깊은 우울감이 우리 시대를 사로잡고 있는 듯하다. 몸과 마음이 모두 지쳐있지만 내일은 더 좋아지리라는 희망조차 가질 수 없는 상황이 지속되기 때문이다. 우리를 둘러싼 모든 조건이 위기에 처해 있음을 자연·사회·마음으로 이루어진 세 개의 생태계가 입증해주고 있다. ‘올해가 가장 시원한 여름이 될 것이다’라는 기상학자들의 경고는 우리의 남은 생애 동안 기후와 생태환경이 계속해서 악화될 것임을 말해준다. 또한 극소수를 제외한 대부분은 사회생태 안에서 늘 생계 위기에 시달린다. 거주지와 관련해 지출되어야 할 돈은 점점 더 늘어나고 있고, 높아지는 물가에 비해 수입은 점점 더 줄어들고 있으며, 심지어 수입조차 불안정한 경우가 대부분이다. 나아가 기존의 마음생태를 구성하던 가족이나 친연 관계들은 서서히 해체되어 가고 있고 적자생존의 경쟁체제 속에서 개인들은 깊은 박탈감과 고립감에 시달리고 있다.

오늘날 삶은 왜 이렇게 총체적으로 불안정한가? 우리는 어떻게 지금의 고통스런 삶을 중단시키고 즐겁고 행복한 삶으로 나아갈 수 있는가? 한디디의 『커먼즈란 무엇인가』(빨간소금, 2024)는 바로 이 두 가지 물음을 출발점으로 삼는다. “너무나 불안한 삶 속에서 우리는 현재를 음미할 여유, 삶의 활력, 함께 사는 능력, 삶을 스스로 통치하는 자율성, 새로운 삶을 구성할 상상력을 잃어갑니다.” “우리가 생산한 커먼즈를 삶으로 되돌리는 것은 삶을 풍요롭게 재구축하기 위해 너무나 중요한 문제입니다.”(21-22쪽) 커먼즈란 무엇이기에 이처럼 우리가 현재 겪고 있는 삶의 상실 및 고통을 설명해주고, 또 어떻게 그것은 우리의 삶을 풍요롭게 만들어낼 수 있다는 것인가?
커먼즈(commons)의 가장 일반적인 한글 번역어는 ‘공유지’이다. 잘 알려져 있듯이, 근대 이전 시기 공유지에서 농사를 짓거나 생존에 필요한 재화를 얻었던 이들은 사적 소유체제를 공고화하는 인클로저(울타리 치기)와 함께 공유지에서 쫓겨나고 바로 그렇게 무산자로서 도시로 흘러들어가 ‘자신의 신체를 팔지 않으면 살 수 없는’ 조건에 놓이게 된다. 자본주의는 이렇게 공유지를 사적소유로 전환하면서 진행된 시초축적을 통해 자신의 잉여가치 축적의 핵심인 임금노동자를 공급받았다. 하지만 한디디는 바로 이러한 ‘커먼즈’ 개념에 대한 이해만으로는 부족하며, 또한 그러한 사유 방식에는 근대적 인식론의 흔적이 너무 강하게 남아있다는 문제를 제기한다. 그가 보기에 커먼즈를 ‘공유지’로만 보는 것은 ‘이익을 추구하는 합리적 존재인 인간’이 “자연을 채취‧개발‧이용‧관리”(43쪽)한다고 보는 근대의 이원론적 사고방식에서 비롯된 것이다. 따라서 ‘커먼즈=공유지’의 관점에서 자연은 인간 주체에 의해 관리되고 이용되는 객체로서의 자원으로 전락할 수밖에 없으며, 따라서 오늘날 제기되는 여러 위기, 그 중에서도 특히 기후와 생명(멸종)의 위기를 돌파할 생태적 전략을 수립할 수 없다. 그렇다면 우리는 오늘날 커먼즈를 무엇으로 바라보고 또 어떤 형태로 이해해야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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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디디가 보기에 커먼즈는 그 근본에서부터 미리 주어진 어떤 객체로서가 아니라 “‘신체적, 생태적, 정동적’ 차원에서 분리되지 않는 여러 존재의 연결”(45쪽)이자, 개체 바깥의 타자와 “관계적 세계”(46쪽)를 구성하는 과정이자 활동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즉 생명체들은 외부의 생명체들 및 비생명체들과 일정한 신진대사 활동을 이뤄냄으로써 자신을 둘러싼 거대한 환경을 만들어내고 스스로를 재생산한다. 관계를 구성하는 생명체의 활동은 “서로 겹치고 교란되고 오염되는 패치들, 복수의 세계”(48쪽)를 구성하는데, 바로 이렇게 구성되는 바로 그 세계 자체가 커먼즈라는 것이다. 한디디는 이렇게 ‘커먼즈=커머너들의 세계짓기=전체 세계’로 귀결되는 내재주의적이며 유물론적인 존재론을 통해 앞서 제기했던 문제들에 응답한다.
커먼즈가 개체가 자기 바깥의 타자와 만들어가는 생명활동인 한에서 커먼즈를 구성하는 커머너(commoner)들은 인간으로 환원될 수 없는 세계의 거주자 전체 즉 인간을 포함한 동물·식물·광물·공기·바다가 되며, 따라서 커먼즈 바깥은 존재할 수 없다. 커머너들은 자신들의 생명활동(세계짓기의 활동)을 통해 커먼즈(세계)를 생산하고 다시 그 조건 위에서 커먼즈를 재생산한다. 자본주의는 바로 이 거듭 재생산되는 커먼즈 위에 구축된 단절과 파괴의 체제이다. 가부장제적 자본주의는 인간의 커먼즈를 성별분업의 논리로 찢어놓고 한쪽(여성)의 노동활동은 무상으로 취하고 다른 쪽(남성)의 노동활동은 임노동 착취를 통해 이윤 축적과 성별 위계체제를 구축한다. 산업주의적 자본주의는 생명들의 커먼즈를 객체와 주체로 분리시켜 한쪽(자연)의 활동을 무상으로 취하고 다른 쪽(인간)의 활동을 파괴적 대리자로 이용하거나 그 중 일부를 ‘상품 소유자’로 삼아 현재의 ‘사적 소유체제’를 지속시키면서 삶을 소외시킨다. 이러한 자본체제는 커먼즈들을 분리시키면서 그 각각의 생명이나 활동을 화폐가치로 환원해 측정한다. 따라서 자본주의 속에서는 화폐(및 재산·권리·땅)의 독점적 소유자들을 제외한 그 무엇도 행복을 영위할 수 없다. 사람들은 “거대한 생명의 그물로부터 뽑혀 나와 그물을 만드는 존재, 즉 자연 밖의 주체”가 되며, “자연은 인간과 사회로부터 분리된 원료, 대상, 혹은 객체”로 전락하며, 노동은 인간과 삶의 재생산이 아닌 “상품 생산과 이를 통한 이윤 증식”(130쪽)으로 귀결된다. 화폐가 “우리의 삶과 욕망을 구조화”함으로써 각자는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각자도생”에 시달리며, 따라서 삶은 “불안정성을 더욱 확대시키는 악무한”(133쪽)에 빠져든다. 커먼즈를 구성하면서 삶을 영위하는 존재들이 자본주의 체제 안에서 끊임없이 커먼즈와 분리됨으로써 세계 전체는 죽음, 불행, 소외의 목소리로 가득 채워지게 된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행복한 삶을 살 수 있는가? 어떻게 우리는 자본주의 체제를 넘어서는 새로운 삶의 전략을 짜낼 수 있는가? 커먼즈를 세계 내 거주자들의 내재적 활동으로 보는 한 그 대안은 쉽게 도출된다. ‘n-1’ 즉 커먼즈에 부과된 초월적이고 위계적인 체제(자본주의, 가부장주의, 근대적 국가체제, 소유적 개체주의 등)를 삭제하는 뺄셈의 운동으로서의 커먼즈 운동이 필요하다, 물론 다양한 형태의 지배적 권력체제가 자동적으로 삭제되는 것은 아니며, 커머너들의 커머닝(commoning:공통화하기) 활동이 반드시 동반되어야 한다. “생활의 필요를 충족하기 위해 필요한 관계와 물질적 인프라를 만들고 집합적 노동과 나눔을 자율적으로 통치하고자 할 때”(138쪽) 커머닝이 일어난다. 커먼즈 운동은 ”전 지구적으로, 그리고 폭발적으로 구성되고 있는 공통의 사회적 부를 이미 그것의 일부인 커머너들이 함께 생산하고 조직하고 나눌 수 있는 새로운 방식으로 창안하는 것”(139쪽)이다. 너무 추상적인 것은 아닐까? 그렇지 않다. 한디디가 보기에 커먼즈 운동에는 많은 사례가 있기 때문이다. 도시 빈민들의 마을 공동체 운동(‘난곡희망의료협동조합’)(7장), 함께 살림하기를 실천하는 새로운 가족형태로서의 ‘빈집’(8장), 도시를 커머닝하는 ‘경의선공유지’ 운동(9장), 금융의 커머닝을 실험하는 청년 공공기탁활동으로서의 ‘빈고’(10장) 등이 그것이다.
하지만 이것으로 충분한가? 내 생각에 이것은 세 가지 의미에서 충분하지 않다. 첫째, 한디디가 제안한 커먼한 삶의 사례들은 너무 국지적이고 한시적이기에, 오늘날 지구 전체를 통제하는 자본주의의 강력함을 넘어서기에는 한없이 부족해 보인다. 둘째, 한디디가 제시하는 커먼즈는 너무 평화롭고 고요하다. 현실의 커먼즈는 그보다는 훨씬 더 치열한데, 오늘날 생산자들은 커먼즈 안에서 커먼즈를 재생산하지만 자본 역시 커먼즈에 의존해서만 이윤을 증식하기에 두 화해할 수 없는 힘이 커먼즈를 둘러싼 생사를 건 투쟁을 펼치기 때문이다. 셋째, 한디디 자신이 커먼즈를 모든 존재의 생명활동으로 규정되었던 것과 달리 그의 구체적 인식은 활동가들이 소규모 공동체를 구성한 사례에 한정되어 있다.

이러한 한계를 벗어날 방법은 없는가? 권범철의 『예술과 공통장』(갈무리, 2024)은 그 좋은 사례가 될 것이다. 그에게 커먼즈(권범철은 이것을 ‘공통장’으로 옮긴다)는 도시의 구성요소 일반을 아우르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차라리 두 책을 커먼즈 기획의 두 갈래로, ‘공통주의’라는 표제를 가진 하나의 책의 1부와 2부로 보는 것은 어떨까라는 상상을 해보는 것도 가능하리라. 실제로 『커먼즈란 무엇인가』가 커먼즈의 존재론을 추상적으로 잘 규정해내면서도 그 사례 제시는 충분치 못했던 것과 달리, 『예술과 공통장』은 커먼즈의 정치학을 구체적인 현실 안에서 세밀하게 전개시키기 때문이다.
내 생각에 커먼즈의 본질적 측면을 규정하려는 한디디의 기획은 커먼즈가 어떻게 “대안적 가능성과 전유의 위험”(『예술과 공통장』, 16쪽) 속에 놓여있는지를 묻는 권범철의 현실주의적 기획으로 보완될 수 있다. 권범철에 따르면 도시의 예술가들이 만들어내는 현실의 커먼즈(=공통장)는 정부와 자본에 의해 늘 끊임없이 전유되고 있으며, 따라서 이러한 포섭과 흡수의 전략에 맞서서 커먼즈를 방어하는 저항의 기획이 커머너들에게 절실히 요구된다. 현실의 커먼즈는 바로 이 두 차원(권력의 포섭과 생산자들의 저항)을 내포하며, 권범철은 이것을 각각 ‘전략 공통장’(4장)과 ‘전술 공통장’(3장)으로 분류하여 글을 작성하고자 했다. 시초축적 이래로 자본은 늘 공통장을 공략했으며 그것은 오늘날 도시의 특정 부분을 숙주로 삼아 ‘지대(rent)’로 이윤을 증식하는 형태가 되었다. ‘젠트리피케이션’은 이러한 ‘도시 공통장의 지대를 통한 전유’를 부르는 또 다른 이름일 것이다. 그런 점에서 권범철에게 “공통장”은 한디디가 생각했던 것처럼 “공유와 협력이 조화롭게 일어나는 무대”로 머물지 않으며, 늘 “갈등과 투쟁”(31쪽)의 ‘전쟁터’로 즉 두 힘의 적대가 벌어지는 역동적 무대로 파악된다.
권범철은 그러한 적대가 첨예하게 나타난 한 사례로 ‘스쾃’에 주목한다. ‘스쾃’은 예술가들이 도시 내의 허름한 공공지나 소유가 불분명한 낡은 빈집을 점거하고 자신의 창작물을 전시하거나 공간 자체를 예술작품으로 변형시키는 활동을 지시한다. 그렇게 점유된 공간은 대중들에게 무료로 혹은 저렴하게 개방되며, 이러한 공간개방은 예술가들 간의 만남을 주선하거나 예술가들의 집단적 창작활동을 촉진하는 계기가 된다. 예술가들은 그렇게 빈 공간을 자신들의 작품을 생산하는 예술공장으로 탈바꿈한다. “사회 주변부에서 활동하는 괴짜들, 이단자들, 예술가들은 이렇게 사회적 공장의 노동자로 부상한다.”(127쪽) 정부나 공공기관은 처음에는 이러한 활동을 불법으로 규정하고 강력하게 탄압(구속, 벌금, 이데올로기적 비난)하기도 하지만 문제는 그런 예술가들의 활동이 활력을 잃은 공간이나 지역을 미적 공간으로, 관심이 집중되는 ‘핫플’로 만든다는 데 있다. 지역을 재생시키고 죽은 거리를 재활성화하는 이러한 활동은 국가기관이나 자본에게는 도시 전체를 ‘품격있는 이미지가 부과된 경쟁력을 갖춘 공간’, ‘개성이 넘치고 볼 것이 가득한 소비 공간’, ‘스펙터클한 창조 공간’으로 탈바꿈시킬 결정적 계기를 제공한다. 서울이라는 거대도시를 전 세계 모두가 열망하는 ‘예술’·‘문화’·‘혁신’·‘관광’의 도시로 만드는 것, 바로 이것이 서울시의 “창의문화도시 마스터플랜”이다. 이제 예술가들과 그들의 창작물들은 탄압과 공격의 대상이 아니라 공공기관과 자본이 협조해 적극적으로 후원해야(단 선별적으로!) 할 포섭과 수용의 대상이 된다. “스쾃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부로 나타나는 상품을 공통재로 전환하는 활동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탈자본주의 사회를 향한 움직임이기도 하다. 하지만 경쟁력을 추구하는 도시는 그러한 삶 활동을 스펙터클로 전유한다. 이것은 마치 출구가 가로막힌, 상품에서 공통재로 다시 스펙터클로 통합되는 현대 도시의 변증법처럼 보인다.”(105-106쪽)
도시 공통장은 그렇게 예술가들과 권력자들 모두의 공통 관심사가 되었다. 한쪽은 “호혜, 연대, 공생공락 등 대안적 삶”을 위해서, 반대쪽에서는 “경쟁력, 축적”을 위해서 공통장은 필요하고 또 거듭해서 재생산되어야 한다. 한편에는 “공통인들의 네트워크를 통한 집합적 생산”을 이뤄내는 ‘숙주’가 자리하고, 반대편에는 “사회적 생산을 관리, 흡수, 모의”하는 ‘기생체’가 도사리고 있다.(165쪽) 권범철은 이것이 예술생산자들의 “전술 공통장”과 자본과 국가의 “전략 공통장”의 차이라고 말한다. “전술 공통장은 아래로부터 공통의 부를 생산하는 자율적인 집단의 행동 양식”(162쪽)이며, “전략 공통장은 사회적으로 생산된 부를 흡수하거나 모의하는 행동 체계”(163쪽)이다. 하지만 이것은 평행하거나 서로 마주보는 동등한 두 개의 질서일 수는 없다. 한쪽은 새로운 시간과 공간을 만들어내지만, 다른 쪽은 그렇게 만들어지는 시간과 공간이 존재하도록 일정한 자금력을 동원할 뿐 스스로는 어떠한 생산도 이뤄내지 않기 때문이다. ‘스쾃’이 있었기에 ‘창의도시’가 가능했다. 이탈리아의 ‘오페라이스모(노동자주의)’ 전통에서 나온 ‘저항의 우선성 테제’[1960년대 케인즈주의의 기조하에서 이탈리아의 자본과 국가가 펼친 내핍정책은 이후 60-70년대 동안 노동자들의 파업투쟁으로 이어지고 다시 이에 대한 대응전략으로 자본과 국가는 신자유주의라는 재구조화 전략으로 나아가게 되었음을 이론적으로 해명한 것이다. 이는 저항이 없었다면 자본과 국가는 기존의 권력 형태를 변경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점에 초점을 둔다]는 이렇게 오늘날의 ‘공통장’의 기획과 접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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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항(스쾃)은 공통장을 오염시키는 자본(사적소유)과 국가(공적소유)의 소유지 안에서 일어나지만, 저항을 통해 생산자들은 죽은 공간을 다시 소생시키고 재구성함으로써 공통장을 생산한다. 저항의 전술로서 새롭게 형성된 공통장은 그것을 다시 이윤 형태로 전환시키고자 하는 권력의 전략적 거점지가 되는 것이다. 도시의 모든 곳, 아니 자본과 국가가 지배하는 전 지구의 모든 공간은 공통화와 소유화의 두 운동이 뒤얽혀 전개되며, 따라서 좋은 삶을 살고자 하는 모든 존재들은 이러한 고통스러우면서 자유로운 몸짓을 매번 새롭게 다시 펼쳐내야 하는 과제를 안게 된다. 권범철이 보기에, “새로운 삶과 불안정한 삶은 한 몸이었다. 이것은 도시 공통장이 틈새에 출몰하는 전술로만 남을 때 불가피하게 맞닥뜨리게 되는 취약함을 시사한다.”(372-373쪽) 따라서 어떤 존재, 배치, 삶, 생태를 만들어내느냐는 오로지 “자본과 공통장의 끝없는 교전”(374쪽)의 한가운데에서 삶을 욕망하는 공통의 몸체들이 어떤 저항을 전개하느냐에 달려 있을 뿐이다. 공통장에 기생해 그것을 부패시키는 자본에 맞서, 새로운 시공간을 구축하고 새로운 공통을 창조해내는 것 외에 다른 길은 없다. 공통장은 적대적 장이기에 저항없이는 어떠한 해방도, 자유도, 생명도 저절로 주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두 저작 모두에게서 확인되는 어떤 공백을 언급하는 것으로 마무리해보자. 한디디에게 개체가 타자와 함께 이미 커먼즈를 생산하는 것이라면, 그 타자의 범위는 훨씬 더 넓어야 하지 않을까? 도시와 예술가라는 특정한 존재양식만으로 ‘전술의 공통장’은 충분히 표현되는 것일까? 내 생각에 둘 모두 ‘공통적인 것’은 여전히 너무 인간중심적이거나 현실주의적 관점에 머물러 있다. 가령 제주 해군기지 건설에 맞서는 강정마을의 저항을 생각해보자. ‘구럼비 바위’, ‘누이에 대한 추억’, ‘마을의 식수 용천샘’, ‘개발의 대상인 바다’, ‘마을사람들’, ‘아무 이익도 바라지 않은 연대자들’, ‘지지를 표현하는 인터넷 접속자들’, ‘강정을 표현한 예술 생산물들’ 등 강정의 투쟁은 여러 인간적·비인간적·가상적 공통체의 공통화의 산물이다. 즉 강정의 투쟁은 바위·바다·샘·기억·마을·투쟁·인터넷 등 생물·광물·인간·기계·예술·도시와 그 연결망 일체로 구성되어 있다. 강정투쟁은 비인간존재들 없이는 구성될 수 없었으며 또한 상상의 활동이나 가상공간이 없었다면 국지적인 물리적 투쟁에 머물렀을 것이다. 강정투쟁은 물리적인 수준에서는 도시가 아니지만 가상적이고 잠재적인 수준에서는 도시 공통장과 공존했다. 바로 이 차원을 빼고 커먼즈=공통장을 말하는 것은 너무 협소하다. 커먼즈의 존재론, 공통장의 정치학과 함께 묶일 또 다른 책이 필요한 것이 아닐까? ‘공통체의 생태학’은 어떨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