자연과 사회적 거리두기
Ecology can do without a concept of a something, a thing of some kind, “over yonder.” called Nature. Yet thinking, including ecological thinking, has set up “Nature” as a reified thing in the distance, under the sidewalk, on the other side where the grass is always greener, preferably in the mountains, in the wild.”
p. 3, Introduction: Critical Thinking, 『The Ecological Thought』
생태학은 “저 너머‘에 있는 무언가라는 관념, 즉 자연이라 불리는 어떤 종류의 대상 없이도 충분히 가능하다. 그런데도 생태적 사고를 포함해 우리의 생각은 ”자연“을 먼 곳-보도블럭 아래와 저 푸른 초원 위1, 가급적이면 산이나 야생-에 있는 구체화된 사물로 설정해왔다.”
p. 3, 서문: 비판적 사고, 『생태적 사유』
처음 읽은 날의 기록:
‘생태’라는 말을 들은 것은 먹이사슬과 생태계 피라미드를 배울 때인 20세기였다. ‘생태학2 ’은 훨씬 나중에 21세기가 되어서 들은 것 같다.
다시 읽은 날의 기록:

‘a concept of a something’과 ‘a thing of kind’를 나란히 놓은 이유를 생각해본다. ‘관념’으로, ‘사물’로 자연을 대하는 태도를 지적하는 것 같다.
나에게 자연은 오늘의 날씨(비가 와서 우산을 가지고 나가야 되는지 확인하기, 기온 변화에 맞춰 옷의 길이와 두께 정하기), 계절을 알리는 꽃, 텃밭의 작물, 마을의 논과 밭, 차를 타고 가며 보이는 가로수와 먼 산, TV에서 보는 대자연의 위력과 신비로움을 느끼는 장면들이다. 예로 든 것은 모두 ‘a thing of kind’인데 나도 모르게 ‘나에게 자연은’이라는 말로 ‘a concept of a something’을 아무렇지 않게 썼다.
일상에 정보를 주는 변수로 생각하고, 물리적·심리적 안전을 생각해 적절한 거리를 두고 바라보고 감상하며 하나하나 이름을 알고 있지만 ‘자연’이라고 묶어버린다. 날씨는 통제할 수 없지만 비가 오면 우산을 챙기고 부침개 먹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햇빛이 쨍쨍하면 선크림을 꼼꼼히 바르고 모자를 쓴다. 자연이 나를 방해하려 해도 우산과 모자를 방패로 삼는 셈이다. 내가 자연이라고 생각하는 목록은 한없이 길어질 수 있다. 우리집 붙박이 고양이 다크, 이제는 오지 않는 고양이 초코, 점점 우렁찬 소리로 울어대는 개구리들, 가본 적 없지만 세렝게티를 질주하는 얼룩말, 아프리카의 바오밥 나무, 소행성 B612의 바오밥 나무와 장미꽃…. 아무리 생각해도 모두 나의 시선이 가는 ‘thing’(사물)이면서 ‘concept’(관념)이다. 나름 진지하게 이 목록의 개체(thing)를 대하며 안다고 믿었지만, 사실은 나에게 쓸모 있는지 위험물이 아닌지 따져보고 불순물을 제거한다. 이렇게 자연과 자발적 & 사회적 거리 두기를 실천하고 있다.
망치와 카메라를 들고 가까이에서 과학적으로 사물을 보는 것이 곧 자연을 “보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여전히 인간의 도구와 인간의 접촉을 통해 자연을 해석하고 있다. 생태적으로 사유하는 것은 자연에 대한 이런 관념을 버리는 것을 의미한다. 믿기 어려울 수도 있다. 하지만 그렇게 믿기 어려운 이유는 단지 호수, 나무, 소, 눈, 햇빛, 밀과 같은 사물에 접근하고 실행하고 나아가 “해석하는” 일정한 방식이 워낙 습관이 되었기 때문이다.
티모시 모튼, 『생태적 삶』, 김태한 옮김, 엘피, 2023, 40-41쪽.
이것이 내가 자연을 바라보는 방식이라는 걸 인정한다. 그러면 그 다음엔 뭘까? 모튼은 ‘생태적 사유는 자연에 대한 이런 관념을 버리는 것’이라고 말하는데 나는 또 그 말을 관념으로 받아들인다. 제대로 알고 싶다고 생각했지만 여전히 주위를 맴도는 느낌이다.
다시 읽을 날의 기록:
| Breathing in, I see myself as a flower. Breathing out, I feel fresh. Breathing in, I see myself as a mountain. Breathing out, I feel solid. Breathing in, I see myself as still water. Breathing out, I reflect all that is. Breathing in, I see myself as space. Breathing out, I feel free. Rest in peace, Thich Nhat Hanh. | 들이마시며, 나는 꽃이다. 내쉬며, 나는 신선하다. 들이마시며, 나는 산이다. 내쉬며, 나는 견고하다. 들이마시며, 나는 고요한 물이다. 내쉬며, 나는 있는 그대로 비춘다. 들이마시며, 나는 공간이다. 내쉬며, 나는 자유롭다. 평안하세요. 틱낫한 |
저만치 물러나 있다
지금은 4월, 봄이 한창이다. 산은 연두와 초록으로 나날이 색이 달라지지만, 예전처럼 산이 부풀어 올라 다가오지 않는다. 아니, 산은 여전히 새로 난 나뭇잎으로 부풀어 오른다. 그렇지만 다가오지 않는다. 신비로움이 없어졌다. 나이 탓인지 번잡한 마음 탓인지 가늠해 보다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산은 있고 산을 바라보는 나도 있고, 티머시 모튼의 책도 있다. 가까이 다가온 줄 알았던 생태적 사유는 저만치 물러나, ‘나 잡아봐라’ 하는 것 같다. 내가 잡히고 싶은 줄 모르나?
내가 생각하기에, 안정된 마음의 우선적인 징후는 한 장소에 머물러 자기 자신에 대해 생각하는 것이지. 그러나 많은 작가의 책들과 모든 종류의 책들에 대한 독서가 자네를 두서없고 불안하게 만들지 않도록 조심하게. 자네의 마음속에 확고하게 자리 잡을 생각들을 끌어내려면, 자네는 적은 수의 뛰어난 사상가들 사이에 오래 머물면서 그들의 작품들을 소화해야 하네. 어디에나 있다는 것은 어디에도 없다는 것을 의미하지. 여행하면서 인생을 소비하는 사람들은 아는 사람들은 많으나 친구들은 갖지 못한다네. 또한 어떤 한 사람의 작가와도 친하지 않으면서, 경솔하고도 성급하게 모든 것들을 알려고 하는 사람들에게도 그와 같은 일이 생긴다네.
루키우스 안나이우스 세네카, 『스토아 철학자의 편지』, 유원기 옮김, 북커스, 2024, 15쪽.
조약돌 없음
‘없음’이 조약돌이 되는 것이 아니라 정말 없다. 자연도 생태적 사유도 저 멀리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