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노동자를 가두는 징벌적 손해배상 청구에 맞서 싸운 한화오션 노동자들과 연대 밥상을 나누었다. 채식으로 차린 평등한 밥상을 모두 맛있게 먹어주어 감사했다. 앞으로도 꼭 시간을 내어, 이 땅에서 생명과 평화, 평등을 위해 싸우는 자리에 평등한 채식 밥상으로 찾아가고 싶다는 꿈을 꾼다.
울산 울주군 두서면의 두광중학교는 매년 전교생이 수학여행을 떠난다. 작은 학교의 여정에 동행하며 교육의 본질을 돌아보았다. 1년이 넘는 긴 시간 동안 준비는 차근차근 진행되었다. 학생들은 역할을 나누어 자료를 조사하고 모둠활동을 구상했고 교사와 학부모가 사전답사를 갈 때도 몇몇은 참가했다. ‘배움의 주체가 되는 것 이상의 교육 목표가 어디에 있을까!’하는 마음을 이 여행기에 담았다.
어느 날 귀가한 남편의 손에 모두 열 두 개의 백화점 종이봉투가 들려 있었는데, 큰 애가 “내 껀 없어?” 물었다고 한다. “그 많은 물건봉투들에 죄다 자기 것만 있었던 거 있지? 내참, 어이가 없어서.”
저자가 만난 사람들은 사회적으로 명망 있는 사람도 아니고, 유명인도 아닌 이들로 장애인을 가진 부모, 어부, 시장 상인, 세월호 유가족, 대구 지하철 참사 유가족, 9·11 테러 유가족, 미국 총기사건 생존자 등 아픔을 간직하고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하지만 이들의 슬픈 이야기는 기쁜 말이 되어 우리를 기쁜 세상으로 인도한다.
이 글은 역사학자 피터 라인보우의 『목매달린 자들의 런던: 18세기 영국 노동계급 공통장의 죽음과 삶』을 소개하는 글이다. 특히 인클로저를 통해 시골의 공유지(커먼즈)에서 쫓겨난 사람들이 18세기 대도시 런던에서 어떻게 새로운 커먼즈를 구성해나갔는지, 생산 재료를 전유하는 그 구성 방식에 지배 계급은 어떻게 대응했는지, 런던의 다중은 어떻게 마침내 타이번의 교수형으로 대표되는 죽음통치를 위기에 빠뜨렸는지, 그러나 임금은 어떻게 새로운 훈육의 장치로 등장했는지를 살핀다.
인간의 생로병사는 예외적 사건이 아니라 모든 생명이 거치는 자연의 질서다. 자연에서 꽃이 피고 지며 낙엽이 흙으로 돌아가듯, 죽음도 소멸만이 아니라 순환의 한 과정이다. 불교적 관점에서 보아도 삶과 죽음은 고정된 실체가 아니라 조건에 따라 생겨나고 사라지는 변화의 흐름이다. 따라서 죽음을 무조건 두려워하거나 회피하기보다, 삶의 유한성을 인정하고 남은 시간을 더 진실하게 살아야 한다. 삶과 죽음은 서로 대립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생명 과정이며, 우리는 자연스럽게 왔다가 머물고 다시 돌아가는 존재다.
티머시 모튼의 ‘생태적(ecological)’이라는 말을 ‘삶터의 이야기’로 재해석하며 ‘마을에서 철학하기’를 써내려가는 과정을 되짚어보니 나의 지난 시간, 음악, 영화, 고요라는 비인간 존재와 함께 호흡하고 있었다.
미래를 전혀 고려하지 않고 자원과 부를 있는 힘껏 축적함으로써 그들은 숙주와 우리, 그리고 다음 세대의 피까지 모조리 빨아 먹는다. 그러나, 부패에, 악취에, 쉽게 변할 것 같지 않은 상황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위축되지 않도록 지탱해주는 그 '무엇'이 있다.
탈성장 전환시대를 맞기 위해 스스로를 단련한다고 할 때, 첫 발을 디딜 수 있는 바닥을 찾고 고르는 일이 쉽지는 않을 듯하다. 왜냐하면 성장 지향의 사회가 너무나도 강고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어떤 강고한 사회도 변화하여왔다는 역사적 교훈을 존중하는 사람들은, 희미하고 작은 상징 속에서까지도 변화의 계기를 찾아왔다. 그런 변화의 계기들에 관하여 살펴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