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승철 선생님이 돌아가신 지 1주기가 되는 날, 손을 잡아보지 못한 선생님께 밥상 한 번을 차려드렸다. 그것이 내가 선생님과 손을 잡는 방식이었다.
‘파란 장미 이야기’는 겉모습을 꾸미는 일이 본질의 회복이 될 수 없음을 보여준다. 오늘날 생태 담론도 자연을 실제로 되살리기보다 친환경적 외양만 덧칠하는 데 머물 때가 많다. 꽃과 강, 숲은 독립된 대상이 아니라 흙·물·생물·계절이 얽힌 관계망 속에서 존재한다. 『비밀의 정원』처럼 진정한 회복은 자연과 인간이 서로를 살리는 상호적 과정이다. 우리가 찾아야 할 것은 ‘파란 장미’가 아니라 생명이 스스로 피어날 수 있는 생태환경이다.
대한민국 사교육 시장에서 보낸 20년 세월. 입시에 도움이 된다면 조상님 묘도 파헤친다지만, 앞 글자 따서 암기하는 기상천외한 방법으로 ‘흥/병신강조/임갑동’ 같은 입에 올리고 싶지 않은 기괴한 조어를 동원하게 만드는 웃픈 현실을 살았다. 하지만 이 바닥에도 분명 보람찬 순간은 있다.
현재의 우리로서는 기후변화로 인한 문명 종말을 막을 수 없다. 이처럼 인류 문명을 살릴 수 있는 시간이 사라진 때에 우리는 개인 차원이 아니라 문명 차원에서 죽는 법을 배워야 하는 철학적 시대에 진입했다. 죽는 법을 배운다는 것은 개인의 차원에서는 우리의 성향과 두려움을 버린다는 것이지만, 문명의 차원에서는 특정한 생활 방식과 정체성, 자유, 성공, 진보에 대한 특정한 생각을 버린다는 것이다.
본격적인 봉사형벌의 시작으로서 길가에 버려진 담배꽁초를 주웠습니다.
티머시 모튼의 『생태적 사유』는 천천히 읽으며 생각을 많이 하게 되는 책임을 실감하며 흐름이 이끄는 대로 1페이지로 다시 돌아갔다가 새로운 발견을 하게 된다. 지난 에세이에서 던져둔 질문에 느닷없이 찾아온 답은 실마리, 도끼, 초대장 같다.
에로스 효과란 국가와 민족의 경계를 넘어 수십만의 대중이 중앙 조직 없이 자발적, 동시적으로 공공 공간을 점거하고 새로운 정치를 요구하며 서로와 직관적으로 동일시하는 현상을 말한다. 이 현상 속에서 대중은 경제적‧정치적 조건 보다는 유대감과 자유에 대한 사랑에 기반하여 행동했다. 이를 통해 기존의 가치와 규범을 평화, 연대, 자결(自決), 휴머니즘으로 대체하는 데에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오늘날 경제에 있어서의 무한성장을 믿는 사고방식이 있다면 그것의 가장 치명적인 문제점은 무엇일까? 또한 이 사고방식에 대응하여 탈성장을 제안하고 상상한다는 것은 어떤 얼개로 이루어지고, 어떤 조건 속에서 행하여지게 될 것인가? 특히 나름의 독자적인 문화전통 속에서 살아가며 사고하는 한국인들에게만 문제되는 조건은 어떤 것인가? 이러한 의문들 특히 마지막 의문에 대한 답변을 시도해 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