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성댁 이야기] ㉕ “나 서울에 요한이 입학식 갔다 올라요.”

집에서 가까운 국립대학 사범대학에 합격해 다니던 요한은 하고 싶은 공부가 있다며 재수를 결정하고 학원에 다니지 않고 공부해 서울에 있는 대학에 합격한다. 보성댁은 8남매 중 유달리 사랑하던 요한의 입학식에 참여하고 싶어 요한과 함께 밤기차를 타고 서울로 향한다.

“엄마 저, 학교 그만 다닐래요.”

“이? 먼 소리냐? 그만 다니믄 머 어쩔라고.”

“지금 하는 공부는 제가 하고 싶은 공부가 아니에요. 재수해서 대학 시험 다시 보려고요.”

“아이, 니가 우리집 헹펜을 봐서 그런 소리를 흘 때냐. 지금 느그 누나에, 니 대학 보내는 것만으로도 허리가 휠 판인디.”

“그러긴 흔디요, 지금 공부가 도무지 흐기 싫어서요.”

청천벽력 같은 말이었다. 제 누나가 다니는 대학, 수학교육과에 무난히 합격하여 잘 다니고 있어서 저것도 졸업하고 어느 학교로든 발령을 받으면 제 밥벌이는 하겠다고 생각했던 일곱째인 요한이 다니던 학교를 그만 두고 다른 공부를 하고 싶다고 하니 보성댁 입장에서는 깝깝한 소리일 수밖에 없었다.

소위 지역의 명문고라는 S고를 졸업하고 제 누나가 다니고 있는 국립대학의 수학교육과에 별일 없이 합격해서 잘 다니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정작 당사자는 그러지 못 했던 모양이었다. 아니 잘 다니고 있었다. 처음 대학에 입학했을 때 요한이는 자기도 모르게 유명세를 타고 있었다. 180이 넘는 키에 외모도 준수한 편이고 거기에 코 한 가운데에 파란색 점이 자리잡고 있는 게 남들 눈에 많이 띌 수밖에 없었다. 1학기에 중간고사를 치르고 난 후에 교양영어 시간에 들어온 교수가 물었다.

“여기 수학교육과에 최요한이 누구인가?”

갑자기 교수가 자기를 물으니 어리둥절한 채로 요한이 대답했다.

“네? 접니다만.”

“아, 자네가 최요한인가? 자네는 수학교육과인데 영어교육과 학생들보다 영어를 잘 하는구만. 사범대 학과 전체에서 자네 영어 점수가 제일 좋아. 영어교육과에 들어오는 게 더 나았을 뻔 했어.”

그러곤 별 다른 말을 보태는 것 없이 수업을 시작했다. 이미 외모와 이름부터 남달라 다른 사람의 흥미를 끌기 충분한데 사범대생 전체에서 영어 성적이 가장 좋은 학생으로 소문이 나다보니 동기들 사이에선 은근히 유명인사가 되어 있었다. 그러다보니 공부하다 모르는 것을 물어오는 학생들이 종종 있었다. 그것이 딱히 영어에 한정된 것은 아니었다. 어느 날 도서관에서 공부를 하고 있는 요한에게 어떤 여학생이 다가왔다.

“저, 너 최요한 맞지? 난 가정교육과 김보미라고 하는데 공부하다가 잘 이해되지 않는 게 있어서……, 좀 물어봐도 될까?”

“어? 어어 그래 뭔데?”

“이거, 이 세포에 대한 설명이 좀 이해가 안 되어서”

“아, 이거? 이건 말이야.”

아 이리 쉬운 걸 모른단 말이야? 생각하며 설명을 해나갔다. 차근차근 설명을 해가고 고개를 끄덕이며 이해가 되는 듯 펴지는 얼굴을 보며 뭐라고 딱히 말하기 어렵지만 설레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아, 그런 거구나. 고마워. 근데 넌 정말 알아듣기 쉽게 잘 설명한다. 고마워.”

“에이 뭘, 이해가 되었다니 다행이네.”

그렇게 여학생에게 설명을 하고 난 요한은 문득, 이 학교에 들어와 다니며 자신이 느끼던 답답함과 조금 전 설레는 기분의 정체를 알 것 같은 기분이었다. 맞지 않는 옷을 입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이었던 이유도 알 것 같았다. 수학교육과는 자신의 성적과 집안의 경제 사정을 고려해 선택한 전공이었지 자신이 하고 싶은 공부는 다른 것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가정교육과의 학생에게 세포에 대해 설명을 할 때 뭔가 신이 났고 즐거웠던 이유를 알게 되었다.

수학교육과는 자신의 성적과 집안의 경제 사정을 고려해 선택한 전공이었지 자신이 하고 싶은 공부는 다른 것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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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요한은 생물학에 대한 공부를 더 깊이 해보고 싶었다. 그렇게 공부해서 어딘가의 연구직으로 일하는 게 자신의 적성에 맞을 것 같았다. 교수가 되어 대학에서 강의를 하는 게 자신에게 어울릴 것 같았다. 한번 그런 생각에 사로잡히니 더 이상 이 학교에 다닐 수가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부모님이나 경제사정을 생각하면 안 되는 생각 같았지만 자신의 꿈을 실현시키고 싶었다. 부모님을 생각해서 그냥 다녀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그럴수록 생물학에 대한 꿈이 더욱 간절해지는 것이었다. 그러다보니 지금 하는 공부에 대한 집중도 되지 않았다. 긴 시간을 고민하다 1학기를 마치고 난 요한은 반수를 결심하고 보성댁과 상덕씨에게 자신의 결심을 말하게 되었다. 자식 이기는 부모가 없다고 결국 요한의 뜻을 받아들이게 되었다. 결코 넉넉하지 않은 집안의 형편을 아는 요한은 재수 학원에 보내 달라는 말은 못 하고 혼자 시립도서관에 다니며 공부를 하기 시작했다.

어려운 형편 속에서 부모님을 설득해 자신의 뜻대로 선택을 한 만큼 이를 악물고 공부를 했고 세 군데에 원서를 넣어 서울에 있는 K대 미생물학과에 합격을 했다. 요한이 합격 소식을 전하자 보성댁은 가슴에 큰 바윗덩이가 하나 턱 얹힌 기분이었다. 가고 싶은 대학에 합격했다고 싱글벙글하며 소식을 전하는 요한을 보며 집 가까이에 있는 국립대학 보내는 것도 쉽지 않았는데 서울까지, 그것도 사립대학을 어떻게 보내나 앞날이 캄캄하기만 했다. 미자가 이번에 졸업하니 두 사람 등록금 챙기던 거 한 사람 것만 챙기면 된다지만 둘 다 사범대여서 등록금이 상대적으로 저렴했는데 요한이가 가려고 하는 대학은 사립대여서 등록금이 그 이상으로 많았다.

상덕씨와 마주 앉아 어떻게 해야 하는 건지 의논에 의논을 거듭했다. 가난한 부모가 되어 어려서부터 풍족하게 지내게 하지 못 한 것이 미안하기도 해서 어떻게 해서라도 하고 싶은 공부를 하게 해주고 싶었다. 많이 사랑했던 요한이어서 원하는 것을 하게 해주고 싶었다. 자신도 서울에서 대학 다니는 아들 하나 두고 싶은 욕심도 생겼다. 만약의 일에 대비해 좀들이며 나물 장사 등으로 한 푼 두 푼 모아둔 쌈지돈도 털고 어찌어찌 돈을 모아 봤지만 돈이 한참 모자랐다. 그러던 중 큰며느리에게서 전화가 걸려 왔다.

“어머니, 저예요.”

“이, 잘 있었냐? 아그들도 잘 크제?”

큰아들 부부는 연년생으로 딸을 낳아 기르고 있었다. 아들이 아니어서 섭섭한 맘이 없지 않았지만 손녀들은 손녀들대로 사랑스럽고 예뻤다.

“어머니, 요한이 도련님 서울에 있는 대학에 합격했다믄서요.”

“이, 그래 합격했단다. 기냥 다니던 대학 얌전히 다녀서 난중에 선생이나 흐믄 쓰겄드만은 그래븠단다.”

“등록금은 준비되셨어요?”

“아이고…… 안 그래도 나가 그것 땜에 날마다 잠이 안 온다. 어찌어찌 집안에 돈을 딱딱 긁어 모았다만, 한참 모지래서 어째야 쓸랑가 모르겄다. 에휴.”

“어머님, 제가 돈 쪼끔 모아둔 것이 있는디 그거 보내드릴랑게 우선 그거 보태서 해결하세요.”

“어이? 아이 니가 그 얼마 되도 않은 군인 월급으로, 아그들까지 키움스로 돈을 모았으믄, 그 돈 모을라고 안 먹고, 안 입고, 안 쓰고 했을 것인디, 그걸 그러고 홀랑 줘부러도 되겄냐?”

염치가 없어 말은 그렇게 하고 있었지만 보성댁은 천사의 음성을 들은 기분이었다. 우리 집에 어쩐다고 저런 복덩이가 들어왔을끄나

“지들은 또 모으믄 되지요. 군인 월급 얼마 안 된다고 해도 조금씩 올르고 군인 관사에서 산께 월세가 안 나가고 해서 그래도 흘 만해요.”

“나가 염치가 없다. 느그들 사는 디, 큰아들이라고 보태준 것도 없는디, 이러고 느그 돈만 받아 묵어서 어쩌끄나.”

“아이 어머님 그런 말씀 마셔요. 형제 간에 서로 돕고 살아야지요.”

“고맙다 고마워. 그저 염치도 없고 흘 말도 없다. 고맙다 이.”

전화를 끊는데 목이 메어 왔다. 말할 수 없이 미안하고 고마웠다. 나가 저거 절대 시집살이 안 시키고 잘해 줘야 쓰겄다. 뭘 얼마나 잘해 줄 수 있을까마는 내가 힘닿는 한 잘해줘야 쓰겄다. 집이 오믄 설거지라도 딸네들 시키고 일이라도 덜 시키야제. 보성댁으로서는 그런 생각 밖에 답이 없었다. 그래도 조금 부족해서 사우디로 돈을 벌러간 용식의 처가 부족한 부분을 보태 주어 겨우 등록을 마쳤다. 집이 멀어서인지 무사히 기숙사에 들어갈 수 있게 되어 주거에 대한 부담은 줄어 들었다. 기숙사비를 챙기는 것도 일이었지만.

그렇게 등록금을 보내주고 나니 기운이 쭉 빠졌다. 어찌어찌 입학금이야 냈다마는 앞으로는 어떻게 보내질랑가 모르겄다. 이번에 대학 졸업하는 즈그 누나가 선생으로 발령받으믄 도와주겠다고는 했다만 발령이 제때에 나 줄랑가 모르겄다.

요한이가 입학을 위해 서울로 떠나는 날이 다가오자 보성댁은 요한의 입학식에 가보고 싶었다. 주위에 비슷하게 자식 둔 사람들이 저마다 아이들 대학을 광주로 보내니, 서울로 보내니 하는 이야기를 들을 때 그들이 부러웠다. 그들의 아이들보다 공부를 더 잘 하던 요한이 집안 형편 때문에 집에서 다닐 수 있는 거리에 있는 순천대학에 들어갈 때 미안했다. 사실 그래서 요한이 반수하겠다고 했을 때 적극 반대를 하지 못 했다. 이제 지 누나가 졸업하면 이제 돈 들어갈 일은 밑에 두 아이들 밖에 없다 싶으니 어찌 되겠지 하는 마음도 있었다. 사실 보성댁은 인정하려 들지 않았지만 보성댁은 요한에 대한 사랑이 컸다. 어려서부터 순하고 착하고 인물 훤하고 키도 큰 데다 공부도 잘 해서 주위 사람들의 부러움을 샀고 그래서 요한은 보성댁의 자랑이었다. 요한이 국민학교 6학년에 올라갈 때의 일이었다. 보성댁은 시장에 나갔다가 동상개에 사는 애경이 엄마를 만났다. 애경이 엄마는 보성댁을 보자마자 자기 딸에 대한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아이고 요한이 엄마, 우리 애경이가 요한이랑 한 반이 안 됐다고 어찌나 서럽게 울는지 말도 못 흐요. 잉”

“에? 요한이랑 한 반 안 됐다고 울어요? 뭐 그런……”

“아니이, 딴 머시마들은 반장이 되믄 즈그들을 때레싼디 요한이는 안 때린다고, 요한이가 반장되믄 좋은디 한 반이 아니다고 울드란 말이요. 흐흐”

아들하고 한 반이 안 되었다고 운다는 아이의 이야기를 들으며 조금은 당혹스럽기도 하고 또 한편으론 우리 아들이 이렇게 친구들 사이에 덕이 있구나 싶어 기분이 좋기도 했어서 보성댁은 이 이야기를 두고두고 이 사람 저 사람에게 들려주곤 했다. 조금 과장을 하자면 보성댁의 자식들은 일 년에 한 번꼴로 그 이야기를 들어 왔다. 그런 요한이 서울에 있는 대학에 입학하게 되니 요한이 다닐 대학도 궁금했고 우리 아들도 서울로 대학간다 자랑하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 그런데 서울로 가자니 잘 곳이 문제였다.

“예, 요한이 아부지, 나 요한이 입학식 갔다 올라요.”

“이? 입학식에?”

“예, 밤차 타고 같이 올라가서 입학식만 보고 올라요.”

상덕씨는 왔다갔다 차비도 걱정이 되었지만 밤차 타고 올라가면 새벽에 서울 도착할 텐데 입학식 시간까지 어쩌려고 그러나 하는 것도 걱정이 되었다. 요한이가 그 해결책을 들고 왔다.

“엄마, 서울 가믄 민구 이모집에서 신세 좀 지기로 했어요.”

“이? 민구 이모집에? 그래도 된다냐?”

“예, 서울에 새복에 떨어지믄 엄청 추울 것인디, 민구가 즈그 이모한테 물어 봤는디 그래도 된다 그랬다네요.”

요한에게는 국민학교부터 고등학교까지 같이 다닌 친구가 셋 있었는데 서로 우정이 돈독했다. 요한, 민호, 민구, 경식 이렇게 넷은 초등학교 때부터 친구가 되었는데 어차피 시골 동네 중학교는 하나뿐이라 같이 다녔고 넷 다 공부를 잘해서 지역에서 공부 잘하는 애들이 다닌다는 고등학교에 같이 들어갔다. 대학에 가면서 요한만 순천에 있는 대학에 들어가고 셋은 모두 서울에 있는 각기 다른 대학교로 진학했다. 그 중에 민구는 서울에 이모가 살아서 이모집에서 대학을 다녔고, 요한이 대학 면접을 보러 갔을 때도 민구의 이모집에서 신세를 졌었다. 그런데 또 이번에 신세를 지게 된 것이다. 보성댁은 염치가 없다 싶었지만 그야말로 ‘없는 살림에’ 아들 입학식을 위해 서울까지 가는 거라 더 돈을 들여 쉴 곳을 찾는 것은 무리가 되지 싶어서 눈 딱 감고 신세를 지기로 했다.

저녁이 되자 집에서 저녁을 먹은 후 딸들에게 설거지를 맡기고 짐을 챙겨서 일어섰다. 순천역에서 11시 45분에 출발하는 기차를 타기 위해서 보성댁은 요한과 함께 순천에 사는 딸네 집으로 향했다. 보성댁이 사는 동네에서는 그렇게 늦은 시간에 순천에 가는 버스도 기차도 없었다. 요즘 같아서야 한 가구에 차 한 대는 기본이지만 그 시절엔 부자가 아니고서는 자가용을 갖는 건 꿈도 못 꾸는 시절이기도 했다. 그래서 저녁을 일찍 챙겨먹은 보성댁은 요한의 짐을 같이 챙겨들고 순천으로 가는 버스에 몸을 실었다. 진작 혼인을 하고 버스터미널에서 가까운 곳에 사는 큰딸의 집으로 들어가자 사위와 큰딸이 반갑게 맞아 주었다.

“아이고 어무니 오셌어요. 저녁은 잡수셨어요?”소방서에 다니는 사위가 인사를 했다.

“이, 묵고 나섰네. 걱정 말소.”

“이 쪽으로, 여기 따뜻한 자리로 앉으세요. 여가 따뜻해요.”

“이 고맙네. 아이고 따땃하다.”

그렇게 둘러 앉아 사위는 요한에게 이런저런 말을 건넸다.

“나가 옛날에 서울에 쪼깜 살아봤는디, 서울 가믄 정신 바짝 채리고 살아야 쓴다. 서울에서 눈 감으믄 코 베어간다는 말이 괜히 있는 것이 아녀. 알겄지야?”

“예, 자형 잘 알겄어요.”

“공부도 열심히 해야쓰고.”

“아, 그럼요. 당연하지요.”

그렇게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데 밖에서 부르는 소리가 났다.

“아가씨, 엄니 오셌소?”

“이? 누가 왔다냐. 요왕아 좀 내다 봐라 이.”

“어? 용식이 형수 왔어요.”

“이? 아이 어쩐 일로 왔냐? 애기는 어쩌고? 춥다 얼른 들어오니라.”

“엄니한테 맡기고 왔어요. 추운디 뗄꼬 다니기가 좀 그래서요.”

“이이 그랬냐. 그래 추운 디 델꼬 다니다가 감기나 걸리고 그러믄 안 좋제.”

“아이, 욜로 욜로 좀 땡게 앉아라. 느그 형수 앉게.”

밀고 당기고 해서 둘러 앉았다. 그렇게 둘러 앉으니 넓지 않은 방이 꽉 찼다. 외손주 남매는 손님이 와서 집안이 북적대니 좋은지 연방 웃으며 어른들을 쳐다보고 앉아 있었다.

며느리가 손에 들고 온 봉지를 내밀었다.

“어무니 가심서 기차에서 드시라고 달걀 좀 삶아 왔어요.”

“아이고 멋 흐러, 이, 암튼 고맙다.”

이어서 며느리가 요한이에게 봉투를 내밀었다.

“글고 이거 용돈 흐씨요. 많이 못 담았응께 섭섭해 흐지 말고요.”

“아니, 형수님 이렇게 안 하셔도 되는디.”

“아이고 받아요. 얼마 되도 않은디. 그렇게 멀리 가믄 비상금이 좀 있어야지요. 보나마나 엄니는 딱 쓸 돈만 챙게 줬을 것인디.”

“아, 형수님 고맙습니다.”

며느리의 말을 들으며 보성댁은 잠시 민망한 기분이었고 아이고 그래도 나 형편에 서울에 있는 대학 보내는 것만 해도 어디흔디 쟈는 저런 소리를 하나 싶었다.

사위도 주섬주섬 봉투를 하나 요한에게 내밀었다.

“어, 나도 좀 챙겨 놨는디, 이등이 되부렀네. 아나 요한아, 이것도 받아 넣어라.”

“아이고, 고등학교 댕기는 내내 신세를 진 것도 못 갚았는디 또 이런 걸 챙겼는가. 미안해서 어쩌까 이.”

“에이 어머님도, 누나랑 매형이 이 정도는 해야지요.”

“아이고 그래, 모다들 고맙다 고마워. 요한아, 난중에 니가 다 갚아야 쓴다 이, 알었냐?”

“예 열심히 해서 다 갚으께요. 고맙습니다. 형수님, 자형.”

며느리는 조금 더 앉아 있다가 집으로 돌아가고 시간이 되자 보성댁도 요한과 나와 사위가 잡아준 택시를 타고 기차역으로 향했다.

이제 막 3월이 된 밤공기는 차가웠고 기차역의 창문엔 대합실에 앉은 사람들과 난로의 열기로 인해 생긴 김 때문에 물방울이 가득 맺혀 있었다. 아직 기차 시간이 남아 있어 보성댁과 요한도 난로 옆으로 가까이 다가가서 섰다. 두 손을 비비며 난로 가까이 내밀자 따스한 온기가 손 끝에 전해져 왔다. 그렇게 기다리고 있노라니 상념이 많아졌다. 하, 앞으로는 어찌케 살아야 쓸까, 인자 대학을 졸업한 미자는 이번에 발령이 안 났는디 언제 날지 알 수가 없그만. 2학기나 되야 날랑가. 그때까지 멀 흐고 있어야 하까. 야도 걱정이다. 서울서 일없이 잘 지낼랑가. 절로 한숨이 나왔다. 그때 용산행 11시 45분 기차 탈 승객은 입장하라는 안내 방송이 나와 대합실 문을 열고 나갔다. 차가운 밤바람이 얼굴로 확 끼쳐와서 지저리를 치며 철길을 건너 플랫폼으로 향했다. 멀리서 울리는 기적소리가 아련하게 들려오는데 이, 기차가 인자 보해공장 쯤이나 온갑다. 추운디 얼른 오믄 쓰겄네 생각했다. 곧 기차의 불빛이 멀리 보였다. 기차가 다가와 멈추자 함께 기차에 오른 요한은 두리번거리며 중간쯤 되는 곳에 자리를 잡았다. 밤늦은 시간이지만 생각했던 것보다 사람들이 많아 두 자리가 빈 곳을 찾는 데에 시간이 좀 걸렸다.

“엄니, 욜로 앉으씨요. 이, 짐은 나가 올려 놓을 겅게 이리 주시고요.”

아들이어서이기도 하거니와 요한은 키가 크고 등치가 있어서 더욱 듬직하고 의지가 되었다.

“그래, 이거 이거 올려 놓고, 이건 느그 형수가 챙게준 구님석이 들었응게 나가 갖고 있을란다. 이따 가다가 배고프면 먹자.”

이윽고 기차가 움직이기 시작하자 들뜬 얼굴로 창밖을 보고 있던 요한의 고개가 떨어졌다. 사진출처 : Pixabay

이윽고 기차가 움직이기 시작하자 들뜬 얼굴로 창밖을 보고 있던 요한의 고개가 떨어졌다. 늦은 시간이라 어차피 기차에서 잘 요량하고 탄 거였다. 그런 요한의 얼굴을 바라보다 보성댁도 요한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고 잠이 들었다. 그러다 불편한 잠자리라 세 시쯤 잠이 깨서 용식의 처가 챙겨준 달걀을 꺼내 보니 열 개나 되었다. 보성댁은 두 개 먹고 요한은 세 개 먹고 다섯 개는 아침에 먹지 하고 다시 싸서 넣어 두었다. 염치없이 남의 집에 신세지기로 했지만 아침은 알아서 챙겨야지 생각했다. 용산역에 도착하니 새벽 네 시가 넘은 시간이었다. 새벽이라고는 하지만 삼월이라 해는 뜰 기미도 보이지 않는 한밤중이나 다름없었다. 용산역 근처에 있는 민구 이모집을 이미 한번 가 본 적이 있는 요한이 길을 안내했다. 큰길에서 조금 들어간 골목으로 찾아 들어가니 민구가 기다리고 있는지 골목 쪽 방 창으로 불빛이 보였다. 요한은 조심스럽게 창을 두드리며 나직한 소리로 친구를 불렀다.

“민구야, 민구야.”

그러자 방안에서 부산스럽게 움직이는 소리가 나더니 민구가 창을 열고 밖을 내다 봤다.

“이, 왔냐. 엄니 오셨어요? 문 열어 드릴게요, 잠깐만요.”

창문을 닫고 들어가더니 방문 여는 소리, 신발 끄는 소리가 나더니 이내 대문이 열렸다.

“엄니 추우셨죠? 얼렁 들어오세요. 짐은 이리 주세요.”

“이이, 고맙다. 염치가 없다. 들어가자 들어가.”

역에서 가깝다고는 했지만 매서운 서울의 새벽 추위를 느끼며 한 십 분 걸어오니 많이 추웠던지라 방안으로 들어가니 따뜻한 공기에 열이 확 올랐다.

“아이, 나가 오기는 왔다마는 느그 이모한테 염치가 없다이. 다들 주무시냐?”

“예, 엄니 괜찮아요. 어차피 이 방은 저 혼자 쓰는 방이라 그렇게 염치없어 하지 않으셔도 돼요. 엄니 안 오시고 요한이 야 혼자 왔어도 이렇게 새벽에 찾아 왔을 건디요 뭐.”

“오냐오냐 고맙다.”

“엄니, 요기 요리 아랫목으로 좀 누우세요. 아직 해 뜰라믄 당당 멀었은께 좀 주무세요.”

“이이 알았다. 고맙다.”

목도리와 외투를 벗고 아랫목에서부터 보성댁, 요한이 눕고 민구는 불을 끄고 누웠다. 요한과 민구는 금방 잠이 들어 가볍게 코를 골고 몸이 노곤하게 풀리는 중에도 보성댁은 선뜻 잠이 들지 못 했다. 이 생각 저 생각으로 뒤척거리다 창이 희부연해질 때쯤 깜박 잠이 들었다.

민구야, 요한이 어머니 아침 드시라 해라 방밖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깜짝 놀라 눈을 떴다. 민구 책상에 있는 사발시계를 보니 일곱시가 넘어 있었다. 벌떡 일어나니 민구랑 요한은 일어나 둘이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가 보성댁에게 인사를 했다.

“엄니 인났소.”

“엄니, 잘 주무셌어요? 아침 먹게 세수하시게요. 마당으로 나오시믄 제가 따신 물 받아다 디리께요.”

“아니, 먼 아침, 우리 아침에 묵을라고 달걀 삶아온 거 있어서 그거 묵으믄 된다.”

“아이고 엄니, 이 먼 데까지 오세갖고 무슨 아침을 그러고 묵어요? 언능 씻고 건너가서 아침 드시고 나가요. 아무리 서울 인심이라지만 그렇게까지 야박하진 않아요.”

민구가 극구 말리니 보성댁은 얼른 씻고 민구의 안내를 받아 본채로 건너갔다. 밤에 먹고 남긴 삶은 달걀과 아무리 그래도 그냥 신세를 질 수 없어 챙겨온 나물 보따리를 내놨다.

“아이고 민구 이모님, 염치가 없네요. 여기 이거 찐 달걀 아그들이랑 한나씩 나놔묵읍시다. 글고 이건 내가 봄에 산에 댕김스로 끊어서 말레논 꼬사리인디 아무래도 기냥 못 와서 쪼끔 싸왔응게 두고 해잡수시오.”

“오메, 기냥 오세도 된디 멋흘라고 이러고 챙게 오셌어요. 괜찮은디, 암튼 잘 해 먹을게요. 감사해요.”

“그냥, 우리 식구들 먹는 밥상이에요. 찬없다 마시고 드세요.”

“아믄이라 아믄이라, 밥까지 얻어먹을 생각은 없었는디 이라고 따뜻한 국에 밥에 이것도 오감하요. 잘 묵으께요.”

정말 그랬다. 아침밥까지 챙겨줄 거라 생각지 않았는데 별 특별한 반찬은 없어도 따뜻한 밥에 국이 있는 것만으로도 너무나 고마운 밥상이었다. 민구 이모네 집에서 요한이 입학할 대학까지는 버스로 한 시간쯤 걸리는 곳이어서 여유있게 나가려고 밥을 먹자 곧바로 챙겨서 길을 나섰다. 민구가 다니는 대학은 다른 곳이었는데 자기 학교도 입학식 날이어서 강의가 없다고 같이 동행했다. 시내버스가 오자 먼저 버스에 오른 민구가 빈자리를 하나 찾아 보성댁을 불러 앉게 했다. 집에서 순천까지 버스로 20분 거리도 가깝지 않다고 여기며 살아온 보성댁에게 한 시간 거리는 너무나 먼 곳이었지만 이미 서울에서 학교에 다니고 있는 민구에게는 예사로운 일이었는지 요한이랑 버스 손잡이를 잡고 보성댁 옆에 서서 이러저런 이야기를 도란도란 하며 갔다.

서울에 있는 대학에 난생 처음 가보는 보성댁의 눈에 아들이 다닐 대학은 말할 수 없이 커보였다. 미자가 다니던 대학은 입학식 때와 졸업식 때에 갔었는데 4년 사이에 학교가 많이 커지고 변한 것을 보며 감탄을 했었는데 더 오랜 역사를 지닌, 아들이 다닐 대학은 더 크고 훌륭해 보였다. 우리 아들도 서울에 있는 대학에 다닌다 혼자 속으로 자랑스러웠다. 앞으로의 학비며 서울에서의 생활비 마련이라는 큰 산이 앞에 있었지만 이 순간만큼은 행복했다. 누군지 알 수 없는 이러저러한 사람들이 훌륭하게들 차려입고 근엄한 표정으로 저마다 일장 연설들을 하는 소리는 귀에 들어오지 않고 아들이 있는 쪽만 바라봤다. 늠름하게 서있는 아들을 보기만 해도 웃음이 절로 나왔다. 입학식을 마치고 짜장면으로 셋이 같이 점심을 먹고 요한과 민구가 같이 용산역까지 동행해 주며 집으로 내려가는 보성댁을 배웅했다.

사범대를 졸업하고 3월 1일자 발령을 받지 못했던 미자는 3월 25일에 갑자기 발령을 받아 고흥에 있는 중학교로 가서 출근하기 시작했고 4월부터는 월급의 반 정도에 해당하는 20만원을 매달 내놔서 그걸 받아 요한의 용돈을 보낼 수 있었다.

최은숙

35년의 교직생활을 명퇴로 마감하고 제 2의 삶을 살고 있습니다. 어머니의 이야기를 듣고 소설로 쓰고 있습니다. 올해 91세인 어머니가 살아 계실 때, 어머니의 이야기를 많이 듣고 글로 남기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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