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다 이장] ⑥ 도움받을 용기

어떤 방식으로든 누군가에게 도움을 받기로 결정한다는 것은, 결국 도움을 주는 이와 깊은 관계에 들어가야 함을 받아들여야 하는 선택이다. 시간이 지날수록 이장은 도움을 부탁하는 자리라는 생각이 든다. 그러려면 개인적으로 많은 연습과 용기가 필요하다. 도움받을 용기!

길일인 날이었나 보다. 검찰총장 출신 윤 모씨가 대권 도전을 선언해 온 나라가 떠들썩했던 2021년 6월 29일! 선흘2리 마을회는 세계자연유산센터내에 직영하는 오름보러가게 개업식을 열었다. 마을가게를 가오픈해서 운영한 지 딱 2개월째 되는 날이었다. 오랜만에 야외에 모인 주민들과 손님들이 함께 종이비행기를 날리며 마을가게의 대박을 기원했다.

사실 개인적으로는 개업식을 하고 싶은 마음은 1도 없었다. 인생에서 남자, 어른 사람들을 만나는 게 제일 힘든 사람이 아마 바로 나일 게다. 그래서 몇 안되는 친구들마저 대부분 여성들이다. 게다가 누군가에 아쉬운 부탁하는 것을 죽기보다 싫어한다. 그래서 불편한 사람들을 만나 마을찬조금을 읍소해야 하는 개업식보다는, 제로웨이스트 제품 박스를 개발해 온라인으로 판매하는 개업 이벤트를 제안했었다. 그런데 이벤트를 준비하기 위한 회의자리에서 “개업식을 안 할 이유가 특별히 있나요?” 라는 의견이 나왔다. 맞다. 딱히 안 할 이유는 없다. 남들이 다 개업식을 하는 이유가 있는데 내가 불편하다고 안하는 건 말이 안된다.

마을가게 개업식을 축하하며 종이비행기를 날리고 있다 ⓒ이상영
마을가게 개업식을 축하하며 종이비행기를 날리고 있다 ⓒ이상영

결정은 쉬웠는데 개업식 준비는 역시나 복잡했다. 먼저 세계자연유산센터와 연락해 개업식 날짜, 장소, 방역계획 등을 논의해야 했다. 처음엔 코로나19 상황이라 난색을 표했던 유산센터는 거문오름 탐방이 없는 화요일, 외부 공간에서 방역수칙에 맞춰 100인 이내로 행사를 진행하기로 협의해 주었다. 오신 분들께 드릴 답례품은 세계자연유산이라는 이미지에 걸맞는 대나무칫솔, 천연식물수세미, 친환경주방비누 등 제로플라스틱 생활용품으로 준비했다. 초대장, 웹자보, SNS용 홍보이미지, 기념품안내지, 가게 스탬프를 디자인해 제작했고, 사무장님은 연락책을 맡아 이 마을 저 마을에 행사를 알렸다. 비용을 아끼기 위해 기념품 포장 등 모든 공정에 마을 주민들이 기꺼운 마음으로 애써주셨다. (이 자리를 빌어 다시 한 번 감사드려요^^)

개인적으로 이번 행사에서 가장 좋았던 장면을 꼽자면 단연 마을 풍물패의 공연이었다. 2년 전 제주동물테마파크 갈등이 터진 이후 마을에선 풍물소리도 멈췄었다. 찬반 갈등의 여파였다. 마음이 맞지 않는 불편한 사람들에게 공연을 부탁드리기 어려웠지만, 나름 큰 용기를 내 풍물패 단장님께 전화를 드렸다. 생각과는 달리 단장님과 주민들은 ‘마을의 일’이라며 선뜻 긴급회의를 소집해 공연을 해주시마 약속하셨다. 행사 전날 육지에서 지도해 주시는 선생님까지 모시고 열 분 정도의 단원들이 2년만에 마을회관에 모여 공연을 위해 밤늦도록 합을 맞추셨다. 그리고 개업식날! 징, 북, 장구, 꽹과리 소리가 유산센터 곳곳을 울릴 때마다, 사회를 보기 위해 마이크를 잡고 있던 내 마음도 괜시리 둥둥둥 울렸다.

마을 일이라며 선뜻 나서주신 거문오름 풍물패 ⓒ이상영
마을 일이라며 선뜻 나서주신 거문오름 풍물패 ⓒ이상영

개업식에 참여한 분들이 손에 꼽은 행사는 바로 ‘마을해설사와 함께 떠나는 거문오름 탐방’이었다. 서울 시민 중에 63빌딩을 안 가본 사람이 의외로 많듯이, 거문오름이 있는 마을에 살면서도 거문오름을 가보지 못한 주민들이 꽤 많았다. 그래서 고민 끝에 거문오름 해설사로 활동하시는 마을 감사님께 연락해 가이드를 부탁드렸더니, 역시나 너무도 흔쾌히 수락해 주셨다. 그래서 유산본부와 협의해 개업식이 끝난 후, 신청한 분들을 대상으로 2차례 거문오름 탐방을 진행했다. 베테랑 마을 해설사 두 분의 안내를 받고 분화구까지 다녀온 주민들은 세계자연유산마을에 살고 있는 뿌듯함에 기뻐들하시며 가게가 잘 자리잡기를 기원해주셨다.

3년 전, 제주 산골 마을로 이사오면서 가장 걱정했던 건 시골의 인간관계였다. 시골에서 태어났지만 독립을 결정하고 서울에 살다보니 누군가에게 신세지고 되갚아야 하는 얽히고 설킨 관계망보다는 앞집의 누군가도 모른척 할 수 있는 도시의 쿨한 인간관계가 훨씬 편하게 느껴졌다. 그런데 마을 이장을 하다보니 모든 일을 혼자 할 수 없으며, 생각이 다른 누군가에게 손을 벌려야 하는 경우가 종종 생긴다. 그리고 용기를 내서 부탁을 드리면 놀랍게도 그 손을 기꺼이 꼭 잡아주는 주민들을 만난다. 겹부조로 대표되는 제주 특유의 찬조문화는 지금도 이해하기 힘들지만, 어쨌든 지금까지 마을은 턱없이 부족한 행정의 지원보다는 주민들의 찬조금과 봉사로 운영되어 왔던 게 현실이다. 반대대책위가 2년 동안 자치적으로 운영될 수 있었던 데에는, 3천만원이 넘는 선흘2리 주민들의 찬조금이 큰 몫을 해냈다.

어떤 방식으로든 누군가에게 도움을 받기로 결정한다는 것은, 결국 도움을 주는 이와 깊은 관계에 들어가야 함을 받아들여야 하는 선택이다. 도움을 주고 받는 행위에서도 위계가 발생한다. 도움을 주는 행위를 통해 개인은 관계에서 있어 도덕적, 심리적 우위를 점할 수 있다. 그걸 알기 때문인지 나는 누군가의 도움을 받는 상황이 늘 불편하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이장은 도움을 부탁하는 자리라는 생각이 든다. 주민들에게 도움을 줄 기회를 만들어주는 자리인 것 같다. 그러려면 개인적으로 많은 연습과 용기가 필요하다. 도움받을 용기!

이 글은 『제주투데이』 2021년 7월 2일 자에 실렸던 내용입니다.

이상영

20년 가까이 중고등학교에서 지리(사회)를 가르치다, 2018년 한라산 중산간 선흘2리로 이주한 초보 제주인. 2019년 초 학부모들과 함께 참여한 마을총회에서 제주동물테마파크 반대대책위원으로 선출된 후, 2021년 어쩌다 이장으로 당선되어 활동하고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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