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세계의 식탁을 차리는 이는 누구인가』를 읽으면서 마음에 못처럼 박힌 게 있다. 그것은 ‘죽음’이다. 내가 알지 못했던, 너무 많은 죽음이 있었다. 나는 그 죽음을 잘 알지 못했을 뿐 아니라 내가 그 무수한 죽음에 연루되어 있다는 사실도 알지 못했다. 내가 그 죽음들에 조금쯤은 기대어 살아가고 있다는 것도, 삶보다는 죽음 쪽에 더 가까이 서 있다는 사실도 잘 알지 못했다.

1984년 12월, 인도 보팔에 있는 농약 공장에서 가스 유출 사고가 있었다. 유출이 일어난 건 딱 40분이었다. 그로 인해 하룻밤 사이에 3천 명이 사망했으며, 그 이후로도 3만 명이 넘는 사망자가 발생했다. 공장 주변 마을의 20만 명에 가까운 이들은, 살아남았더라도 영구적인 후유증으로 죽음과 같은 삶을 살아야 했다. 죽은 동물들은 셈조차 할 수 없었다. 길거리에 사람과 동물의 시체가 어지럽게 널려 있었다. 통곡과 비명이 시체의 틈새를 메웠다. 세계 최악의 대참사였다. 농약 제조에 쓰이는 독성 화학물질인 아이소사이안화 메틸이 죽음을 일으킨 핵심 물질이었다.
공장 운영 주체인 유니온 카바이드를 상대로 한 민사소송과 형사소송은 수십 년에 걸쳐 이어졌고 2010년에야 최종 판결이 났다. 참사 당시의 경영자 7명이 업무상 과실로 유죄 판결을 받았으나, 형량은 고작 징역 2년에 벌금 2천 달러였다. CEO인 워런 앤더스는 고발을 당했으나, 인도 법정에 세워지지조차 않았다. 미국이 인도 정부의 송환을 거절했기 때문이다. 유니온 카바이드를 인수한 다우는, 이에 항의해 비폭력 시위를 하는 활동가들을 오히려 줄기차게 법정에 세우며 가해 행위를 이어가고 있다.
농약은 ‘사고’로만 생명을 죽인 것이 아니었다. 농업 개혁, 혹은 녹색혁명을 가능하게 한 농약은 수많은 삶을 자살로 마감하게 했다. 이 역시 인도의 일이다. 지난 15년간 28만 4천 명의 농민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머릿속에 잘 그려지지도 않는 숫자다. 결과만을 보면 빈곤 자살처럼 보이지만, 이 서사의 시작에는 기업과 정부가 있었다.
농업 시장을 개방해 토종 면화 값이 폭락하자 인도 정부는 미국산 변형 종자를 권고했고, 다국적 기업 몬산토는 지속적인 광고 카피로 이를 부추겼다. “이 종자는 농약을 뿌릴 필요가 없습니다. 당신도 이제 백만장자가 될 수 있습니다.” 여기에 현혹되지 않을 농민은 없었다. 농민들은 앞다투어 빚을 냈다. 토종 면화를 비롯해 검은콩, 녹두, 참깨 농사까지 다 버리고 몬산토의 변형 종자를 사들여 재배했다. 광고 카피는 사기에 가까웠다. 변형 종자는 오히려 더 많은 농약을 필요로 했던 것이다. 농민들은 더 많은 빚을 내어 농약을 구매했다. 변형 종자를 팔아넘긴 바로 그 몬산토로부터. 빚을 갚지 못한 농민들의 땅을 빼앗기 위해 채권자들이 몰려오면 농민들은 농약을 먹고 죽었다. 바로 그 몬산토의 농약을.
녹색혁명에 의해 전 세계적으로 확산된 변형된 종자, 화학 비료는 수많은 먹거리 속에 죽음의 인자를 녹여 넣었다. 그 덕분에 20억 인구가 비만과 암 등으로 고통받고 있다. 몬산토와 같은 기업은 농민의 삶만 파괴한 것에 그치지 않았다. 몬산토를 비롯한 산업농 시스템의 역군 기업들이 이뤄낸 성과는 오로지 자신들을 위한 이윤과 부의 혁명일 뿐이었다. 땅과 생명의 재생산이 아닌 죽음과 상품의 재생산일 뿐이었다. 반다나 시바는 말한다. “상품은 사람을 먹여 살리지 못한다”고.
반다나 시바는 녹색혁명이 필연적으로 죽음을 야기할 수밖에 없는 또 하나의 이유를 제시한다. 2차 세계대전 중에 살상무기와 폭발물, 강제수용소에 제공하기 위한 화학 물질을 생산했던 대기업은 전쟁이 끝난 뒤 농화학 기업으로 발 빠르게 전환했다. 폐업이 아닌 산업 형태 전환을 택한 것이다. 이들 공장은 화학 비료를 생산하기 시작했고, 인종 살상과 민간인 학살에 이용되던 화학 물질은 살충제와 제초제로 쓰이기 시작했다. 형태는 바뀌었지만 죽음을 야기하는 물질 생산이라는 내용은 바뀌지 않은 셈이다. 반다나 시바는 이를 “네크로이코노미necroeconomy, 즉 죽임의 경제 모델”이라고 부른다.

농약과 화학 비료, 그리고 변형 종자, 또 이를 기반으로 돌아가는 산업농은 인간과 비인간 동물만 죽이는 것이 아니다. 농지를 포함한 이 세계의 대지도 죽인다. 농약과 화학 비료는 벌, 나비, 익충을 죽이고 토양 유기체를 죽여 토양을 급속도로 파괴한다. 이 물질은 강과 바다로 흘러들어 수생, 해양 생물을 죽인다. 반다나 시바에 의하면, 20세기 초 미국에서 기록된 7098종의 사과 가운데 96%가 사라졌고, 양배추, 옥수수, 완두콩, 토마토의 상황도 이와 비슷하다. 생물 다양성이 사라졌다. 농약과 화학 비료에 의지하도록 설계된 GMO 작물 경작의 보편화 역시 그 요인 중 하나다. 몬산토 같은 기업이 독점 판매한 변형 종자는 이 기업이 생산한 화학 물질을 쓸 수밖에 없도록 유도한다. 이처럼 의도된 순환 고리 덕분에 몬산토는 돈을 긁어모은다. 기업의 주머니가 돈으로 불어날 때 죽음도 빠르게 쌓여간다.
이 모든 시스템에 이름을 붙인다면 ‘사회적 학살 시스템’이라 부를 수 있지 않을까. 보팔 농약 공장 참사로 인한 고통과 희생, 수십만 농민의 자살, 농약과 화학 비료로 인한 죽음들, 생물 다양성의 파괴, 황폐화된 땅, 안전하지 않은 먹거리로 인해 질병을 얻은 무수한 사람들. 나 역시 이 시스템의 피해자이면서, 이 시스템에 기대고 이 시스템을 침묵으로 성장시킨 기여자이기도 하다. 침묵은 몰라서가 아니라, 더 정확히 말한다면, 몰라도 되는 편리한 세계 속에 얼굴을 파묻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책임이 있다. 부끄러운 얼굴을 기어이 들어, 이 책임을 바라보고 싶다.
비장하게 쓰인 문장에 비해, 할 수 있는 것이 많지 않다. 그럼에도 찾아나가고 싶다. 작은 일이라도. 동료, 이웃, 또 일면식 없는 이들과도 자꾸 만나고 공부하고, 문제를 문제라고 이야기하는 것이 중요하겠다. 얼마 전엔 여럿이 함께 소농들의 연합인 언니네텃밭 봉강공동체에 다녀왔다. 숨쉬는 땅과 좋은 먹거리와 여성 농부를 만났다. 거기서, 다 시들어버린 것처럼 보이는 배추라도 봄이 되면 그 몸의 가장 안쪽에서 새잎을 밀어낸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희망은, 찾아다니는 자에게는 필연적으로 찾아진다는 말처럼 들렸다.
전 세계 소농들의 급진적 연대체인 비아캄페시나에서도 많은 것을 배운다. 비아캄페시나는 다양성과 페미니즘을 주요 가치로 두고 있다. 기업이나 단체 임원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는 ‘국제조정위원’의 남여 의무 성비 구성은 1:1이다. 여성 임원의 비율이 1%를 밑도는 한국 기업의 상황과 비교할 때 이것은 혁명에 가깝다. 비아캄페시나는 ‘세계는 상품이 아니다 연합’의 핵심 그룹으로서 생명에 대한 특허권 금지, WTO 확대 금지, 사회 기본권과 환경 지속가능성 및 식량주권 보호 운동을 전개해 나갔다. ‘투쟁을 세계화하고 희망을 세계화하자’는 비아캄페시나의 구호는 지금 당장 폐지 박스를 잘라 써넣어도 좋을 구호다. 그 피켓을 들고 윤석열 퇴진 집회에 나가도 모자람이 없겠다. 윤석열 뿐만이 아니라 이 ‘죽임의 경제 모델’을 끌어내리는 투쟁이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