맛있는 쌀은 어떤 쌀일까요?
고개만 돌리면 먹을거리가 넘쳐나는 시대에 새삼 품게 되는 질문입니다. 사람마다 기호와 취향이 다르니 정답이 있을 리 없습니다. 그럼에도 막연하지만 답에 가까운 것이 있지 않을까 싶은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이럴 땐 교과서를 살펴보는 것도 하나의 방법입니다.
미질(米質)에 영향을 미치는 요소는 품종, 재배환경, 재배기술, 수확 후 관리로 요약됩니다. (채제천, [쌀생산과학], 향문사, p.281)
부연해야 할 내용이 많지만 간략하게 정리해 보겠습니다. 결실기에 평균기온이 다소 낮고 일교차가 크고 상대습도가 낮은 재배환경을 가진 지역에서 자란 벼가 미질이 좋다고 합니다. 보통 경기미 그중에서도 여주 이천쌀이 맛있다고 알려진 이유입니다. 남부지역은 상대적으로 온화하기에 이런 조건을 맞추기 위해선 파종을 늦춰 벼수확 시기를 살짝 늦게 잡는 것도 하나의 방법입니다.
적기에 파종하고 적기에 수확하며 화학비료보다는 퇴비 중심의 시비를 하는 유기재배 방식으로 키우는 것이 맛좋은 쌀을 생산하는 중요한 방법입니다. 수확 후 관리의 핵심은 벼를 최대한 천천히 말리는 건조입니다.
미질을 결정하는 요소들

이렇게 나열하니 정말 교과서 같네요. 이왕 하는 김에 조금 더 나아가 볼까요? 네 가지 요소 중 미질에 가장 많은 영향을 미치는 것은 무엇일까요? 역시 종자입니다. 농부들이 너도나도 맛좋다고 알려진 종자를 찾아 먹어보고 심는 연유입니다. 그런데 책에 기술된 맛있는 벼종자는 저희의 상식을 살짝 벗어납니다.
‘키가 크고 줄기가 약해 쓰러지기 쉽고 병해에 약하고 수량이 적은 것’
이렇게 적어놓고 보니 불현듯 떠오르는 것이 있습니다. 바로 토종벼입니다. 병해에 약하다는 건 의문이지만 이 구절은 토종벼의 특성을 설명할 때 반드시 따라오는 문구들입니다. 이런 점에서 보면 정부 주도 하에 보급되는 보급종자보다 토종벼가 밥맛이 좋다는 것입니다.
토종벼가 맛있다
종자는 그렇다치고 제 관심을 끄는 것은 두 번째로 크게 미질에 영향을 미치는 요인입니다. 그것은 벼의 건조로 앞서 언급한 대로 벼를 최대한 천천히 말리는 것이 관건입니다. 벼를 최대한 천천히 말리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어떤 교수는 콤바인으로 벼를 베었다면 바람 잘 통하는 그늘에 말리라고 조언합니다. 하지만 그보다 확실한 방법은 낫으로 벼를 베는 것입니다. 낫으로 벼를 베게 되면 뒤따르는 공정이 많아 벼를 천천히 말릴 수밖에 없습니다.
저희 집의 경우, 낫으로 벼를 벤 후 그대로 바닥에서 2-3일, 볏단으로 묶어 다시 3-4일 말린 후 볕 좋은 날 탈곡을 합니다. 혹시 알곡이 덜 말랐다면 2-3일 볏덕에 벼를 널어 말립니다. 그러나 이건 그저 희망사항일 뿐 혹시라도 비가 온다면 이 일정은 며칠이고 미뤄집니다. 그러니 벼를 베고 나서 도정해 밥상에 오르기까지 아무리 빨라도 20일 이상 걸리는 조금은 지난한 과정입니다.

낫으로 벼를 베는 또 다른 좋은 점은 벼 줄기에 있는 양분이 알곡으로 전해져 알곡이 더 튼실해진다는 것입니다. 벼 줄기에 있는 양분은 화학기호와 낯선 외국어로 불리는 학술용어들이 회자되곤 합니다. 저 같은 촌부가 용어의 자세한 내막을 알 리 만무합니다. 그저 농부의 언어로 정리하자면 벼가 한 해 동안 온전히 겪은 일생의 경험담과 어려움에 대처하는 노하우라 할 수 있습니다. 볏짚이 마르는 기간은 이 지혜를 다음 세대에게 전달하는 시간이기도 합니다. 급작스런 사고로 생을 마감하기보다는 살아온 생을 찬찬히 되짚고 다음 세대에게 자신이 가진 소박한 지혜를 전달하는 노년의 원숙한 삶을 인간이 기대하는 것처럼 벼도 자신의 한 살이를 차분히 정리할 시간이 필요할 것입니다.
낫으로 벼를 베는 이유
저희가 아직 낫으로 벼를 베는 이유입니다. 이렇게 적고 나니 조금 결연한 느낌이 듭니다만 내막은 그렇지 않습니다. 농사를 짓는 마음가짐은 어떤 사명감이나 비장함과는 거리가 멉니다. 농사짓는 첫해, 낫으로 벼를 베었던 건 경작하는 논이 작기도 했고 형상이 기계가 들어가기 좁아 큰 기계를 부르기 어려운 형편이었던 부득이한 측면도 있었습니다. 이후 논이 늘어났지만 함께 하는 친구들도 늘어 무리 없이 할 수 있었습니다.

‘건강한 쌀’이라는 자부심
몸이 허락하는 한 계속 이렇게 농사를 지어볼 요량이지만 앞으로 언제까지 이렇게 농사를 지을 수 있을지 의문이 드는 것도 사실입니다. 이런 방식은 저희 식구만으론 한계가 분명합니다. 친구들이, 다음 세대가 그리고 이런 농사의 가치를 알아채고 시중에 유통되는 쌀보다 조금 비싸지만 흔쾌히 투자하는 안목있는 소비자가 있어야 가능한 방법입니다.
그럼에도 고백하자면 미각이 발달하지 못한 저는 저희 집 쌀이 다른 농가에 비해 유달리 맛있는지 알지 못합니다. 다만 2025년의 스산한 봄, 유난히 길고 더웠던 여름, 습했던 가을을 견디는 지혜를 온전히 전해 받은 ‘건강한’ 쌀이라는 것만큼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