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후변화와 마음의 생태학] ① 네스의 심층생태학과 자아실현

기후변화를 막기 위한 노력은 윤리적인 차원을 넘어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있을까? 즉, 기후변화 문제가 우리에게는 생존과 이타심의 문제일까? 이 문제를 경험하고 이 시대를 살아간다는 것은 우리 자신의 성장이나 인생의 의미 또는 목적과도 어떠한 관계가 있지 않을까?

기후변화 시대를 살아간다는 것, 그 심리적인 불편함에 대하여

2019년 여름의 일이다. 당시 내가 속해 있던 모임에서는 주말마다 광화문에 나가 사람들에게 기후변화를 알리는 활동을 시작했다. 그런 활동에 익숙하지 않던 나에게는 가장 적극적으로 움직인 시기였다. 기후변화에 대해 공부하고 그 시급함과 엄중함에 대해 알게 될수록 가만히 있는 것이 서서히 불편해지기 시작했던 것이 나를 비롯한 모임에 있던 대다수 사람들의 심리였던 것 같다. 그렇게 몇 달 광화문에 나가다가 몸도 마음도 서서히 피곤해졌고, 달콤한 주말의 휴식을 포기하고 광화문으로 나가는 우리들의 노력에 비해 얼마나 기후변화를 알리는 효과가 있는지도 서서히 의아해지기 시작했다. 그렇게 흐지부지 나는 모임에서 나오게 되었다.

그 후로는 기후변화 문제와 그리 가깝게 지내지 않았다. 정보는 접하면서도 변함없이 일상을 유지해 나갔고, 한편으로는 그게 더 속이 편하기도 했다. 왜 사람들이 기후문제에 대해 침묵하는지도 너무나 공감할 수 있었다. 아마도 일상에서 환경을 보호하는 소소한 실천을 해나가거나 기후문제에 대해 읽고 관련 현안에 서명을 하는 등 개인적 차원의 실천을 하는 사람들은 꽤 있을 것이다. 그러나 개인의 영역을 넘어서 다른 누군가와 기후문제를 공유하거나 혹은 보다 적극적으로 기후 관련 활동을 하는 것은 이보다 훨씬 드물 것이다. 내가 주변 사람들과 기후문제에 대해 이야기를 하면서 알게 된 것은 의외로 꽤 많은 이들이 전자에 속한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내 그들이 기후변화에 대한 크고 작은 심리적인 불편함을 가지고 있다는 것도 알 수 있었다.

그들은 때로는 기후변화에 대해 모르기를 바라는 것처럼 비춰지기도 했는데, 알면 알수록 가만히 있지도 움직이지도 못하는 신세가 되어 그야말로 이중구속의 상황에 놓여있는 것 같았다. 기후문제의 심각성은 알지만, 탄소 소비를 줄이거나 자신의 주변에 실천적 변화를 일으키는 일들은 감내하기 어려운 희생으로 여기는 듯했다. 나와 대화를 나눴던 한 직장 동료는 이로 인해 발생하는 주변 사람들과의 마찰을 원치 않고, 사람들에게 이상하게 비춰지는 것에 대한 걱정을 이야기했다. 실제 나는 야외에서 진행하는 프로그램에 종이컵 대신 스텐컵을 사용했으면 좋겠다고 팀장님에게 건의를 했지만, 주방에서 컵을 세척하고 관리하는 추가 인건비 문제와 위생에 대한 이유로 불가하다는 답변이 회사로부터 돌아왔다. 이 밖에 다른 일회용품 사용 문제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의 대답이었다. 팀장님은 나의 건의에 성가심을 드러냈고, 나 도 더 이상 불편한 관계를 감수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이후로는 거론하지 않았다.

나의 마음을 들여다보건대 기후변화 문제는 여러 복합적인 감정을 불러일으켰고, 순간순간 상황에 따라 나 자신이 기후변화의 가해자나 피해자, 또는 활동가나 방관자가 되어 있음을 발견하게 되었다. 적극적으로 기후 관련 활동을 할 때는 나의 노력과 희생에도 불구하고 기후변화에 무감각하게 탄소 소비를 즐기는 사람들에 대한 분노감을 느끼기도 했고, 또 반대로 내가 그렇게 일상을 보낼 때면 죄책감을 느꼈다. 기후변화로 직접적인 피해를 입게 되는 소수자들에 대한 슬픔과 연민, 미래에 대한 불안과 걱정 등 수많은 감정의 소용돌이 속에서 기후변화 시대를 살아가고 있었던 것이다.

기후변화 문제와 더불어 일련의 시간을 경험하면서 과연 이러한 부정적인 감정을 어떻게 다루어야 하며, 어떤 마음가짐으로 기후문제를 접해야 좋을지가 하나의 화두가 되었다. 이런 고민 속에서 알게 된 것은 기후변화와 관련된 무언가를 함에 있어 내 안에 어떤 애씀이 있었다는 것인데, 그것은 노력과 희생을 수반하는 도덕적 의무나 윤리적인 당위성이었던 것 같다. 내가 어떠해야 하며, 다른 사람 또한 어떠해야 한다는 윤리적인 잣대로 인해 죄책감과 분노를 주로 경험했던 것 같다. 어쩌면 이성이나 논리로 나 자신을 끌어온 만큼 실제 내 마음은 거기에서 벗어나고 싶어 하는 반동을 일으켰는지 모른다.

그렇다면 기후변화를 막기 위한 노력은 윤리적인 차원을 넘어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있을까? 즉, 기후변화 문제가 우리에게는 생존과 이타심의 문제일까? 이 문제를 경험하고 이 시대를 살아간다는 것은 우리 자신의 성장이나 인생의 의미 또는 목적과도 어떠한 관계가 있지 않을까? 이러한 생각들에 대한 답변을 찾아가며 기후학교 강의를 준비하게 되었다. (이 글은 기후학교 강의 내용을 정리한 것이다.)

나를 실현한다는 것, 여기서 ‘나’는 무엇인가?

괜찮다면, 잠시 내가 이 생에서 이루고 싶은 것, 내가 어떤 삶을 살고 싶은가를 떠올려보자. 자신의 분야에서 인정받는 전문가가 되어 있는 모습을 상상할 수도 있고, 또 단란하고 행복한 가정, 친구들과의 사랑과 우정을 떠올릴 수도 있다. 그것이 구체적으로 어떤 모습이 되었든 각각의 형태는 다르지만, 아마도 보편적으로 우리는 그것을 ‘자아실현’이라는 단어로 표현할 수 있을 것이다. 자아실현의 사전적 의미는 하나의 가능성으로 잠재되어 있던 자아의 본질을 완전히 실현한다는 것으로, 이는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 교육의 지향점이기도 하다. 각 개인이 자아실현을 이룰 수 있도록 돕는 것이 현대 교육의 목표이자 사회의 기본 윤리인 것이다. 어릴 적부터 익히 들어온 단어지만, 다시금 이 단어를 면밀히 들여다본다면 이러한 의문을 품을 수 있다.

우리가 ‘나’라고 여기는 것은, 다시 말해 우리 자신과 동일시하는 것들이라고 볼 수 있다. 우리가 언제 어떤 누군가 혹은 어떤 대상의 기쁨과 아픔을 마치 나에게 일어난 일처럼 기뻐하고 아파했는지를 잠시 떠올려본다면 이에 대한 답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by Amine M'Siouri    출처 : www.pexels.com/ko-kr/photo/2050590/
우리가 ‘나’라고 여기는 것은, 다시 말해 우리 자신과 동일시하는 것들이라고 볼 수 있다. 우리가 언제 어떤 누군가 혹은 어떤 대상의 기쁨과 아픔을 마치 나에게 일어난 일처럼 기뻐하고 아파했는지를 잠시 떠올려본다면 이에 대한 답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사진 출처 : Amine M’Siouri

무엇이 ‘자아’인가? 만약 ‘피부에 둘러싸인 나’를 자아라고 본다면, 여기에 내재된 가능성을 실현한다는 것이 어떤 것일지 쉽게 가늠할 수 있을 것이다. 남들로부터 인정받는 더 좋은 직장이나 직책을 얻어야 하거나 원하는 것들을 이루는 데 집중되어 있을 것이다. 또한 피부 바깥에 있는 것들은 나의 실현을 위해 활용되어야 할 도구나 경쟁을 해야 할 대상으로 여겨질 수도 있다. 이런 협소한 ‘자아’의 개념으로 인해 우리가 사는 세상은 생존과 경쟁의 장, 무언가를 이루거나 얻어야 할 투쟁의 현장으로 투영될 것이다.

만약 자아를 우리가 사랑하는 가족이나 지인들, 또 그 밖에 우리가 동의하고 지지하는 단체들, 신념들로 확장한다면, 그 범위는 조금 더 확대된 감이 있지만 이것들을 실현시키는 와중에 우리는 더 큰, 혹은 더 많은 투쟁을 벌여야 할지 모른다.

우리에게 자아는 무엇이며, 그 경계는 어디까지인가? 우리가 ‘나’라고 여기는 것은, 다시 말해 우리 자신과 동일시하는 것들이라고 볼 수 있다. 우리가 언제 어떤 누군가 혹은 어떤 대상의 기쁨과 아픔을 마치 나에게 일어난 일처럼 기뻐하고 아파했는지를 잠시 떠올려본다면 이에 대한 답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만약 ‘나’가 더욱 확대되어서 보다 많은 것들을 나의 일부로 여기고 그들 모두에게 잠재된 것을 실현하기를 바란다면, 우리의 세상과 이를 바라보는 관점은 전혀 다른 무엇이 되어 있을 것이다.

심층생태학의 또 다른 의미, 자아실현(Self-realization)

노르웨이의 철학자이자 등반가  안 네스(Arne Naess, 1912~2009). 출처: https://www.flickr.com/photos/34596392@N04/3258227175/
노르웨이의 철학자이자 등반가 안 네스(Arne Naess, 1912~2009).
사진 출처: flickr

심층생태학(deep ecology)을 창안한 노르웨이의 철학자 안 네스(Arne Naess)는 심층생태학에 대한 정의 중 하나로 그것을 ‘자아실현(Self-realization)’이라고 표현했으며, 우리가 일반적으로 사용하는 협의의 자아와 구분하기 위해 대문자 S를 사용해서 표기했다. 그에게는 자기를 얼마나 확장해 나가는가가 자아실현을 심화하는 것이자 보다 깊은 생태학(deep ecology)의 의미였던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추구한 self-Realizaion(작은 나의 거대한 실현)과는 정반대의 발상이라고 볼 수 있다.

그는 생태학을 표층(shallow)생태학과 심층(deep)생태학으로 구분 지었는데, 일반적으로 표층생태학이 자연을 인간의 바깥에 두고 인간을 위해 보호해야 할 대상으로 바라보는 것이라면, 심층생태학은 인간을 자연의 일부로 다른 생명들과 평등하게 보는 입장으로 알려져 있다. 철학자인 그답게 여기서 심층생태학은 보다 깊은 질문을 던진다는 의미도 내포하고 있다. 표층생태학이 생태적 문제를 해결함에 있어서 보다 나은 기술의 적용, 자원의 효율 등을 강조한다면, 심층생태학은 사람들이 자연을 바라보고 대하는 근본적인 태도, 즉 인간의 세계관과 가치관, 사회경제 시스템과 정책 등이 생태계에 미치는 영향에 대해 끊임없이 “왜”, “어떻게”를 물으며 보다 깊은 사유를 전개해 나간다. 그리고 ‘자아실현’이라는 의미에 다다를 때 심층생태학은 근본적으로 우리가 ‘어떤 인간이 되어야 할 것인가?’ 하는 존재론적인 질문과도 맞물리게 된다.

당시 전후의 환경 단체들은 환경 문제에 대한 사회적인 인식을 불러 모으고 확산시키는 중요한 역할을 하였으나, 이러한 환경 문제를 촉발시킨 근대 서구 사회의 문화적, 철학적 배경에 대해서는 미처 인지하지 못한 상태였다. 네스가 인간이 자연을 바라보는 도구적인 관점 자체를 지적하고, 인간이 무수한 생태계의 연결망 속 일부임을 강조했던 것은 당시로서는 새로운 통찰이었다.

또한 그가 자신의 철학을 아카데미의 영역에만 가두어놓지 않고, 실제 자신의 삶에서 실현하고자 했음은 그의 생애를 통해 엿볼 수 있다. 전후 시기까지 비폭력 저항운동, 평화 운동을 해오던 그는 보다 자유롭게 생태 운동에 가담하기 위해 오슬로 대학의 교수직을 그만두고 생태운동가로 전향했다. 그와 관련된 일화로는 1970년 마르돌라의 수력발전소 댐 건설에 반대하기 위해 폭포 반대편에 위치한 바위에 몸을 결박한 채 건설 계획을 철회할 때까지 내려오지 않겠다며 저항했던 사건이 있다. 그와 함께 바위에 매달렸던 많은 시위대들은 경찰에 의해 강제로 끌려 내려졌고, 결국 댐 건설은 막지 못했다. 그럼에도 명문대 교수였던 그가 경찰에 체포되어 끌려가는 영상은 많은 이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고, 이러한 사회 운동에 큰 무게를 실어주었다.

네스는 스피노자로부터 깊은 영감을 받았으며, 하나의 실체(신)를 지닌 전체(자연)를 깨달아가는 과정이 곧 자아실현(Self-realization)이라고 보았다. 그에게 있어 스피노자의 철학을 삶으로 구현한 인물은 간디였다. 간디는 자신을 따르는 이들이 외적인 실천은 도외시한 채 오로지 영적 수행에만 전념하는 것을 마음 아파했고, 이러한 것이 그에게는 영적 이기주의로 비춰졌다. 그는 최고의 경지에 이르기 위해 사회의 복잡한 문제들과 싸우는 외적인 행동이 필요하다고 생각했으며, 다양한 의미에서 ‘자아실현’이라는 용어를 사용했다. 그는 마을 사람들에게 봉사할 때조차 그 자신에게 봉사하는 것뿐이라고 하며, 마을 사람들에 대한 봉사를 통해 자아실현을 추구하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그에게 있어 자신의 실현과 주변인들의 실현은 분리할 수 없는 것이었다. 즉, 그에게는 모든 생명이 본질적으로 하나였고, 그가 추구한 자아실현은 진리의 실현, 신의 실현과 동일한 발달선 상에 놓여있었다.

윤리가 아닌 욕망으로서의 자아실현(Self-realization)

프랑스의 생태철학자 펠릭스 가타리(Felix Guattari)는 자연생태, 사회생태와 더불어 마음생태를 언급하며, 우리의 마음이 하나의 생태라는 새로운 관점을 건넸다. 생태란 서로 연결되고 유기적으로 영향을 주고받는 그물망에 비유할 수 있기에 연결된 마음은 곧 주변의 공동체와 사회 전체에 자연스레 변화를 일으키게 된다. 가타리는 그러한 분자혁명을 꿈꾸며, 연결망 속에서 새롭게 생산되는 주체성 그리고 욕망을 이야기한다. 생명과 정동의 역동적인 욕망은 자연스레 윤리나 의무, 이기심과 이타심을 뛰어넘어 모든 존재가 자신을 실현하게끔 그 스스로를 실현시켜 나간다. 가타리가 표현한 욕망은 네스가 추구했던 자아실현 속에서 발견할 수 있지 않았나 생각해 본다. 말년의 네스는 지난 30년 간의 모든 연설, 저술, 정치적 활동을 통해 이루고자 했던 것은 자아실현(Self-realizaion)이자 신과의 대면이었으며, 그의 생활, 행동, 존재의 의미 역시 이 목표를 지향하는 것이었다고 말한다.

네스의 심층생태학과 그의 삶을 통해서 이 생에서 추구해야 할 것이 무엇인가를 다시금 생각해 볼 수 있었고, 마치 내가 자아실현(self-realization)을 추구하듯 보다 넓고 많은 내가 그 씨앗을 움트고 열매 맺을 수 있게끔 돕는다면 거기에는 애씀과 노력이 불필요할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사실 이 글을 쓰는 데 많은 망설임이 있었는데, 나조차 소화하지 못하고 실천하지 못하는 내용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강의를 준비하고 정리하는 과정에서 일어났던 사유들이 나로 하여금 삶을 보다 전체적으로 바라볼 수 있도록 도왔고, 다양한 학자들의 관점들이 나에게 영감을 불러일으켰듯 누군가에게도 그러할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용기 내여 글을 시작한다. 다음 회기에도 기후변화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의 팍팍한 마음을 확장시키고 연결시킬 수 있는 또 다른 학자의 사상을 소개하기로 하며 이번 회는 여기서 마친다.

문윤형

생태와 영성 그리고 마음에 관심을 갖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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