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울컴퍼니] ⑤ 색다른 탈주

한국 사회는 점점 다양한 인종과 문화를 포용해야 할 시점에 다다랐다. 그러나 현재의 ‘다문화’와 ‘다양성’ 논의는 특정 중심성을 기준으로 타자를 규정하며 평등하지 못한 관용과 배려에 머물러 있다. 다양성은 단순히 타자를 용인하는 차원을 넘어, 내부와 외부의 얽힘을 통해 변화를 수용하고 재창조하는 과정에서 진정한 의미를 찾을 수 있다. 다문화 사회에서의 다양성은 색다름을 받아들이는 동시에 새로운 욕망과 관계를 창출하며 공동체를 재구성하는 문화로 자리 잡아야 하지 않을까. 이를 위해 우리는 기존의 관념에서 벗어나야 하며, 다양성의 진정한 가능성을 탐구하는 ‘탈주‘를 시작해야 한다.

한국 사회에서 외국인과 마주치는 일은 이제 일상적인 장면이 되었다. 코로나 팬데믹 이후 외국인이 늘었다는 것을 체감하게 된다. 유창한 한국말을 하는 외국인도 심심찮게 만난다. 대한민국이 이민·다문화 이주민 국가가 되었다는 이야기를 듣는다. 달리 말하면, 특정 인종, 문화, 국적을 ‘다문화’ 카테고리로 분류하는 일을 넘어서 이제 함께 공존할 수 있을지를 고민하지 않을 수 없는 때가 다가왔다.

‘다문화’는 이질적이고 생경한 현상으로 다가온다. 사진 출처: DJ Paine

사회 곳곳에서 ‘다문화’, ‘이주민’이라는 단어에서 풍기는 고정적인 ‘다름’과 ‘차이(별)’의 뉘앙스를 넘어서기 위한 노력이 진행되고 있다. 다양한 인종, 문화, 특성을 가진 이들과 함께 살아갈 수 있는 제도적, 사회적 환경을 구축하기 위한 토론과 정책이 진지하게 오간다. 하지만 여전히 ‘한민족’을 자랑스럽게 여기던 이들에게 ‘다문화’는 이질적이고 생경한 현상으로 다가온다.

‘인종’에 국한된 다문화를 차치하고서라도 한국 사회에서 ‘다양성’을 논의하는 시야는 좁다. 여성학자 정희진은 다양성이 “다양한 가치가 아니라 ‘하나’를 중심으로 배제된 나머지를 말한다”고 지적한다.1 다양성이 삶의 ‘다양한 상황’을 제대로 담아내지 못하는 모순이 있다는 점은, 보편성(uni/versal)의 대항으로 마련된 ‘다양성‘(poly/versal) 논의가 한계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드러낸다. 여러 원인 중에서 정희진은 다양성이 간과하는 핵심을 “각각의 다양성이 평등하지 않음”에 있다고 지적한다.

“유색 인종이나 동성애자에게 ‘다양성을 존중하자’, ‘개인의 선택이다’라는 태도는 문제의 본질을 왜곡한다. 관용과 배려는 스스로 우월한 위치를 설정하고 방관하는 태도를 말한다.”2

다양성이 단순히 관용과 배려 차원으로 이해될 때 배태되는 무관심과 시혜적인 태도는 평등하지 않은 ‘다름’ 사이의 문제점을 드러낸다. ‘보편성’이 ‘다양성’이라는 또 다른 기준이 되고, 그 기준에 맞춰 다양성은 새로운 자기중심성을 넘어서야 하는 과제를 안는다. 이주민 국가라는 말도, 다문화라는 말도 자기중심성을 포기하지 못한 채 이해될 때 결국 문제의 핵심을 파고들지 못하고, 문제를 방관하게 된다.

이를테면, 누가 ‘다양성’의 범주를 규정할 수 있을까? 다문화, 이주민의 차이와 이들의 문화적 다양성을 규정할 기준은 어디서 온 것일까? 다문화라는 말 자체가 한 집단의 이해와 이익에 의해 규정되고 보편성을 갖게 될 때, 다문화를 용인하고 그들을 환영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결국 새로운 대상화와 규범에 의한 배제가 발생한다. 특히 다문화 사회 안에서도 취약한 외국인 여성과 어린이가 차별적인 시선과 무방비로 노출된 폭력, 불평등의 문제는 ‘다양성’이 보편성을 가질 때의 심각한 문제점을 보여준다.

다양성과 다문화 자체가 의미 그대로 다양성으로 존재할 수 있을까? 펠릭스 가타리는 욕망을 보존하는 동시에 자율성을 유지하는 새로운 공동체적 관계망을 외부를 만들어냄과 탈주를 통해 사유한다. 탈주는 “색다른 프레임과 지평을 제시하면서 외부를 창출하는 것이다.”3

다양한 피부색, 식습관, 생활방식 등은 내부를 자극하는 외부가 될 수 있다. 이를 탈주라고 한다면 다양성은 내부에서 이질적인 것을 받아들이는 방식이 아니라, 끊임없이 내부로 수렴되는 다양성을 외부의 창출, 외부와의 연결로 이해할 필요가 있다.

질 들뢰즈와 펠릭스 가타리가 천개의 고원에서 주창했던 노마디즘에 대해 신승철은 이렇게 설명한다. “결국 들뢰즈와 가타리가 함께 주장했던 노마드는 ‘고정관념을 갖지 않은 자유인이나 실천가’와 같은 사람, 즉 ‘제자리에서 여행하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는 점에서 탈주하는 사람들의 이미지를 제공해 준다.”4

정희진의 지적대로, 다양성은 평등하지 않다. 이는 다양성조차도 외부와의 얽힘이 아니라 내부에서 해결하고 이해하려는 인식의 한계, 외부적 사유의 부재가 원인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점에서 탈주는 이질적이고 색다른 ‘다문화’를 포획하는 것이 아니라, 내 인식론으로부터의 탈주를 통해 새로운 욕망, 사랑과의 마주침으로 이행되고 변이될 수 있다.

신승철의 또 다른 비유를 빌리자면, 다양성은 입구와 출구가 분열되고 일치하지 않는 이미지로 이어져야 한다. 입구와 출구의 불일치는 우리가 가지고 있는 선입견과 내부의 강력한 인과적 세계관을 넘어서 “우리의 삶의 일련의 과정들이 갖고 있는 색다르고 특이한 영역에서의 출구 전략의 의미를 갖는다.”5

인식의 일치나 보편성을 갖는 다양성이 아니라, 생산된 특이함(색다름)을 통해 내부 원리가 변용되는 과정은 다양성 사회가 진정 어떤 사회인지를 묻게 한다. 입구와 출구가 다를 때 발생하는 새로운 관계 맺기의 가능성은 “내부에서의 관계 맺기나 연결 방식 자체를 재창조함으로써 특이점의 색다른 작용, 기능, 의미 등을 공동체에 전달하고 유통시킨다.”6

현재 우리 사회의 다문화 이해가 평등하지 않은 이유는 낯선 외부를 통해 내부에서의 변화와 재창조가 일어나지 않기 때문이다. 외부를 인식하면서도 내부가 변화하지 않을 만큼만 이를 받아들이려 하기 때문이다. 이는 정희진의 지적대로, 관용과 배려는 가능할지 몰라도 다양성을 어떻게 이해할지에 대한 본질을 왜곡한다. 즉, 내부가 외부와 만나 창출할 새로운 잠재력과 창조성이 고갈되면서 내부는 고정관념에 더욱 사로잡히고, 외부는 계속 공간을 잃어갈 뿐이다.

평등하지 않은 다양성을 기계적으로 ‘평등’하다고 왜곡하고, 낯설고 이질적인 것을 제대로 받아들이고 있다고 착각한다. 사진: Markus Winkler

오늘날 다양성의 의미는 색다름이 아니라 색구별을 통한 모델화의 유혹에 빠져 있다. 평등하지 않은 다양성을 기계적으로 ‘평등’하다고 왜곡하고, 낯설고 이질적인 것을 제대로 받아들이고 있다고 착각한다. 이런 시대에 탈주는 구별을 뛰어넘은 ‘다름’의 의미를 제안한다. 여기서 의미는 이유와 정의를 따져 묻는 것이 아니다. 다만, “양상과 작동이 무엇인가?”라는 질문과 함께 다양한 의미와 의미 사이의 연결 속에서 매끄럽게 탈주하며 그 실존의 양상을 그리는 것(신승철)일 뿐이다. 탈주란 외부의 얽힘을 부정하거나 차별하려는 내부의 관성으로부터의 벗어남과 동시에 기존 배치를 바꾸고 새로운 가능성을 희망할 수 있는 능동적인 행위라고 할 수 있다.

우리 사회는 이제 가파른 속도로 다양한 인종과 문화와 얽히게 될 것이다. 눈에 보이지 않던 낯섦과 마주하게 될 때 우리는 어떻게 이들을 이해하고, 대화할 수 있을까? 내부의 강력한 관성으로 구별 짓기와 자리 정하기가 능사일까? 다채로운 색들이 저마다의 고유함을 유지하면서도 서로의 욕망과 사랑을 통해 변용을 경험할 수 있는 ‘-되기’의 다양성 문화가 자리 잡기 위해 우리는 우선 탈주를 시작해야 한다.


참고 문헌

1. [정희진의 융합]_25 ‘하나, 여럿, 그 너머’, 〈경향신문〉 2021년 6월 2일자.

2. 신승철, 『모두의 혁명법』, 서울: 알렙, 2019.


  1. 경향신문, “[정희진의 융합]_25 ‘하나, 여럿, 그 너머’”, 2021년 6월 2일.

  2. 위의 글.

  3. 신승철, 『모두의 혁명법』, 서울: 알렙, 2019, 324쪽.

  4. 위의 책, 325쪽.

  5. 위의 책, 331쪽.

  6. 위의 책, 335쪽.

김준영

세상에 여러 얽힘, 연결망에 대해 관심을 두고 있습니다.
학교에서 세계기독교와 상호문화를 공부하고 있고,달리기를 좋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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