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회 콜로키움- 『탈성장개념어 사전』 읽기

*문제제기들

  1. 감축의 사회적 메타볼리즘은 어떻게 구성할 수 있을까?
  2. 필요와 과잉 양대축에서 공동체는 어떻게 미시정치를 할 수 있을까?
  3. GDP를 넘어선 공생공락의 판짜기는 어떻게 가능할까?

*모시는 글

자코모 달리사 등이 쓴 『탈성장 개념어 사전』(그물코, 2018)의 서문에는 강수돌교수의 “무소유가 죽음이 아니듯, 탈성장도 종말이 아니다!”라는 말이 표제와도 같이 걸려 있다. 사람들에게 탈성장이 또 하나의 구체적인 삶의 현실이며, 다 사람 사는 일이라는 점이 직감하게 되는 구절이다. 여기서 우선 탈성장에 대한 선입견과 편견을 불식해야 할 것이다. 탈성장을 주장한다는 것이 현존 경제 질서를 전환하는 것은 분명하지만, 결코 사회적 메타볼리즘[Metabolism : 신진대사]의 경색이나 기능 정지를 뜻하는 것은 아니라는 얘기다. 오히려 그것은 ‘자기 제한’을 통해서 한정된 자원, 장소, 에너지, 사람들 등에 대한 통제권을 획득하여 더 자율적이게 될 여지가 있다. 오히려 탈성장의 구도에서 사회적 메타볼리즘은 더욱 활발하고 민주적이고 평등하게 움직일 가능성이 높다.

자원-부-에너지가 ‘제한’되는 삶의 형태는 흔히들 ‘가난’이라고 일컬어지는 상황을 의미한다. 특히 ‘자기 제한’의 경우를 우리는 ‘자발적 가난’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그런데 이러한 자기 제한의 상황으로 자신을 배치한다는 것은 사실상 엄청난 감속의 순간이기도 하다. 보다 적게 쓰고, 에너지를 아끼고, 대중교통이나 자전거를 이용하고, 지역농산물을 채식 중심의 식단으로 먹는 등의 행위양식에 대해서 다들 익숙하다. 그러나 그것은 ‘보다 적게’의 미학적이고 윤리적인 지평에만 머무는 것뿐만 아니라, 생활양식(Lifestyle)을 완전히 ‘보다 다르게’ 설계하는 것일 수 있다. 다시 말해 생활양식 전반을 전환한다는 것이고, 생각, 말, 행위양식을 다르게 바꾼다는 얘기이다. 물론 적게 사용하는 것의 이점은 물질, 자원, 부, 에너지에 종속되어 거기에 끌려 다니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손으로 이를 통제할 수 있는 소규모 메타볼리즘으로 이끌 수 있다는 점에 있다.

그런데 기존의 사회적 메타볼리즘은 화석연료의 채굴과 추출을 통해서 지역사회와 환경을 무자비하게 파괴하고 여기서 추출된 에너지를 통해서 작동하는 방식이었다. 이는 성장주의, 개발주의, 발전주의 사상에 입각한 사회의 작동양상이었다. 그러나 자기 제한의 상황에서의 사회적 메타볼리즘은 외부로부터의 에너지와 자원에 의존하기보다는 바로 자기 자신의 신체 내 에너지에 입각한 방식일 것이다. 다시 말해 탈성장 사회는 일을 더 적게 하는 사회는 아니라는 얘기이다. 현행의 사회적 메타볼리즘의 작동을 위해서 우리는 더 많이 일해야 할 것이다. 그것은 노동 중심의 사회는 끝장났고, 오히려 돌봄 경제와 정동경제 중심의 사회로의 재편 중에 있다는 점을 알려준다. 정동경제(affective economy)는 살림(oikos)와 경제(economy)의 분열 이후에 찾아온 색다른 통섭의 국면이다. 그것은 실물적이고 양적인 경제의 축소와 정동노동, 돌봄 서비스 등의 살림이 주도권을 찾게 되는 새로운 국면이다.

여기서 자기 제한이 소규모 메타볼리즘를 통제할 수 있는 자율성의 획득하는 것에 주목해야 할 시점이다. 자원-부-에너지에 대해서 보다 단순하고, 보다 적게, 보다 자신이 작동과정 전반을 통제할 수 있는 수준에서 신진대사와 순환을 이룬다는 의미이다. 이것은 무엇보다도 자원-부-에너지에 대한 현존 질서가 갖고 있는 통제권으로부터 주도권을 되찾는 것일 수 있다. 이를테면 라이프라인(Life-line)에 대한 부분을 생각해 보자. 도시에서 사는 사람들에게 수도, 전기, 가스, 폐기물처리 등의 영역은 문명이 제공하는 혜택으로 자동적으로 미리 주어진 것으로 생각하기 쉽다. 우리는 무심결에 이에 대한 혜택을 누리고 있으며, 이러한 거대한 사회적 메타볼리즘에 철저히 종속되어 있는 셈이다.

화석연료에 기반한 현존 문명의 라이프라인은 효율적이고 세련되고 화려하다. 그러나 그 에너지 양으로 볼 때 양적으로 작아 보이는 것이라 할지라도 그 소비, 유통, 생산 과정에서 필요로 하는 전체 에너지의 양 즉 에머지(emergy)는 엄청나다고 할 수 있다. 이를테면 가솔린 1L를 만들기 위해서 축적되고 응축된 태양에너지의 양, 정제과정과 운송과정, 채굴과정에 드는 에너지의 양, 즉 총 에너지를 생각해 보면 300배에 달하는 에머지가 소요된다는 얘기도 있다. 다시 말해 현재의 화석문명은 사용하는 에너지양보다 소요되는 에너지양이 많은 지극히 비효율적인 시스템인데도 불구하고 사회의 제반 인프라를 장악한 화석카르텔 덕분에 유지되고 있을 뿐이다.

또한 우리의 신체에는 생존 유지에 필요한 몫 이외의 에너지 즉, 재생산에 필요치 않은 과잉 에너지가 현존한다. 이를테면 우리는 많은 양의 식사를 하지만, 우리의 몸을 재생산하는 데 필요한 양을 넘어서는 경우가 있다. 그러한 잉여분의 에너지 사용을 위해 운동을 하기도 하고, 산책을 하기도 한다. 이에 따라 그 과잉 에너지, 즉 데팡스(dépense)를 어떻게 사용해야 할지가 관건이다. 사실 성장주의 사회는 신체와 사회 속의 과잉에너지를 어떻게 처분할지를 몰라서, 흥청망청 성장주의, 소비주의, 물신주의, 쾌락주의로 내던져 놓은 사회이다. 프랑스 철학자 조르쥬 바타유(Georges Bataille)는 『저주의 몫』(2000. 문학동네)이라는 책에서 과잉에너지 현상을 처음으로 제기했다. 이 책에서 바타유가 제시한 ‘과시소비’는 사실은 마르셀 모스(Marcel Mauss) 의 『증여론』(2011, 한길사)에서 나오는 포틀래치(potlatch)로부터 기원을 갖는다. 여기서 포틀래치는 관혼상제, 의례, 축제 등에서 상상치도 못할 수준의 선물을 증여하는 행사를 의미한다. 그러나 공동체에서는 신체 내 과잉에너지에 대한 미시정치의 방법으로 승려와 절간, 교회 등에서 주기적으로 제물을 바침으로써, 이러한 과잉에너지에 대한 승화(sublimate)를 추구해 왔다. 특히 자원이 규모가 작은 곳이라 하더라도 신체 내 과잉에너지의 소모를 위해서 밤샘 기도, 새벽 기도, 절하기 등을 통해서 그것의 완벽한 소모와 다시 태어나는 과정을 추구해 왔다.

더불어 미국의 신학자, 이반 일리치(Ivan Illich)는 제 3세계에 서구문명이 개발의 명분으로 도입되면서 토착적 삶을 파괴하는 것을 공생공락(conviviality)이라는 개념의 프리즘을 통해 들여다봤다. 여기서 공생공락은 우리가 사용하는 도구가 그저 연장(tools)나 수단이 아니라, 하나의 관계와 맥락을 형성하는 것이라는 점을 지목한다. 즉 우리는 자기 제한, 즉 자발적 가난을 위해 어떤 도구를 써야 하는지에 대해서도 고려해야 하는 것이다. 현대사회에서 도구화된 제도, 시스템, 기계적인 장치 등은 대부분 내적 논리에 따라 그 작동방식이 이미 결정되어 있어서 자율성을 획득하기 어렵다. 우리가 냉장고를 쓰게 되면 냉장고가 갖고 있는 내적 논리에 따라 움직이게 되며, 우리가 세탁기를 쓰면 세탁기가 갖고 있는 내적 논리에 따라 움직이게 된다. 개인의 자유, 창의성, 자율성을 고무하는 도구와 개인의 자유를 억압하고 전반적인 사회시스템 내로 종속시키는 도구는 철저히 구분되어야 할 것이다.

공생공락은 결국 현행 제도 내부에서 행복을 찾고 있는 사람들에게 그 제도가 강제하고 있는 바에 대해서도 함께 고민해보자는 제안일 수 있다. 가난은 행복일 수 없다고 보는 성장주의의 복잡한 도구와 제도 속에서 선택의 기회와 자유가 없다고 느끼는 사람도 더러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자발적 가난을 통해서 성장주의의 변화의 속도에 대한 자기 제한을 부여할 수 있다. 빠르게 움직이고 성장하고 미친 듯이 쓰고 마시고 노는 문화 속에서 살아가다보면 모든 것이 GDP의 척도 내에서의 하나의 건전지나 하나의 회로가 될 뿐이다. 그러나 전환사회는 성장주의의 가속이 아닌 활력과 정동(affect)의 가속으로 향함으로써 색다른 계기를 발견할 수 있다. 더불어 가난은 공생공락의 사회로의 약속이며, 자원의 풍요가 아닌 관계의 풍요로 이끌 수 있는 하나의 경로라고 할 수 있겠다. 『탈성장 개념어 사전』에서는 다가올 탈성장 사회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전망한다. 이는 탈성장이 하나의 운동의 의미를 가짐을 적시하고 있다.

“탈성장은 물질적인 삶의 질의 붕괴가 아니라 더 적게 일하고, 적게 낭비하고, 우리가 원하는 것을 가지고 삶을 최대한 즐길 수 있는, 스스로 개발한 인간 활동의 재조직을 의미한다. 삶을 이런 방향으로 재조직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들은 날마다 아침에 일어나 세계 자본주의 사회를 만드는 사람, 즉 우리 자신이다. 우리 모두가 함께 해야만 가능하다. 우리가 무엇을 어떻게 하는가에 대한 통제권을 찾는 것은 끝없는 성장의 쳇바퀴에서 내려가는 첫걸음이자 탈성장 사회를 향한 첫걸음이다.” (331p)

  • 주제 : 『탈성장개념어사전』(2018, 그물코)
  • 일시 : 2020년 9월 10일 목(木)요일 저녁 7시 온라인 줌(Zoom) 회의실
  • 발제 : 권희중 (생태적지혜연구소 편집위원, 작가), 공규동(생태적지혜연구소 편집위원, 지향초등학교 교사)
  • 논평 : 오민우(한밭레츠 대표), 이정(광명등대생협 활동가)
  • 사회 : 이승준(생태적지혜연구소학술위원, 연구공간 L 활동가)
  • 대상 : 탈성장에 관심을 갖는 모든 사람들
  • 주관/장소 : 생태적지혜연구소협동조합

생태적지혜

모두의 혁명을 위한 모두의 지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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