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듣기의 윤리] ② 그림자를 드리운 말

내 것이 아닌 불투명한 언어로 말하기는 필연적으로 그림자를 동반한다. 그림자를 드리운 말을 어떤 태도로 들어야 할지, 스피박의 서발턴 연구와 레비나스의 윤리학, 그리고 상담의 경험을 통해 고민해본다.

이 글은 김애령 선생님의 저서 『듣기의 윤리』1 2부를 읽고 썼다. 이 작업은 이전에 기고했던 「실패로부터 시작하는 자기 창안」의 연장선상에 위치한다.

김애령 선생님은 2부에서 전달 불가능성과 환대의 개념에 대해 다루었다. 본고는 2부의 내용을 거칠게 요약함과 동시에 ‘상담’이라는 행위와 연결시킨다.

그림자를 드리운 말

1부에서는 너도 말하라 즉 말하는 주체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면, 2부에서는 말할 수 없음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 언어를 빼앗겼거나 담론체계를 갖지 못했다는 등의 이유로 “자기 언어로 말할 수 없는” 자들을 듣기 위한 윤리를 본격적으로 요청한다. 요청을 위해 저자는 스피박의 서발턴 연구를 근거로 든다. 2부 후반부에서는 윤리적 듣기가 곧 정의의 환대임을, 환대의 개념을 이용해 말한다.

버틀러는 이렇게 말했다.

“설명을 할 수 없다는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우리는 설명을 해야 한다. (버틀러, 2018:357)”2

그런데 스피박은 이렇게 말했다.

“서발턴은 말할 수 없다.”3

듣기의 윤리란, 들리지 않는 것에까지 귀를 기울이고, 이야기가 드러내지 못하는 거부와 부재의 영역에까지 집중하며, 이야기하는 방식과 스타일에까지도 주목하는 민감한 듣기이다. 
사진출처 : CDD20
듣기의 윤리란, 들리지 않는 것에까지 귀를 기울이고, 이야기가 드러내지 못하는 거부와 부재의 영역에까지 집중하며, 이야기하는 방식과 스타일에까지도 주목하는 민감한 듣기이다.
사진출처 : CDD20

서발턴이란 누구인가? 서발턴이란 용어와 개념은 이탈리아의 맑스주의자인 안토니오 그람시가 처음 사용했다. 그의 저작 『옥중수고』에서 그람시가 사용한 서발턴의 의미는 ‘헤게모니를 장악하지 못한 자’이다. 인도의 역사학자 라나지트 구하는 그람시의 서발턴 개념을 발전시켜 1783년에서 1900년 사이 있었던 식민 치아의 인도 농민 봉기에 대해 다루었다.4 그리고 가야트리 차크라보르티 스피박은 식민지 인도의 서발턴 연구에 ‘젠더’라는 교차지점을 하나 더 놓음으로써 식민/제국주의 대항의 주체가 아닌 동시에 가부장적 질서 안에서도 주체가 아닌 서발턴 여성에 집중했다.

‘공론화된 담론장에서 말할 수 있기’가 주체성 획득의 조건이라면 서발턴 여성은 말하기를 통해 주체성을 획득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런데 스피박이 “서발턴은 말할 수 없다”고 말한 주장하게 된 토대는 정체성이 정치적으로 작동하는, 즉 말하기가 이루어지는 담론장이 서발턴의 목소리를 굴절시킨다는 것이다. 담론장이 기울어 있다. 서발턴 여성은 영국 제국주의자 남성들에 의해, 그리고 인도 민족주의자 남성들에 의해 그 입장이 대변됨으로써 스스로 말할 수 있는 공간을 박탈당했다. 뿐만 아니라, “서발턴 여성이 사용할 수 있는 언어는 이데올로기적으로 투명하지도, 온전히 주체적이지도 않다”.5 서발턴에게 ‘말하라’고 한다면 그들은 ‘들리게’ 말해야 한다는 압박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고, 그 발화는 서발턴의 이야기가 되지 못한 채 그저 소리가 될 뿐이다. “그림자를 드리우지 않는 발화는 그들의 살아 있는 경험을 배반할 것이다”.6

순수하게 서발턴을 위한 언어는 없다. 서발턴뿐만 아니라 모든 존재에게, 그들 각각을 위한 언어는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서사가 되지 않거나, 언어화 되지 않는 사례들이 이 책에 계속 등장한다. ‘내 이야기’를 말하는 것은 언제나 조금씩은 실패한다. 저자는 그러므로 “조심스러운 듣기가, 그런 ‘듣기의 윤리’가 필요하다”7고 주장한다. ‘듣기의 윤리’란, 어떤 말하기에는 재현 공간이 주어지지 않았다는 것을 인식하며 듣는 것이다. “들리지 않는 것에까지 귀를 기울이고, 이야기가 드러내지 못하는 거부와 부재의 영역에까지 집중하며, 이야기하는 방식과 스타일에까지도 주목하는 민감한 듣기이다”.8

상담을 받은 적이 있다. 듣기의 윤리를 읽으며 상담의 경험이 떠올랐는데, 그 이유는 상담이야말로 ‘윤리적 듣기’를 위해 마련된 좌판이기 때문이다.

상담은 ‘자기 이야기’를 할 수 있는 온전한 시간을 제공한다. 상담 때 나는 제한된 시간 안에 최대한 많이 이야기를 하려고 노력하는 편이었다. 열심히 전달을 노력해보지만 결국 실패하는 지점들이 생기곤 했다. 실패했을 때 내가 할 수 있는 건 없었다. 말이 이미 나를 떠났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말에는 항상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상담이야말로 ‘윤리적 듣기’를 위해 마련된 좌판과도 같다. 사진출처 : Christina Morillo
상담이야말로 ‘윤리적 듣기’를 위해 마련된 좌판과도 같다.
사진출처 : Christina Morillo

상담자는 내담자를 파악하려고 노력한다. 이를 위해서 상담자는 내담자의 발화 내용뿐만 아니라 발화를 둘러싼 비언어적 표현, 사건과 배경들을 함께 생각하며 듣는다. 때로는 침묵을, 눈물, 웃음을 듣는다. 그것들 뒤에 “왜?”라는 물음이 항상 따라오긴 하지만. 상담이 이 책과 다른 점이 있다면 언어화되지 않는 증상, 느낌들을 최대한 언어로 번역해볼 것을 제안한다는 것이다. 실패할 것이 명백하더라도 내담자에게 질문을 계속함으로써 말하기를 계속하게 한다. 오역과 굴절과 함께 하는 이 과정은 고되다.

은밀할수록 고되다. 마주하고 싶지 않은, 그래서 애써 모른척하던, 그러나 사실 무의식에서는 이미 알고 있는 자기 자신을 꺼내 볼 용기가 필요하다. 스스로 잘 들여다보지 않는 그 모습은 아마도 자신의 가장 취약한 모습일 것이다. 적당한 자리를 찾지 못해 언어화가 되지 않는 사건일 것이다. 불완전한 번역으로 만든 퍼즐 조각들을 상대에게 건넨다. 나를 맞춰 주세요. 그렇다면 상담자는 어떤 방식으로 듣기의 윤리를 실천할 수 있을까?

상담자, 즉 청자는 ‘절대적 환대’를 통해 윤리적 듣기를 할 수 있다. 절대적 환대는 주체가 ‘초대’하는 것이 아니라, 타자가 ‘방문’하는 것이다. 신원을 확인할 수도, 예견할 수도 없는 도래자, 이방인, 타자에게 무조건적으로 열려 있는 환대이다. 레비나스는, 타자에 대한 주체의 평가와 파악, 인식, 이해를 뛰어넘는 적극적인 경향을 ‘윤리학’이라고 불렀다.9 내 앞의 타자가 누구인지 예견할 수 없음에서 오는 위험을 감수하고서라도 타자에 대해 무한히 열려 있어야 하는가? 절대적 환대는 실천적으로 불가능하더라도 현실의 경험을 성찰하게 하는 ‘준거’로 요청되어야 한다고 데리다는 주장한다.10 저자 또한 레비나스와 데리다의 의견을 지지하면서, 절대적 환대는 곧 정의이고, 윤리적 듣기는 환대여야 한다고 주장한다.

다가오는 타자를 정의의 이념으로 환대해야 한다. 이념으로서의 정의가 매번의 환대의 실행에 동반할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그것이 타자의 고유한 독특함, 그의 유일무이한 단수성에 귀 기울이면서, 그의 존재를 듣는 것을 요청한다. 듣기의 윤리는 정의의 환대 안에서만 스스로를 반성할 수 있다. 윤리적 듣기는 환대여야 한다. 그것을 정의의 이념이 동반한다. (김애령, 2020:205)


  1. 김애령, 『듣기의 윤리』, 봄날의 박씨, 2020.

  2. 위의 책, p.98.

  3. 위의 책, p.132.

  4. 신윤주, “[비평의 눈:바두리에서 설리까지] 여성 서발턴은 말할 수 있는가? I”, 「제3시대」 (2023년 5월 15일 접속)

  5. 김애령, 위의 책, p.144.

  6. 위의 책, p.153.

  7. 위의 책, p.148.

  8. 위의 책, p.151.

  9. 위의 책, p.184.

  10. 위의 책, p.1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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