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태적지혜연구소(이하 ‘생지연’)의 조합원들은 서로에게 어떤 존재로 받아들여지고 있을까. 2019년 11명의 첫 조합원들이 쓴 ‘생태적지혜연구소협동조합 창립선언문’은 기후위기가 우리의 일상과 삶의 양식 자체에 심각한 위협으로 직면하는 가운데 이 위기를 넘어서려고 ‘뜻’을 함께한 이들의 의미를 이렇게 소개한다.
“먼저 우리는 기후위기를 세련된 최신의 정보와 지식으로 받아들일 뿐, 그것을 극복하려는 지혜와 정동(affect)에 대해서 무심해 왔다는 점을 발견했습니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멸망과 위기의 이유 등의 확실한 답이 아니라, 문제 상황과 대면해서 던지는 다양한 문제제기입니다. (중략) 우리들은 마침내 현시대에 절실하게 필요한 것이 바로 생태적 지혜(Ecosophy)라는 점에 도달했습니다. 생태적 지혜는 커먼즈(Commons)로서의 공유지에서 발아했던 약초, 벌레 퇴치, 식생, 발효, 요리, 저장 등의 지혜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그래서 생태적 지혜는 연결망의 지혜이자, 정동과 살림, 돌봄의 지혜이기도 합니다. (중략) 우리의 고민은 보이지 않는 과정이었지만, 연결망 자체를 가시화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그 결과 우리가 갖고 있는 생태적 지혜, 커먼즈, 미래적 지혜를 ‘생태적지혜연구소협동조합’이라는 연결망에 담아내게 되었습니다.”
연결, 돌봄, 정동이라는 단어로 수렴할 수 있는 생지연의 가치는 서로 다른 지역, 직업, 활동 현장에서부터 성별, 연령대를 넘어서는 새로운 얽힘과 연결로 이어지고 있다. 백여 명이 훌쩍 넘은 단체톡방에 올라오는 다양한 공지들을 확인할 때면 내가 아는 세상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에 새삼 놀랄 때가 있다. 생지연을 통해 기후위기와 여러 사회 문제에 맞선 구체적인 대안과 실천의 영역을 궁리하는 이들의 감수성은 누구보다 세심하고 기민하다. 좀 더 나은 삶과 세상을 위해 마음으로의 연대를 요청하는 경우도 있고, 관심의 밀도가 높아 실질적인 행동이 필요할 때는 이에 힘을 보태는 활발한 참여의 형태도 보인다. 최근에도 기후정의행진에 참여한다거나 펀딩을 통해 활동가와 연구자, 시민 사이를 가로지르는 프로젝트가 소개되어 공명과 참여를 이루었다. 나처럼 매달 웹진에 글을 쓰는 방법으로 연대하는 이들도 있다. 공동체, 기후위기, 탈성장, 돌봄, 커먼즈, 생태, 인문학, 생태민주주의 같은 주제로 서로의 자리와 공동의 관심사를 연결해 보는 글들은 저마다 특징을 갖고 꾸준히 연재되고 있다.

이처럼 생지연의 ‘함께하기를 모색’하는 방법은 다채롭고, 저마다 소중하다. 사실 이렇게 연대할 수 있는 데에는 공동이 가진 위기의식, 몸으로 체감하는 위협적인 변화가 서로를 보듬고 지키는 연대의 방식으로 이끌었다고 할 수도 있다. 그렇게 ‘따로 또 같이’ 서로의 낯설고 어색한 사이를 이어주는 지혜의 언어를 찾고, 위기에 직면하는 용기를 품은 이들의 행보는 ‘새로운 삶은 가능하다’라는 명제가 아닌 실질적인 삶의 움직임으로 나타나고 있다.
한편으로는, 생지연의 ‘지혜와 용기’가 갇힌 담론이나 행동 양식이 되지 않기 위해서는 어떤 노력이 필요할까도 생각해 본다. 여기서의 활발함과 진정성은 결국 외부, 바깥의 다름과도 끊임없이 대화하고, 설득하는 과정 속에서 그 빛을 발휘할 것이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생지연의 창립선언문에 일면 동의하지 않더라도 주변에서 쉽게 마주치는 사람들, 때론 그들의 생각이나 행동을 외면하고 싶고 반박하고 싶지만, 이 사회를 함께 이루어가는 사람들과의 대화. 이 대화가 필요한 이유는 생지연의 지혜가 진리나 규범이기 보다는 끊임없이 연결망을 이어가며 낯선 존재와의 연루를 부정하지 않기 때문이다.
출판사 편집장이자 작가 박동수는 최근 쓴 책『동료에게 말 걸기』에서 오늘날 사회가 어떻게 구성되어 있는지 이렇게 소개한다.
서로 다른 세계관, 서로 다른 가치관, 서로 다른 언어를 가진 사람들과 함께 살아가야 한다. 다원화 시대 속에서, 기후위기 앞에서, 민주주의 위기 한가운데서 우리는 내 마음대로 선택할 수 없는 이웃들과 공존해야 한다. 이때 필요한 것은 같은 신념을 가진 동지 관계도, 진리를 전수하는 사제 관계도 아니다. 서로 다르지만 함께 살아갈 수밖에 없는 사람들, 즉 동료와의 관계다.(박동수, 14)
그러면서 작가의 사유와 삶에 대한 태도를 형성하는 데 영향을 끼친 책 몇 권이 소개한다. 그중에서 작가는 로런 포니에의『자기이론』을 소개하면서 그 책의 부제인 ‘자기의 삶으로 작업하기’의 의미를 살핀다. 포니에의 ‘자기이론’이란 ‘대가’의 고급이론이나 백인 남성 이론가로 수렴되기 쉬운 서구 철학의 한계, 구획을 넘어선다. 대신 ‘간극, 틈새, 흠집’처럼 평범한 일상(삶의 현장)에서 개인으로 경험하는 직접적 생생함이 자기이론의 토대가 된다. 이에 대해 박동수는 이런 말을 덧붙인다.
따라서 ‘대가’와 ‘대중’이라는 이분법은 성립하지 않는다. 그 사이를 잇는 수많은 연구자, 번역자, 편집자, 강사, 기자, 독자, 사회관계망서비스 논평자들이 모두 ‘감식가’로서 이론의 재생산에 관여한다. 그들은 저마다의 자기이론을 갖고서 간극의 지점을 포착하고 선별하고 증폭한다. 그 누구도 한낱 중간 매체나 지나가는 통로가 아니며, 각자는 담론을 변형하고 번역하는 매개자로서 크고 작게 활동하고 있다. 그렇기에 구조든 습속1이든 결코 일방적으로 적용되지 않는다.(박동수, 125)
생지연의 연결망은 “서로 다른 세계관, 서로 다른 가치관, 서로 다른 언어를 가진 사람들” 속에서 저마다의 ‘자기이론’을 충분히 갖되, 저마다의 언어와 삶을 존중하는 태도로부터 이어져 오고 있다. 그 뚜렷한 지향이 있기 때문에 생지연은 지금처럼 누군가를 계몽시키거나 가르치려는 태도가 아니라 서로의 정동에 대한 사려 깊은 지지와 시대의 위기를 나의 아픔, 곤란함, 두려움으로 비끌어매어 서로의 삶을 재배치할 여력을 갖고 있는 것 아닐까.
물론, 이러한 지향과 실천 방식은 번거롭고 어려운 일을 사서 하는 일처럼 보일 수 있다. 또 한 방향의 신념이나 지향으로 수렴되지 않기 때문에 겉으로는 산만해 보일 수 있다.
하지만 신쌤2이 줄곧 이야기했던 것처럼 이 운동의 관심은 우리가 무심코 지나가며, 무의미하다고 여겨 왔던 우리 사회의 주변부, 가장자리에 있다. 이를 달리 말하면 생지연이 관심 갖는 소수자운동, 대안운동, 생태운동, 욕망해방운동을 무의미와 침묵의 영역에 두지 않으려는 바지런함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신승철, 263)
다름과의 연결, 낯섦과의 대화는 소수의 진보적 사람의 전유물도 아니고, 어떤 성원권을 갖고 하는 일도 아니다. 단지, 그 자체로 연결망으로서 존재하는 태도로 이어나갈 뿐이다. 이를 서로의 작은 다름을 함부로 판단하거나 무시하지 않는 태도로 보고 싶다. 그 태도야말로 연결의 방향을 독점하지 않도록 끊임없이 성찰하며 나아가는 생지연을 다양하고 많은 ‘다름’과의 깊은 공명으로 이끌 것이다. 앞서 소개한 박동수 편집자는 철학을 전공하거나 학위도 없지만, 자신이 ‘발을 딛고 선 곳’(철학책 편집자)에서 배우고 경험한 “철학”을 이렇게 소개한다.
“철학이란 언제나 무지의 인정인 동시에 타자와 세계에 대한 끝없는 탐구였다.”(박동수, 39)
기꺼이 조직이나 공동체가 아니라, 연결망이 되기를 자처하는 생지연도 마찬가지다. 언제나 무지에 대한 인정과 끝없는 타자와 세계에 대한 탐구, 나아가 저마다의 정치 성향과 가치관, 정체성을 넘어서 서로의 욕망을 유머와 해학, 낙관과 사랑으로 꾸준히 실천하는 데에서 생지연은 새로운 연결을 이어갈 것이다.
〈참고도서〉
박동수,『동료에게 말 걸기』, 민음사, 2025.
신승철,『모두의 혁명법』, 알렙, 201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