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 년 전, [소울컴퍼니] 연재를 시작했다. 그 출발은 어떤 대단한 기획이나 포부보다 사적인 결심에서 비롯되었다. 내가 지금 바라보고 있는 지점을 정직하게 기록하되, 다만 정직함에만 고정되어 유연함을 잃지 않겠다는 다짐이었다. 첫 연재에서 나는 이렇게 썼다.
“써보자. 완벽하게 시작하지 말고, 내가 살피고 있는 지점을 고스란히 기록하는 기회로 삼자. 설렘과 긴장이 공존하는 생각에서 빠져나오니 가장 먼저 신승철 선생님과의 짧은 인연이 떠올랐다. 어쩌면 이 기회가 못다 한 이야기를 마저 하자는 신승철 선생님의 ‘말-걸기’일 수도 있겠다.”1

신승철 선생님(이하 ‘신쌤’)과의 짧은 인연은 이 글쓰기에 중요한 씨앗이다. 그의 사유와 문장을 실마리 삼아, 그간 내가 겪고 관찰한 것들-때로는 사회적이고 정치적인 현실, 때로는 내면에서 일렁이는 정동들-을 엮어나갔다. 그렇게 지난 1년 동안 나는 신쌤의 사유를 바늘로 삼고, 글과 사유의 노정을 실로 삼아 연재를 이어왔다.
그 사이 많은 일이 있었다. 단지 개인적인 삶의 사건들만이 아니라, 우리 모두가 함께 목격한 역사적 격동도 포함된다. 비상계엄과 이어진 국가 혼란, 그 가운데 펼쳐진 헌법과 광장의 시간은, 우리가 기억하는 촛불의 경험과는 결이 다른 방식으로 이어졌다. 익숙했던 민주적 외침이 아닌, 새로운 방식의 ‘응시’와 ‘재편’이 광장에서 일어났다. 광장에서 펼쳐진 서로 다른 이들의 다양한 목소리와 의지가 어떻게 실현될지는 아직 기다려봐야겠지만, 응원봉을 흔들면서 광장의 질서와 약속을 재편하는 움직임은 분명 무관하게 여겼던 존재와의 새로운 얽힘을 느끼게 했던 시간이었다.
이러한 얽힘은 단순히 물리적 존재 간의 충돌이 아니라, 이전까지는 나와 무관하다고 생각했던 타인의 삶과 의지, 감정과 욕망이 내 일상의 구조와 겹치는 경험으로 발전되었다. 그 낯설고 때로는 불편했던 감각은 글쓰기에도 영향을 주었다. 나와 무관하다고 여겼던 평범한 사물과의 얽힘에 천착하려 했던 초기 기획은 점차 수정되어, 사회와 타자와의 ‘얽힘의 가치’, 그리고 ‘새로운 감각을 받아들이는 태도’를 모색하는 쪽으로 조율되기도 했다. 무엇보다 타자를 냉소적으로 바라보지 않고, 대화를 이어갈 방법을 고민하게 되었다. 특히 예기치 않게 서로의 성향과 생각이 검열되기 시작한 현실에서 무작정 ‘싫어한다’는 표현이 나를 반드시 자유롭게 하는 것이 아님을 배웠다. 사실 그 존재(들)와 영원히 불화하며 살아가긴 싫었다. 나와 다르다고 여겨지는 사람을 무작정 밀어낼 수 없도 없고, 냉소하며 살아가기 싫은 현실에서, 결국 필요한 것은 대화의 자리를 찾는 과정이었다.
이를 위해 흔히 ‘대화’라고 여기는 것-예컨대 SNS나 공론장에서 이루어지는 주장과 반박의 연속, 혹은 누군가에게 가르치려는 말의 반복-이 진정한 의미의 대화인지 거듭 성찰할 필요가 있다. 신쌤은 우리가 대화할 때 “고정되고 멈추어선 기성 질서를 사용할 메시지가 갖고 있는 모든 것으로 여기고 그대로 전달하거나 오려붙이기 식으로 대화하지 않는다.”2는 점에 주목한다. 달리 말해, 누군가 맹목적으로 주장하는 “정치적, 선동적” 구호나 “무조건 가르쳐야 할 것, 지켜야 할 것‘을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이는 과정은 대화가 아니라는 말이다.
진정한 대화는 단지 말의 교환이 아니라, 상대의 온-존재에 접속하는 일이다. 그 접속을 위해 신쌤은 대화를 가로막는 벽을 파훼할 방법으로 “상대방의 눈빛, 향기, 색채, 음향, 몸짓, 표정”3에 주목한다. 삶을 살아가는 인간의 감각과 존재 전체가 대화에 개입되어야 한다는 뜻이다.
우리가 살아가는 삶은 단선적이지 않다. 선과 악, 옳고 그름, 정당함과 부정함이 명확히 구분되어 있지 않다. 우리는 모두 그런 복잡함과 모순, 혼종적 현실을 안고 살아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종종 타인에게 도덕적 완벽함을 요구하거나, 자신을 선한 존재로 연출하기 위해 위선과 무관심을 선택하곤 한다.
독일 작가 루이제 린저의 『삶의 한가운데』에는 다음과 같은 장면이 있다. 소설의 주인공 니나는 단순히 “살아 있음”만을 삶이라 부르지 않는다. 죽음, 모순, 이기심, 두려움, 비겁함과 같은 부정적 정동까지도 삶의 일부로 받아들인다.
“우리는 영웅이 아니야. 가끔 그럴 뿐이야. 우리 모두는 약간은 비겁하고 계산적이고 이기적이지. 위대함과는 거리가 멀어. 내가 그리고 싶은 게 바로 이거야. 우리는 착하면서도 동시에 악하고, 영웅적이면서 비겁하고, 인색하면서 관대하다는 것, 이 모든 것은 밀접하게 서로 붙어 있다는 것, 그리고 좋고 나쁘고를 떠나서 한 사람으로 하여금 어떤 행위를 하도록 하는 것이 무엇이었는지를 아는 일은 불가능하다는 걸 말야. 모든 것이 복잡하게 얽혀 있는데도 그것을 간단하게 만들려는 게 나는 싫어.”4

사진출처: Antranias
인간 내면에 선과 악, 좋은 것과 나쁜 것, 진실과 거짓을 예리하게 잘라 구분할 수 있는 면도날 같은 것이 내재되어 있다면, 인생살이는 지금보다 훨씬 덜 복잡하고 단순해졌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리에겐 그런 능력이 없다. 그렇기에 대화를 포기하지 않는 삶이 필요하다. 추상적 개념의 분별이 아니라, 관계를 만들어갈 용기를 통해, 모순과 얽힘의 순간마다 어떤 태도를 취할 수 있을지를 끊임없이 질문해야 한다. 신쌤은 그 단서를 평범하고 단조로운 일상에서 찾는다.
“자신의 삶과 완벽히 무관한 것을 아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고, 일상 속 소재와 주제가 사유의 원천이다.”5
그렇기에 낯선 이와의 어울림을 시작하는 지점 또한 ‘일상의 자리’라는 점을 간과하지 않는다. 나는 지금까지 써온 글들이 단순한 관찰이나 보고가 아니라, 일상이라는 ‘사유의 토양’ 위에서 자라난 것임을 실감한다. 그리고 그 글쓰기는 단지 나의 말이 아니라, 누군가가 나에게 먼저 말을 걸어왔고, 내가 그 말에 응답한 흔적이라는 것을 점점 더 깨닫는다. 신승철의 ‘말-걸기’가 그랬듯이.
이제 다시 가장 작은 우주, ‘일상’에서 글을 써보고자 한다. 냉소와 비난이 익숙한 시대, 우리가 함께 외쳤던 구호가 어떻게 삶으로 이어질 수 있을까. 광장에서의 연대와 치열한 토론, 때로는 좌절과 분열로 얼룩졌던 그 시간을 가져와 우리는 일상 속에서 다시 말 걸고, 다시 대화해야 한다. 그 대화는 판단이 아니라 존재의 개방, 구호가 아니라 향기와 눈빛과 손짓에서 출발해야 한다.
삶의 한가운데서, 나는 또다시 묻는다. 얽힘을 감내하며 사는 것-그것이 신쌤을 통해 이어갈 용기이자 사유일 수 있을까. 나는 이 물음을, 다시 한번, ‘써보자’. 이 글이 발행될 즈음이면 신쌤의 2주기 추모제도 지나 있을 것이다.
참고문헌
신승철, 『모두의 혁명법』, 서울: 알렙, 2019.
신승철, 『사랑할수록 지혜로워진다』, 서울: 사우, 2019.
루이제 린저, 『삶의 한가운데』, 박찬일 역, 서울: 민음사, 199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