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삶은 생존 이상이어야 한다.
내가 언제나 하는 말이다. 자본주의 사회는 인간의 생을 생존으로 일축시킨다. 생존의 필수 요소를 생산할 수단을 잃어버린 도시인은 주체적으로 살아갈 능력을 상실하고 말았다. 이제 우리는 먹고살기 위해 삶을 바쳐 노동한다. 임금 노동에 귀속된 인간은 살아있는 것조차도 누군가의 인정과 허락을 받아야만 가능해졌다. 매일같이 스스로를 증명하기 위해 노력해서 얻어낸 대가는 고작 생존이다. 내가 내 입에 풀칠 좀 하겠다는데, 그조차도 사회로부터 기회를 얻어야만 가능한 꼴이 됐다. 언제부터 생존이 남의 손에 달린 일이 되었는가? 돈이라는 매개가 우리의 삶을 더욱 풍요롭게 해 준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정반대다. 돈은 우리의 숨통을 감히 쥐고 흔든다. 이제 인간은 서로가 서로에게 생존을 빌미로 갑질한다. ‘남의 돈을 받아먹어야만 살 수 있는 사회’가 인간을 이토록 천박하게 만들었다. 문명인은 자연을 야만이라 부르지만, 진짜 야만은 콘크리트 정글에서 일어난다.
2. 도시의 야만

자본주의적 인간은 영혼을 죽이고, 신체를 죽이고, 자연을 죽이는 무의미한 노동에 일생을 희생하며 살아간다. 오늘날 우리가 하고 있는 노동의 대부분은 돈을 위한 일이자, 일을 위한 일이다. 그 일이 더욱 자본을 위하면 위할수록, 이상하게도 부가가치는 높아진다. 정작 사람을 위하고 생명을 위하는 기본적인 일은 기본 중의 기본이라는 이유로 당연하게 여겨진다. 인간은 당연한 것의 소중함을 잊었다. 의미 없는 숫자 놀음을 하는 주식 애널리스트가 주식을 생산하는 농민을 하대한다. 주식을 요리하는 아내에게 “놀고 있다”며 비난한다.
지난 12월 21일 남태령에서 있었던 경찰의 농민 탄압 또한 무엇이 우리를 살게 해주는지 잊었기 때문에 일어난 일이었다. 그 추운 새벽, 차가 끊겨 오도가도 못 한 시민들이 함께 날밤을 지새우며 연대하는 동안, 경찰은 시민이 죽어가는 것을 보고도 방조하며 제 배 채우기 바빴다. 굶어 죽지 않겠다는 결연한 의지의 도시락이 한가득 쌓여있었다. 정작 그 도시락을 먹을 수 있게 해 준 농민들은 제가 먹여 살린 사람에게 폭행당하는 비참함을 맛봤다.
이에 시민들은, 정확히 2030 여성들은 분노했다. 농민들이 당한 일에 연대하고 분노하는 사람들이 아직 존재한다는 점에서 나는 그나마 희망을 엿봤다.
농민이란 누구인가? 자신의 생체 에너지를 사회에 환원하는 사람들이다. 그들이 흘린 구슬땀이 도시 사람들을 먹여 살린다. 농민이야말로 스스로의 엔트로피를 가장 바람직하게 순환시키는 사람들이 아니던가. 그러나 이번 정부는, 밥을 먹으면서도 그 밥의 소중함을 모르고 그 밥이 어디에서 나오는지도 자각하지 못했다. 돈에 미친 인간들은 식량이 지갑에서 나오는 줄 알지만, 그건 착각이다. 식량은 땅과 땅을 일구는 사람에게서 나온다. 비트코인, 반도체, 스페이스 X는 쌀을 생산할 수 없다. 바다도, 농지도, 발전소도 없는 도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그곳의 인간들은 돈을 빼면 시체다.
도시가 의식주를 지방으로 외주 주고, 그들을 천대하며 배척하는 동안 지방은 그 호로자식 같은 인간들을 꾸역꾸역 먹여 살리고자 애썼다. 그렇게 도시는 농촌에, 크게 보면 제1세계는 제3세계에 기생하며 살아간다. 정작 뭣이 중한지도 모르고 인류는 “위업”을 추구한다는 불명예스러운 미명 하에 피라미드 건축, 모아이 석상 조각, 로켓 발사, 양자 컴퓨터 생산에만 몰두했다. 마지막 씨앗이 사라지면 이것들이 전부 소용없다는 걸 아는지 모르는지. 이러다가 다 죽는데도 여전히 붕 뜬 혁신만을 좇는다. 이스터 섬 사람들이 더 큰 모아이 석상을 만들다 굶어 죽었듯, 현대 문명은 더 “대단한” 업적을 추구하다 굶어 죽을 것이다.
3. 언제나 세상은 약자가 바꾼다

그리고 언제나 세상은 강자가 망쳤다. 지금 전 세계는 단일의 통합된 세계관 안에서 살아가고 있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여태까지 지엽적으로 이루어져 있던 인류 역사의 모든 문명이 몰락하고, 단 하나의 문명만이 남았음을 뜻한다. 인류 역사의 모든 문명이 망한 이유를 연구한 결과, 그 모양은 제각각이었지만 원인은 전부 동일했다. 기득권층의 욕심. 제 손에 쥔 권력을 놓지 않으려는 그 알량한 사리사욕이 한 사회를 멸망으로 이끌었다. 배제와 혐오는 가진 자의 몫이었고, 오직 배척을 통해 누리는 특권이 그들 체면의 전부였다. 그들은 세상이 약육강식의 세계라고 말하며 본인들의 행동을 정당화하려 부단히도 애썼다. 하지만 세계는 피라미드나 사다리가 아니라 원으로 이루어져 있다. 일방적으로 먹거나 먹히기만 하는 관계는 어디에도 없다. 세계의 원리는 먹고 먹히기가 아니라 먹고 먹이기다.
자산을 축적하겠다는 비뚤어진 욕망과 위계질서가 발생한 이후로 인간은 이 사실을 모른 채 세상을 왜곡된 시선으로 바라보며 살아왔다. 그러한 방식으로 구축한 문명은 결국 지배층의 독재와 폭정으로 인해 하나하나 무너져 갔다. 그 어느 문명도 예외는 없었다. 세계에 우열이 존재한다는 잘못된 믿음이 재앙을 낳았다. 자기들이 더 가졌다고 착각하는 기득권층은 종족에 우열을 나누고, 성별에 우열을 나누고, 신체에 우열을 나누고, 직업에 우열을 나누며 “오로지 더 우수한 자만이 더 가질 자격을 얻는다” 설파했다. 그 오만한 프로파간다는 이제 현대 사회에서 능력주의, 자본주의, 기술 만능주의로 둔갑해 여전히 사람들을 옥죈다. 우리는 아직도 식민 지배의 논리 아래 살아간다. 기계에 대한 사랑과 유전공학은 인종 청소, 나치즘의 다른 언어다.
이번 민주주의 탈환에 가장 적극적인 사람들이 청년 여성, 장애인, 농민인 이유도 여기에 있다. 민주주의는 모든 존재에게 동등한 권리가 부여될 때 가능하다. 반면 자본주의는 필연적으로 위계질서를 낳는다. 자본주의와 민주주의는 상호 간에 충돌을 일으킨다. 이 체제를 유지해서 손해 볼 거 없는 자들은 세상의 변화에도 무관심할 것이다. 그들은 이미 안다. 모두가 잘 사는 자본주의 따위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을. 자본주의란 내가 잘 산다는 감각을, 나보다 못 사는 타인 위에 올라설 때 비로소 실감할 수 있도록 짜인 판이기 때문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더 유리한 부류는 “더 비싼 노동력”으로 인정받는 사람들이며, 이는 이 체제가 태동할 때부터 그랬듯 (제1세계 백인) 남성을 상정한다. 24/7, 365일 일정한 자본생산성을 창출해 낼 수 없는 사람들은 게임에서 배제된다. 항상 뜨거운 감자로 여겨지는 정혈로 인해 여기에는 여성도 포함되며, 장애인과 자연의 흐름을 따라야 하는 농민은 말할 것도 없다. 이 시점에서 우리가 이룩해야 할 민주주의는 “우리도 공장에 넣어달라”가 아니다. “생명은 공장이 아니다”의 민주주의여야 할 것이다. 모든 존재는 있는 그대로 자연스러울 권리를 가진다. 우리는 이제 그걸 인정하기만 하면 된다.
“위대한” 소수가 다수를 지배하는 사회를, 우리는 너무 오래 방치해 왔다. 그 끝에 기다리고 있는 것이 문명의 몰락임을 알면서도 말이다. 인류 역사에서 기록된 “위대함”이란 실상 일상적인 것을 괄시하고 짓밟아서 이룩해 낸 것일 때가 많다. 이를테면 타인의 노동력, 타인의 삶, 타자의 고통 같은 것들.
4. 세상을 위해 살고 싶다
그래서 나는, 더 이상 소비자가 아니라 생산자로 살겠다고 다짐했다. 그 다짐을 실현하기 위해 농촌에도 다녀오고 일본에도 다녀왔다가 결국 도시로 되돌아온 나지만. 단순히 나의 생존을 위해 내가 세상으로부터 취한 에너지를 허튼 일에 소모하는 것이, 점점 불편하다. 나 좋자고 -실은 그렇게 좋지도 않다- 돈을 벌기 위해 무의미한 노동을 하면서 배를 채우고 싶지 않다. 대지가, 바람이, 하늘이, 바다가, 농민이, 어촌이, 택배 노동자들이, 어머니가. 이 세상의 많은 존재들이 합심하여 나의 배를 불려 주었듯, 나 또한 세상으로부터 얻은 만큼 베풀어야 인간 된 도리라고. 내가 지구 위에 오게 된 것은 나를 먹여 살린 존재들에게 내 에너지를 돌려주기 위해서라는 생각이 점점 명징해진다. 꼭 농사가 아니더라도, 내가 할 수 있는 것을 하고 싶다. 내가 글을 쓰고 싶은 것도 그런 이유에서다. 나는 사람들에게 돈이 되는 이야기가 아니라 도움이 되는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다.
늘 디스토피아는 미래가 아니라 지금 여기에 있다고 말하는 주제에, 사실 나는 유토피아적인 미래를 꿈꾼다. 지구의 막내인 인류가 지능을 쓰는 쪽으로 진화한 이유는, 신의 뜻이 있을 것이라고 믿으며. 신이 우리를 이렇게 조형한 건 집단지성을 활용해 지구를 더욱 풍요롭게 만들라는 의미가 아니었을까. 모든 존재가 자유롭게 꽃피울 수 있도록 자연을 돕는 것. 그것이야말로 우주가 우리에게 바랐던 것일지도 모른다.
지금까지 철 못 들어 온갖 종을 멸종시킨 인류였다. 이대로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는다면, 이번엔 사라지는 게 다른 종족이 아니라 바로 우리 자신이 될지 모른다. 하지만 나는 언젠가 우리가 다 같이 정신을 차리고 인류의 제대로 된 소명을 다하게 될 날이 오리라 믿는다. 그날이 너무 멀지 않기를 빌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