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미니즘: 살림의 경제학

여성의 노동이 비가시화됨과 동시에, 여성의 노동은 그 자체로 하찮고 열등한 것으로 여겨졌다. 하지만 (백인) 남성을 기준으로 상정된 임금 노동 중심의 가시경제는 결국 생태적 위기를 맞이했으며, 인간의 존재 목적을 오로지 노동과 생산성으로 해석하는 치명적인 오류를 낳았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 우리는 경제의 구조를 뿌리부터 바꿀 필요가 있다.

인류가 지구상에 존재해 온 수백만 년의 시간 이래, 역사상 이러한 분리를 겪은 적은 없었다. 이전까지 인류는 노동과 휴식의 명확한 경계를 두지 않고 살아왔다. 노동이 곧 휴식이 될 수 있고, 삶이 곧 노동을 통해 성립해왔다. 일상 속에서 행해지는 노동은 곧 우리의 살림살이와 직결되는 노동이었다. 예컨대 밥을 짓고, 옷을 짓고, 집을 지으며, 농사를 짓는 식이었다. 그렇게 인류는 스스로의 삶을 직접 지으며 살아왔다.

그러나 이러한 삶의 모양새에 대격변이 일어났다. 산업혁명과 맞물린 헨리 포드식 대량생산은 근대 자본주의의 서막을 알렸고, 이전까지 인간으로서 삶을 지속해 나가기 위한 재생산 노동-돌봄 노동-과 자본 축적을 위한 임금 노동의 분리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바야흐로 분리의 경제로 접어들기 시작한 것이다.

여성이 가정에서 해온 노동은 인간이 살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돌봄이다.
사진 출처 : Lisa Fotios

이전까지 경제, 즉 이코노미(economy)는 살림살이와 동일한 것으로 여겨졌다. 경제를 뜻하는 이코노미는 살림살이를 뜻하는 오이코스에서 유래했다. 경제생활은 곧 스스로의 의식주를 직접 충당하는 노동으로 이해되었고, 이러한 노동은 출퇴근의 개념이 존재하지 않았다. 삶의 절대적 필요 여하에 의해 진행되는 노동이었으므로 자급적인 성격을 띠며, 모든 것은 가정에서 이루어졌다. 간혹 예외적으로 물물교환이나 작은 규모의 무역은 존재했으나 주된 것은 역시나 지급 생산이었다. 생산과 소비가 모두 눈에 보이는 범위 내에서 이루어졌다. 여성과 남성의 노동 영역은 크게 구별되지 않았으며, 여성의 노동이 불필요하고 무가치한 것으로 여겨지거나, 비가시화되는 일도 없었다. 언제나 경제의 중심이 가정의 재생산 노동에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서구 근대 자본주의와 세계화된 무역 경제 이후, 모든 상황이 달라졌다. 더 이상 경제와 살림살이는 동일한 의미가 아니게 되었다. 오히려 그 반대의 위치에 서게 되었다. 서구식 근대 자본주의에서는 오로지 화폐 경제만이 주류 경제로서 인정받았다. 이제 임금 노동이 자급 노동의 자리를 꿰차고 생계유지의 필수 조건으로 안착했다. 임금 노동의 자격을 부여받는 것은 건장한 성인 남성이었다. 출산과 육아라는 자연적 신체 특성은 생산성의 세계에선 방해물에 불과했다. 자본의 세계에선 24시간 언제나 노동할 수 있는 기계와 같은 신체가 우상이었다. 그에 반해 여성의 신체는 자연의 영향을 더 많이 받는다. 이러한 특성이 임금 노동의 수요에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여성의 신체는 그 자체로 열등하게 여겨졌다. 여성은 남성과 자본, 자본가들과 기계가 만들어 낸 주류 경제의 영역에서 배척당했다. 그와 동시에 여성의 노동은 주류 경제인 화폐 경제에 편입되지 못했다는 이유로 인해 그림자처럼 여겨졌다.

기실 여성이 가정에서 해온 노동은 인간이 살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돌봄이었다. 인류가 생존해 온 600만 년의 시간 동안 늘 필수로 수반되었던 것은 여성의 노동이다. 그러나 산업 자본주의 이후 돌봄은 보이지 않는 것이 되었다. 임금 노동자의 재생산을 위해서 반드시 필요한 노동이지만 아무도 그것의 존재에 대해 신경 쓰지 않았다. 노동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면 당연히 따라붙어야 하는 것으로 여겨짐과 동시에 자본 축적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는 이유로 폄하되었다. 가정과 경제의 분리는 여성을 보이지 않는 공간인 가정으로 밀어 넣었고, 동시에 보이지 않는 구성원으로 취급했다. 주류가 된 화폐 경제는 생산자와 소비자의 분리, 생산지와 소비지의 분리, 노동과 삶을 분리시켰다. 여성적 노동-돌봄 노동과 재생산 노동-은 더 이상 생산적 활동으로써 인정받을 수 없게 되었으며, 가정 역시도 생산의 영역이 아니라 단순한 소비의 공간이 되어버렸다.

이러한 경향은 신자유주의 경제체제가 더욱 극대화되면서 갈수록 뚜렷해졌다. 신자유주의 시대에 접어들고 나서는 화폐 경제의 권력이 커지면서 오로지 임금 노동밖에 보이지 않는 현상이 발생했다. 어느덧 인간의 삶은 임금 노동과 소비로만 구성될 수 있는 것으로 이해되었다. 인생의 시간을 임금 노동에 바치고, 그 외의 시간은 임금 노동을 위한 재충전의 시간이자 소비의 시간으로 주객이 전도되었다. 이제 가정 경제의 중심이자 인류의 원천이었던 재생산 및 돌봄 노동, 쉽게 말해 가사는 기피해야 할 일이 되었다. 최대한 시간을 아껴야 하는 일, 혹은 이윤 창출의 수단이 아니라는 이유로 하찮은 일처럼 여겨졌다. 현대인은 자신의 삶과 직접적인 관련이 없는 노동을 하느라 하루의 기력을 모두 소진하는 탓에 정작 스스로의 삶을 돌볼 시간과 기력은 잃어버렸다. 자기 자신을 재생산하는 활동, 충전하는 활동, 즉 다시 말해 인간의 본래 삶이었던 먹고 자고 입는 활동은 모두 상품의 영역에 흡수되었다. 인간은 스스로의 살림살이를 시장에 외주 맡기며 살아가게 되었다. 가정에서 이루어지는 일은 귀찮고, 무가치하며 상품으로 해결하면 그만인 일이 되고야 만 것이다.

현대 자본주의 사회가 만들어 낸 삶과 노동의 분리, 가시 경제와 비가시 경제의 분리는 노동 사이에 위계질서를 세워냈다. 보이지 않는 노동을 하는 사람은 인간으로서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하지 않는 하등 인간 취급당한다. 그러나 가시 경제 속에서 노동을 하는 인간은 자각하지 못할 뿐, 자본가를 위해 삶을 바치는 노예의 삶을 산다. 자본가가 원하는 노동을 수행하기 위해 스스로의 삶을 돌보지 못한다. 그러면서도 자신의 삶을 지탱해주는 돌봄 노동을 무시한다. 이러한 사회에서는 인간과 인간 사이의 관계에 왜곡이 생기고 모순이 발생할 수밖에 없다. 임금 노동의 삶은 필히 가정 노동, 자급 노동이 있어야만 성립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자급 노동의 가치는 집에서 살림이나 한다는 말로 폄하된다.

더 좋은 보수는 더 유능한 노예라는 의미에 그칠 뿐이다.
사진출처 : kirill_makes_pics

지난 시간 동안 한국에서, 혹은 세계에서 진행되어온 페미니즘은 남성이 만든 가부장적 자본주의의 세계에서 여성이 인정받는 것이었다. 가정에서 자급 노동을 담당하던 여성들이 주류 경제에 편입되기 위해 경제활동에 뛰어든다. 그러나 이는 여성의 자율성을 보장해주지 못한다. 현대사회의 추동력은 가부장적 자본주의다. 현대의 모순은 자본의 축적과 영원한 상속을 위해 남성이 여성을 억압하고 지배하던 역사에서 시작되었다.

5000년 전 시작된 자본 상속과 축적이라는 욕망은 영역을 넓혀갔다. 전쟁과 식민 지배, 부족 간의 싸움으로 사회는 가정을 벗어나 크기를 더 키워갔다. 가정의 일이 전부였던 인류의 삶에 공적 영역이 발생했다. 그 영역의 지배자는 오로지 남성이었다. 인류 역사에서 가정을 떠나있었던 시간은 사실상 식민화와 착취의 이데올로기가 지배한 시간이다. 가부장제가 만들어 낸 인간과 인간 사이의 위계질서는 여성을 억압했고, 동시에 자연을 억압했다. 팽창하는 욕망을 뒷받침하기 위해 약자의 노동력과 자연의 생산력을 갈취했다. 그러한 방식으로 만들어져 온 문명은 결국 자연이 무너짐과 함께 붕괴되었다.

현대 사회는 반복되어 온 인간 역사의 실수를 거듭하고 있다. 현대에서 살림살이란 그저 골칫덩이로 여겨진다. 인간을 먹여 살리기 위해 필수적으로 해야 하는 노동은 바쁜 현대인의 삶에서 가장 배척당하는 영역이다. 가정에서 이루어져 온 여성의 돌봄 노동이 점점 상품화되고 시장 의존적으로 변해갈수록, 더 많은 약자들이 더 많은 사람들의 돌봄을 책임져야 한다. 세상의 약자들은 결국 여성화된다. 각자가 의식주를 스스로 해결하는 대신 자본 생산을 위해 자신을 희생 할수록, 주류 경제를 이끌고 가는 이들의 의식주는 세계의 변두리에 떠맡겨진다. 지구 변방에서 세계인의 의식주를 지탱해주는 것은 다시 여성들이다. 맥잡(McJob)으로 통칭되는 열악한 임금 노동에 다시 여성을 의존하게 만든다. 기존의 세계에서 여성이 주류가 되려 할수록 역설적이게도 여성이 자유를 박탈당한다. 끝없는 욕망의 추구를 기반으로 한 현대 사회는 착취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없게 만든다. 동시에 이러한 형태로 우리의 살림살이를 보이지 않는 영역에 떠맡김으로써 생태적 한계를 맞이했다. 인간 사이 극명하게 벌어진 위계는 자연의 조화를 무너뜨렸다. 세계적으로 벌어진 살림살이 노동 분업과 외주화가 초래한 결과다.

우리는 다시 노동을, 가정으로 돌려보내야 한다. 애초에 살림이란 글자 그대로 무언가를 살게 하는 행위를 이야기한다. 본래 살림은 나와 가족을 먹고 살도록, 생을 이어가도록 해주는 거룩한 행위이다. 노동을 위한 노동, 자본을 위한 자본의 논리를 답습하는 것은 주체적인 삶의 행위자를 만들어내지 못한다. 그러한 타율적 노동은 사람을 살게 하는 자유로운 노동이자 궁극적인 원천이 되지 못한다. 더 좋은 보수는 더 유능한 노예라는 의미에 그칠 뿐이다. 앞으로의 페미니즘은 경제 구조 자체에 균열을 내고, 뿌리부터 바꾸어 나가는 방향으로 전개되어야 할 것이다. 삶과 노동의 분리를 끝내고 다시 살림살이의 기술을 되찾을 때 우리를 옭아매는 권력구조에 비로소 변화가 올 것이다.

조윤지

여성해방과 자연해방을 소명으로 삼아, 천혜의 자연에 따른 마을 공동체로 이루어진 평화로운 지구가 도래하는 꿈꾸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반농반어로 바다밭과 땅밭을 모두 가꾸는 농사꾼 인어가 되는 것이 꿈입니다. 궁극적으로 생태아나키즘을 추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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