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지털과 가상계를 나눌 수 있는가? – 『가상계』 제5장 「아날로그의 우월성에 관하여」 독후기

아날로그와 디지털은 세계를 인식하고 기록하는 방식 혹은 도구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세계의 제1속성 혹은 중요한 특성으로 거론되기도 한다. 20세기를 거쳐오면서 과학자들은 디지털이 아날로그보다 우위에 서기 시작했다는 판단과 아날로그가 디지털보다 세계 자체를 더 생생하게 대변한다는 느낌을 동시에 가지는 듯하다. 브라이언 마수미 『가상계』 제5장 「아날로그의 우월성에 관하여」에서도 그런 ‘판단’과 ‘느낌’의 마찰이 느껴진다.

가상계
브라이언 마수미 저, 『가상계; 운동, 정동, 감각의 아쌍블라주(assemblage)』 (갈무리, 2011년)

2002년, 듀크 대학교 출판부는, Post-Contemporary Interventions [지금과 그 다음 사이에 끼어들기]라는 기획의 한 부분으로, 브라이언 마수미의 원고를 스탠리 유진 피쉬와 프레드릭 제임슨이 편집한 책 Parables for the Virtual : Movement, Affect, Sensation [가상계 우화 : 운동, 정동, 감각]을 펴냈다. 이 책은 2011년 『가상계 – 운동, 정동, 감각의 아쌍블라주(assemblage)》라는 제목을 달고 한국어로 번역 출판되었다. 한국어 번역본의 제목에는, 원서본 제목에 들어가 있던 ‘Parables[우화]’라는 단어가 빠진 대신, ‘얽기[assemblage(아쌍블라주)]라는 단어가 들어갔다. 이 번역본의 서문에는 “구체적으로 행하지 않아야 구체적이다” 라는 부제목이 붙어있다. 이 책과 그 한국어 번역본의 서지정보는 다음과 같다.

Massumi, Brian , Fish, Stanley Eugene (EDT) , Jameson, Fredric (EDT), Parables for the Virtual : Movement, Affect, Sensation (Post-Contemporary Interventions), Duke University Press, 2002.04.09.〕

브라이언 마수미(지음), 조성훈(옮김), 『가상계 – 운동, 정동, 감각의 아쌍블라주(assemblage)》, 아우또노미아총서 28, 갈무리, 2011.07.30.

아래의 글은 위의 책의 제5장 「아날로그의 우월성에 관하여」의 독후기이다. (이 글에서는 「아날로그」로 줄여 쓰겠다)

커피잔과 도넛

마수미는 세계를 가상계라고 한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느껴질 수 없는 가상성 역시 그 효과에서만큼은 느껴지지 않을 수 없다. 그 효과들의 표현이 종식되면, 가상성은 어느덧 나타난다. 그 잠깐 동안의 출현은 이미지들 사이의 틈에서 그리고 이미지들을 둘러싸는 표면에서 일어난다.”

「아날로그」, 229쪽.
위상학에서는 동일한 형태적 특성 즉 구멍이 하나인 특성을 유지하면서 ’무한하다‘고 할 수 있을 정도의 다양한 변화를 하는 물체가 보여주는 다양한 모습 가운데 두 사례로 커피잔과 도넛을 든다. 사진: Eiliv Aceron

그에게 가상계는 잠깐 동안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는 그런 가상계를 ’느껴질 수 없으나 그 효과에서만큼은 느껴지지 않을 수 없는 것‘이라고 표현하였고, “하나의 기하학적 도형의 다른 것으로의 끊임없는 변형”(「아날로그」, 231쪽)인 위상학[Topology]이 그러한 가상계의 인식을 돕는 적절한 비유 혹은 우화라고 본다. 그는 매체들도 최소 위상학 정도의 변형을 하여야 가상계를 그려볼 수 있을 것이라고 한다.(「아날로그」, 231쪽 참조.) 위상학에서는 동일한 형태적 특성 즉 구멍이 하나인 특성을 유지하면서 ’무한하다‘고 할 수 있을 정도의 다양한 변화를 하는 물체가 보여주는 다양한 모습 가운데 두 사례로 커피잔과 도넛을 든다. 이 사례는 인터넷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다. 마수미는 이 커피잔과 도넛을 예로 들어서 가상계가, 일정한 본성이라고 할 만한 것을 유지하는 무엇들이 무한대의 다양한 변화를 이어가고 있는 장(場)이기 때문에, 그 세계가 일정한 본성이라고 할 만한 것이 유지되지 않는 곳이라는 생각이 들게 하며, 세계를 이해하고자 하는 주체 자체도 일정한 모습을 유지하지 않는다고 설명한 듯하다.

마수미가 불교의 삼법인(三法印)을 알았더라면 굳이 위상학에 기대어 우화를 만들지 않았을 것 같기도 하다. 삼법인(三法印)은 석가모니의 첫 번째 가르침이라고 한다. 불교의 기본적 입장이라고 볼 수 있다. ’제행무상(諸行無常)‘·’일체개고(一切皆苦)‘·’제법무아(諸法無我)‘. 즉 무상(無常)·고(苦)·무아(無我)가 삼법인 즉 인장[印]처럼 지울 수 없는 세 개의 진리[法]이다. 영어로는 ‘Three marks of existence’라고 한다. 석가모니는 현실 세계가 모두 고(苦)이며, 고(苦)의 원인은 인간 자신의 마음 속에 있는 자기모순이라고 하였다. 모든 것은 변화하고 있어 고정되어 있는 것이 없는데(제행무상) 불변을 바라는 모순. 나라고 할만한 고정적 실체가 없는데(제법무아) 나를 고집하는 모순. 이것들이 고(苦)의 원인이라는 것이다.(《위키백과》, ‘삼법인’ 참조.) 여기에 보이는 무상과 무아가 가상계를 설명하는 데 적확한 것은 아니지만, 커피잔과 도넛을 동원한 우화를 이해하는 데는 도움이 될 듯하여, 우화 중간에 “일정한 본성이라고 할만한 것을 유지하고 있지 않은”이라는 말과 “그 자체도 일정한 모습을 유지하지 않는”이라는 말을 끼워 넣어 보았다.

디지털과 아날로그

사람들은 수적으로 환원하여 계산[digitize]하는 방식으로, 세계에 대한 설명을 객관화하여왔다. 그런데 환원의 과정은 추상(抽象)[abstraction] 즉 복잡한 모습으로부터 핵심적인 개념 또는 기능을 간추려 내는 과정이기도 하여서, 이런 과정에서 가상계의 많은 장면/국면[scene/phase]들이 버려지게 된다. 그런데 세계 즉 가상계는 연속체[continuum]일 수도 있다. 만약 가상계가 연속체이거나 가상계에서 볼 수 있는 여러 모습 가운데 하나가 연속적이라면, 분절을 전제로 하는 계산[digitize] 만으로 가상계를 이해하거나 설명하기 어려울 수 있다. 그래서 아날로그[analog/analogue] 즉 “어떤 수치를 길이, 각도 또는 전류와 같이 외부적인 원인에 의해 연속적으로 변하는 물리량으로 나타내는 일”(《위키백과》, ‘아날로그’)을 가상계의 설명 방법의 하나로 남겨두어야 할 듯하다. 마수미는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감각은 아날로그 방식의 질료이다. 이것이 바로 질적으로 다른 하나의 매체에서 다른 매체로 횡단할 수 있는 끊임없이 변하는 충동 혹은 추진력으로서, 기술적인 의미에 가까운 차원에서의 아날로그이다.”(「아날로그」, 233쪽.)

비유컨대, 화가는 강아지를 점묘화로 ‘실감나게’ 그릴 수 있지만, 점들의 집합으로만 강아지를 설명하는 것은 설득력이 부족할 것이다. 마수미는 또 “감각에 있어 생각하고-느끼는 몸은 일종의 변환기로서 작동한다”(「아날로그」, 234쪽.)라고 주장하였다. 감각은 하나의 ‘생각하고-느끼는 몸’의 문제가 아니라 둘 이상의 ‘생각하고-느끼는 몸’들이 서로 만나거나 충돌하거나 접촉하거나 무엇인가를 상호교환하거나 이상의 짓들을 동시다발적으로 수행하는 것이라고 마수미는 생각한 듯하다.

마수미는 새삼 디지털과 아날로그를 비교한다.

“수량화[quantification]와 특질화[qualification]에 더하여 또 다른 탈실제화 과정이 있다. 바로 코드화[codification]가 그것이다. 디지털은 수적인 것을 근간으로 하는 코드화의 형식(0과 1)이다.”

「아날로그」, 236~237쪽.

탈실제화 이전에는 실제가 있었을 것이다. 아마도 그것은 연속체였을 것이며, 아날로그에 의하여 이해 가능하였을 것이다. 디지털에 의한 연속체의 추상적 이해는 나름의 강점을 가지지만 한계도 가지고 있다.

“디지털 매체는 가능성이지, 가상성이 아니다. 심지어 잠재도 아니다. 그것은 개연성과 마찬가지로, 억지로 잠재에 근접하지 않는다. 디지털 코드화 그 자체는 극단적인 상황에서 개연적이다, 디지털 코드화 그 자체는 극단에 이르기까지 가능적이다.”(「아날로그」, 237쪽.) “디지털 테크놀로지는 오로지 아날로그를 통해서만 잠재적인 것과 가상적인 것으로 연결된다.”(「아날로그」, 239쪽.)

어떤 컨텐츠를 접하고 있다가 발생한 궁금증을 해소하기 위하여 다른 컨텐츠를 찾아보는 일은 인터넷 검색 과정에서만 일어나지는 않는다. 사진: Clay Banks

이렇듯, 디지털과 아날로그를 비교하면서, 마수미는 디지털로만은 다 설명할 수 없는 무엇이 연속체의 모습을 보이는 가상계 속에 있을 수 있으므로 아날로그를 버릴 수 없다고 설명하고, 그 지점에서 더 나아가, 연속체의 모습을 보이는 가상계와 그것을 설명하는 아날로그가 하이퍼텍스트에 수용될 때, 특정 계산과정에서 사상(捨象)되었으나 다른 차원과 변화 국면에서는 유의미할 수 있는 ‘잔여’(「아날로그」, 234쪽.)의 재활성화가 가능하여진다고 주장하는 듯하다.

“디지털, 즉 비실제성의 형식은 현실화되어야 한다. 그것이 디지털의 개방성 지수이다. 하이퍼텍스트의 자유는 그것이 아날로그를 수용하는 개방성에 있다.”(「아날로그」, 239쪽.)

하이퍼텍스트는 주로 인터넷에서 어떤 컨텐츠를 접하고 있다가 발생한 궁금증을 해소하기 위하여 찾아보는 다른 컨텐츠를 지칭한다. 어떤 컨텐츠를 접하고 있다가 발생한 궁금증을 해소하기 위하여 다른 컨텐츠를 찾아보는 일은 인터넷 검색 과정에서만 일어나지는 않는다. 책을 읽을 때나, 남의 말을 들을 때나, TV를 시청할 때나, 혼자 골똘히 생각할 때에도, 궁금증을 해소하기 위하여 다른 컨텐츠를 찾아보는 일은 일어난다. 다만 인터넷의 사용에서 하이퍼텍스트 검색이 절대적으로 쉬우며 점점 더 쉬워지고 있다. 이런 환경의 변화로 인하여, 하이퍼텍스트를 서핑하는 사람에게, 링크는 다음 링크와의 중복으로부터 벗어나게 하여주는 듯하다.(「아날로그」, 239쪽.) 인식이 증강된다는 것이다.

사상되었던 것의 재활성화나 연결의 확장을 통한 인식의 증강은 중요하며, 디지털이 가능하게 한 인터넷에 의하여 더 쉬워지고 있다는 것이 마수미의 주장 같다. 마수미는 여기에서 더 나아가. 가상계에 보이는, 아날로그의 대상이 될 만한 면에 더 주목할 것을 권한다.

읽기의 아날로그 과정은, 의식적 반영이라는 제한적 의미에서 취해진, 사유의 형상들을 감싸는 발화의 형상들로 아스키 코드를 전환한다. 힘을 들이거나 동요하는 등(이마를 찡그리거나 입술을 모으거나 심장이 뛰는 것만 보더라도)의 물리적 감각이 수반되지 않는 사유란 존재하지 않는다.”1

아스키 코드는 10진법에 의한 연산을 처리하기 위한 수단인 동시에 결과를 표현하는 수단이다, 연산을 수단으로 표현한 세계 자체라고 할 수 있다. 21세기 초라는 시점에 마수미는 코드화를 수단으로 하는 디지털이 가상계를 표현하는 방식이 정밀하여지고 있다는 면을 인정하면서도 디지털이 미치지 못하는 데가 있다고 생각하는 듯하다. 그곳은 사유다. 연산 과정 즉 디지털에서는 물리적 감각이 괄호 속에 넣어져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그 물리적 감각과 뗄레야 뗄 수 없는 관계에 놓여있는 것이 사유라고 마수미는 단언했다. 그는 이 관계를 다음과 같이 표현한다.

근육과 촉각과 내장에 감싸인 상태에서, 주의집중의 감각들은 지각의 발단이다.”

「아날로그」, 239~240쪽.

이와 같이 근육과 촉각과 내장을 망라해서 가상계 속에서 일어나는 만남과 만남이 남겨서 넘쳐 흐르게 되는 것을 설명하는 것은 마수미의 글 여러 곳에 보인다. 글을 이렇게 쓴 마수미에게 디지털은 가상계라는 생선의 머리와 꼬리는 다듬은 채 살이 통통하게 오른 몸통 만을 투명한 랩으로 싸서 매대에 올려놓은 행위와 비슷한 것 정도로 보였을 수도 있다.

월드와이드웹

마수미의 가상계에서는 추상작용도 일어날 것이지만 그 과정에서 잘려져 나갔던 ‘나머지[잔여]’들이 재활성화되고 그것이 새로운 것이 발생하는 듯한 느낌을 주는 데 이어지고는 다시 추상되는 일이 꼬리를 물면서 일어나는 것 같다. 그런 가상계를, (1) 가상계라는 이름과 규정이 생기기 이전부터 이미 마수미처럼 읽어냈고, 그래서 마수미가 한 것 같은 생각이 싹틀 자양분이 되어준 것이 이미 많이 있었던 듯하다. 한편 마수미는 (2) 자신의 세계 설명 방식 정립 속도보다 훨씬 빨리 변화하고 있는 미디어[매체]들을 자신의 세계 설명 방식에 포함시켜갈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 과정에서 마수미는 자신에게 영향을 주었던 세계 읽기 방식【읽기 1】과 21세기 초 기준 최신 미디어가 보여주는 세계 읽기 방식【읽기 2】을 대비시켜 보여준다;

【읽기 1】 “화자는 “외부 감각들의 실제적인 자극은 없지만, 보고, 듣고, 평가하고, 연결하고, 선택한다.” 이 모든 것은 “비실제성” 속에서 일어나며, “단지 이러한 운동에 해당되는 긴장만”을 가진다. 그 운동은 본질적으로 “연결하는 활동의 느낌”, 즉 “상관적 자아-활동”, “활동의 살아있는 자기-감각”이다. 비실제성의 이러한 확장된, 살아있는 충만은 실제적 “언어 활동성의 느낌”으로, 즉 “의미를 나타내는 소리를 만들어내는 느낌”으로 감싸인다. 여기에는 모든 운동 요소들 즉 “조음(분절), 몸짓, 얼굴 표정 등등이 포함된다.” 읽기를 할 때에, 운동 요소들은 최소화되고, 몸안쪽으로 전환됨으로써 단락[short-circuit]이 일어난다. 읽기는 촉진된, 부유된 발화, 즉 의사소통의 단락작용이다. 그 부유상태는 비실제적인 것 속에 실제적인 것이 감싸이거나 그 반대로 실제적인 것 속에 비실제적인 것이 감싸이는 정도를 증대시킨다.(가상적인 것과의 연계를 강화시킨다). 독자는 수동성에 의해 바흐친이 명명했던 강렬하게 활성화된 “몸 내부”[inner body]로 점점 더 끌려들어간다.” “읽기, 의식적 사유, 감각, 주목하기는 최대로 비틀린다.” (「아날로그」, 240~241쪽.)

이상과 같은 【읽기 1】은 마수미가 가상계라는 이름과 함께 앞세워 제시한 세계 설명 방식에 앞서 바흐친이 제시한 읽기[세계 이해]를 마수미가 나름대로 소화한 것이다. 여기에서 비실제가 실제를 감싼다는 것은 마수미의 세계 이해 방식에 입각하면 받아들이기 어려운 것일 듯하다. 왜냐하면 비실제라는 것은, 마수미에게는, 가상계 속에서 일어나는 끊임없는 변화에서 연속체의 근본 속성을 일단 괄호에 넣어둔 채 변곡점들을 선택하고 나머지를 버리는[사상(捨相)하는] 추상작업의 앙상한 결과일 뿐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런 면을 덮어놓고 나면 【읽기 1】은 연산을 가능하게 하는 계산능력뿐만 아니라 감각과도 결합되어있는 사유와 의사소통과 만남에서 가상계가 유출되고 넘쳐난다는 묘사로 받아들일 수 있다. 【읽기 1】은 바흐친의 읽기 설명을 바수미가 소화 정리한 것이다. 그러니 마수미의 세계 설명은 20세기 중반에 이미 바흐친에 의해 어느 정도 이야기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읽기 2】 “읽기는 이미지없는 육체를 “조장하는” 또 다른 방식으로 고려될 수 있다. 월드와이드웹 같은 미디어의 발전에서 독특한 것은, 그것이 광범위하게, 다시 말해 링크들의 계열을 가로질러 분포되는 방식으로, 이미지 없는 육체를 활성화시킨다는 것이다. 하이퍼텍스트 독자는 지체하지않으며, 파도를 타면서 하나에서 다음으로 계속 움직이며 효과들을 축적시킨다. 그는 어떤 특정한 방식으로 머무르며 경험을 파고들지 않는다, 시의 독자는 행간 위에 머물러 지체한다. 그는 감싸여 있는 감각들의 수준과 수준으로 파고든다. 하이퍼텍스트에서 그러한 수준들은 수평화되어 있으며 그 감싸인 층위들은 운동(도플러 운동)의 효과일 뿐이다. 디지털 테크놀로지는 가상적인 것의 강렬도를 연장시킬 수가 있다, 다시 말해 가상적인 것을 그 자체로 실제화하여 그 정도를 증대하고, 확장시킬 수 있다.”(「아날로그」, 241쪽, 주 19.) “디지털 테크놀로지의 일부 독특함은 강렬도를 지루하게 만드는 능력 …… 이다.”(「아날로그」, 241쪽, 주 19.) “볼거리로 만들어진 진부함은 그 과정을 추동하는 동력이 된다.”(「아날로그」, 241쪽, 주 19.) “서핑은 주의력과 산만함의 어떤 리듬을 구성한다. 이것은 감각, 초기지각, 그리고 의식적 반성의 봉합과 상호작용이라는 보다 넓은 영역을 서핑이 그 자신의 과정으로 접어버린다는 것을 의미한다.” “웹의 개방 구조는 아날로그 효과들의 축적을 가능하게 한다.”(「아날로그」, 243쪽.) “지루함이 나온다. 웹상에서 그것을 경험해 보지 않은 사람이 있을까? 그 지루함은 종종 어떤 이상한 예감, 즉 곧 다가올 어떤 더함[moreness], 그러나 여전히 모호한 어떤 것에 대한 감지와 함께 나온다.”(「아날로그」, 244쪽.)

그런데 마수미는 웹에 돌아다니는 사람들이 빨리 지루해진다고 주장한다. 사진: Walling

이상과 같이 정리한 【읽기 2】는 먼저 월드와이드웹 같은 미디어가 시공적 장벽과 한계를 넘어 여러 가지 만남을 더 많이 할 수 있게 하여준다는 당연한 사실부터 재확인한다. 그런데 마수미는 웹에 돌아다니는 사람들이 빨리 지루해진다고 주장한다. 그는 그것이 중요하다고 본다. 그는 그 지루함이 ‘곧 다가올 어떤 더함[moreness], 그러나 여전히 모호한 어떤 것에 대한 감지’와 함께 한다고 주장한다. 마수미는 월드와이드웹 같은 미디어가 사람들의 경험을 거의 무한대로 증폭시킬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주었지만, 세계를 마수미가 말한 가상계로 인식하는 것은 그 증폭과는 별개의 것이라고 주장하는 듯하다. 이런 논리를 보면 【읽기 2】에 그다지 새로운 것은 없다. 그러나 그 가운데에서도 주목할 만한 것은 앞서 말한 ‘지루해짐’이다. 빨리 지루해지고 뻔하다고 느끼게 되는 것. 이것은 과소비와 직결된다. 마수미는, 월드와이드웹 같은 미디어가, 사람들로 하여금, 디지털이 설명하는 바를 추종하여, 가상계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빨리 지루해지고 뻔하다고 느끼게 되고, 그 느낌에 따라 소비하는 생활을 받아들이게 만들 수 있다고 볼 수 있는, 인식의 틀을 제시한 셈이다. 그가, 이러한 논리 전개를, ‘과소비의 폐해’에 대한 우려로 내놓은 것은 아니었다. 그는 다만 월드와이드웹이라는 우화를 가지고, 세계는 가상계라는, 자신의 주장을 돋보이게 하려 하였던 것인 듯하다.

디지털과 가상계

마수미는 디지털이 만든 월드와이드웹이 사람살이의 지평을 넓히고 있음에 주목하였지만, 그것만으로 가상계가 설명될 수 있을 듯 생각하는 것이 사람들의 의식 속에 잠재하는 것을 경계한다; “디지털은 아마도 처리[proccessing]일 것이다-그러나 아날로그는 과정[process]이다. 얽혀 있는 가상성 뿐만 아니라, 떠오를지 모를 어떠한 새로운 가능성도 잠재화작용 릴레이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그것은 코드 속에 격납되지 않는 것 안에 있다.”(「아날로그」, 245쪽.) 마수미는 가상성이 코드 속에 격납되지 않는 것 안에 있다고 한다. 가상성은 디지털로 처리되지않는 영역에 있다는 것이다. 마수미는 “항상 디지털에 대한 아날로그의 초과가 존재한다”(「아날로그」, 247쪽.)고 단언한다. 그는 또 “아날로그와 다지털은 비대칭적으로 함께 사유되어야 한다. 아날로그는 언제나 앞으로 나아가는 주름이기 때문이다”(「아날로그」, 248쪽.) 라고 설명하기도 한다.

그러면서도, 디지털이 어떻게 진화하느냐에 따라, 디지털과 가상계 사이의 관계는 달라질 수 있다고 하였다.

“이 글이 개진한 경고, 즉 디지털과 가상계를 혼동해서는 안 된다는 경고가 시대착오적이 될 날이 그다지 멀지 않았을 수도 있다. 그러나 당분간 그 경고는 유효하다. 물론 직접적으로 가상적인 디지털성이 언젠가 존재한다면, 그것은 아날로그를 그 자신 안을 통합함으로써(생체근육 로봇같은), 그 자신을 아날로그로 번역함으로써(신경망과 여타 진화 체계), 혹은 그 위에 자신의 릴레이들을 아날로그 안팎으로 다중화하고 강화함으로써(유비쿼터스 컴퓨터 환경) 그렇게 될 것이다. 디지털과 아날로그의 관계가 상호 배타적인 차원에서, 마치 하나가 다른 하나를 완전히 대체하는 것처럼 해석되는 한 이러한 디지털 되기의 가능성은 요원하다.”(「아날로그」, 247쪽.)

여기에서 가상성 되기라고 하지 않고 디지털 되기라고 한 것은 잘못 표기된 것 같다는 생각이 들게 하는 부분이다. 그렇지만 다음 인용을 보면 마수미가 말하고자 하는 것을 좀 더 명확히 알 수 있다; “디지털 가상이 도래할 때 혹은 도래한다면, 그 경험은 그렇게 극적인 것은 아닐 것이다. 그것은 매일 매일의 흔해빠진 일상이 될 것이다. 즉 모르긴 몰라도 웹만큼이나 지루할 것이다.” 세계에 대한 인식이 디지털적인 방향으로 발전해 온 데 비하여 세계 즉 가상계 자체는 아날로그적인 것이라고, 마수미는 생각하는 듯하다. 그럼에도, 디지털이 더 편리하고 정교해지는 방향으로 진화하리라는 예상을, 마수미도 받아들인 듯하다. 그리하여 그는 디지털과 아날로그, 이 둘을 함께 사유해야 한다(「아날로그」, 247쪽 참조.)는 판단에 도달한다. 이는 어찌보면 ‘아날로그의 우월성에 관하여’ 라는 표제와 어긋나는 판단이라고 할 수도 있겠다. 물론 지금은 이 어긋남 여부를 둘러싼 논의보다는 ‘포스트-월드와이드웹’이라고 묶을 수 있는 상황 즉 2000년의 마수미와 모든 사람들이 아직 체험하지 못하였던, 아이폰·안드로이드폰·소셜 네트워크 서비스·대화형 인공지능·휴머노이드 등등을 가상계 속에서 설명하는 과제의 제출 기한이 임박한 시점이다.


  1. 「아날로그」, 239~240쪽. 주 18에 의하면 이 부분은 아래 자료로부터 인용한 것이다; William James, “The Feeling of Effort”, Collective Essays and Reviews (New York: Russell and Russell, 1969), 151-219

  2. 「아날로그」, 241쪽, 주 19. 이 인용 부분은 마수미가 미하일 미하일로비치 바흐친[1895~1975]의 아래와 같은 글을 정리하여 쓴 것같다; M. M. Bakhtin, ed. Micheal Holquist and Vadim Laipunov, trans. Vadim Laipunov, “The Problem of Content, Material, and Verval Art”, Art and Answerability: Early Philosophical Essays (Austin: University of Texas, 1990), 309-315.

이유진

1979년 이후 정약용의 역사철학과 정치철학을 연구하고 있다.
1988년 8월부터 2018년 7월까지 대학에서 철학을 강의하였다.
규범과 가치의 논의에 도움이 될 만한 일을 하고 싶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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