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쉽게도 그와의 인연은 짧다. 영등포에 있는 생협의 이사로 합류하면서 그를 알게 되었다. 초면이었지만 오랫동안 생협 조합원들과 책모임을 하고 있었다는 사실에 눈길이 갔다. 수더분한 인상과 나름 정돈된 수염이 인상적이었다. 생협 총회 준비 회의에서 두어 번, 총회 시작 세션에서 강연하는 모습 한 번, 이사회에서 몇 차례밖에 본 적 없지만, 그는 자신의 연구와 삶을 사랑하는 사람 같았다. 회의나 이사회가 있는 날 다른 이사님들과 어울려 여러 담론을 나누던 모습이 짧지만, 선명하게 기억난다. 하지만 정동 이론, 가타리, 탈성장, 스피노자와 철학공방 별난에 대해서도 아는 것이 없으니, 회의날 스치듯 그의 말에 관심을 가질 뿐이었다.
‘신승철’이라는 이름에 꽂히게 된 계기는 생협에서가 아니라 학교 도서관에서였다. ‘자본주의와 인류학’ 수업을 들으면서 사회적 경제와 정동이론에 대해 공부하는 중에 읽은 여러 논문에서 그와 마주쳤다. 그동안 쓴 단행본과 논문이 어찌나 많은지. 그의 글을 읽을수록 넉살 좋아 보이는 미소 뒤에 숨은 엄밀한 연구자 신승철의 얼굴과 마주쳤고 꾸준히 그와 대화하고, 글을 매개로 친해지고 싶었다.
글을 읽으면 그 사람이 궁금해 친해지고 싶을 때가 있고, 그의 글쓰기 실력과 해박한 지식에만 매료될 때가 있다. 어떤 판단이나 선입견을 만드는 방식이라기보다 연구자의 글이 내게 ‘쓸모 있는’ 레퍼런스가 될 수 있을지를 고민하는 나만의 접근 방식이다. 그런데 신승철 선생님의 글은 번번이 그 둘을 분간하려는 내 시도를 보기 좋게 거부했다. 날카롭게 어떤 학자의 개념을 밀도 있게 설명하다가 비근한 일상의 사례를 끄집어낸다거나, 학문적 논리를 형성하다가 단번에 상상력을 요구하는 이미지를 툭 던지는 시도는 신선했다.
이를테면 이런 식의 문장들,
“어느 도서관에서 ‘소수자 되기’에 대해 강연할 때였습니다. 청중 한 사람이 이렇게 물었습니다. ‘앞날이 창창한 어린 학생들도 많은데, 이왕이면 성공 쪽으로 향해야지 왜 약자에 대한 사랑을 말하는 거죠?’ 저는 그분에게 소수자를 사랑한다는 것이 단지 일방적으로 약자를 돌본다는 의미에 한정되지 않는다고 말했습니다. 소수자는 약자라기보다는 사회를 풍부하게 해주는 특이점이기 때문입니다. 그날 집에 돌아와 곰곰이 그 질문을 복기하면서, 아직도 이 사회를 이끌어가는 것은 공리주의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신승철, 『사랑할수록 지혜로워진다』 (서울: 사우, 2019), 242-3.)
“끊임없이 자아로 고정되고, 아버지의 아들로 고정되고, 인간중심주의로 고정되어야 할 영역이 그것이다. 가족, 나, 사람을 반생산 쪽으로 보내는 것은 정체성, 인격, 인간성, 역할 모델, 기능적 직분 등에 대한 사보타지를 의미한다. 대신 공동체적 관계망 속에서 작동하는 사이주체성이나 네트워크 속에서의 ‘욕망하는 기계’의 연결접속에 대해서 주목할 필요가 있다. 특정 개인들이나 원자화되어 있는 개인, 정체성이 확실한 사람들, 가족 내에서 자리 잡는 인물 등에 대해서 철저히 반생산의 영역으로 만들어버릴 필요가 있다. 그렇게 된다면 ‘무차별적 사회’의 신화 대신 ‘간(間)공동체로서의 사회’의 현실이 등장할 것이다.”(신승철, 『모두의 혁명법』, (고양: 알렙, 2019), 69-70.)

사진출처 : saeedkarimi
몇 주 전 《생태적 지혜》 이윤경 편집장님에게 제안이 왔다. 웹진 연재 청탁을 받고 덜컥 겁부터 났다. 흥미롭게 읽었던 책 두 권에 대한 서평을 웹진에 올리실 때까지도 예상도 하지 못한 제안이었다. 어떤 글을 써야 할지, 연재 표제는 뭐라 해야 할지. 처음부터 진지해지는 내겐 시작부터 큰 부담이었다. 웹진의 성실한 독자도 아니었는데. 어떤 글이 올라오는지 참고하려고 홈페이지에 들어갔다가는 나도 모르게 주눅이 들었다. 다양한 현장에서 생태적 지혜를 모으는 이들이 대단하게만 보였다. 지금이라도 ‘못 하겠다’라고 연락드릴까. 머릿속에 그려지는 글짓기가 아닌 글쓰기의 고통, 마감 압박에 쫓기는 모습. 한참을 궁리하다가 처음부터 나를 괴롭힐 필요는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써보자. 완벽하게 시작하지 말고, 내가 살피고 있는 지점을 고스란히 기록하는 기회로 삼자. 설렘과 긴장이 공존하는 생각에서 빠져나오니 가장 먼저 신승철 선생님과의 짧은 인연이 떠올랐다. 어쩌면 이 기회가 못다 한 이야기를 마저 하자는 신승철 선생님의 ‘말-걸기’일 수도 있겠다. 로자 룩셈브르크에 대해 질문했더니 해맑게 로자가 얼마나 중요한 사람인지를 알려주겠다고 하셨던 그 약속을 지키려는 것일 수도 있다.
전례 없는 기후위기의 경고음과 함께 인간뿐 아니라 다양한 존재들이 새로운 인연을 맺기 시작했다. 불가피하게 재편된 관계일 수도 있지만, 새로운 관계망을 통해 우리는 서로를 이기려는 일상에서 서로를 돌보는 일상으로의 전환을 시도하고 있다. 이 연재는 전환의 흐름 속에서 신승철의 ‘흐름’을 따라 일상 철학자이자 삶의 혁명가로의 생각을 나누는 시도가 될 것이다.
‘일상 철학자’, ‘삶의 혁명가’ 뭔가 거창하게 들리지만, 사실 별 것은 없다. 그저 이 혼란스러운 세상에서 너무 나만 생각하면서 산다거나, 예민하게 굴지 않으려는 몸부림에 지나지 않는다. 다만, 그렇게 이어가다 보면 구성될 하나의 세계가 자못 기대되기는 한다. 어떤 글로 다음 원고를 채울까. 신승철 선생님에게 한번 물어봐야 할 것 같다.
P.S. 소울컴퍼니는 학창시절을 지탱해준 힙합 레이블이다. 어쩌다가 연재의 표제가 되었는지는 마지막 글을 쓸 때 소개하려고 한다. 그때까지 잘 부탁드린다. : )
당신의 힙합레이블에 초대해주어 고맙습니다!
소수자란 사회를 풍부케 하는 거라니, 궁금해지는 분이네요! 저도 찾아봐야겠습니다!
글을 읽을 수 있게 되어 영광입니다! 김작가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