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려움의 번역, 번역된 두려움

주디스 버틀러는 젠더가 오늘날 판타즘(phantasm)—실제로 존재하지 않으나 상상 속에서 실재처럼 작동해 심리적·정서적 효력을 발생시키는 특정한 이미지로서 일종의 허상—이 되었다고 말한다1. 지난 몇 년간 판타즘으로서 젠더는 여성가족부 폐지 논란, 2022 개정 교육과정에서의 성소수자 용어 삭제, 리박스쿨의 이성애중심적이고 순결주의적 성교육 등으로 이어졌다. 특히 교육의 영역에서 젠더는 결코 언급해선 안 되는 해악이 되었으며, 학교 교육에서 젠더 교육을 이야기하는 순간 정치적 선동가가 되고 만다. 공포와 두려움의 판타즘은 누군가의 기본권을 박탈하고 삶을 파괴하는 결과로 이어지더라도 무조건 제거해야한다는 파시즘적 정념을 부추기게 된다.
2025년 10월, 정부는 여성가족부를 성평등가족부로 명칭을 바꾸었다. 여성만을 위한 정부 부처가 아니라 남성의 역차별 문제도 함께 다루겠다는 취지가 핵심이었다. 즉, 이러한 명칭의 변경 맥락에는 판타즘으로서 젠더가 정치적으로 작동했다. 버틀러의 책 『누가 젠더를 두려워하랴』에는 한국의 사례가 등장한다. 버틀러는 “윤석열 전 대통령은 여성들의 불만이 ‘외부’와 ‘다른 어딘가’에서 유래한 발상의 영향을 받았다고 보았으며, 여성가족부의 해체를 추진했다”고 지적한다. 과연 이러한 젠더와 관련한 판타즘이 윤석열 정부가 만든 허상일까? 아니면 이미 오래전부터 구조화된 두려움의 번역이 특정 정권 하에서 극적으로 가시화된 것일까?
2001년 여성부(Ministry of Gender Equality)가 신설되고 2005년 여성가족부(Ministry of Gender Equality and Family)로 변경되었다가 다시 2008년 여성부(Ministry of Gender Equality)로, 2010년 다시 여성가족부(Ministry of Gender Equality and Family)로 변경되었다. 이때 명칭 변경의 쟁점은 보육과 가족 정책과 관련한 부처 업무 범위에 따른 ‘가족’의 포함 여부였으며, 영문 명칭은 Gender가 항상 포함됐다. 심지어는 최근 성평등가족부로 명칭을 변경한 현재도 여전히 영문 명칭은 ‘Ministry of Gender Equality and Family’이다. 언제나 영문 부처명에는 Gender가 사용되었으나 단 한 번도 ‘젠더’로 번역된 적이 없다.
번역의 정치—Gender는 왜 번역되지 않았나
한국에서 Gender는 처음부터 온전히 번역되지 않았다. 1995년 UN 북경행동강령 이후, 정부는 ‘Gender Equality’와 ‘Gender Mainstreaming’을 받아들이면서 「여성발전기본법(이후 양성평등기본법)」이 제정되었다. 젠더 주류화(Gender Mainstreaming)란 정치, 경제, 사회를 아우르는 전 분야의 정책에 남성과 여성의 사회문화환경적 조건과 관심요소가 고르게 반영되어 궁극적으로 젠더 평등을 달성하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법령에는 이러한 포괄적 의미를 담은 ‘젠더 평등’, ‘젠더 주류화’라는 용어 대신 ‘양성평등’, ’성주류화‘로 정착되었다. 결과적으로 법령과 정책 문서에는 젠더라는 용어가 등장한 적이 없다.
「여성발전기본법」을 「양성평등기본법」으로 전부 개정한 2014년 당시, 영문 법령은 「Framework act on gender equality」였으며, 세부 법령에서도 모두 ‘Gender Equality’를 사용했다. 즉 대외적으로는 젠더 평등(Gender Equality)을 표방하면서도, 한글로는 ‘양성평등’의 번역을 고수해 온 것이다. 이는 우연이라고 보기 어렵다. ‘젠더(Gender)’가 함축하는 급진성—성별 이분법에 대한 도전, 사회문화적 구성으로서의 젠더, 다양한 성정체성의 인정—을 무력화하려는 의도적 선택이라고 볼 수 있다. 단순한 번역의 기술적 문제가 아니라, 번역 행위에 내재한 정치적 결정이다.
한국 정부는 젠더(Gender)와 관련하여 기묘한 이중 구조를 보여왔다. 영문 공식 명칭으로는 Gender라는 용어를 계속 사용하면서 그 번역을 회피함으로써 그 개념의 사회문화적 구성성을 배제하고 생물학적 ‘성별’ 이분법으로 환원한 것이다. 이와 같은 번역의 문제는 구조적으로 남성/여성이라는 두 범주만을 ‘정상’으로 인정하고, 그 경계 혹은 경계 바깥의 존재들을 ‘비정상’, ‘일탈’로 배치하는 효과를 만들어낸다.
번역의 수사성
번역은 중립적 의미의 전달이 아니라 권력관계가 작동하는 정치적 행위다. 스피박은 번역이 결코 투명한 매개가 아니며, 제국/식민, 중심/주변의 권력이 조직되는 장이라고 지적했다. 그는 후기구조주의적 언어 모델을 통해 언어를 ‘수사(rhetoric)–논리(logic)–문법(grammar)’의 긴장 관계로 파악하면서, 이 가운데 수사는 논리와 문법이 구성한 의미를 끊임없이 전복하고 비틀며, 이 전복이 곧 사회적 효과를 낳는다고 주장한다. 스피박은 중동과 아시아 문학의 번역자들이 신식민주의적 재현을 피하기 위해서는 이러한 언어 모델에 주목해야 한다고 말하며, 즉각적 접근성과 사실주의적 환상을 강화하는 서구 번역 전략을 비판하고, 대신 그 효과를 방해하는 축어적 번역을 옹호한다.
스피박에 따르면 번역에서 중요한 것은 언어적 논리의 범주 밖에서 작동하는 수사성(rhetoricity), 즉 논리적 의미뿐 아니라, 그 의미를 끊임없이 교란하는 수사적 층위이다2. 그러한 수사와 논리의 긴장 관계 속에서 어떤 언어는 권력에 의해 번역되거나 되지 않을 수 있다. 예컨대 언어적 논리 구조에 의하면 Gender는 성별 또는 성을 의미하므로 성 혹은 양성으로의 번역은 적절한 것처럼 보이지만, ‘양성’이라는 번역은 말 그대로 두 종류의 성(sex)을 전제하는 용어이다. 이러한 번역은 Gender의 논리적 의미 일부만 취해, 그 안에 응축된 사회문화적 구성성, 수행성, 유동성이라는 수사적 층위를 삭제함으로써, 결과적으로 Gender를 더 이상 Gender로 가리키지 못하게 만든다. 남성/여성이라는 생물학적 이분법이라는 논리만 남긴 까닭이다.
한국 정부가 영문 명칭으로 ‘Gender Equality’를 사용하면서도 한글로는 ‘양성평등’으로 사용할 수 있었던 것은 번역을 판단할 수 있는 다언어 구사자의 부재와 같은 지정학적 비대칭성 때문이다. 국제사회에는 Gender를 표방하면서, 국내적으로는 그 급진적 함의를 제거한 번역어를 사용함으로써, 이중 언어의 틈새에서 젠더 판타즘을 은폐한 셈이다.
판타즘과 이분법의 폭력—지워진 존재들
젠더 판타즘의 장면에는 용어에 대한 합의도 비판적 사유도 없이 오직 두려움만 있으며, 그러한 두려움은 정치적 정념을 선동한다3. Gender라는 용어에 대한 번역을 회피한 한국 정부의 젠더 판타즘은 이중적 권력으로 작동하고 있다. 하나는 보수·극우 세력이 구축한 판타즘으로, 이른바 ‘젠더 이데올로기’가 전통적인 이성애 중심 가족을 파괴한다는 공포이고, 다른 하나는 정책 언어 차원의 판타즘이다. ‘젠더’를 ‘양성’으로 번역함으로써, 마치 남성과 여성 두 성별 간의 평등만 문제인 것처럼 구성했다. 한국 사회에서 젠더는 실제로 인류와 문명으로 대표되는 인간(Man)을 위협하는 어떤 것으로 상상되며, 젠더 그 자체가 제거되어야 할 위험 요소로 간주된다. 정부 혹은 정치권은 악마화된 젠더를 지워버리는 방식으로 법과 정책을 설계하고, 그 결과 성별 이분법으로 포섭되지 않는 존재들- 트랜스젠더, 간성, 논바이너리 등-과 성별 이분법과 그것에 기초한 이성애 규범 바깥에 위치한 동성애자는 위협하는 타자로 상상된다. 이렇듯 Gender라는 용어의 번역 회피와 왜곡을 통해 작동하는 판타즘은, 그것이 어떤 권력과 두려움에 기대고 있는지 역으로 드러낸다.

버틀러는 젠더를 왜곡하는 공포 담론이 실제로 존재하는 경제적 불안정, 폭력, 불평등 같은 문제의 원인을 외부로 투사하거나 과잉단순화하여 복잡한 현실을 호도한다고 진단한다. 한국에서 ‘젠더(혹은 gender의 의미를 담은 다른 용어)’가 아닌 ‘양성’이라는 용어 선택은 성별이분법을 ‘자연적’ 질서로 고정한다. 예컨대 간성(intersex)은 인구의 약 1.7% 정도로 추정되며, 빨간 머리 인구(대략 1~2%)와 유사한 비율임에도 ‘예외’로 취급되며 이분법적 틀에 강제로 끼워 맞춰져 여성 혹은 남성 둘 중의 하나로 수정되어야 했다. 마찬가지로 성별이분법의 틀 안에서 트랜스젠더, 논바이너리, 동성애자 등의 존재는 정책적으로 비가시화되고 법적·제도적 보호로부터 소외된다. 즉 Gender의 번역 회피와 축소는 성정체성에 따른 차별과 배제뿐 아니라, 혼인을 서로 다른 두 성의 결합으로 규정하는 틀을 강화함으로써 성적 지향에 따른 법적 차별과 배제를 정당화하는 기제이기도 하다.
번역의 불가능성과 번역의 윤리
한국 정부는 ‘Gender’를 정치적 필요에 따라 텍스트를 재단하여 정치적으로 안전한 용어로 대체함으로써 원문의 수사성을 삭제했다. 그렇다면 Gender를 어떻게 번역해야 할까? 아니, 번역이 가능한가?
번역은 언제나 원어의 그림자일 수밖에 없으며, 문제는 그 그림자가 얼마나 촘촘하고 빈틈없이 원어를 따라가며 동시에 그 한계를 드러내는가에 있다. 그런 의미에서
Gender를 언어와 논리를 넘어 수사적 복잡성까지 포함하여 ‘그대로’ 옮기는 것은 불가능한 일인지도 모른다. 어쩌면 그것은 Gender 자체가 가진 특성일지도 모른다. 버틀러가 지적하듯 젠더는 고정된 실체가 아니라 끊임없이 수행되고, 전유되고, 퀴어하게 재가공되며, 이분법을 전복하는 과정 속에서만 존재한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그 전 과정을 온전히 번역하는 것은 원리상 불가능에 가깝다4.
그러나 번역의 불가능성이 번역의 포기를 정당화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우리는 젠더(gender)가 위험이 아니라 희망으로 작동할 수 있도록, 불가능성을 전제하면서도 번역을 멈추지 않아야 한다. 이때 번역은 단지 Gender를 칭하는 적절한 한글 단어를 찾는 것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Gender를 왜, 무엇 때문에 왜곡된 번역을 했는지, 왜곡된 번역이 어떤 영역에서 누구를 비가시화하고 배제하는가를 드러내는 일을 포함한다. Gender Equaility가 성평등으로 번역되어 통용된다고 하더라도 성평등이라는 번역이 Gender Equality의 본래적 의미를 담을 수 있도록 하는 노력 역시 번역의 불가능성 속에서 번역을 계속하는 과정이다.
따라서 젠더(gender)라는 용어의 수사적 복잡성과 불안정성을 온전히 받아들이려는 노력 자체가, 다양한 젠더(gender)를 지닌 타자를 향한 윤리일 수 있기 때문이다. 결국 gender를 최대한 충실하게 번역하고 수용하려는 애씀은 단순한 용어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타자를 가시화하고 인정하려는 윤리적·정치적 책임의 문제다. 그것은 우리가 어떤 존재론적·인식론적 틀 속에서 살아갈 것인가, 누구를 ‘인간’으로 인정하고 함께 살아갈 것인가에 대한 질문이기도 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