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3 내란의 날, 그날 밤 소식을 접했을 때 생생한 충격은 세월호 침몰사고 뉴스를 처음 화면으로 보았을 때처럼 각인되어 있다. 그날 밤 일찍 잠들었던 나는 나중에서야 현장에서 일어난 온갖 일들을 유튜브를 통해 알았다. 얼마 후 방송사에서 공식적으로 아카이브 하기도 한 그날 밤의 시민들 중에 내 인상에 남은 건 장갑차를 맨 먼저 막아선 젊은 남성의 모습이었다. 혼자서 그 육중한 철갑 앞에 선 남성은, 장갑차가 앞으로 바퀴를 돌리려는 순간 물러서기는커녕, 앞으로 숙이며 그 위협을 온 몸으로 받아내듯 밀어붙였다. 훗날의 인터뷰에서 그는 장갑차를 보는 순간 막아야 한다는 생각이 먼저 앞섰다고 했다. 그는 훈련된 군인도 누군가의 명령을 받은 사람도 아니었다. 평범한 한 개인의 자발적인 용기, 안티고네가 가졌던 그것.
크레온이 역적의 시체를 묻지 말라고 국가에 포고령을 내렸을 때, 그가 원했던 것은 공포 앞에 온 백성이 길들고 순응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생각지도 못한 반항, 그 역적의 여동생이 분연이 일어나 맞섰던 것처럼 12월 3일의 밤 이 사회의 시민들은 공포에 질리거나 위축되거나 숨지 않고 오히려 거리로 밀려나왔다. 국회를 둘러싸고 군인들을 막아내고 계엄해제를 끌어냈고 그 후로도 몇 개월간 지루하게 이어진, 법적, 정치적, 시민들 간의 양분된 공방 속에서 조금이라도 잘못된 길로 흘러가지 않도록 민주주의를 보호해낸 끝에, 우리는 마침내 민주적 정의를 회복했다.
이 모든 과정에서 광장을 채운 수만의 응원봉 불빛, 12,3 내란의 밤에서 이어진 과정을 상징하는 ‘빛의 혁명’이라는 이름을 부여하는 그 모습을 보면서 많은 사람들이 물었을 것이다. 나 역시 궁금했다. “저 많은 빛들은 어디서 왔으며, 어디로 가야 할까?”
– 응원봉을 든 광장의 안티고네들에게 by 주호 2025년 9월 11일
내 모습은 만들어졌다. 사회가 요구하는 여성상에 부합하지 않았던 나의 실제 모습은 두꺼운 알을 깨고 세상 밖으로 나오고자 부단히 노력했지만 결혼이라는 제도 안에서 다시 감춰졌다. 이분법적으로 역할이 주어질 결혼생활을 상상하면 구역질이 나서 비혼을 선언하려 했다. 그러다 나와 달리 여성성을 지닌 남성을 만나 관계를 맺고 말았다.
(중략)
그렇게 내 안의 남성성과 여성성은 견제하고 견제받으며 줄다리기를 한다.
남성성을 상징하는 폭력적이고 권위적인 질서 또는 그러한 모습이 나오는 것을 경계하지만, 더불어 여성성을 상징하는 조신하고 순종적인 모습 또한 멀리한다. 결정이 필요할 때는 과감하지만 어려움에 처한 존재를 만나면 약해진다. 각각의 성향은 상황에 따라 더 크게 발현되기도 하고, 발현되지 않기도 한다. 나의 생물학적 모습(외형)은 여성이니까, 나의 성별은 남성 40%, 여성 60%쯤 되는 것 같다(적어도 지금은). 모든 이가 자신에게 내재된 여성성 또는 남성성을 발견한다면 더이상 성별로의 구분이 의미가 있을까. 나에게 젠더정의란 그렇다. 남성성과 여성성, 그중 어떤 하나가 좋고 다른 하나는 나쁘다가 아니라, 서로 견제하며 균형을 이루는 것. 그러나 어쩌면 억압적인 남성성이 자연 상태에서는 강자가 되어 약자의 목소리를 감춰버릴 수 있으니 약자에게 조금 더 섬세하게 귀 기울이는 것. 하지만 이 글의 가장 큰 오류는 남성성과 여성성이라는 단어가 연상시키는 이미지 또한 사회가 만들어낸 것이라는 사실이다.
– 결혼이라는 알[卵] by 호호 2024년 3월 11일
현대 자본주의 사회가 만들어 낸 삶과 노동의 분리, 가시 경제와 비가시 경제의 분리는 노동 사이에 위계질서를 세워냈다. 보이지 않는 노동을 하는 사람은 인간으로서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하지 않는 하등 인간 취급당한다. 그러나 가시 경제 속에서 노동을 하는 인간은 자각하지 못할 뿐, 자본가를 위해 삶을 바치는 노예의 삶을 산다. 자본가가 원하는 노동을 수행하기 위해 스스로의 삶을 돌보지 못한다. 그러면서도 자신의 삶을 지탱해주는 돌봄 노동을 무시한다. 이러한 사회에서는 인간과 인간 사이의 관계에 왜곡이 생기고 모순이 발생할 수밖에 없다. 임금 노동의 삶은 필히 가정 노동, 자급 노동이 있어야만 성립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자급 노동의 가치는 집에서 살림이나 한다는 말로 폄하된다.
지난 시간 동안 한국에서, 혹은 세계에서 진행되어온 페미니즘은 남성이 만든 가부장적 자본주의의 세계에서 여성이 인정받는 것이었다. 가정에서 자급 노동을 담당하던 여성들이 주류 경제에 편입되기 위해 경제활동에 뛰어든다. 그러나 이는 여성의 자율성을 보장해주지 못한다. 현대사회의 추동력은 가부장적 자본주의다. 현대의 모순은 자본의 축적과 영원한 상속을 위해 남성이 여성을 억압하고 지배하던 역사에서 시작되었다.
(중략)
우리는 다시 노동을, 가정으로 돌려보내야 한다. 애초에 살림이란 글자 그대로 무언가를 살게 하는 행위를 이야기한다. 본래 살림은 나와 가족을 먹고 살도록, 생을 이어가도록 해주는 거룩한 행위이다. 노동을 위한 노동, 자본을 위한 자본의 논리를 답습하는 것은 주체적인 삶의 행위자를 만들어내지 못한다. 그러한 타율적 노동은 사람을 살게 하는 자유로운 노동이자 궁극적인 원천이 되지 못한다. 더 좋은 보수는 더 유능한 노예라는 의미에 그칠 뿐이다. 앞으로의 페미니즘은 경제 구조 자체에 균열을 내고, 뿌리부터 바꾸어 나가는 방향으로 전개되어야 할 것이다. 삶과 노동의 분리를 끝내고 다시 살림살이의 기술을 되찾을 때 우리를 옭아매는 권력구조에 비로소 변화가 올 것이다.
– 페미니즘: 살림의 경제학 by 조윤지 2023년 11월 18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