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철학 조각모음] ① 화(化), 연대를 통해 모두 함께 더 나아짐

오래 전 한국 사람들의 생각들은, 그들이 아직 문자를 사용하지 않았던 시절부터 지금까지, 변형을 겪으며 이어져오거나 소멸되었을 것이다. 그 생각들은 지금 여기의 한국 사람들에게도 적지 않은 영향을 주고 있다. 그 생각들을 한글과 여러 문자로 된 기록들 속에서 추려내서 다각적으로 검토하는 것은 지금 여기의 한국 사람들의 생각을 한 겹이나마 더 섬세하게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삼국사기』 권 제4 〈신라본기〉 제4 ‘진흥왕(眞興王)’ 37년 조

다음의 인용문은 『삼국사기』 권 제4 〈신라본기〉 제4 ‘진흥왕(眞興王)’ 37년 조 전체다.

“①1 37년〈576〉 봄에 처음으로 원화(源花)를 받들었다. 처음에 임금과 신하들이 인재를 알아볼 수 있는 방법이 없어 근심하다가, 〈사람들로 하여금〉 무리를 지어 놀게 하고 그 행실을 관찰한 연후에 발탁해서 등용하고자 하였다. 마침내 미녀 두 사람을 뽑았는데, 한 사람은 남모(南毛)이고, 또 한 사람은 준정(俊貞)으로 무리 3백여 인을 모았다. 두 여자가 아름다움을 다투고 서로 질투하였는데, 준정이 남모를 자기 집으로 유인한 뒤 억지로 술을 권하여 취하게 되자, 〈남모를〉 끌고 가 강물에 던져 죽였다. 〈일이 발각되어〉 준정은 사형에 처해졌고, 무리들도 사이가 나빠져 흩어졌다. 그 후에 다시 미모의 남자를 선발하여 곱게 꾸미고 화랑(花郞)이라 이름하고 받들었는데, 무리들이 구름같이 모여 들었다. 혹은 도의(道義)로써 서로 연마하고, 혹은 노래와 음악으로써 서로 즐겨서 산과 내를 찾아 노닐며 멀리까지 이르지 않은 곳이 없었다. 이로 인하여 사람들의 그릇됨과 올바름을 알게 되어, 훌륭한 자를 발탁하여 조정에 천거하였다. 이런 까닭에 김대문(金大問)의 『화랑세기(花郞世記)』에는 “현명한 보필자와 충성스러운 신하가 여기에서 나왔고, 훌륭한 장수와 용감한 병졸이 이로부터 생겨났다.”라고 하였다. ② 최치원(崔致遠)〈857~908〉의 〈난랑비(鸞郞碑)〉 서문(序文)에는 “나라에 현묘(玄妙)한 도(道)가 있는데, 풍류(風流)라고 이른다. 교화를 행하는 근원에 대해서는 선사(仙史)에 자세하게 갖추어 있는데, 실로 이에 삼교(三敎)를 포함하여 중생(衆生)들을 접하여 교화하는 것이다. 이를테면 ⑴ 들어와서는 집안에서 〈부모에게〉 효도하고, ⑵ 나가면 나라에 충성하라고 하는 것은 노(魯)나라 사구(司寇)의 가르침이다. ⑶ 무위(無爲)의 일에 처하고 ⑷ 불언(不言)의 가르침을 행하는 것은 주(周)나라 주사(柱史)의 본뜻이다. ⑸ 갖가지 악(惡)을 행하지 말고 ⑹ 갖가지 선(善)을 받들어 행하라고 하는 것은 축건태자(竺乾太子)의 교화이다.”라고 하였다. 당(唐)나라 영호징(令狐澄)의 『신라국기(新羅國記)』에는 “귀인(貴人) 자제(子弟) 가운데 아름다운 이를 선발하여 분을 바르고 곱게 꾸며 이름을 화랑(花郞)이라고 하였는데, 나라 사람들이 모두 떠받들며 섬겼다.”라고 하였다. ③ 안홍법사(安弘法師)가 수나라에 들어가 불법(佛法)을 배우고 호승(胡僧) 비마라(毗摩羅) 등 두 승려와 함께 돌아와 『능가경(稜伽經)』과 『승만경(勝鬘經)』 및 부처의 사리(舍利)를 바쳤다. ④ 가을 8월에 왕이 돌아가셨다. 시호(諡號)를 진흥(眞興)이라 하고, 애공사(哀公寺) 북쪽 산봉우리에 장사지냈다. 왕이 어려서 즉위하여 한결같은 마음으로 불교를 신봉하였다. 말년에 이르러 머리를 깎고 승복을 입었으며, 스스로 〈법명을〉 법운(法雲)이라고 지어 생애를 마쳤다. 왕비 역시 이에 비구니가 되어 영흥사(永興寺)에 머물렀다. 〈왕비가〉 돌아가시자, 나라 사람들이 예를 갖추어 장사지냈다.”2

『삼국사기』를 편찬한 사람은 풍류도(風流道)가 화랑 무리〈花郞徒〉 활동의 바탕이자 지향점이었다고 생각한 듯하다. 사진출처 : 문화재청

이 인용문에서, ③은 안흥법사와 두 다문화 승려 이야기이고, ④는 진흥왕과 진흥왕비의 죽음 이야기이다. ①과 ②는 화랑(花郞) 무리〈도(徒)〉에 관한 기록이다.

①은, 왕이 미녀인 원화(源花)를 중심으로 인재 집단을 만들려고 했으나 무산되고, 미모의 남자를 선발하여 곱게 꾸미고 화랑(花郞)이라 이름한 후 그들을 중심으로 인재 집단〈낭도(郎徒)〉이 형성되는 과정을 기록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여기에서는 화랑 무리가 국가의 인재로 성장하기 위한 수련을 다음과 같은 설명해 놓았다.

“혹은 도의로써 서로 연마하고, 혹은 노래와 음악으로써 서로 즐겨서 산과 내를 찾아 노닐며 멀리까지 이르지 않은 곳이 없었다.(或相磨以道義 或相悅以歌樂 遊娛山水 無遠不至)”

이에 따르면 수련의 방식은 산과 내를 찾아 노니는 것이었으며, 주요 내용은 도의로써 서로 연마하거나 노래와 음악으로써 서로 즐기는 것이었다.

〈난랑비〉 서문

②는 최치원의 〈난랑비〉 서문에 들어있는 풍류도에 대한 설명과 영호징의 『신라국기』에 들어있는 화랑에 대한 평가를 인용해 놓은 것이다. 이 두 인용문을 나란히 붙여놓은 것을 보면, 『삼국사기』를 편찬한 사람은 풍류도(風流道)가 화랑 무리〈花郞徒〉 활동의 바탕이자 지향점이었다고 생각한 듯하다. 〈난랑비〉 서문〈鸞郎碑序〉은 남북국시대 신라학자 최치원이 화랑인 난랑의 비에 새기기 위해 쓴 글이라고 하는데, 일부만이 『삼국사기』〈신라본기〉‘진흥왕 37년’(576) 조 기사에 인용되어 후세에 전한다. 이 인용문과 같은 글이 『고운선생속집(孤雲先生續集)』에도 들어있다고 한다. 연구자들은 이 인용문이 화랑도의 정신사적 측면을 살펴볼 수 있는 귀중한 자료라고 평가하기도 하고, 글 전체가 보존되었다면 그를 통해 신라의 화랑도와 9세기 말엽 화랑의 실태 알아볼 수 있었을 것이라고 추측하기도 한다.3

②에 인용된 〈난랑비〉 서문의 원문4은 다음과 같다.

“國有玄妙之道 曰風流

設敎之源 備詳仙史 實乃包含三敎 接化群生 且如

⑴ 入則孝於家 ⑵ 出則忠於國 魯司寇5之旨也

⑶ 處無爲之事 ⑷ 行不言之敎 周柱史6之宗也

⑸ 諸惡莫作 ⑹ 諸善奉行 竺乾太子7之化也”

풍류(風流)라는 말을 문자 자체에 충실하게 풀이하면, ‘바람의 흐름’ 나아가 ‘자연의 변화’라 할 수 있을 것이나, 의역을 한다면 ‘자연의 변화에 거스르지 않는 것을 우선시하는 삶의 태도’ 정도가 가능할 듯하다. 도(道)는 길, 말씀, 제1원리 등으로 그 뜻을 새길 수 있다. 이에 따르면 「난랑비」 서문에서의 도(道)는 ‘사람이 자기 필요에 따라 만든 것이기에 마땅히 써야 할 길’, ‘믿고 따를만한 말씀 혹은 가르침’, ‘벗어나지 않는 것이 좋은 제1원리’ 정도로 이해할 수 있다. 최치원은 풍류(風流)라는 이름의 도(道)의 제1의 행동방침을 접화군생(接化群生)〈중생(衆生)들을 접하여 교화하는 것〉이라고 단정한 후, 그런 행동방침의 구체적이 예가 공자〈⑴·⑵〉 노자〈⑶·⑷〉 석가〈⑸·⑹〉가 제시한 여섯 개의 실천규범8과 부합된다고 부연설명하였다. 접화군생에 비하면 여섯 개의 실천규범은 구체적인 것으로 보인다. 그런 만큼 접화군생이라는 말은 정의하기 어렵다.

접화군생

接化群生(접화군생)의 번역은 다양하다.

㈀ 인간을 교화하는 것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과학원 고전연구실, 1958년〉9

㈁ 중생을 교화한다. 〈이병도, 1982〉10

㈂ 모든 생명체와 접촉하여 그것들을 생기있게 변화시킨다. 〈김형효, 1987〉11

㈃ 모든 중생을 친히 교화하고 있다. 〈차옥숭, 2001〉12

㈄ 중생(衆生)들을 접하여 교화하는 것 〈대한민국 국사편찬위원회, 2025〉13

이 다양한 번역들을 다음과 같이 비교해 보았다.

* ㈀~㈄은 모두 화(化)를 교화 혹은 변화로 번역하였다.

* ㈀·㈁은 접(接)을 제외하고 번역하였다.

* ㈃은 접을 ‘친히’라고 의역한 듯하다.

* ㈂·㈄은 접을 중요한 글자라고 보고, 외래어로 보면서 번역한 듯하다.

* ㈀·㈁·㈄은 한 주체가 인간 혹은 중생을 대상화하는 것을 전제로 하였다.

* ㈂·㈃은 모든 중생 혹은 모든 생명체라는 말을 사용함으로써, 주체마저도 중생 혹은 생명체의 일원임을 시사함으로써, 주체-대상으로 관계를 설정할 때 피할 수 없는 힘의 작용의 일방향성을 현저히 약화시켰다. 이러한 의도는 ㈂에서 더 강해 보인다.

* ㈂·㈃은 군생(群生)을 모든 중생 혹은 모든 생명체로 번역해, 군(群)의 의미를 소홀히 하지 않았다는 면에서 다른 번역과 다른 번역과 구별되게 되었지만, 군(群)을 존재들이 사회를 이룬 상태를 뜻하는 것으로 본다면, 모든 중생 혹은 모든 생명체는 군생의 적확한 번역이 아닐 수도 있을 듯하다.

모든 생명체와 접촉하여 그것들을 생기있게 변화시킨다

지금 여기의 한국 사람들의 생각을 한 겹이나마 더 섬세하게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사진출처 : itoldya test1 – GetArchive

위에 열거한 번역들 가운데 1987년의 번역인 “모든 생명체와 접촉하여 그것들을 생기있게 변화시킨다”에서, 번역자는 군생(群生)을 ‘모든 생명체’로 보았다. 이에 비하면 군생을 ‘인간’·‘중생’·‘모든 중생’으로 보는 관점은 사람이 아닌 존재를 배제하는 관점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이 번역자는 군(群)을 ‘존재들이 사회를 이룬 상태’를 뜻하는 것으로 보기보다는 ‘모든’을 뜻하는 것으로 봄으로써 사회를 이루는 것과 무관한 존재까지 화(化)와 관련시켰다고 볼 수 있겠다. 이와 더불어, 앞서 주장한 바와 같이, ‘모든’이라는 말을 굳이 덧붙임으로써, 그 ‘모든’ 속에 화(化)의 주체도 포함될 수 있음을 시사함으로써, 화(化)를 둘러싸고 주체-대상으로 관계를 설정할 때 피할 수 없는 힘의 작용의 일방향성은 현저히 약화시켰다고 볼 수 있을 듯하다.

한편 ‘산과 내를 찾아 노닐면서, 도의로써 서로 연마하거나 노래와 음악으로써 서로 즐기는’ 화랑의 수련 방식은, 형식논리에 입각해 정의하기 어려운 접화군생을, 그런 수련 방식이 풍기는 분위기가 자아내는 ‘느낌’을 통해 우회적으로나마 이해하게 해주는 듯하다.

1958년과 1982년의 번역에 비교해 보면, 1987년의 번역이 접화군생이라는 말 속에 저장되어있던 행동방침 나아가 가치관을 생동감있게 재생한 것이라는 느낌을 가지게 될 듯하다. 한편 2001년의 번역과 2025년의 번역이 1987년의 번역에 대한 충분한 검토의 결과라면, 2001년과 2025년의 번역자들은 1987년의 번역이 글자 하나하나에 대한 지나친 의미부여로 인해 번역이라기보다는 ‘창작’이라고 해야 할 것이 된 것이 아닌가 하는 의혹을 품었던 것 같다. 1987년의 번역에 비하면, 2001년의 번역과 2025년의 번역은 의미와 가치가 날카롭게 서 있지 않다는 비평을 받을 수도 있을 듯하다.

유교 경전 연구의 역사에 탁고개제(託古改制)라는 말이 있다. ‘옛 것에 의탁하여 제도를 개혁한다’는 뜻이다. 다소 과격하게 의역하자면, ‘옛 제도나 문헌이나 사상 등을 새로운 제도의 수립을 정당화하는 데 이용한다’라고 할 수 있다. 1987년의 번역은 탁고개제를 떠올리게 한다. 다른 번역들에 비하면, 이 번역은 ‘과격’하다. 아쉬운 것은 1987년 이후의 번역들이 ‘온건’해졌다는 것이다.

화(化), 연대를 통해 모두 함께 더 나아짐

번역은 반역이라고도 하고 창작이라고도 한다. 모든 것이 시대의 산물이라고 한다면, 시대의 변화에 따라 번역이 달라지는 것을 혼란이라고만 할 수는 없다. 1987년의 번역이 과격해 보이는 것은 번역자가 번역에 당대의 요구를 반영하고자 하였기 때문일런지도 모른다. 이런 논리의 연장선상에서 보면, 변화가 가속화되고 있는 지금 여기에서 번역자는 1987년의 번역보다 더 과격한 번역, 예컨대 화(化)만 떼어내서, 화(化)를 둘러싸고 주체-대상으로 관계를 설정할 때 피할 수 없는 힘의 작용의 일방향성을 더더욱 양화시켜, 주체와 대상을 연대 가능한 대등한 양자로 설정해, 화(化)를 ‘연대를 통하여 모두 함께 더 나아짐’ 정도로 번역하는 것을 생각해 볼 만도 하다.


  1. 여기에 쓰인 번호들은 글 쓰는 이가 만들어 붙인 것이다.

  2.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삼국사기』 권 제4 〈신라본기〉 제4 ‘진흥왕(眞興王)’

  3. 『한국민족대백과사전』 ‘난랑비서’ 참조.

  4. 원문에 가해진 줄 바꾸기, 밑줄 긋기, 번호 붙이기는 글 쓰는 이가 글을 보는 이들의 편의를 고려하여 한 것이다.

  5. 공자

  6. 노자

  7. 석가

  8. 『한국민족대백과사전』 ‘난랑비서’ 참조.

  9.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과학원 고전연구실 (번역), 『삼국사기』 상,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과학원, 1958, 93쪽.

  10. 이병도 (번역), 『삼국사기』 상, 신장판 세계사상전집 6, 을유문화사, 1983, 74쪽.

  11. 김형효, 〈고대신화에 나타난 한국인의 철학적 사유〉, 韓國哲學會(編), 『韓國哲學史』(上卷), 東明社, 1987, 10쪽.

  12. 차옥숭, ‘풍류도’, 『한국의 고유사상』, 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원 한국사상연구소 (엮음), 『자료와 해설, 한국의 철학사상』, 민연총서–한국사상1, 예문서원, 2001, 44쪽.

  13. 대한민국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번역), 『삼국사기』, 2025. 〈이 번역은 2019년 이후 갱신되고 있다〉

이유진

1979년 이후 정약용의 역사철학과 정치철학을 연구하고 있다.
1988년 8월부터 2018년 7월까지 대학에서 철학을 강의하였다.
규범과 가치의 논의에 도움이 될 만한 일을 하고 싶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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