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주의 삶, 야생으로 돌아가기

지구 문명의 총체적 위험이 기후위기로 드러나고 있다. 그러나 지금 인간들이 실천하고 있는 것들(저탄소경제, 재생에너지, 소비 절약 등)만으로는 인류 문명의 위기를 극복해낼 수 없다. 자연과 연결되고, 자연의 신비와 아름다움을 인식하며 문명을 철거하는 자연주의의 삶, 야생으로 돌아가는 전혀 새로운 차원으로 나아가야 한다.

이 날 뉴스는 매우 놀라운 것이었다. 대부분의 언론매체가 첫 뉴스로 보도했다. 우리나라뿐 아니라 외국의 언론도 그랬다. 유엔의 정기총회도 아니고 산하단체의 결의가 이렇게 보도된 적이 있었나 싶지만 그 내용을 보면 그럴 만도 하다.

정확한 날짜는 11월 23일, 월요일이다. 연도는 2026년. 제30차 〈유엔 기후변화 협약 당사국 총회〉는 196개 정부 대표가 참석해서 참가국 모든 나라의 헌법에 몇 가지 내용을 꼭 포함할 것을 권유하는 결의를 한 것이다.

첫 번째가 물과 토양과 대기의 기본권을 보장한다는 것이다. 부속 조항에서는 인권보다 자연권을 우선할 것도 권유했다. 두 번째는 각 나라의 영토에 존재하는 생명체들은 종 개체의 많고 적고를 따지지 않고 국가라는 공동주택에 함께 사는 입주자의 권리와 의무를 같이 누린다는 조항이다. 생명체의 미래 세대를 위해 대체 불가능한 자원은 절대 소비할 수 없게 엄금한다는 조항도 있다.1

과연 우리는 이런 뉴스를 볼 수 있을까? 1993년 12월에 이 협약에 47번째로 가입한 한국 정부가 이 결의에 따라 헌법을 개정하겠다고 선언하는 발표를 볼 수 있을까? 덩달아서 유엔 생물다양성협약(CBD) 당사국들도 급히 모여 같은 결의를 하는 모습도 볼 수 있을까?

모르긴 몰라도 이런 일은 없을 것이다. 인간이 지구에서 장렬하게 멸종은 할지언정 이런 결정은 죽어도 못할 것이다. 단언한다. 미국 때문에, 미국이 있는 이상 못할 거라고 주장하면 오산이다. 아무리 교토 의정서에 서명하지 않았고 파리기후협약에서 탈퇴한 전과가 있을지언정 미국 때문에 안 될 거라고 하면 인간들을 과대평가하는 것이다.

내가 이렇게 단언하는 데는 근거가 있다. 2015년에 프랑스 파리에서 열린 당사국 회의에서는 2100년까지 산업화 이후 지구 기온의 상승 폭을 1.5℃ 이내로 억제하자는 데에 합의했다. 하지만 2022년 현재, 지구 기온의 상승 폭은 이미 1.4℃에 이르렀으며, 지금 추세가 지속된다면 2100년에는 기온 상승이 최소 2.8 ℃에 달할 것으로 예측한다.2

한국을 보자. 2050년까지 탄소 중립(온실가스 순 배출량 ‘0’)을 하겠다면서 2030년까지 2018년 대비 40% 감축하겠다고 했지만 실적은 초라하다. 한국의 1인당 온실가스 배출량은 G20 평균의 2배다. 재생에너지 발전 비중도 G20 평균의 5분의 1에 불과하다. 한국 정부는 석탄발전소 건설사인 두산중공업에 3조 6천억 원을 지원했다. 인도네시아와 베트남에 석탄화력발전소와 가스복합발전소를 지어주고 있다.

자연농부의 민감한 촉수

하도 들어서 귀에 딱지가 앉았을 기후위기 이야기를 먼저 꺼내는 것은 환경과 생태, 지구 자연의 총체적 위험 상태가 기후위기로 드러나고 있어서다. 이 위기를 인간은 극복하지 못할 것이라고 단언하는 것 또한 내가 종말론자라서가 아니라 하루하루 피부로 실감할 뿐 아니라 유구한 인간 역사가 말해주고 있기 때문이다.

『문명의 붕괴』를 쓰고 『총⸱균⸱쇠』를 쓴 ‘제레드 다이아몬드’는 말한다. 찬란했던 지구상의 모든 문명은 최고의 융성기에 많은 위기의 징후와 경고가 있었으나 멸망을 향해 질주했고, 끝내 사라졌다고.

어떤 이는 말할 것이다. 자연재해와 기후변화는 지구 역사의 흔한 과정이었다거나 에이아이(AI)기술과 우주항공 기술이 위기를 넘길 방안을 찾을 것이라고. 나는 그렇게 보지 않는다. 음식에는 날파리가 먼저 꼬인다. 마찬가지로 모든 신기술과 새로운 제도는 돈벌이 장사꾼이 먼저 가로챈다. 군대가 먼저 사용한다. 실크로드가 그랬다. 철도가 그랬고 방직기가 그랬다. 증기기관과 내연기관이 그랬고 트랜지스터가 그랬다. 웹(web)도 그랬다.

여러 억제 장치와 제도적 규제는 이미 산업 자본들이 훑고 간 뒤에 나타난다. 뒷북만 치는 것이다. 챗 지피티(chat GPT)를 축으로 기승(?)을 부리는 생성형 인공지능 기술을 보고 있노라면 불난 집에 앉아서 형제간에 재산 다툼을 하는 꼴로 보인다. 2024년 한국 국정감사를 보노라면 정부나 국회, 여야가 모두 술에 취한 코끼리가 되어 민가를 휩쓰는 것처럼 보인다.

그래서 지금은 공공연히 붕괴 얘기가 나온다. 인류의 종말 얘기가 왕성하다. 귀가 얇은 사람에게만 들리는 게 아니라 생태인지감수성이 있는 사람은 그런 ‘감’을 느낀다. 자연과 가장 가까이서 사는 자연농부들이 그렇게 말한다. 자료나 모니터를 통해서가 아니라 온몸으로 자연과 마주하는 사람들이 자연농부다. 그들이 말한다. 생존을 도모할 때라고. 지구의 인류문명은 끝났다고.

스마트농업이니 농업의 6차 산업화니 수직농장이니 하는 와중에도 비닐 한 장 안 쓰며 최대한 야생에 가까운 농사를 짓는 자연농부는 자연의 변화에 예민할 뿐 아니라 천지신명 또는 우주 정령의 메시지도 듣는다. 천지신명이나 정령을 얘기하면 누구는 최순실이나 박근혜 전 대통령의 “간절히 원하면 우주가 도와준다”라는 발언을 떠올려 무속신앙이나 샤머니즘 신봉자를 연상할지 모른다. 사실 이 말은 노벨문학상 수상자인 파울로 코엘료의 소설 『연금술사』에 나오는 말이고, 소설 이전에 널리 통용되던 명언이다.

무속과 샤머니즘은 고대 초기의 종교 형태로 종교가 권력과 야합하기 이전의 원형 신앙체라 할 것이다. 따라서 자연과 가까이 사는 농부는 신령과 함께하는 삶이라 보면 된다. 자연이 신인 이유는 신이 세상을 만들었다고 하면 창조 원형 그대로가 자연이기 때문이고, 신이 자연을 만들지 않았다고 해도 신의 본령은 있는 그대로, 저절로 되어 가는 꼴에 따라, 뭐든 온전함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자연농부는 이구동성으로 말한다. 농사 못 짓겠다고. 난데없이 고추 칼라병이 창궐하여 고추가 말라비틀어진다. 잎이 오그라들고 반점이 생긴다. 총채벌레 때문이라는데 치료법이 없다. 마늘이나 양파에는 뿌리 무름병이 예년 같지 않다. 잎마름병이나 노균병도 심하다. 늦봄 우박이나 서리로 가루받이 중인 꽃들이 다 떨어지는 건 다반사다. 그래서 과수농가 피해가 매년 커진다. 고추, 감자, 가지, 피망 등 가짓과 채소의 풋마름병(청고병)도 해마다 극심하다. 발병했다 하면 손을 쓸 수 없다. 식물체 전체가 급격히 시든다. 초고온에서 활개치는 토양성 병원균이다.

열대성 작물을 이식하지만 대책이 아니다. 수천 년에 걸쳐 기후가 바뀌어야 미생물과 곤충과 바이러스나 박테리아가 길항작용을 거쳐 안정적인 균형을 이루는데 열대작물만 식재한다고? 어림없다. 병해충의 득실거림을 막을 길이 없다.

생태 농장의 비닐을 전혀 사용하지 않은 자연 멀칭 농장, 굵기가 작고 뿌리가 왕성한 마늘과 양파, 병이 전혀 없는 고추밭. 사진제공 : 전희식

인간이 하는 짓이라는 게

나도 인간이면서 인간 흉보기가 겸연쩍다. 인간을 나무라고 야단치는 존재는 신이거나 외계인일 것이다. 인간이 인간을 나무라는 경우는 극단적인 생태주의자나 스스로를 신이라 하는 사이비 교주일 것이다. 외계인을 고진재(고도로 진화한 존재. 상위 차원의 존재)라고 할 때 지구인들이 하는 짓이 기괴하다고 여길 것이다. 떠오르는 대로 늘어놓아 보자.

기후 변화로 농사를 망쳐서 먹고 살길이 막막해지는데도 국회나 정부는 농사 얘기는 없고 김건희 국정 농단이나 명태균의 총선 개입 문제로 날이면 날마다 시끄럽다. 그것이 중요하지 않다는 건 아니나 김건희가 없고 윤석열 정부 아니었을 때는 태평천국이라도 되었다는 듯이 난리니 문제다. 기후위기 논의가 단 한 번도 이번 국감에서 다뤄지지 않아서 문제라는 것이다.

우리나라는 여전히 버리는 음식물이 연간 15조 원에 육박한다. 발생량은 2023년 기준 522만 톤이다. 그게 토양 오염과 악취와 전염병을 옮긴다. 온실가스 발생량도 1000만 톤이 넘는다. 외계인이 한국 곡물자급률이 20% 미만이라고 듣고는 벌린 입을 다물지 못할 것이다.

이산화탄소 발생을 줄인답시고 천 장바구니(에코백)와 머그컵이 생겨났는데 이제는 이게 쓰레기가 되었다. 행사 때마다 하나씩 나눠 주니, 그걸 들고 다니면 기후위기범에서 면책이라도 되는 듯이 너도나도 집에는 십 수 개씩 쌓아 놨다. 깜빡하고 못 가져가면 또 비닐봉지와 일회용 종이컵을 쓴다. 천 장바구니 하나가 비닐봉지 130개 분량의 이산화탄소를 만든다니 완전 거꾸로다. 의식 있는 인간이 하는 짓도 이렇다.

몸에도 안 좋고 온실가스의 주범인데다 대체육까지 있는데도 고기를 얼마나 먹어대는지 고지혈에, 비만에, 관절염에, 당뇨에, 고혈압을 앓고 약물에 중독된 상태로 병원을 들락거린다. 우리나라는 한 사람이 1970년에 연간 육류 소비량이 5.3kg이었는데 2023년에 60.6kg을 기록했다. 쌀 소비량보다 많다. 어린이와 환자와 노인과 채식하는 사람을 빼고 나면 성인들은 근 100kg을 먹지 않을까 싶다.

전북작가회의 총회에 웬만하면 참가하려고 하다가도 매캐한 담배 연기와 숨을 쉴 수 없는 고기 굽는 냄새, 그래서 포기한다. 작가들의 자유로움과 상상력. 이건 창작의 밑거름이다. 근데 그게 기후 위기 시대에 실내에서 담배를 피우고, 앉았다 하면 고기부터 굽는 것일 수는 없다. 자유라는 것은 나와 이웃, 그리고 사회에 가장 최선의 것이 되도록 책임을 다하는 것이 참 자유라고 생각한다. 그래야 지속가능한 자유이고 타인의 자유를 보장하게 된다.

다들 기억할 것이다. 코로나 바이러스가 한창 난리를 칠 때 말이다. 하늘이 맑아지고 공기가 깨끗해지던 때를 말이다. 소비가 줄고 이동이 제한되니까 비로소 자연이 숨을 쉬게 된 것이다. 인간에 의해 숨구멍이 틀어 막혔다가 다시 숨을 쉬고 보니 세상 좋고 사람도 좋았지 않았는가 말이다.

코로나가 끝나기도 전에 소비 촉진이다, 전통시장 활성화다, 여행 권장 쿠폰 발행이다 각종 정책들이 나왔다. 전염병처럼 이전 버릇을 되살리기 시작했다. 소상공인 지원금이다, 지역화폐다 하여 먹고 마시고 돌아다니고 사고팔고 버리고 없애고 또 사서 버리고…. 난리도 그런 난리가 없다.

우리나라가 어떤 방식으로 언제까지 탄소 제로, 탄소중립을 할지는 토론장에서나 할 일이고 생활에서는 나 몰라라 한다. 우리나라만이 아니다. 말과 글과 생각으로만 하면 끝이다. 이게 대다수의 인간이다.

이런 말을 하는 나도 물론 완벽하지 않다. 하지만 말과 글과 생활이 딱 맞아떨어지도록 늘 노력하는 것은 사실이다. 자동차 없애고 자전거 타고 다닌다. 멀리 갈 때는 대중교통을 이용한다. 가전제품 거의 다 없앴다. 보일러 안 틀고 겨울난다. 에너지 안 드는 집을 지었다. 내 평생 집을 4채 지었지만 단 한 번도 수세식 화장실을 들이지 않고 생태 뒷간만 30여 년 쓴다. 똥오줌이 수돗물에 실려 가지 않고 다 논밭으로 간다. 태양열 난방을 한다. 농장에는 무동력 농기구만 쓴다.

언젠가 우리 집 장계에서 충북 단양에 강의가 있어서 가는데 8번 갈아탔고 9시간 걸렸다. 시내버스, 택시, 시외버스, 기차 등 인터넷으로 다 살펴봐서 갔는데 그랬다. 전혀 힘들거나 답답하지 않았다. 책을 두 권 읽었고 오가며 각 지역의 많은 풍경을 감상했다. 두 시간 강의하고 1박을 했지만 마냥 좋았다. 이런 걸 사람들은 별난 사람이 하는 별난 짓으로 여긴다. 그게 문제다. 기후 위기는 딱 한 가지다. 소비 때문이다. 과잉 소비, 과잉 생산, 과잉 폐기, 과잉 이동 때문이다. 모든 게 상품이 되어버리는 시장 만능 때문이다. 시장 사회는 잉여 생산을 그 본질로 한다.

이제는 소비가 물품만을 대상으로 하지 않는다. 감정과 정서도 중요한 소비 상품으로 거래된다. 지식이 상품이 되어 거래된 지는 오래다. 이 역시 과잉이다. 감정 과잉, 생각 과잉. 지식 과잉. 심각하다. 요즘 사람들은 모르는 게 없다. 유튜브나 생성형 인공지능을 손안에 쥐고 있으니 그렇다. 그런데 제대로 하는 건 없다. 손가락만 움직이면 다 되니까 그렇다. 그게 온실가스를 폭증케 하는 것이고 기후 위기를 촉진하는 것이라는 건 모른다. 기계를 쓰지 말고 몸을 많이 쓰면 온실가스 발생이 준다는 사실을 아무도 강조하지 않는다.

신재생에너지? 알이백(RE100)? 에이아이(AI)?

몸을 많이 쓰면 웬만한 병은 없다. 기계에 마취된 것처럼 2층이건 3층이건 무조건 엘리베이터를 타면서 운동 부족이랍시고 휴일에는 맨발 걷기나 등산하는 지구인을 외계인이 본다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 것이다. 운동이 필요한 사람이 지하철 환승역에서 왜 에스컬레이터를 타는지 의아해 할 것이다. 자살은 못 하게 하면서 완만한 자살행위이자 타인에게 고통을 주는 담배와 술을 국가 공기업에서 팔고 있는 한국을 보고 뭐라 할까?

히틀러를 지지하고 따르던 사람들을 ‘군중심리’, ‘심리 조작’ 운운했다. 같은 인간 무리를 보고 광화문의 촛불 대열은 집단(다중) 지성 운운한다. 지식 장사치들은 이렇게 딴 것인 양 이름 붙인다. 포장만 바꿔서 비싸게 파는 장사꾼과 같다. 아이폰이나 갤럭시가 수년 치 제품을 다 설계해 놓고는 6개월에 한 번씩 계속 신제품이라는 이름으로 기능 하나 끼우고 빼고 하면서 출시해 소비자를 현혹하는 것과 같다.

화석연료를 줄이고 재생에너지를 써야 한다. 그래서 RE100이라는 세계적인 캠페인이 등장했다. 2050년까지 재생에너지만을 100% 사용해서 공장을 돌리겠다는 선언이다. 재생에너지 비중을 2030년에 60%, 2040년에는 90%를 달성해야 한다. 구글, 애플, 지엠, 이케아 등 세계적인 기업들이 다 가입했고 우리나라도 현대모비스, 케이티, 엘지이노텍 미래에셋증권, 에스케이그룹 등 21개 기업이 참가하고 있다. 세계 4번째로 많다. 한국 참 대단하다.

그런데 말이다. RE100 선언은 좋은데 그 때문에 내가 사는 장수에 초고압 345kv 송전선로가 생기게 된다. 용인시 처인구에 반도체 단지를 만들어 삼성이 약 360조 원, SK하이닉스가 120조 원을 투자해 10개 반도체 공장을 지을 계획인데 삼성전자가 2년 전 RE100을 선언하면서 재생에너지 공급이 절실해졌다.

이 같은 상황에 정부는 전남 신안과 전북 서남권에 해상풍력을 만들고, 여기에서 생산되는 전기를 그곳에 보내겠다는 계획을 세웠다. 그 송전선로가 진안, 장수, 무주를 지난다.3

정말 RE100이나 신재생에너지가 답이 될까? 나는 그렇게 안 본다. 현대문명은 딱 한 마디로 숲을 잡아먹고 커왔다. RE100이나 신재생에너지도 숲을 잡아먹는다. 똑같다. 태양광 산업으로 산과 농지가 전부 태양전지로 뒤덮이는 현실이 그렇다. 태양은 영원하고 바람은 늘 불고 지구 내핵은 태양 표면보다 뜨겁다. 그러나 지열이나 태양광, 태양열이나 풍력을 이용하는 재생에너지 단지도 꾸준히 손을 보고 에너지를 공급하지 않으면 기계는 녹슬고 내구 연한이 있어 부속은 망가진다. 영원하지 않다. 태양광 전지도 수명이 25년에 불과하고 초기 제품들은 사용 연한이 다 되어 엄청난 환경오염 쓰레기로 변한다. 눈가림하는 기후산업일 뿐이다.

편리하게 살려는 욕망의 열차에서 더 과속으로 달리고자 하는 잔꾀에 불과하다. 이는 민중의 적정기술, 생활 기술을 무시한다. 이런 기후산업은 민중의 자생력을 파괴한다. 정치적 민주주의를 내 걸면서 경제적 집중과 독점은 더 심해진다.

환경(Environment), 사회(Social), 지배구조(Governance)의 약자인 이에스지(ESG)를 내세우는 기업들이 도입하는 경영 방식. 내 눈에는 잘 키워서 잡아먹으려고 사료를 듬뿍 주는 양식장의 양식업자의 모습으로 비친다.

지금의 국가는 껍데기다. 우리 삶을 규정하고 우리를 울고 웃게 하며 많은 시간을 들이게 하는 것은 이커머스(전자 쇼핑몰), 넷플릭스, 유튜브, 초고속 이동 네트워크, 공산품이 된 식품, 공산품이 된 의료일 뿐이다. 구글, 테슬라, 삼성, 구글. 애플. 쿠팡 등은 세계 어느 국가보다 영향력이 크다. 우리는 쿠팡 노동자들이 가혹한 노동환경에서 자살하고, 택배 현장에서 숨진다는 뉴스를 보면서도 몇십 원 싼 맛에 쿠팡을 찾는다. 몇십 원이 없어서가 아니다. 소비의 마취 상태, 정신적 음주 상태라서 그렇다.

생태 영성차원 상승과 야생의 삶

RE100이나 신재생에너지가 답이 될까? 나는 그렇게 안 본다. 현대문명은 딱 한 마디로 숲을 잡아먹고 커왔다. 사진 출처 : markmerner

노화는 없다는 연구들이 많다. 단순한 질병일 뿐이란다. 분자생물학, 생리 파동 의학, 후성유전학, 정보통신기술 분야의 발전은 눈부시다. ‘유발 하라리’는 역작 『호모데우스』에서 신이 되어 가는 인간을 다뤘다. 인간은 지금껏 이성과 지식으로 오늘의 문명을 이루었다. 그것이 계속 통하지는 않을 것이다. 지식으로 망가뜨린 지구를 지식으로 지킬 수는 없다.

처음으로 철도를 깔면서 군인은 안 태우고 무기와 마약과 매매춘 관련자는 절대 이용할 수 없다는 조약이 가능할까? 그렇게 한들 지켜질까? 아니다. 존재의 차원이 달라지지 않으면 어떤 이성도 지식도 지성도 맥을 못 춘다고 봐야 한다. 기술이란 자연과 인간을 서로 북돋는 삶이 되게 해야 한다. 현재의 인간 기술은 그렇게 될 수 없다.

존재의 차원을 달리한다? 이 지구에 차원을 달리하는 존재들은 많다. 그쪽을 향해 가는 것만이 돌이킬 수 없게 된 이 지구 생태계의 희망이라고 본다. 그렇다면 차원을 달리 한다는 게 뭔가? 한번 찬찬히 생각해보자. 스스로에게 스무고개 놀이 삼아 해보자. 그게 뭔지를.

차원은 중첩적으로 존재한다. 겹쳐있다. 사람마다 각각의 차원을 가진다. 익숙하고 편리한 습관에서 탈출하는 것이다. 단순한 탈출이 아니라 돌아가는 다리를 불 질러 버리는 것이다.

《엑스페리먼트》라는 독일 영화가 있었다. 죄수 역할과 교도관 역할을 하는 역할극을 통해 인간 본성에 대한 깊은 통찰을 보여 준다. 게임이라는 걸 알고 시작했지만 점차 간수와 죄수의 역할을 현실로 받아들이기 시작한다. 습관과 다중 논리의 마법 같은 현상이다. 우리가 습관의 벽을 넘어서는 것이 차원 변화, 차원 상승이라고 하는 이유다.

저탄소 경제, 재생에너지. 소비 절약만으로 기후 대재난과 기후 난민, 전쟁, 파시즘의 등장을 피할 수 없다. 우리 체온이 1~2°C만 올라도 우리는 일상을 유지하지 못하고 드러눕는다. 설사가 나면 안 먹어야 한다. 지사제를 먹고 계속 상한 음식을 먹으면 만성병에 걸려 죽는다. 수직 빌딩 농사. 고층 아파트, 스마트 농업. 대도시 등은 온실가스를 풍풍 뿜는다. 기후재난으로 통신, 에너지. 도로가 끊기면 끝이다. 일찍 벗어나야 할 감옥이다.

우리는 기후위기라고 부른다. 그건 인류 문명의 관점이다. 지구 님께서는 뭐라고 할까? 지구는 이런 현상을 자연순환이라 할 것이다. 지구 시선으로 보면 인간도 자연의 한 조각에 불과하니까. 그러니 호들갑 그만 떨고 적응해야 한다. 자연주의 삶으로! 야생 살기로 가야 한다. 문명을 철거해야 한다. 전혀 새로운 차원으로 상승하는 첫걸음이 될 것이다.

영성은 나와 세계는 하나라는 것이다. 영성은 네 안에 내가 있고 내 안에 네가 있다는 것이다. 한 뿌리에서 잎도 나고 열매도 나고 꽃도 핀다는 사실. 꽃을 찾아오는 곤충과 새들도 다 같은 뿌리의 다른 형상들이라는 것이 영성이라고 이해하면 된다. 그렇게 사는 것이다.

“봄에는 가볍게 걸어라, 어머니인 지구가 임신 중이다”라는 말은 내가 휴대폰 프로필에 적어 놓는 북미 원주민 ‘카이오와 족’의 속담이다. 자연을 그렇게 대하는 것이다. 나나 돌멩이나 벌레 한 마리도 다 지구에 깃든 세입자라는 것이다. 생존의 범위 안에서 순리에 따른 먹고 먹히는 삶을 아름답게 사는 게 새로운 차원의 삶, 개벽 세상, 물병자리 시대라고 본다.

야생으로 살기, 화석연료와 비료 없이 농사하기, 생필품 자가 제작하기, 전기 없는 삶, 몸 에너지 활용, 먼 길 교역이 아닌 가까운 마을 장터, 에너지 필요 없는 집짓기 등은 차원이 다른 파동에너지로 삶으로 넘어가는 길목이 될 것이다. 더 자세한 이야기는 이쯤에서 줄인다. (신비) 체험의 영역, 신성의 영역이기 때문이다.

낡은 운동화 꿰매 신기, 오래된 비 고쳐 쓰기, 흙.나무.돌로 지은 생태 집 고치기. 사진제공 : 전희식

우리는 웰다잉을 얘기하며 연명치료 거부 사전의향서를 쓴다. 유언을 미리 해둔다. 인류는 유언을 써 둘 때다. 연명 조치는 그만둘 때다. 그러기 위해서는 힘 빼기를 해야 한다. 눈에, 어깨에, 머리에 과도한 힘을 뺀다. 병원에 가도 다리가 부어 있거나 탈진해 있으면 침도 안 놓고 수술도 하지 않는다. 부기가 빠지고 기력을 회복하고 나서 시술한다. 그것처럼 지구에서의 삶에 있어서 인류는 먼저 이완하고 정화하고 치유되어야 한다. 안 그러면 백약이 무효다. 인류 유언장을 쓰고 자청해서 안락사를 준비하는 인류가 된다면 비로소 희망이 있을 수 있겠다. 생태 영성의 길이다. 자연과 연결되고, 자연의 신비와 아름다움을 인식하며, 이를 통해 내면의 평화를 찾는 길. 자연 속에서 느끼는 감동과 경외감을 통해 더 나은 자신을 발견하고, 한발 더 나아가는 삶이 희망이다.


  1. 『자연의 권리(데이비드 보이드. 이지원 옮김. 교유서가. 2020. 10)』의 일부 내용을 참고하여 가상 뉴스 만듦.

  2. 기후 변화에 관한 정부 간 협의체(IPCC; Intergovernmental Panel on Climate Change)의 기후과학 자문단에서 나온 보고서.

  3. 〈장수신문〉 2024년 10월 29일

전희식

농부. 마음치유농장 대표. 건강한 노동, 깊은 마음 챙김, 이웃과 사회에 봉사, 모든 일과 공부를 놀이 하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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