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콘크리트 유토피아》, 두 겹의 대한민국 × 두 가지 가능성

한국사회의 새로운 주체인 백래시 홍위병들의 행위자성을 영화 《콘크리트 유토피아》와 그에 대한 반응을 통해 확인하고, 이들의 재교육 가능성에 대해 묻는다.

이 글은 영화 《콘크리트 유토피아》(2023)를 다룬 영화평으로, 다수의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음을 미리 알려드립니다.

. 박보영 : 민폐와 발암 사이

“관객 반응을 예측했을 때 명화의 편이 많지 않을 거라는 생각은 했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어요. 제게 ‘왜 이런 민폐 캐릭터를 만들었냐’고 직접적으로 질문하는 분들도 있었죠. 해외 반응은 훨씬 열려있어요. 그만큼 한국 사회가 남을 위해 손을 뻗는 것에 있어 경직된 분위기구나 하는 생각을 하는 계기가 됐죠. 만약 저라면 앞에 나서는 건 절대적으로 피했을 거예요. 민성은 아예 될 수도 없고, 도균처럼 저는 빠지겠다’며 전투적으로 표현하지도 못했을 것 같아요. 어떻게든 핑계를 대면서 수색대 활동을 빠지고, 외부인이 너무 간절하게 들여보내 달라고 부탁하면 어쩔 수 없이 받아주는 사람이지 않았을까요. 그런데 그전에 그냥, 건물에 깔렸을 것 같기도 하네요.(웃음)”1

엄태화 감독이 평론가 이은선과의 인터뷰에서 마지막으로 한 대답이다. 질문은 “영화가 다양한 가치관의 인물들을 제시했기에, 관객들은 ‘나라면 어떻게 했을까’를 고민할 수 있었던 것 같아요. 실제상황이었다면 두 분의 행동은 누구와 가장 비슷할까요?”였다. 감독은 배우 이병헌이 분한 모/영탁2이 아니라 도균과 비슷하게 행동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영화 《콘크리트 유토피아》 속에서 모/영탁은 사기당한 살인자이며 황궁아파트가 외부인들에게 점령당하는 파멸적 결과를 초래한다. 그러나 대부분의 리뷰 글에서 관객들은 그를 두둔하고 옹호한다. 그에 반해 박보영 배우가 분한 주인공 명화는 “민폐 캐릭터”로 불렸다. 점잖게 표현해서 민폐였고 실제 게시판이나 소셜 미디어에서는 ‘발암 캐릭터’로 비난받았다. 대부분의 한국인들에게 명화의 이타적인 행위는 비현실적이고 이상해서 명화의 선택과 행위 때문에 영화를 보면서 암에 걸린 것처럼 괴로웠다는 것이다.

감독조차 작품의 주제가 어떻게 받아들여질지 반대로 예상하였다. 작품 속의 빌런이 현실의 관객들에게 동일시되면서 상찬을 받았고 작품의 주제와 지향과 가치를 보여주는 주인공은 작품 밖의 현실에서 외면받거나 욕받이가 되었다. 왜 이런 현상이 발생하였을까? 자본제가 원래 인간성을 탐욕스럽고 이기적으로 만들기 때문일까? 『파리대왕』 이후 인간 본성을 부정적으로 묘사하는 문화적 경향이 승리한 것일까? 죽고 죽이고 약탈하는 할리우드식의 포스트 아포칼립스 액션에 너무 길들여진 탓일까? 이 장르 특유의 식량과 거처와 필수품 등이 부족하고 공급이 제한된 한계상황에서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기적으로 행동하는 것이 당연하다는 생각, 모든 이들이 남들이야 죽건 살건 알 바 없이 내 생존만 중요시하면 살아갈 것이기 때문에 현세 지옥이 펼쳐질 것이라는 생각은 거의 의심받지 않는다.

오프닝의 대지진은 비현실적일 정도로 파멸적이다. 땅이 종횡으로 격동하며 요동치며 들썩거린다. 건물들은 속절없이 무너지고 여기저기서 지하가 입을 벌리고 차와 인간과 건물을 삼킨다. 장르의 문법대로 세계는 전복되었다. 대사건 이후 생존자들은 재난 공동체를 형성하며 새로운 가치와 질서와 가능성을 만들 수 있을까? 최근의 포스트 아포칼립스 장르의 할리우드 대작인 《퓨리오사 : 매드맥스 사가》은 서로가 서로를 의심하고 죽이는 사막의 생지옥을 배경으로 한다. SF의 하위 갈래인 포스트 아포칼립스의 장르적 의미와 특성은 인간의 생존이 집단적이고 극단적으로 어려워진 세계에서 인간다운 삶이 가능한 다른 세계에 대한 사고실험을 한다는 것이다. 《퓨리오사》의 경우 ‘엄마에게서 딸로 전해지는 씨앗’이라는 형상을 통해 그 가치와 희망과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이와는 반대로 《콘크리트 유토피아》에 대한 대중들의 반응을 보면 영화보다 훨씬 심각한 게 스크린 밖의 현실이었다. 영화 속에서도 재난을 당한 사람들은 「2020 자연재난 매뉴얼」을 뒤적거리면서 붕괴 이후의 상황을 타개하려 한다. 기후위기가 이미 세계 인구의 15%이상을 기후붕괴 상황으로 몰아넣었고 한국이 언제까지 이 위기의 방관자로 생존가능할지 아무도 모른다. 무너지고 전복된 ‘콘크리트’ 속에서 ‘유토피아’의 씨앗을 보여주는 영화 안의 세계와 그 세계를 마주보는 작품 밖의 현실을 서로 비춰보면서 파멸적 재난 상황을 맞이한 사람들의 두 가지 가능성인 합리적 호혜의 재난 공동체3와 비이성적 배타의 아파트 공동체를 심층적응4과 붕괴학5이라는 관점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영화 한 편을 다시 보고 평론 한 편 읽은 덕에 혹시 모를 현실붕괴 이후의 상황에서 생존 가능성을 높일 수 있다면 많이 남는 장사다.

. 관객들의 전도된 반응

2023년 8월 15일 집 근처의 영화관에서 재난 공동체에 대한 영화를 보았다. 물의를 빚었던 어떤 배우가 출연하였기에 안 보려 했지만 붕괴학 연구자 입장에서 당시 가장 화제가 되는 포스트 아포칼립스 장르의 영화를 안 보고 넘길 수 없었다. 보고 난 직후 장르 출현 이후 최고의 작품이며 2023년 한 해 최고의 영화 작품을 보았다고 느꼈다. 다른 사람들의 영화평과 감상이 궁금하여 하루에도 몇 번 검색하였다. 전문가들의 리뷰는 태부족이었고 일반 관람자들의 리뷰들에는 심각한 문제가 몇 가지 있었다. 앞서 살핀 바와 같이 작품의 주제를 담고 공동체 내에서 가장 합리적인 선택을 누적한 명화는 비난과 욕설의 과녁이 되었다. 리뷰를 읽으면서 지금이 ‘붕괴학’의 시간이 되어야 한다는 걸 직감했다. 한국 사회의 최대 문제점인 ‘아파트와 그에 대한 열망’이 파국적 상황에서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를 보여주면서 많은 대중들에게 ‘내가 만약 저 상황에 처했다면’이라는 사고실험을 하였고 소셜미디어에 그에 대한 토로가 쏟아지고 있었다. 그러나 정작 《콘크리트 유토피아》와 그에 대한 대중들의 열띤 반응을 분석하는 글은 찾을 수 없었다. 2023년 여름 최고의 화제작인데도 영화 소개를 넘어 영화가 던지는 질문과 그에 대한 한국사회의 응답이 완전히 엇갈렸는데도 언론에서 다루는 빈도가 적었다. 아마 뻔한 말 이상을 하기가 어려웠기 때문이었을 것이라 추정한다.

영화의 라스트 씬을 통해 작품 속 세계를 한 문장으로 요약하면, ‘황궁6에 사는 인육을 먹는 악마 같지만 평범한 사람들이 만든 아파트 공동체 이야기’이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명화와 재난 공동체 사람들이 나눈 대사를 통해 확인시켜 주듯이, 황궁 주민들은 외부인들에게 인육을 먹는 악마 같은 존재로 여겨진다. 하지만 황궁에 살았던 명화에게는 붕괴 이전부터 보던 평범한 사람들이다.7 그 평범한 사람들이 대지진으로 인한 총체적 붕괴라는 1차적 재난 상황에서 새로운 사회질서를 만들어내지 못하고 붕괴 이전의 기존 질서를 관습적으로 지켜내려고 한다면 어떤 2차적 재난을 어떻게 초래할지를 작품은 보여준다.

영화는 건물이 모두 무너지고 구조대도 오지 않으며 심지어 한강물이 다 말라버려서 바닥을 드러낼 정도의 재앙이 닥친 사회를 다룬다. 사진출처 : publicdomainq

관객들의 리뷰에서 가장 문제가 되는 부분부터 집어보자. 확인 가능한 거의 대부분의 리뷰에서 황궁 사람들이 “수렵채집”으로 생활을 꾸린다고 하였다. 그러나 엄밀한 주인이 있는 물건을 위력이나 폭력으로 가져오는 것은 수렵채집이 아니라 약탈이고 노략질이다. 소유자가 있건 없건 필요한 재물을 약탈하는 해적경제를 수렵채집 경제로 착각하고 오해하였다. 석기문명의 채집 경제라는 건 자신들이 점유한 지역을 다니면서 식량과 생활 물자가 될 자원을 포레이징foraging하는 것이다. 다른 씨족이나 부족이 점유한 지역에 무단으로 들어가선 안 된다. 남의 땅에서 채집하려면 먼저 허락을 받아야 한다.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금지하지 않는다. 수렵채집 사회는 간단해 보이지만 현대인에게 보이는 만큼 그렇게 간단한 사회가 아니다.8

관객들이 영화에서 놓친 부분이 여기에 있다. 해적 경제는 불가피한 것이 아니었다. 황궁 주민들은 교역이 가능한 상황을 스스로 걷어차고 약탈과 해적 경제를 선택했다. 영화에서는 재난 때문에 화폐경제가 무너지고 현금이 쓰이지 않는 대신 물물교환의 교역 경제가 생겨났다. 무너지지 않은 유일한 건물이 랜드마크가 되어 여기저기서 피난민들이 모이고 있다. 그런데 황궁 주민들은 외부인을 배제하기로 결정한 후 내몰고서 출입을 금지하고 폐쇄하기로 결정하였다. 위기 상황에서 공동체가 외부인을 추방하고 폐쇄와 고립으로 들어가는 것은 당연한 것이 아니고 합리적이지도 않다. 안전과 생존을 위해 교역을 거부하고 노략질만 하겠다는 건 폭력의 순환 속에 자멸하겠다는 무지의 의지다.

붕괴/재난/파국/재앙이 닥쳤을 때 황궁주민들처럼 폐쇄적 공동체를 만들고 외부와 교역을 거부하고 물리적 충돌까지 불사하면 2차 재앙으로 가는 지름길 정도가 아니다. 그냥 미끄러져 흘러간다. 돌이키기도 어렵다. 의료 시스템이 붕괴되어 의료인과 의약품과 주사, 붕대 등의 의약부외품이 태부족인 상황에서 폭력의 연쇄에 들어간다는 건 자살과 다름없는 선택이다.9 외부인을 추방하기로 결정한 주민회의는 투표라는 민주적 형식을 선택하여 합리화되었다. 그러나 그 결정은 생존에 대한 공포에서 나온 것으로 외부인과 함께 합리성도 추방되었다. 영화 밖의 관객들의 반응을 통한 두 겹의 질문이 던져진다. ‘콘크리트’ + ‘유토피아’의 모든 거주자들에게 붕괴학을 통한 계몽이 가능할까? 또는 계몽이 필요할까?

. 재난 공동체의 가능성

《콘크리트 유토피아》에서 확인 가능한 범위의 모든 건물들이 붕괴되었다. 세계관 속 유일하게 멀쩡한 건물인 황궁아파트로 외부인들이 몰려온다. 황궁은 만남과 정보 교류와 교역의 중심지 역할을 한다. 또한 영하 26도의 찬 바람과 냉기를 피하고자 하는 난민들에게 지붕과 벽을 제공해 준다. 붕괴 이후의 세계에서 화폐도 금융도 이미 붕괴하여 화폐를 통한 구매 행위는 불가능하다. 트렁크에 음식과 위생용품을 넣어두고 아파트 로비에서 물물교역을 하던 남자는 종이에 크게 써 놓았다. “현금 X” 화폐는 교환수단이 되지 못하고 교환수단이 될 수 없는 5만원권 지폐는 손바닥만한 휴대용 티슈 한 곽 보다 쓸모가 없다. 휴지나 생리대 등의 위생용품이 식량만큼 귀중한 자산이 되었다.

붕괴 이전과 이후에 귀중한 것의 우선순위는 전복된다. 그러나 재앙 속에서도 생존에 유리한 마인드셋은 붕괴 전후가 비슷하다. ‘다양한 구성원을 포용할 것. 침착과 유머와 존엄과 냉정을 유지할 것. 비극과 비참에 압도되지 않을 것.’10 다른 것도 있다. 민주적 의사결정이 군중심리에 쓸려서 가장 비합리적인 선택을 할 수도 있다. 황궁의 주민들은 어떤 외부인의 칼부림과 방화 사건을 겪은 뒤 폐쇄적이고 배타적인 아파트 공동체로 변화할지, 아니면 난민을 최대한 포용하는 호혜적 재난 공동체로 남을지 선택의 기로에 섰다. 그 기로에서 그들은 어떤 선택을 하였고 그 선택의 결과가 어떠했던가?

배제와 추방과 폭력을 통해 아파트 공동체가 탄생하였다. 외부인을 퇴거하는 과정에서 기만과 폭력의 사용은 주목할 만하다. 주민들은 외부인들에게 빈 집을 소개한다는 거짓말로 아파트 광장에 소집시킨다. 허위 언술을 통해 배제해야 할 외부인들을 공간적으로 집중시킨다. 직후 퇴거를 위해 아파트 방범창과 골프채와 쇠파이프 등의 도구가 동원된다. 배제와 퇴거의 형식에서 허위와 폭력의 사용이라는 파시즘 국면으로 아파트 공동체가 진입한다. 20년간 아파트를 위해 일한 경비원조차 퇴출된다. 인정사정 볼 것 없는 백색의 아파트 공동체가 탄생하는 순간이다.

퇴거를 요청받은 외부인은 외친다. “빈 집이 너희들 것이냐?” 그렇다. 집주인이 돌아오지 않아 빈 채로 있는 집의 소유권은 아무에게도 없다. 주인 없는 집조차 황궁 아파트 공동체 주민의 것이라는 주장은 어떤 논리로도 합리화하기 어렵다. 이러한 논리 부족과 합리성 결여와 황궁 아파트 공동체를 생성한 폭력성이 서로 결합하여 작동하는 방식은 대지진이라는 파국 이전과 동일한 것이다. 특정 소수 인원에게 지대를 추구할 권리를 독점적으로 부여하고 대부분의 구성원은 인간적인 삶을 불가능하게 하는 사회의 어두운 힘과 작동 방식은 붕괴되지 않고 우뚝하다.11 붕괴 이후에 가능한 새롭고 합리적인 삶의 방식을 거부하고 과거의 방식대로 보수적이고 반동적인 주민만의 아파트 공동체를 만드는 급진 백래시 혁명이 성공한 것이다.

백래시 혁명이 성공하여 1차로 외부인을 축출한 후 주민들은 외친다. “아파트 만세!” “김영탁 만세!” “아파트는 주민의 것!” 비인간적인 공동체에도 공동체로서의 소속감과 일치감은 중요하다. 이때 일치감의 표상은 물신화된 아파트와 지도자이다. 외부인을 추방하여 아파트를 주민들만의 것으로 지켰다는 것은 아파트 외부 공간을 모두 위험하고 생존하기 어려운 곳으로 바꾼 것이다. 거주공간의 안전성과 외부 공간의 안전성을 폭력과 기만에 의해 등가교환한 셈이다. 망하기 딱 좋은 밑지는 장사다. 지도자가 된 모/영탁은 축출 직후 아파트 경계 인원을 늘린다. 외부는 이제 안전하지 않다.

내부인들이 만들어낸 황궁 외부의 위험성을 극적으로 보여주는 것은 시체에서 금이빨을 뜯어내고 나머지 이빨은 아이들에게 장난감으로 주던 사내의 죽음이다. 금이빨을 모으기 위해 황궁 외부로 다니던 한 주민은 외부인들에게 죽임을 당하였고 나체로 발견된다. 시체 위에는 그가 모아놓은 금니가 흩어져 있다. 그는 아무 의미도 필요도 없는 금이빨이라는 자산을 모으다가 죽은 것이다. 그를 죽음으로 몰아넣은 것은 자산 축적이라는 붕괴 전의 관성적인 습속과 외부인 축출을 통해 황궁 외부를 위험공간으로 창출한 아파트 공동체의 선택이었다. 사내의 노모는 통곡하고 그 앞에서 주민들은 외부인들의 “복수”에 분노한다. 배제와 폭력의 대가로 원한과 복수를 예상치 못했던 것일까? 채집 활동을 위해 필수적인 여성의 노동력이 황궁 안에 갇히면서 생산력을 완전히 잃었고 여성 주민들은 소비밖에 할 일이 없는 잉여집단이 되었다. 내부의 안전과 외부의 위험을 교환하였기에 생산력의 절반을 잃고 부양해야 할 인구는 두 배가 된 상황을 초래한 것이다. 그런데도 자신들만의 성채 안에서 무탈한 평화와 번영을 얻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일까?

급진 백래시 혁명은 성공했지만 그 대가를 치룰 계산의 시간이 오고 있다. 앞서 말한 대로 치안과 사법 시스템이 붕괴한 뒤에 타인들과의 관계에서 원한을 축적하는 것은 자살에 준하는 것이다. 외부인들은 퇴거당한 채 뿔뿔이 흩어지지 않은 듯하다. 무기를 준비하여 황궁을 기습한다. 1차 황궁 공성전이 벌어진다. 외부인들은 부탄가스통을 묶어서 폭탄을 준비해 온다. 모/영탁이 영웅적으로 과감하고 민첩하게 손을 써서 공중에서 터뜨린다. 마치 장판교의 장비와 같은 결기로 모/영탁이 활약하지 않았다면 1차 공성전에서 황궁은 탈취당했을 수 있다. 그러나 여전히 외부에는 사람이 많다. 이들을 계속 적으로 돌리면서 폐쇄적인 아파트 공동체를 지키는 반동적인 해적 경제의 끝에는 무엇이 있을까?

황궁으로 쿠팡도 오지 않고 교역도 불가능하므로 약탈과 노략질이 연속되고 확대된다. 결국 수색대는 기습을 당한다. 역시 모/영탁의 활약으로 불리한 전황에서 탈출할 수 있었지만 금애의 외동아들인 지혁은 죽는다. 지혁의 사체를 껴안고 금애는 오열한다. 피에스타의 붕괴적 재현이다. 모자 둘 뿐인 가정에서 금지옥엽이 죽은 것이다. 금애는 오열하면서 절규한다. “왜?” 지혁만 죽은 것이 아니다. 수색대원 중 몇 명이 같이 죽었다. 황궁 아파트 공동체는 붕괴라는 자연적 파멸을 뚫고 살아났지만 외부인을 폭력으로 배제하며 보수적인 안전과 고립을 선택한 순간 인간적 파멸의 길인 필연적 파멸의 길로 들어섰다. 아파트 공동체가 아니라 재난을 당한 모든 사람들의 재난 공동체라는 가능성은 완전히 사라졌다. 백래시 아파트 공동체는 외부와 영구적인 전쟁에 돌입한다. 내부는 유한하지만 외부는 무한하다. 바둑으로 치면 흰 돌은 중앙에 고립되었고 바둑판 전체는 흑돌이 둘러싼 상황이다.

영화에서 검은 색과 흰 색의 바둑돌은 의미심장하다. 붕괴 전 사기당한 모/영탁이 김영탁의 집에 찾아와서 항의하는 과정 중에 몸싸움이 붙고 끝내 김영탁을 죽이는데 사용하는 도구가 흰색 바둑돌이다. 흰색 바둑돌은 ‘바퀴벌레’에 불과한 모/영탁이 황궁 주민으로 인증되기 위한 1단계의 포석으로 이용된 것이다. 이 흰색 바둑돌은 반상회에서 주민투표의 도구로 쓰인다. 흰 색 바둑돌은 외부인을 축출하는데 찬성하는 표이고 검정색은 그 반대이다. 흰 색이 배제의 색상이 되는 것이다. 흰 색은 또한 극우의 상징이다. 반대인 검정은 아나키즘의 상징색이다. 붕괴 이후 황궁이라는 유일무이한 랜드마크를 향해 멀리서도 찾아오는데 기존 사회체제의 권위를 전복시키고 리셋시킬 기회는 흰색 바둑돌을 선택한 백래시 혁명세력에 의해 사라진다. 그들이 누구인가? 우리다. 그렇다면 우리는 모두 흰색 바둑돌을 들고 살인도 불사하는 백래시 홍위병인가? 아니다. 이웃들을 은닉해 준 도균 같은 사람들이 있다.

. 아파트 공동체라는 디스토피아에 저항하는 재난 공동체

아파트는 ‘어디 사세요?’라는 단지 주소를 묻는 것이 아니라 복잡한 정체성을 묻는 질문에 대한 답으로 주류적 삶을 표상한다. 사진출처 : Choi Kwang-mo

외부인 축출은 1차로 끝나지 않았다. 명화는 자신과 함께 살던 주몽과 주몽 엄마가 도균의 집에 숨어있다는 걸 알게 된다. 그리고 자신이 받은 배급품을 도균에게 몰래 건네준다. 그 장면은 모/영탁에게 발각되었고 도균의 집부터 2차 외부인 색출이 벌어진다. 색출작업은 방역작업이라고 불린다. 실제로 이루어진 것은 아파트 공동체 구성원들끼리 고발을 독려하면서 고발당한 집을 강제로 밀고 들어가는 폭력이었다. 수색대는 외부에서 해적이 되어 약탈을 하고 내부에서는 재난 공동체를 몰아내는 백래시 홍위병이 되어 방역에 나섰다.

황궁 홍위병들은 외부인을 숨겨준 집에 붉은 페인트를 칠한다. 붉은 색은 피의 색이며 좌파의 상징색이다. 황궁 아파트 공동체 내부에도 인간의 피가 흐르며 내몰린 자들에게 연대하는 좌파 무리가 남아 있던 것이다. 아파트 공동체는 이 내부의 좌파들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회의를 한다. 처음에는 외부인과 함께 몰아내자는 의견이 있었지만 이는 주민 수칙에 어긋난다. 아파트 소유자들의 평등한 고원에서 주민을 밖으로 내몰 자격은 누구에게도 없었다. 대신 공개 사과를 200번 하기로 모/영탁이 결정한다. 아파트 광장에서 주민들이 모두 모인 맞은편에 좌파 무리들은 홍위병들의 인민재판에서 모멸적인 공개 사과를 강요당한다. 이런 모멸과 균열이 나중에 어떤 결과를 가져올 수 있을지 아무도 모른 채 그저 방역 완료만을 축하한다.12

이 때 도균은 황궁 모든 주민들이 보는 중에 투신자살로 항거한다. “그만해라! 이 짐승만도 못한 새끼들아! 사람끼리 그러면 안 되는 거다! 이 지경이 됐어도 해도 될 일이 있고 아닌 일이 있는 거야!” 그렇다. 모든 것이 붕괴된 상황이건 보통의 대한민국이건 인간다운 삶에는 하한선이란 것이 있어야 한다. 그 하한선을 공동체가 끌어내리면 어떤 일들이 벌어질까에 대한 사고실험. 이것이 《콘크리트 유토피아》라는 SF 작품의 장르적 의미이다. 이러한 의미를 간파했기에 홍명교는 “이 영화는 동시간대에 상영하는 다른 흥행작들과 비교하기 어려운 절묘한 동시대성을 갖추고 있다.”13고 평했을 것이다. 도균의 자살을 목격한 명화의 내면에서 변화의 싹이 튼다.

도균의 사체는 화장된다. 그 주변에 황궁 사람들이 모여 어떤 이는 ‘갈치 냄새’가 난다고 한다. 또 어떤 이는 “외부인들은 식인종”이라고 한다. 외부인들은 황궁을 식인종으로 알고 황궁 주민들도 외부인들을 식인종으로 혐오한다. 이러한 오해는 어디서 오는가? 정보의 확산과 공유가 막혔기 때문이다.14 이때 여진이 발생하였고 아파트 뒤쪽에서 수맥이 터진다. 물 부족이라는 문제가 해결된 것이다. 그러나 다음 여진 때 아파트가 무너질 수도 있다는 가능성은 아무에게도 제기되지 않는다. 합리적인 사고와 추론과 판단의 가능성은 도균의 죽음과 함께 소각되었다. 위험의 감각도 완전히 소실되었다. 공동체의 파국을 본인들이 당겨오고 있다는 자각이 없다. 성공 공식이 파멸 공식이 되는 것은 흔한 일이다. 2차 외부인 추방이 방역이라는 이름으로 완수된 이후 재난 공동체의 가능성은 완전히 사라진다. 성공이 파멸이다. 재난 공동체는 애초에 불가능한 것이었을까? 아파트는 과연 무엇인가?

. 아파트라는 배경과 자산경제

한국인들에게 아파트의 의미는 매우 중층적이다. 가족과 내가 거주하는 공간이라는 의미를 훨씬 초과한다. 아파트는 ‘어디 사세요?’라는 단지 주소를 묻는 것이 아니라 복잡한 정체성을 묻는 질문에 대한 답으로 주류적 삶을 표상한다. 평생의 업적이기도 하고 자산의 대부분이기도 하며 안전을 보장하는 성채이기도 하다. 개발과 성장이라는 대한민국의 근대적 신화와 신앙에서 개개인의 구원을 보장하고 개인적 좌표를 설정한다.15 《콘크리트 유토피아》라는 제목은 ‘내 돈 주고 내가 산’ 아파트에 대한 소비자주의적 사고방식과 열망을 드러낸다. 또한 파국인가 이상향인가 양자택일에 대한 얘기로 해석할 수 있다. 황궁 아파트 공동체의 거듭되는 잘못된 선택과 결과적 파국은 내돈내산의 비윤리성과 불가능성을 보여준다.

《콘크리트 유토피아》는 아파트라는 자산의 소유 여부가 묵시록 세계에서도 신분이 되는 세계다. 황궁 주민들은 ‘한국에서 제일 비싸고 좋은 아파트’에서 산다는 자부심을 가진다. 금융을 기반으로 하는 화폐 체계도 무너졌고 다른 아파트가 존재하지 않아서 비교 대상도 없다. 이런 발화는 모/영탁과 황궁 주민들에게 합리적인 사고가 결여되거나 지체되었고 심지어 감각조차 누락된 것을 보여준다. 전세나 월세를 내고 사는 세입자는 소유자의 고원까지 올라갈 수 없다. 주민으로 인정은 받지만 의결권에서 노골적으로 차등을 받는다.16 붕괴 이후의 사회는 붕괴 이전과 마찬가지로 또는 그 보다 심하게 아파트 소유 여부라는 경제력에 의한 신분과 위계의 등고선이 촘촘해졌다. 자본제 사회의 불평등 원리는 전복 이후에도 지속되는 것이다. 이는 주민 축제인 황궁 잔치17 중에 보초를 서는 고시생과 지혁의 대화에서도 확인된다.

고시생은 지혁에게 이런저런 충고를 준다. 그 내용은 전복되기 이전의 사회에서 꼰대들이 10대에게 하는 전형적인 내용이다. ‘1. 이 고생을 군대 일찍 온 거다 라고 생각해라. 2. 사회 나가면 스펙이 된다. 3. 너 공부는 잘 하냐?’ 이와 같은 동네 아는 형이 주는 충고는 건물이 모두 무너지고 구조대도 오지 않으며 심지어 한강물이 다 말라버려서 바닥을 드러낼 정도의 재앙이 닥친 사회에서 아무 의미도 없고 심지어는 해롭다. 그러나 외부인을 축출한 폐쇄적인 황궁 아파트 공동체는 변화에 적응하는데 실패한다. 이런 실패는 아이들의 놀이에서도 확인된다. 영화 초반 줄넘기를 하면서 놀던 아이들은 이제 시체에서 방금 뜯어낸 이빨을 가지고 논다.18 시체조차 자원을 채굴해야 하는 대상이 된 세계에서 살인과 죽음은 아무렇지도 않게 아이들 놀이 속에 자리 잡았다. 백래시 혁명의 총체적 실패다. 인간의 존엄성은 어디에 있는가? 살인이 비윤리화된 것인가? 최초의 살인자는 누구인가? 그 살인은 공동체에서 어떻게 다뤄지는가?

. 이병헌, 영웅에서 살인자로 그리고 바퀴벌레로

모/영탁은 재난 상황에서 어떤 인물이 지도자가 되는 지를 보여준다. 외부인과 집주인 사이에 칼부림이 난 206호에 불이 붙는다. 모두가 우왕좌왕하면서 어쩔 줄 모를 때 마스크로 얼굴을 가린 사내가 소화기를 들고 불 속으로 돌격한다. 용기와 민첩함은 재난 상황에서 매우 귀중한 덕목이다. 소화기 한 통을 뿌려서 불을 끌 수 없자 복도의 소화전으로 달려가서 민성에게 호스 끝을 맡긴다. 본인은 소화전을 붙들고 용을 써서 나오지 않는 물을 나오게 하는 주술적 힘을 발휘한다. 아파트 관리소장은 물탱크가 얼어붙어 나올 수 없다고 했는데 물이 호스를 타고 급하게 흐른다. 그런데 민성이 호스의 수압을 제어하지 못하고 놓친다. 모/영탁은 관창수 역할까지 맡아서 끝내 화재를 진압한다. 공동체를 위기로 몰아넣은 불과 혼자서 싸워 이겼다. 그의 “희생정신”은 모두에게 각인된다. 신화적 영웅의 등장이다. 주민들은 이병헌이 902호 거주자인 김영탁인지 처음 보는 외부인인 모/영탁인지 알지 못하는데 박 소장은 그가 9층에 내린 것을 기억한다. 덕분에 쉽게 주민으로 인정받는다. 모/영탁은 지도자로 추대된다. 이후 그는 계속되는 위기에서 아파트 공동체을 이끌면서 역할을 모범적으로 수행한다. 그러나 균열은 커지고 파멸의 순간이 온다.

수맥이 터져서 급수난은 해결되었지만 식량난은 계속 된다. 멀리 나온 약탈에서 외부인들은 매복하여 수색대를 기습한다. 지혁은 죽고 금애는 오열하며 모/영탁을 원망한다. 황궁의 균열이 본격화 되었다. 이때 명화와 혜원이 김치 냉장고와 함께 등장한다. 냉장고 안에는 902호 주인인 김영탁의 시체가 들어있다. 이를 확인한 황궁 주민들은 모/영탁이 살인자라는 것을 문제 삼지 않는다. 대신 “바퀴벌레였어?”라고 묻는다. 외부인 축출 후 약탈과 해적 경제로 먹고 산 황궁 아파트 공동체 구성원들에게 살인은 해도 되고, 할 수도 있고, 식량과 필수품을 얻을 수 있다면 얼마든지 장려될 수 있는 행위가 되었다. 영화 안에서만 그런 것이 아니다. 영화 밖에서 관객들은 모/영탁에 동일시한다. 두 겹의 ‘콘크리트 대한민국 유토피아’에서 모/영탁의 살인은 문제도 아니다.

소유권이 없다는 것이 확인된 순간 모/영탁은 지도자에서 바퀴벌레로 격하된다. 그리고 주민수칙에 따라 추방당한다. 모/영탁은 살인자라서 축출되는 것이 아니라 자산 소유자의 고원에 머물 자격을 미달했기에 쫓겨났다. 명화는 모/영탁을 살인자라는 걸 고발했지만 무자격 주민으로 심판당한다. 추방은 죽음이다. 관객들이 명화를 원망하는 순간이다. 모/영탁은 걸음을 돌려 혜원을 황궁 밖으로 던져서 죽이고 구토한다. 그 구토의 의미는 무엇이었을까? 살인의 역겨움이었을까? 죽음의 두려움이었을까? 이 때 박 소장의 “땡겨!”라는 외침이 들리고 바리케이드는 무너진다. 황궁 외부의 재난 공동체와 황궁 아파트 공동체의 마지막 대전이 시작된다. 영웅적인 바퀴벌레는 추방당했고 여태 내부자였던 이가 바퀴벌레들의 선봉이 되었다. 영웅이 바퀴벌레가 되는 과정에서 명화는 주민수칙 1항을 이용한다. 배제의 칼은 양날이었던 것이다. 김영탁이 오히려 모/영탁을 죽였다면 김영탁은 아파트에서 쫓겨났을 것인가, 아니면 황궁에 거주할 자격을 유지할 것인가?

. 붕괴학 원오원

평등주의적 전망과 페미니즘에 기반한 사회에 대한 기획이 불가능한 환경이 도래하고 있다. 한국 사회가 마주한 기후위기와 저출생 등을 제대로 해결하지 않으면 자멸과 추락과 붕괴연쇄로 가는 길은 넓고 가파르고 미끄럽다. 사진출처 : Luna-Kyoki

《콘크리트 유토피아》에서 인물들의 이야기가 시작되는 일자는 12월 22일이다. 황궁 1층 로비의 벽면에는 사람 찾는 전단지가 어지럽게 붙어있다. 카메라가 비춘 달력에는 12월 13일에 여러 겹의 붉은 색 원이 그려져 있다. 그리고 21일까지 빗금이 그어져 있다. 세상이 뒤집히고 일주일이 한참 지났다. 아파트 주민들은 아파트 안전에 대해 걱정하지만 나가서 얼어죽는 것 보다는 무너져 깔려죽는 것이 낫다는 말에 수긍한다. 그렇다. 어차피 죽는 거라면 길에서 죽는 것보다 집에서 죽는 편이 나을 수 있다. 정말 그럴까? 언제 붕괴될지 모르는 건물에서 살다가 갑자기 깔려 죽는 것이 나을까? 아니면 얼어 죽는 쪽이 나을까?

어느 쪽이 고통스러울까? 당연히 깔려죽는 쪽이다. 동사는 졸음으로 온다. 그리고 확실하다. 대신 겨울이 지나면 다음 겨울까지 8개월간 얼어 죽을 위험은 사라진다. 그에 반해 깔려죽을 가능성은 불확실하지만 계절과 무관하다. 봄 여름 가을의 낮과 밤 언제 붕괴될지 모른다. 붕괴와 동시에 즉사하면 죽음의 두 방식에 큰 우열이 없겠지만 오히려 살아서 잔해에 깔리면 더 곤란하다. 물도 식량도 없는 상태에서 꼼짝도 못하고 삼일 정도 극한의 고통을 받다 죽거나, 한달 가까이 자신의 오줌을 받아먹으면서 살다가 아사하게 된다. 생각을 해야 한다. 공부도 해야 한다. 가능성과 확률을 끝없이 따지고 질문해야 한다. 누구와 어떤 삶을 살지, 그리고 어떤 죽음을 선택할 지. 재난 공동체에서 살다 죽을 것인가? 아니면 아파트 공동체에서 살다 죽을 것인가? 스크린 밖 우리 앞에 두 가능성이 있다.

금애가 말한 대로 위아래가 없이 리셋된 평등한 세상을 지킬 것인가? 아니면 금애가 실천한 대로 위아래가 있는 불평등한 세상을 만들 것인가? 불평등과 여성혐오는 문화적 자살이다. 스크린 위에 뜬 세상은 수색대라는 마초집단과 아파트 공동체라는 타자를 배제하는 불평등의 세계다. 영화관 밖에서는 감독과 작가의 의도와는 정반대로 이들을 옹호하고 명화와 재난 공동체를 비현실적이라고 비난하는 백래시 홍위병의 세계다. 평등주의적 전망과 페미니즘에 기반한 사회에 대한 기획이 불가능한 환경이 도래하고 있다. 한국 사회가 마주한 기후위기와 저출생 등을 제대로 해결하지 않으면 자멸과 추락과 붕괴연쇄로 가는 길은 넓고 가파르고 미끄럽다. 붕괴학 101 강좌는 아직 열리지 않고 있다. 붕괴학 개론을 수강하면 백래시 홍위병들은 계몽되고 재교육될 것인가? 개론을 넘어 더 많은 강좌가 필요한가? 계몽과 재교육을 통해 다른 가능성이 열릴 수 있는가? 그 다른 가능성을 누가 원하는가?

세상이 망해가는데 지인 능욕 딥페이크 영상을 만들어 돌려보는 백래시 홍위병들, 손가락 모양을 가지고 분개하는 이 백래시 홍위병들을 멈추게 하는 방법이 있을까? 일단 소리라도 질러 봐야 하지 않을까? ‘그만해라, 홍위병! 누가 누구를 포위했는지 모르지만 너희가 투항해라!’

■ 참고문헌

김보형, 자산경제의 아포칼립스, 《콘크리트 유토피아》, 『사회붕괴와 문화정치』 발표문, 한국문화연구학회, 2024.

김선아, 멸망 이후의 ‘우리’:《콘크리트 유토피아》(2023)의 장르와 시간의 문화 정치학, 『사회붕괴와 문화정치』 발표문, 한국문화연구학회, 2024.

드미트리 오를로프, 『예고된 붕괴』, 이희재 역, 궁리, 2010.

드미트리 오를로프, 『붕괴의 다섯 단계』, 홍기빈 역, 궁리, 2018.

로버트 켈리, 『수렵채집 사회 – 고고학과 인류학』, 성춘택 역, 사회평론아카데미, 2014.

리베카 솔닛, 『이 폐허를 응시하라』-대재난 속에서 피어나는 혁명적 공동체에 대한 정치사회적 탐사, 정해영 역, 펜타그램, 2012.

박권일, 『한국의 능력주의 – 한국인이 기꺼이 참거나 죽어도 못 참는 것에 대하여』, 이데아, 2021.

이신지, 엄태화 외, 『콘크리트 유토피아: 아카이브 북』, 플레인아카이브, 2023.

젬 벤델, 루퍼트 리드 외, 『심층적응』, 김현우, 김미정, 추선영, 하승우 역, 착한책가게, 2022.

홍명교, 《콘크리트 유토피아》와 윤석열의 광복절 연설, 매일노동뉴스 칼럼. https://www.labortoday.co.kr/news/articleView.html?idxno=216789&fbclid=IwAR1M3pLNAn240cBnIWtc7bIv17lsxCgTIK2eWkeM7tow1H11MwHmsxkfnuI

영화 《콘크리트 유토피아》, 2023.

영화 《퓨리오사 : 매드맥스 사가》, 2024.


  1. 이신지, 엄태화 외, 『콘크리트 유토피아: 아카이브 북』, 플레인 아카이브, 2023, 422.

  2. 이병헌의 극중 역할명은 모세범이다. 모세범은 김영탁을 죽인 후 김영탁 행세를 하기 때문에 본고에서 이병헌의 극중 역할을 모/영탁으로 하고 죽은 김영탁은 김영탁으로 표기한다. 모/영탁은 주민회의 장면에서 모세범이 서명할 때 ‘ㄱ’보다 ‘ㅁ’을 먼저 쓴 장면에서 힌트를 얻어 이름한다.

  3. 리베카 솔닛, 『이 폐허를 응시하라』-대재난 속에서 피어나는 혁명적 공동체에 대한 정치사회적 탐사, 정해영 역, 펜타그램, 2012.

  4. 심층적응은 기후 위기를 관리하고 완화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판단으로 사회와 문명이 붕괴하는 과정을 대비하고 적응하는 데 도움이 되는 개인적, 집단적 변화에 대한 이론이다(젬 벤델, 루퍼트 리드 외 지음/김현우, 김미정, 추선영, 하승우 옮김, 『심층적응』, 착한책가게, 2022).

  5. 다양한 붕괴학이 있는데 필자의 경우 역사적이고 인류학적인 관점에서 문명과 사회의 붕괴를 연구하는 입장이다. 환지중해 청동기 문명, 위진남북조, 흑사병 당시의 유럽, 16세기 이후의 남미, 이스터 섬 등 실제 역사 속에서 붕괴되었거나 장기 붕괴 상태의 사회를 연구한다. 기후붕괴 시대의 미래예측은 붕괴학의 통찰을 담아야 한다. 수렵채집 사회의 인류학과 고고학, 법인류학, 청동기 문명의 붕괴, 한 번 오면 최소 천년은 꿈쩍 않는 빙하기 등등의 주제가 다뤄져야 한다. 심층적응을 통해 붕괴를 향한 가속도를 줄이는 건 모르겠지만 붕괴 중에 다치고 죽을 사람들을 대폭으로 줄일 수 있다.

  6. 이하에서 영화의 배경이 되는 황궁아파트를 황궁이라고 부르겠다. 황궁은 고대 중국에서 한 국가의 도성에서 중심에 있었던 것처럼 폐허가 된 서울에서 우뚝 솟아 붕괴 이후 시대의 중심지이자 도성이 되었다.

  7. 논란이 많은 영화의 결말부에 대해 첨언하자면, 위기의 상황에서 비합리적 선택을 한 집단은 몰락할 수밖에 없고 합리적 선택을 한 집단은 존속이 가능하다. 합리적으로 선택해야 하는 문제가 집단 앞에 놓여 있고 경험과 성찰을 통해 비합리적 선택을 배제할 수 있는 가능성이 단 하나라도 있다면 무엇이 합리적 선택인지 말해야만 한다. 이는 생존 가능성이라는 희망이 있고 없고의 문제가 아니다.

  8. 로버트 켈리, 『수렵채집 사회 – 고고학과 인류학』, 성춘택 역, 사회평론아카데미, 2014.

  9. 주인공 민성부터 손바닥 부상이 전혀 치유되지 않고 있었으며 아파트 관리소장의 부상도 시간이 갈수록 악화되었다. 붕괴학에서 항생제나 진통제로 사용할 수 있는 약품에 대한 지식은 필수적이다. 여담이지만 물리적 충돌에서 방패로 쓸 수 있는 물건은 무조건 챙겨야 한다. 무술 고수가 아닌 평범한 사람끼리 근거리 병기를 들고 충돌하면 방패를 가진 사람이 절대 유리하다. 근거리에서 충돌하는 것은 너무 위험한 일이므로 새총 등의 원거리 무기가 낫다. 그러나 의료와 치안이 부재한 상황에서는 타인과 물리적 충돌을 피하고 아예 존재감을 희미하게 하는 것이 최선이다.

  10. 드미트리 오를로프, 『예고된 붕괴』, 이희재 역, 궁리, 2010. 드미트리 오를로프, 『붕괴의 다섯 단계』, 홍기빈 역, 궁리, 2018.

  11. 박권일, 『한국의 능력주의 – 한국인이 기꺼이 참거나 죽어도 못 참는 것에 대하여』, 이데아, 2021.

  12. 치안시스템이 없는 상황에서 폭력적 모욕과 공포로 내부 결속을 추동하려는 집단은 영화처럼 야습으로 절멸될 수밖에 없다. 소규모 공동체의 심판 행위은 공동체의 파열을 봉합하는 축제의 기능을 가져야 한다.

  13. 홍명교, 《콘크리드 유토피아》와 윤석열의 광복절 연설, 매일노동뉴스 칼럼, 2023.

  14. 재난과 붕괴상황에서 모두가 자신의 생존 가능성을 최대화하기 노력할 때 정보의 흐름을 막아 불신을 키우는 것 역시 자멸을 선택하는 것이다.

  15. 김보형, 자산경제의 아포칼립스, 《콘크리트 유토피아》, 『사회붕괴와 문화정치』 발표문, 한국문화연구학회, 2024.

  16. 관리사무소 현황판에 호별로 자가와 전세와 월세가 명시되어 있다.

  17. 황궁 잔치는 영화 내용상 수색대가 노략질을 하던 중 최초로 살인을 하고 돌아오는 날 벌어진다. 슈퍼 주인을 죽이고 털어온 음식을 나눠먹으며 공범의식을 돈독히 하면서, 12월 31일에서 1월 1일로 한 해가 넘어가는 것을 기리는 거나한 송년 의례였다.

  18. 짧은 장면이긴 하지만 이 영화에서 아이들의 부재를 선언하고 진행하는 김선아의 논의는 영화의 장르성에 대하여 잘못 짚어내게 된다. 김선아, 멸망 이후의 ‘우리’:《콘크리트 유토피아》(2023)의 장르와 시간의 문화 정치학, 사회붕괴와 문화정치, 한국문화연구학회, 2024.

조원식

민담과 놀이 이론 독립 연구자.
오랑우탄 에세이 준비 중.
전쟁과 평화의 질문들 세미나 준비 중.

댓글

댓글 (댓글 정책 읽어보기)

*

*

This site uses Akismet to reduce spam. Learn how your comment data is processed.


맨위로 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