떠난 사람에 대한 그리움은 사라지지 않는다. 그것은 경천의 산줄기처럼 깊고 오래 남는다. 그러나 그 그리움을 품은 채 살아가는 방식은 선택할 수 있다. 흙을 만지고, 계절을 기다리고, 다시 싹이 올라오는 시간을 지켜보는 일. 그것은 슬픔을 부정하는 일이 아니라, 슬픔을 삶 속으로 받아들이는 방식이다. 나는 그것을 ‘애도’라고 부른다.
고통스러워하는 언니의 시간이 그만 멈추길 기도한 적도 있다. 그러나 한 고비 한 고비를 넘겨 회복되어 가는 그의 몸을 보면서, 나는 기도를 멈췄다. 그의 인생에 조금 이르지만, 가을이 왔을 뿐이지 않는가.
셸리의 시적 표현과 모튼의 생태적 사유를 따라가며 미래의 그림자를 만난 순간의 기록이다. 피아노 선율이 하이데거의 사방(Gevierte)과 어우러지고 지혜를 사랑하는 거인들의 어깨 위에서 나에게 드리워진 그림자를 응시하며 사물과 세계에 다정하게 조현(attunment)하는 법을 배운다.
다시 자본론을 읽는다new
당시 어린 나로서는 이 책의 문장들이 무슨 뜻인지조차 잘 알지 못했다. 하나, 고등학교를 졸업하며 내가 막연히 생각했던 다짐은, 모두가 돈과 성장만을 이야기했던 그 호황의 90년대를 바라보며 “적어도 나는 자본의 노예처럼 살지는 말아야겠다”는 것이었다.
생명의 소중함을 자각하고 건강한 삶을 격려하는 시 한 편.
공장식 축산 시스템 속에서 닭들은 어떻게 살아가다가, 어떤 방식으로 도축되어, 우리 눈앞에 ‘치킨’의 형태로 도착하는가?
누구 하나 뒤처지는 사람이 없는 곳. 나와 너, 그리고 우리가 같은 높이에서 서로를 마주하는 곳. 선생님과 학생의 경계도 흐려지는, 공동체 정신이 살아 있는 공간이다.
계절마저도 ‘헤아리기 어려운 시대’를 지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일상의 명랑함을 온전히 누리기 어렵게 하는 시대이지만, 거창한 대안보다는 타자와 느긋하게 얽히고 서로를 보듬는 용기가, 현실이 모순적일지라도 희망을 품고 꿈꾸기를 포기하지 않는 태도가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머뭇거리는 것 같아도 작은 씨앗 같은 공동체의 움직임은 결국 위기 속에서도 빛나는 새로운 주체성을 생산하는 획기적인 시작(분자혁명)이 될 것입니다.
“왜 그랬냐”고 묻는 데 대하여, “그냥 그렇게 느껴서”라고 답하면 문제가 된다. 국가보안법 제7조 찬양・고무죄의 ‘표현의 자유’는 계속 쟁점이다. 그 질문을 두고 판사 앞에 섰을 때를 기억한다. 이제껏 한편 부끄럽기도 했고 외면하고 싶기도 한 장면으로서. 다만, 아직도 “홍시 맛이 나서 홍시 맛이 난다”고 말하고 싶다.
예술가를 위한 팡파르new
진정 아는 사람만 아는가? 올림픽 주제곡처럼 생각해 본다. ‘예술가를 위한 팡파르’가 필요하다. 나무 옆에서 들꽃 옆에서 추는 춤에, 고심하는 펜 끝에, 웅크려 보내는 밤에, 나팔과 현악기, 신디사이저와 타악기들이 필요하다.
오늘날 AI는 생활의 편리함을 넘어서 전쟁•선전•감시의 도구로도 빠르게 전용되고 있는데, 우리는 또 한 번 강력한 무기를 손에 쥔 문명 앞에 서 있다. AI의 발전을 막는 것이 불가능해 보이는 오늘날, AI는 인류의 생존을 위협할 두려운 존재로 인식되고 따라서 인류는 뼈아픈 성찰과 함께 대안을 모색해야 하는 과제를 떠안게 되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