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양철학 조각모음] ⑰ 쉽고 단순한 것에 도가 있다- 이간지도(易簡之道)

한국 사람이라면 극기복례(克己復禮)라는 말은 모를지언정 극기라는 말은 들어보았고 그 뜻을 설명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극기를 쉽고 단순한 것이라고 선뜻 말하게 되지는 않는 듯하다. 이런 현실과는 다르게 유교에서 극기복례를 ‘쉽고 단순한 삶의 방식’ 즉 이간지도(易簡之道)라고 설명하기도 한다.

극기(克己)

극기(克己)라는 한자어를 문자 그대로 풀이하면 ‘자기를 이김’이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은 사람이 보다 나은 삶을 위하여 유지하여야하는 태도라고 할 수 있는 것이었다. 그래서인지 20세기 초·중등 교육과정에는 이것이 바람직한 태도로 제시되어 있었다. 또한 이 말은, ‘해병대 훈련소 입소’를 연상시키는, 군사문화의 잔재 아니냐는 의심의 대상이기도 하다. 그래서인지 21세기 들어 이 말은, 금주·금연 등과 같이 심각한 부작용이 예상되는 의존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결단 따위와 연관될 뿐인, ‘비일상적’인 말이 된 듯하다. 또한 이 말은 많은 사람들에게 ‘너무 낡았다’는 인상을 주는 듯하다. 아닌 게 아니라 이 말은 정말 오래된 말이다. 『논어』에 나와서 유명해진 말인 것이다.

『논어』 제12편 「안연」 제1장의 앞부분

『논어』 제12편 「안연」 제1장1 의 앞부분은 다음과 같다.

“안연(顔淵)이 인(仁)을 묻자, 공자(孔子)께서 말씀하셨다.” “자기의 사욕(私慾)을 이겨 예(禮)에 돌아감이 인(仁)을 하는 것이니, 하루 동안이라도 사욕(私慾)을 이겨 예(禮)에 돌아가면 천하(天下)가 인(仁)을 허여하는 것이다. 인(仁)을 하는 것은 자기 몸에 달려있으니, 남에게 달려있는 것이겠는가?”2

‘자기의 사욕(私慾)을 이겨 예(禮)에 돌아감’은 ‘극기복례(克己復禮)’의 번역이다. 성백효는 기(己)를 ‘자기의 사욕(私慾)’이라고 번역한 것이다. 이러한 번역의 바탕에는 욕(慾)을 사(私)와 짝지우고 예(禮)를 공(公)과 짝지우면서 양자를 대비시켜 보는 사고관습이 깔려있다고 말할 수있다. 이러한 번역·해석을 받아들이는 사람들은 아마도 사람들이 원래 공적일 수밖에 없는 존재들이라고 생각할 듯하다. 그리고 그들은 욕(慾)이 한 사람[기(己)]을 공적인 조건을 무시하는 존재[사(私)]로 만든다고 생각할 듯하다.

『논어』 제12편 「안연」 제1장의 앞부분에서 공자는 “위인유기 이유인호재(爲仁由己 而由人乎哉)” 라고 하면서 자신의 말을 끝냈다. 성백효는 이를 “인(仁)을 하는 것은 자기 몸에 달려있으니, 남에게 달려있는 것이겠는가?” 라고 번역하였다. ‘유기(由己)’를 “자기 몸에 달려있으니” 라고 번역하였다. 이 부분은 “나로부터 말미암는 것이니” 라고 번역할 수도 있었던 것으로 보이기도 한다. 기(己)가 남[인(人)]에 대비되는 ‘나’를 뜻하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기(己)는 그저 ‘나’ 혹은 ‘자기’로 새기면 되었을 듯도 한데, 성백효는 왜 굳이 ‘자기 몸’이라고 새겼을까? 이러한 의문의 답을 찾을 수 있는 실마리는 『논어』 제12편 「안연」의 제1장 뒷부분에 있는 듯하다.

『논어』 제12편 「안연」 제1장의 뒷부분

『논어』 제12편 「안연」 제1장의 뒷부분3 은 다음과 같다.

“안연(顏淵)이 “그 세목(細目)을 묻겠습니다.” 하고 말하자, 공자(孔子)께서 말씀하셨다. “예(禮)가 아니면 보지 말며, 예(禮)가 아니면 듣지 말며, 예(禮)가 아니면 말하지 말며, 예(禮)가 아니면 동(動)하지 마는 것이다.” 안연(顏淵)이 말하였다. “제(回)가 비록 불민(不敏)하오나 청컨대 이 말씀에 종사하겠습니다.”4

여기에서 공자는 보기·듣기·말하기·움직이기 즉 시청언동(視聽言動)을 모두 예(禮)를 기준으로 행하라고 권하고 안연은 그렇게 하겠다고 한다. 이를 모두 ‘자기’[기(己)]가 몸을 움직여서 행하여야 하는 것이다. 이러한 점을 보면 기(己)를 그냥 자기가 아니라 자기 몸이라고 보고 그렇게 번역한 것이 이해가 가기도 한다.  

「사물잠」

일찍이 송나라 때의 도학자 정이(程頤)[1033~1107]는, 중(中)과 외(外)의 구분을 적용하여, 욕(慾)을 사(私)와 짝지우고 예(禮)를 공(公)과 짝지우면서 양자를 대비시켜 보는 사고관습을 나름대로 설명하였다. 정이는 『논어』 제12편 「안연」 제1장의 뒷부분에 나오는 보기·듣기·말하기·듣기[시청언동(視聽言動)]와 관련하여 다음과 같이 해설하였다.

“시·청·언·동 이 네 가지는 몸[신(身)]의 용(用)인데 심중(心中)으로 말미암아 밖에 응하는 것이니, 밖에 제재함은 그 심중을 기르는 것이다. …… 인하여 잠을 지어서 스스로 경계하노라.”5

중첩된 사물들이 시야를 가린 상태에서 세상을 보려면, 보려고 하는 자가 자리를 옮겨야 한다. 사진 출처 : Resource Database

정이가 중(中)이라고만 써 놓은 것을 성백효는 심중(心中)이라고 의역하였다. 이러한 의역에 따르면, 보는 행위[視]는 마음[中]이 밖[外]에 응하는 것이니, 밖[外]을 제어함으로써 마음의 힘을 기름[養其中]이 비롯된다고 할 수 있다. 마음이 밖을 좌우하는 것이라고 한 것이 아니다.

위 인용문에서 “잠을 지어서 스스로 경계하노라” 라고 한 것에서 볼 수 있듯, 정이는 시·청·언·동[四]이 삼가야할 바[勿]를 전하는 교훈[箴]이라는 뜻의 글 「사물잠(四勿箴)」6 7 을 지었다. 그 가운데 ‘시잠(視箴)’8 은 다음과 같다.

“마음이여! 본래 허하니, 물건을 응함에 자취가 없다. 마음을 잡음에 요점이 있으니, 보는 것이 법이 된다. 물건이 눈앞에서 가리워 사귀면 마음이 옮겨가니, 밖에서 제어하여 안을 편안하게 하여야 한다. 사욕을 이겨 예(禮)로 돌아가, 오래되면 저절로 될 것이다.”9

여기에 보이는 바와 같이 ‘시잠’에는 “밖에서 제어하여 안을 편안하게 하여야 한다[制之於外 以安其內]” 라는 구절이 있다. 마음을 잡음에 요점이 있다고 했으면서도, “물건이 눈앞에서 가리워 사귀면[蔽交於前]” 즉 달리 말하자면 중첩된 사물들이 시야를 가린 상태에서 세상을 보려면, 보려고 하는 자[中]가 자리를 옮겨야한다[遷]고 하였으니, 이 또한 마음이 밖을 좌우하는 것이라고 한 것이 아니라 밖의 변화에 마음이 대응하여야 함을 말한 것인 셈이다.

이간지도(易簡之道)

예(禮)는 관계를 원만히 하기 위해서 행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그것은 ‘혼자 있을 때’는 문제되지 않을 듯도 하다. 그러나 『논어』 제12편 「안연」 제1장에 따르면, 그 예(禮)는 ‘혼자 있을 때’도 문제되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원래 관계 속에서 살아갈 수밖에 없는 존재 다시 말해 공적(公的)일 수밖에 없는 존재들이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사람의 삶에서 그 본래적 존재성이 유지되는 시간이 순간에 지나지 않는다고, 유교적 교양인들은 생각한 듯하다.

예를 지키며 산다는 것은, 주어진 조건 앞에 겸손하게 사는, 쉽고 단순한 삶의 방식 즉 이간지도(易簡之道)를 삶에서 유지하는 것이다. 사진출처 : Vlado Paunovic

관계 속에서 살아가기 마련인 인간을 그 본래적 존재성에서 벗어나게 하는 것이 욕(慾)이라는설명은, 겉으로 보기에 쉬워 보이지만, 무엇이 문제되는 욕(慾)인지를 정의하여야하는 선결과제를 매순간 요구하고 있는 것일런지도 모른다. 정이가 말한 바 “밖에서 제어하여 안을 편안하게 하여야 한다[制之於外 以安其內]”라고 하는 것은 이런 선결과제를 해소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이는 바깥[외(外)]과 대결하라는 말이 아니었을 것이다. 바깥 즉 주어진 것을 받아들이면 마음이 편해진다는 말이었을 것이다. 이와 같은 해석이 맞다면, 공자로부터 정이에 이르기까지, 천년이 훨씬 넘는 긴 세월을 지내고나서야, 예를 지키며 산다는 것은, 주어진 조건 앞에 겸손하게 사는, 쉽고 단순한 삶의 방식 즉 이간지도(易簡之道)를 삶에서 유지하는 것임을 정리해내게 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易)는 쉬운[easy] 것이고, 간(簡)은 단순한[simple] 것이다. 앞서 짧게 인용한 정이의 말에 따르면, 바깥을 받아들이면 쉽고 단순해지는 것이다.

천년이 훨씬 넘는 긴 세월동안 수많은 유교적 교양인들이 쌓은 말과 실천의 맥락 위에서 보면, 바깥을 받아들이면 쉽고 단순해지는 것이 맞다. 한편, 꽤 오랜 세월 동안 대를 이어가며 사람들은, 개인의 권리와, 의지의 자유와, 개성의 실현을 위하여 분투하여왔고, 상당 수준 그것을 이루었으나, ‘아직 배가 고픈’ 상태에 놓여있다. 그런 사람들에게 바깥을 받아들이면 삶이 쉽고 단순해지며 결국은 그게 명랑하고 즐거운 것이라고 말해 주는 것은, 모욕적인 훈계일 수 있다. 관건은 지금 여기에서 ‘바깥’이 받아들일 수밖에 없으며 받아들일 만한 것이냐 아니냐 하는 것일 듯하다. 어느 때 어느 곳에서 누군가에게는 너무나도 쉽고 단순해 보이는 것이 다른 어느 때 어느 곳의 다른 누군가에게는 너무나도 어렵거나 불편하거나 심지어 불필요한 것일 수 있다.

그렇지만, 적어도 지금 여기 대한민국에 사는 한국인들은 때때로 이 이간지도를 돌아봐야 할 운명에 처해있는 듯하다. 한국인들이 처한 현 단계가 이간지도를 요청해서가 아니다. 한국 문화 전통 만큼 이간지도에 ‘쩔어 있는’ 문화 전통이 없기 때문이다. 한국 사람들은 자기도 모르게 이미 유교인으로 태어나 있다고 보아야할 것이다. 그런 한국인들이 사는 오늘의 남한사회는 세계에서 가장 강력하게 자본주의화된 세계이다. 이런 세계 속에서 어떤 한국인은 자기가 자본주의에 제대로 적응하지고 못하고 그렇다고 제대로 비판하고 극복하지도 못하는 상태에 놓여있다는 느낌을 가질 수 있다. 자기의 무의식 깊은 곳에 현실 적응을 가로막는 어떤 무의식이 도사리고 있다는 답답함을 느낄 때가 있을 수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그 무의식을 점검하여보고자 할 때, 앞서 말한 이간지도의 얼개를 알고 있는 것이 작지 않은 도움이 될 수 있을 것 같다.


  1. 朱熹[撰], 成百曉[譯註], 『懸吐完譯 論語集註』, 東洋古典國譯叢書 1, 서울 : 社團法人 傳統文化硏究會, 1990, 228~230쪽.

  2. 『懸吐完譯 論語集註』, 228쪽. “顔淵問仁한대 子曰 克己復禮爲仁이니 一日克己復禮면  天下歸仁焉하리니 爲仁由己니 而由人乎哉아”

  3. 朱熹[撰], 成百曉[譯註], 『懸吐完譯 論語集註』, 東洋古典國譯叢書 1, 서울 : 社團法人 傳統文化硏究會, 1990, 228~230쪽.

  4. 『懸吐完譯 論語集註』, 229쪽. “顔淵曰  請問其目하노이다 子曰 非禮勿視하며 非禮勿聽하며 非禮勿言하며 非禮勿動이니라 顔淵曰  回雖不敏이나 請事斯語矣리이다”

  5. 『懸吐完譯 論語集註』, 229쪽. “四者는 身之用也라 由乎中而應乎外하나니 制於外는 所以養其中也라 …… 因箴以自警하노라” [주희가 『論語』를 해설하면서, 정이의 『論語』 비평을 인용한 것의 일부분]

  6. 程頤, 「四勿箴」, 黃堅[撰], 成百曉[譯註], 『懸吐完譯 古文眞寶』 後集, 東洋古典國譯叢書 23, 서울 : 社團法人 傳統文化硏究會, 1994, 432~433쪽.

  7. 꽂다·지르다·경계하다 등으로 뜻풀이가 되는 잠(箴)이라는 글자는 기독교 성서 『구약』의 한 권인 「잠언(箴言)」[The Book of Proverbs]을 떠올린다. ‘Proverbs(프로버브스)’는 지혜와 교훈을 주는 짧은 속담이나 격언을 뜻한다.

  8. 『古文眞寶』 後集에 실려있는 「四勿箴」에는 시잠(視箴)·청잠(聽箴)·언잠(言箴)·동잠(動箴)이라는 낱말이 적혀있지 않다.

  9. 程頤, 「四勿箴」, ‘視箴’: 心兮本虛하니 應物無迹이라 操之有要하니 視爲之則(칙)이라 蔽交於前하면 其中則遷하나니 制之於外하여 以安其內니라 克己復禮하면 久而誠矣리라

이유진

1979년 이후 정약용의 역사철학과 정치철학을 연구하고 있다.
1988년 8월부터 2018년 7월까지 대학에서 철학을 강의하였다.
규범과 가치의 논의에 도움이 될 만한 일을 하고 싶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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