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콜로키움 특집] ④ 도플갱어와 나는 연결돼 있다

지난해 계엄과 탄핵 국면, 그리고 최근의 대선 국면에서까지 우리는 살아서 생생하게 날뛰는 극우의 민낯을 마주했다. 우리는 이 집단을 어떻게 해석하고 마주해야 할까?

나오미 클라인의 『도플갱어: 우파라는 거울 이미지를 마주한 미국 좌파의 딜레마』는 현재의 한국 상황에도 적확하게 들어맞는 책이다. 최근, 대통령후보 연설에서 이준석은 ‘인용’이라고 명명하면서 성폭력 발언을 서슴없이 발언하고 논란이 되자 “진보진영의 위선을 지적”하기 위해 “검증이 필요한 사안”이라고 해명했다. 재현이 2차 가해 혹은 폭력이 될 수 있다는 윤리 의식은커녕, 자신은 잘못이 없고 잘못한 상대 때문에 벌어진 일이라고 주장했다. 그리고 며칠 후 유시민의 발언이 논란이 됐다. 유시민은 유튜브 방송에 출연해 여성비하적 발언을 했고, 논란이 되자 “제가 그렇게 생각하는 게 아니고 설씨가 그렇게 생각하기 때문에 저렇게 말하고 행동하는 것일 거라고 이해하고 있다고 말한” 것으로 “내재적 접근법”이었다고 해명했다. 유시민은 자신의 생각이 아니라 재현이었을 뿐이라고, 자신의 성감수성에 대한 반성이나 성찰은커녕, 자신은 잘못이 없고 잘못한 상대 때문에 벌어진 일이라고 주장했다.

이준석과 유시민은 둘 다, 자신은 잘못이 없으며 상대편의 문제를 지적하기 위한 재현이었다고 말한다. 발언의 수위에는 차이가 있을지언정, 양쪽 다 상대편을 끌어내리고자 재현의 윤리 따위는 고려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논란이 된 이후에도 그 발언을 했던 상대편에게 책임을 넘겼다. 이 사건이 나오미 클라인이 말한 ‘도플갱어’가 아닐까.

좌파와 우파는 기묘하게 닮은 거울상을 띤다.
사진출처: Monoar_CGI_Artist

주현님의 발제문은 좌파와 우파를 서로 되고 싶지 않은, 하지만 기이하게 닮은, 그래서 더 불편하고 낯선 존재로, 미러링된 적대성을 가진 집단으로 설명하고 있다. 또 우파가 “반대편이 아니라 좌파가 억압한 어떤 정동이나 욕망, 혹은 자기 모순의 반영”일 수 있으며, 좌/우파가 “서로를 반영하는 거울 관계”라는 나오미 클라인의 설명이 현시대의 정치적 혼란을 이해하는 계기가 된다는 점에 공감한다. 최근 12/3 계엄 이후 회자된 발화들-예컨대 국민저항권, 인권 같은-을 보더라도, 좌파와 우파가 거의 유사한 언어와 정동 구조를 쓰고 있음을, 우파가 좌파의 언어를 훔쳐 쓰고 있음을 적나라하게 보여준 까닭이다.

이러한 현상의 작동 원리가 감정의 정치라고 해석한 주현님의 생각에 적극적으로 공감한다. 감정은 무언가를 향해 있지만 나에게서 비롯된 것처럼 보인다는 점에서 무언가와 나를 분리하고 경계 짓는다. 구별짓기는 혐오로 이어진다. 그렇기 때문에 감정이 정치에서 중요하게 다뤄지는 것과 극우의 출현은 서로 긴밀히 연결되어 있다고 본다.

극우를 하나의 집단으로 특징지을 수는 없지만, 많은 경우 신자유주의와 능력주의에 포섭된, 현재의 삶이 불안한 이들로 여겨진다. 이들이 꼭 사회경제적 지위가 낮거나 비주류라고 생각되지는 않는다. 현재 주류 집단에 속해 있더라도 언제라도 밀려날 수 있다는 불안감을 가질 수 있다. 그런 측면에서 세계 바깥으로 밀려날 것 같은 두려움과 불안을 가진 취약한 존재이지만 누구에게도 혹은 어디에도 의존할 수 없는 고립되고 파편화된 개인들이라고 생각한다.

그러한 감정을 정치적으로 이용하는, 선동하는 이들이 있다. 그들은 불안이라는 감정의 원인으로 누군가를 지목하면서 그 대상을 혐오하고 차별하면서, 그러한 감정을 공유하면서 서로의 결속을 다지고 ‘우리’라는 경계를 만든다. 탈진실의 시대에 인간의 행위를 추동하는 가장 결정적인 힘이 감정일지도 모르겠다. 이성과 감정은 분리되어 있지 않은 하나의 몸이므로 절대적인 진리나 진실은 없으며, 안다는 것이 단지 이성에 의해서만 가능한 것이 아닌 까닭에 사라 아메드의 말처럼 “진실이란 감정적으로 설득되는 것(발제문 4쪽)”인지도 모르겠다. “동일성과 차이의 경계를 흐리게 만드는(발제문 3쪽)” 도플갱어가 어쩌면 새로운 길을 제시할 수 있지 않을까. 동일성의 반복이 가진 폭력성을 해체하는 일을 나 혹은 우리의 도플갱어와 마주하면서 가능하지 않을까. 그것이 발제문에 제시된 “정치적 주체성의 재구성(발제문 4쪽)”이 아닐까 생각한다.

이를 버틀러의 수행성과 연결한 주현님의 논의를 조금 더 확장해 보자. 정치적 주체성의 재구성은 버틀러의 주체화, 즉 나로부터 멀어지고 타자로 향하는 탈중심화의 반복이다. 그러므로 정치적 주체성의 재구성은 자기 인식에 대한 확신의 과정이 아니라, 오히려 자기 인식의 불가능성과 마주하는 실패의 과정일 것이다. 이는 자기 동일성의 확인이 아니라 실패가 주체의 윤리라는 버틀러의 주장과 만나게 된다.1 여기에서 해러웨이의 『트러블과 함께하기』도 떠오른다. 나오미 클라인이 해러웨이를 염두에 두고 쓴 표현인지는 알 수 없지만, 나오미 클라인은 트러블/죽음을 직시하는 방식이 도플갱어라고 설명했다. 나 혹은 우리의 경계를 무너뜨리는 “자기 탈중심화 과정”에 도플갱어와 마주하는 일이 어쩌면 중요할지도 모르겠다. 나라는 경계를 무너뜨리는 일은 내가 인식하는 나의 죽음이며 그 죽음은 도플갱어에 의해 가능한 까닭에, 나오미 클라인의 도플갱어라는 은유가 너무나 적확해서 소름이 돋을 지경이다. 자기 탈중심화는 언제나 나의 바깥과의 관계에 의해서만 가능하다. 나라는 나의 바깥과의 관계에 의해서 언제나 나라는 자기 인식은 언제나 실패할 수밖에 없다.

도저히 납득할 수 없고 인정할 수 없는 극우적 존재들을 마주하는 일은 고통스럽지만 피할 수 없을 것 같은 생각이 든다. 나 역시 내 도플갱어를 얼싸안을 생각은 전혀 없지만 도플갱어와 내가 연결돼 있으므로. 도플갱어라는 트러블과 함께 한다는 것은 내가 경계지은 나라는 존재인식의 실패인 동시에, 가능성이 잠재된 새로운 나로 향하는 길일지도 모른다.

“자아의 경계를 방비하는 데 조금만 투혼을 덜 발휘한다면 우리 모두는 연결과 단합과 친분을 누릴 수 있다. 도처에 친척이 있다. 어떤 것은 우리처럼 생겼고, 다수는 우리와 매우 다르게 생겼지만 여전히 우리와 연결되어 있다. (중략) 단언컨대 나는 잃어버린 지 오래된 친척처럼 내 도플갱어를 얼싸안을 생각이 없다. (중략) 우리는 생각만큼 서로 분리되어 있지 않다(521)”


  1. 주디스 버틀러, 『윤리적 폭력 비판』, 인간사랑, 2013

이 글은 [제19회 생태적지혜연구소 콜로키움_ 『도플갱어』 – 거울 너머의 우리를 마주하다]에서 발표된 발제문 〈나와 닮은 적: 언캐니한 민주주의, 도플갱어의 문화정치학_현〉에 대한 논평문이다.

남미자

보잘 것 없는 삶이지만 삶의 모든 순간이 시의 시간이라고 믿는다. 그렇게 한 편 혹은 여러 편의 시로 살아가는 모든 빛나는 존재들의 의미와 가치를 찾는 연구자로 살고 싶습니다.

댓글

댓글 (댓글 정책 읽어보기)

*

*

This site uses Akismet to reduce spam. Learn how your comment data is processed.


맨위로 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