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봄의 공간들』 북토크를 통해 도시계획과 먹거리, 커먼즈, 자기돌봄의 논의는 돌봄이 삶의 조건을 어떻게 조직할 것인가의 문제와 맞닿아 있음을 보여주었고, 특히 기후위기 시대에는 폭염·먹거리·주거·재난 대응이 서로 연결되면서 돌봄이 사회를 지탱하는 핵심 인프라가 되어야 한다는 필요성이 커지고 있다. 이 과정에서 돌봄은 선의나 희생에 기대는 것이 아니라 예방적이고 지역적이며 생태적이고 공공적으로 재구성되어야 하며, 공동체적 생활권으로 전환될 가능성이 제기된다. 결국 돌봄을 다시 생각한다는 것은 복지의 범위를 넓히는 데 그치지 않는다.
티머시 모튼의 ‘생태적 사유’와 다윈의 ‘불신의 유예’를 지나 당대의 상식 너머를 신뢰하는 힘을 들여다 본다.
지난해 8월, 인도네시아 거리는 오토바이를 탄 노동자들로 가득찼다. 이들은 정치권의 부조리와 생활난을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다. 오졸 오토바이 노동자이자, 20대 청년인 아판의 죽음은 그들의 봉기에 더욱 불을 지폈다. 인도네시아는 어디로 향하고 있는가, 그들의 투쟁은 불평등을 끝낼 수 있을까.
공장식 축산 시스템 속에서 닭들은 어떻게 살아가다가, 어떤 방식으로 도축되어, 우리 눈앞에 ‘치킨’의 형태로 도착하는가?
거무튀튀하고 딱딱한 나뭇가지에서 찬란하고 부드러운 꽃이 피어나는 것을 보면 참 신비롭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 신비로운 꽃들의 아름다움에 경탄하며 봄을 즐기고 있습니다. 그런데 어느 어린 친구가 묻습니다. “꽃은 왜 아름다워요?”
생명의 소중함을 자각하고 건강한 삶을 격려하는 시 한 편.
생태학의 어원을 실마리 삼아 농생태학이 무엇인지, 어떤 것에 관심을 기울이는지 살펴봅니다.
프레야 매튜스는 전체론적 형이상학으로 환경 윤리를 접근하고, 생태문명, 원주민 시점에서 본 지속가능성, 범심론 등을 다루는 호주의 환경철학자이다. 그는 교수로 재직하면서 사설 생물다양성 보호구역을 관리하고 있기도 하다.
떠난 사람에 대한 그리움은 사라지지 않는다. 그것은 경천의 산줄기처럼 깊고 오래 남는다. 그러나 그 그리움을 품은 채 살아가는 방식은 선택할 수 있다. 흙을 만지고, 계절을 기다리고, 다시 싹이 올라오는 시간을 지켜보는 일. 그것은 슬픔을 부정하는 일이 아니라, 슬픔을 삶 속으로 받아들이는 방식이다. 나는 그것을 ‘애도’라고 부른다.
고통스러워하는 언니의 시간이 그만 멈추길 기도한 적도 있다. 그러나 한 고비 한 고비를 넘겨 회복되어 가는 그의 몸을 보면서, 나는 기도를 멈췄다. 그의 인생에 조금 이르지만, 가을이 왔을 뿐이지 않는가.
셸리의 시적 표현과 모튼의 생태적 사유를 따라가며 미래의 그림자를 만난 순간의 기록이다. 피아노 선율이 하이데거의 사방(Gevierte)과 어우러지고 지혜를 사랑하는 거인들의 어깨 위에서 나에게 드리워진 그림자를 응시하며 사물과 세계에 다정하게 조현(attunment)하는 법을 배운다.
당시 어린 나로서는 이 책의 문장들이 무슨 뜻인지조차 잘 알지 못했다. 하나, 고등학교를 졸업하며 내가 막연히 생각했던 다짐은, 모두가 돈과 성장만을 이야기했던 그 호황의 90년대를 바라보며 “적어도 나는 자본의 노예처럼 살지는 말아야겠다”는 것이었다.
생명의 소중함을 자각하고 건강한 삶을 격려하는 시 한 편.
공장식 축산 시스템 속에서 닭들은 어떻게 살아가다가, 어떤 방식으로 도축되어, 우리 눈앞에 ‘치킨’의 형태로 도착하는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