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철학 조각 모음] ③ 대동(大同), 차이를 인정한 연대new

대동은, 중국과 한국에서, 오랜 세월에 걸쳐, 정치적·사회적 변화에 따라 재정의되면서, 집권세력 내부에서의 정치적 관계의 매개가 되거나, 인민이 주도하는 변혁의 동력이 되었다. 그 과정을 살펴보면서, 지금 여기에서 대동을 어떻게 재정의하는 것이 적절할지 생각해 본 바도 제안하여 본다.

[한국철학 조각모음] ② 새로움이 가치인 세계의 명암

새로움 추구는 자본주의가 그럭저럭 굴러가게 하는 힘들 가운데 하나이다. 한국의 경우에는 고대에서부터 새로움 추구를 중시하는 역사를 이어온 듯하다. 그 결과, 자본주의 속에서 한국이 긍정적인 의미로 돋보일 때도 꽤 있다. 이럴수록 한국의 새로움 추구의 연원과 그늘을 살펴볼 필요가 있겠다.

[한국철학 조각모음] ① 화(化), 연대를 통해 모두 함께 더 나아짐

오래 전 한국 사람들의 생각들은, 그들이 아직 문자를 사용하지 않았던 시절부터 지금까지, 변형을 겪으며 이어져오거나 소멸되었을 것이다. 그 생각들은 지금 여기의 한국 사람들에게도 적지 않은 영향을 주고 있다. 그 생각들을 한글과 여러 문자로 된 기록들 속에서 추려내서 다각적으로 검토하는 것은 지금 여기의 한국 사람들의 생각을 한 겹이나마 더 섬세하게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평범한 권고- 한강 연작소설 『채식주의자』 독후기

인과관계를 가지고 모든 것을 설명하고 예측할 수는 없다. 그러나 우리는 인과관계를 적절히 통제함으로써 일상을 안정적으로 유지할 수 있다. 이에 비하여 한강의 소설들은 사람들에게 때때로 인과관계를 보다 넓은 시공으로 확장해 볼 것을 권하는 글로 볼 수도 있다.

과학·자본·문화연구 -브라이언 마수미 『가상계』 제9장 「지나치게 파란」 독후기

2000년을 전후한 시기에 ‘문화연구’라는 말이 광범위하게 사용되었다. 문화연구를 표방한 사람들은 과학·기술·자본이 사람들의 일상에 깊이 스며드는 양상을 세세히 설명하였다. 그들은 그러한 일상이 곧 자기의 일상이라는 자각을 하고 있었던 듯하다. 또한 그들은 앞서 말한 양상으로부터 한발 물러나 그러한 양상이 펼쳐지는 세계를 관조하는 태도를 견지하고자 한 듯하다. 문화연구라는 말을 넘어 문화산업, 나아가 문화기술이라는 말이 사용되고 그러한 사용에 대한 저항이 급속히 낮아지고 있는 지금 여기에서, 2000년을 전후한 시기의 문화연구를 돌아보는 것은 유익한 지적 긴장을 유발하는 행위일 수 있을 듯하다.

인공지능의 발달은 전체주의에 대한 위험성을 가속화할까? 『가상계』 제8장 「낯선 지평」 독후기

2000년을 전후하여 마수미는 디지털 테크놀로지의 양면성에 주시하였다. 그는 디지털 테크놀로지가 자유의 지평을 확장해 주기를 기대하였을 것이다. 그렇지만 그는 디지털 테크놀로지가 ‘역효과’를 유발하리라는 것 또한 명확히 알고 있었을 것이다. 20세기 이래 전개되어 온 전체주의와의 싸움에 동참하고 있는 것이다. 2024년 12월인 지금, 대화형 인공지능과 휴머노이드의 발달은 2000년 전후의 디지털 테크놀로지의 발달 못지않게 전체주의 강화의 위험을 안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마수미의 「낯선 지평」을 전체주의에 대한 경계를 읽어내는 시도로 읽어보는 것은, 매일 자유로워지기 위해 유용할 것이다.

샛길들을 잠복시킨 색채론 – 『가상계』 제7장 「밝기 혼동」 독후기

‘단도직입적으로’ ‘딱 잘라’ 말하는 것은 나름 멋있어 보일 수 있다. 그러나 그런 식의 말로 설명하기엔 너무 복잡하거나 흐릿한 면도 세상에는 있는 법이다. 때로 그런 흐릿함·혼동 그리고 회색은 사람들을 피곤하게 하고, 상대주의는 피곤을 넘어서 혼란과 파괴를 초래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런 것 또한 세상의 일부이다. 나아가 세상 자체가 흐릿하고 회색인데 여태 그렇지 않다고 우기는 데 너무 많은 힘을 쏟아 온 것일는지도 모른다.

바라보기의 참을 수 없는 가벼움 – 『가상계』 제6장 「시각적 “전체장”의 카오스」 독후기

짧은 인류사 속에서도 인류가 이성의 합리성을 그런대로 공통적으로 승인한 듯한 기간은 그야말로 번갯불이 번쩍하는 순간만큼이나 더 짧다고 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하필 ‘우리’는 그 짧은 순간 속에 살고 있기에, 이성의 합리성과 그것이 세계를 설명하는 틀로 제시한 형식논리에서 벗어나는 것을 무척 힘겨워한다. 그러는 사이, 이성의 합리성 위에 세워진 세계는 치유 불가능할 것 같은 질병에 빠져들어 버린 느낌이다. 다른 세계관이 필요한 시점인 것이다. 「시각적 “전체장”의 카오스」는 그 다른 세계관을 여태까지와는 다른 어법으로 설명하는 글이라 할 수 있다.

디지털과 가상계를 나눌 수 있는가? – 『가상계』 제5장 「아날로그의 우월성에 관하여」 독후기

아날로그와 디지털은 세계를 인식하고 기록하는 방식 혹은 도구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세계의 제1속성 혹은 중요한 특성으로 거론되기도 한다. 20세기를 거쳐오면서 과학자들은 디지털이 아날로그보다 우위에 서기 시작했다는 판단과 아날로그가 디지털보다 세계 자체를 더 생생하게 대변한다는 느낌을 동시에 가지는 듯하다. 브라이언 마수미 『가상계』 제5장 「아날로그의 우월성에 관하여」에서도 그런 ‘판단’과 ‘느낌’의 마찰이 느껴진다.

‘자유의지 대 필연성’의 우화 – 『가상계』 4장 「이성의 진화론적 연금술- 스텔락」 독후기

『가상계』 4장 「이성의 진화론적 연금술- 스텔락」은, 베르그송·시몽동·들뢰즈·가따리 등이 창안한 세계관과 개념어들로부터 받은 영향을 전면에 드러내면서, 스텔락의 행위 예술을 해설하는 내용으로 채워져 있다. 이 글에서 행위 예술은 세계관 이해를 돕기 위해 만들어진 우화 같아 보인다. 자유의지 대 필연성 문제가 이 글 전반에 잠복하여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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