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태음악을 찾아서] ① 자연인가? 자율인가?

생태음악이라고 하는 예를 살펴보고, 무엇이 생태음악이고 생태음악이 되어야하는가를 찾으려 한다. 존 케이지는 「4’33」이라는 작품을 예술과 우리 인생 사이의 경계를 허물기 위해 만들었다고 이야기하였는데, 그로 인하여 음악은 우리 주위의 소리가 되었고 흔히 듣는 우리 주위의 소리는 음악이 되었다.

얼마 전 유행했던 모 방송 밴드경연대회에서 심사위원들이 한 참가자에 대해 자연주의 노래, 자연주의 보컬이라고 평했던 것이 기억난다. 그들이 말하는, 그리고 흔히들 입에 올리는 생태적인 음악, 생태음악이란 도대체 무엇일까? 그것을 찾아가기 위한 출발점에서 “생태란 무엇이고 음악이란 무엇인가?” 라는 질문으로 이 글을 시작할 수는 없다. 적어도 나는 그렇다. 왜냐하면 내게는 그렇게 거창하게 시작할 이론적 근거가 별로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시작은 대략적으로, 그리고 통상적으로 생태음악이라 할 때 떠오르게 되는 음악적 장르나 분위기를 예를 통하여 소개하고 생태음악이란 것이 무엇일지 어떠하여야 하는지에 대한 방향을 잡는 것으로 이 글을 시작한다.

“Noku Mana” – Curawaka

이 곡은 노르웨이 출신 사인조 그룹인 Curawaka가 부른 「Noku Mana」라는 노래이다. 노르웨이 출신이라는 점도 특이하지만, 장르 또한 고대 남미의 전통적인 토착민요를 부른 것으로 보인다. 어떤 느낌이 드는가? 이 음악을 듣고 나면 “통상적으로” 생각하는 생태음악이라고 하는 것이 무엇인지 감이 올 것이다. 지속적으로 들려지는 새소리 등이며, 전통악기인Charango, Sikuri, Guitar 등의 연주며, 이 곡은 우리를 고대 남미의 어느 숲속에 데려다놓은 듯한 느낌을 준다. 그리고 민속음악 특유의 짧은 구절(phrase)이 반복되고 리듬 변화를 통한 주술적인 반복구 사용으로 고조를 이룬다. 아마 가사 또한 남미 토착민의 언어를 사용하고 있어 고대 남미의 정서를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이 곡은 비록 전통 민속가요와 악기로 연주되고 있으나, 서양의 화성을 사용하고 있어 다소 히피스러운 느낌 또한 주고 있다. 마치, 60년대 여성포크 싱어송라이터 조안 바에즈(Joan Baez, 1941- )의 히피스러운 분위기도 연출된다. 아마도 포크뮤직과 민속음악의 단순한 리듬과 선율, 화성과 함께 동서양의 오묘한 만남(counterculture) 등이 히피스러움을 자아내는 듯하다.

이런 종류의 음악들은 월드뮤직이라는 이름으로 서양식으로 분류되고 있으며, 위의 그룹처럼 각 지역의 전통적인 음악을 바탕으로 토착 종교의 색채를 나타냄과 함께 무엇인가, 어디인가에로 회귀하고 싶은 자연주의 분위기를 연출해 내고 있다.

그런데, 이런 종류의 음악들을 생태음악이라 말할 수 있는가? 예전 시대의 악기를 통하여 민속적인 음악과 자연주의적인 분위기를 연출하는 것이 과연 생태적인 음악인가?

여기에서 다른 예를 통하여 차원의 범위를 넓혀 가고자 한다.

우리가 어디에 있던지 간에 우리가 듣는 대부분은 소음(noise)이다.
그것을 무시할 때는 그 소리가 우리를 방해할 것이고, 그 소리를 듣는다면 우리는 그 소리를 매력적으로 들을 것이다.

John Cage, 「The Future of Music: Credo」 (1937)

아마 소음상태의 자연은 혼돈(Chaos)상태일 것이다. 자연속의 정적(Silence) 상태 또한 소음이라고 가정했을 때 이 자연의 소리를 이용한 작곡가가 있었으니, 그는 존 케이지(John Cage, 1912-1992)이다. 그의 작품을 먼저 감상해 보자.

「4’33」(1952) – John Cage

모두들 한번쯤은 이 작품에 대하여 들어보았거나 영상으로 보았을 것이다. 케이지는 미국인 작곡가로, 그의 작품 이전의 주요한 음악적 흐름 밖에서 작업하는 것에 매진하였다. 일반적인 청취자로서는 그의 작품은 음악이 아닌 것이어서 그를 작곡자로서 생각하지 않았으나 그의 추종자들은 그를 위대한 작곡자이자 근본적으로 음악이 무엇인지에 대한 의문을 던진 사람으로 칭송한다.

위의 작품 또한 일련의 음악적 실험―전통적인 음악작업을 허무는―으로서 행해진 작품이다. 사실상 이 작품 속의 정적(Silence)은 실제 정적이 아니고 관람자 자신의 소리를 포함하여 귀가 닿을 수 있는 영역 안에 있는 모든 소리(관객의 부스럭거림이나 기침소리 등)로 구성되어 있다. 케이지는 이 작품을 예술과 우리 인생 사이의 경계를 허물기 위해 만들었다고 이야기하였는데, 그로 인하여 음악은 우리 주위의 소리가 되었고 흔히 듣는 우리 주위의 소리는 음악이 되었다.

존 케이지(John Cage)

들뢰즈와 가타리는 『천개의 고원』(2001, 새물결)에서 음악적 표현성을 구체화하기 위해 케이지의 ‘조작된 피아노’(Sonatas And Interludes For Prepared Piano)와 작곡가 에드가 바레즈(Edgard Varèse)의 ‘이온화'(Ionization)를 비교하고, 바레즈의 ‘이온화’가 악기들의 분자화한 배치로서의 충분한 탈영토화가 된 작품이라고 이야기 하였다. 그러나 바레즈와 메시앙의 음향적 실험들은 사실 케이지로부터 시작했으며 그로부터 음악외의 영역과 어떻게 관계 맺을 건가의 고민이 시작되었다 할 수 있다.

비록 우리가 방금 두 가지의 예밖에 감상할 수 없었으나, 조금은 무엇이 생태음악인가에 대하여 방향을 잡을 수 있을까? 다시 두 가지 예를 정리하면,

  • 첫 번째 예에서, 우리는 음악을 들으면서 자연주의적인 느낌을 받을 수 있었으며, 악기와 선율 및 화성은 전통적인 규율을 따르고 있어 우리가 언제든지 친숙하게 들을 수 있다.
  • 두 번째 예는, 그 자체가 자연이며 전통적인 규율을 전혀 따르고 있지 않아 우리가 다소 친숙하지 않을 수 있다.

여전히 질문은 계속된다. 과연 무엇일까? 생태음악이란?

생태음악을 찾아서 ②에서 계속 …

신동석

음악에 관심이 있다 본격적으로 음악 만드는 공부를 하고 있다. 재즈를 전공하고 있지만 모든 음악에도 관심이 있다. 환경과 관련된 일반적인 관심이 있지만 일반 이상의 관심을 가지려 노력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