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물 되기를 통한 야성성=자율성 회복

스피노자는 생명과 자연과 연결되어 있는 신체를 탐색합니다. 이에 따라 신체 속에 생명, 사물, 자연, 기계 등이 내재하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합니다. 그리고 욕망이라는 자기원인이 바로 생명과 자연의 원리에 따른다는 점에 주목하면서, 결국 욕망, 사랑, 신체 변용, 정동이 바로 생명과 자연으로부터 유래했다는 사실로 나아갑니다. 그런 점에서 생명과 자연은 외부성의 존재이면서도 삶의 내재성에 잠재된 것이 됩니다. 인간의 내부에 외부적 존재인 자연과 생명이 내재한다는 점은 조금 역설적으로 느껴지기도 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들과 연결된 신체 없이는 살 수 없기 때문에, 느끼고 감응하고 변용하고 사랑해야 할 우리 안의 동물성, 식물성, 사물성, 기계성임에는 분명해 보입니다. 그런 점에서 우리는 꽃 되기, 책상 되기, 로봇 되기, 호랑이 되기 등의 능력을 신체 안에 갖고 있는 셈입니다.
그런데 최근 문명은 외부의 자연과 생명을 외부에 두지 않고 도구화함으로써, 고도로 첨단화된 과학기술 앞에서 자연과 생명을 뻔하게 규정하는 수식과 통계, 도표로 벌거벗게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생명과 자연을 유일무이하고 특이하다는 점에서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다소 뻔하게 보는 관점이 교육되었지요. 그리고 과학과 생명공학, 천문학 등의 수치와 통계, 역학조사 등이 연일 발표되고 있지요. 동시에 야생동물 보호구역이나 자연 보호구역과 같이 생명과 자연이라는 외부적 존재를 그대로 놔두면 잘 자라고 큰다는 생각으로부터 벗어나 야성성을 보존해야 하는 문명의 역설에 직면해 있습니다. 생명의 시중꾼이자 자연의 대리인으로서의 인간 문명의 역할이 등장한 것입니다. 즉 외부성은 그저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양육하고 보호하고 보존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대로 가면 대부분의 동식물이 멸종위기에 내몰리는 거대한 기후변화의 상황을 목전에 두고 있습니다. 이제 외부성을 그대로 놔두면 잘 자랄 거라는 자연주의적 입장에서 사유하는 것은 그리 합리적이지도 타당하지도 않아 보입니다. 그런 점에서 문명의 외부로서의 생명과 자연을 설정하는 것은 낡은 도식에 불과합니다. 외부였던 생명과 자연이 이미 문명의 내부 구성원이 되어 있는 상황인 것이지요. 이제 그들에게 권리를 부여하고 고려해야 하는 상황입니다. 그런 점에서 동식물을 보호하고 보존하려는 생명권과 생태권이 굉장히 중요해진 상황입니다.
들뢰즈와 가타리는 ‘문명의 외부=야성성=자율성=동물 되기’라는 공식을 통해서 스피노자의 외부성의 사유를 복원합니다. 우리의 신체 안에 있는 생명과 자연의 능력인 사랑과 변용의 능력을 촉진하고 촉매해야 한다는 점도 강조합니다. 다시 말해 거대한 위기의 시대에 우리가 자율적인 행동 능력과 야성성을 갖추지 않고서 그것을 헤쳐 나갈 수 있을지도 의문이 들고, 그 어떤 능력보다도 동물 되기의 능력이 필요한 것일지도 모릅니다.
우리 문명은 일찍부터 외부를 내부로 포섭함으로써 이에 순응하는 달콤하고 부드러운 삶의 방식에 익숙한 사람들을 양산했습니다. 그런 점에서 우리 안의 자연과 생명의 능력인 욕망에 더 귀 기울여야 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우리는 지금 스피노자의 외부성에 대한 질문에 직면해 있습니다. “문명으로부터 벗어난 야생 상태, 즉 외부가 있을까?”라는 질문이 그것입니다.
도구적 이성에서 생명권으로
스피노자의 이성에 대한 사유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약간의 비교가 필요합니다. 그 비교 대상으로 데카르트를 소환해보겠습니다. 데카르트는 생명과 자연을 ‘도구적 이성’이라는 구도에서 쓸모 있는 것, 용도가 있는 것, 필요한 것으로 만들어내는 문명의 기초를 정립했습니다. 반면 스피노자의 욕망과 이성이 평행을 그리는 구도는 아무래도 ‘내재적 이성’이라는 개념이 더 어울릴 것 같습니다. 여기서 무엇을 내재했는가 하면 외부의 생명과 자연의 능력인 욕망을 내재하고 있다는 얘기지요. 스피노자의 내재성 이성의 구도에서 보면, 생명과 자연을 도구로 삼는 도구적 이성은 합리적인 방향성이 아니고 자신 안에 있는 자연과 생명의 힘, 욕망과 변용의 역능을 억압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특히 도구적 이성은 동물을 도구로 삼아 공장식 축산업, 동물실험, 동물원, 오락, 사냥 등으로 사용하는 것을 정당화하는 논변일 뿐입니다. 근대 합리주의를 대표하는 데카르트의 도구적 이성이 역설적으로 비합리주의의 화신으로 평가절하되는 순간입니다.
문제는 동물을 도구화하면 그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안의 생명과 자연을 억압하는 것으로 나아간다는 점입니다. 이에 따라 동물에 대한 도구화는 곧이어 제3 세계 민중을 약탈하고, 노동자를 착취하고, 소수자를 차별하고 이주민을 혐오하는 방향성의 근간을 이루게 됩니다. 마치 도미노처럼 작은 생명을 짓밟는 최초의 행위가 사회 전체에 파급되는 것입니다.
이를테면 공리주의가 내세우는 ‘최대다수 최대행복’은 소수자의 희생과 배제를 정당화하는 것임을 간파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것은 민주주의의 탈을 쓰고 있지만, 파시즘의 토양이 될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도구적 이성도 생명과 자연의 억압을 정당화함으로써 결국 민중, 소수자, 노동자를 억압하는 파시즘의 토양이 됩니다. 파시즘은 억압을 욕망하는 방식으로 억압 자체에 대한 기괴한 욕망이 발생함으로써 우리 안의 생명과 자연의 힘을 굴절시킵니다. 이는 도구적 이성의 최종 산물임에 분명합니다. 그런 점에서 지구상의 가장 약자인 동물에 대한 사랑은 곧 인간에 대한 사랑의 필요조건입니다. 즉 현재 우리는 생명권 없이 인권을 성립시킬 수조차 없는 상황에 직면해 있습니다.
스피노자는 우리 신체 안의 생명과 자연의 능력인 욕망과 변용에 대해 얘기함으로써 동물에 대한 사랑을 함의하는 이야기를 하지만, 물론 동물 자체에 대해 많이 발언한 것은 아닙니다. 약간의 에피소드와, 동물 자체가 죄의식이나 부정의 사유가 없다는 발견 등을 전개할 뿐입니다. 그러나 그의 외부성의 사유로 생각해볼 때, 외부가 소멸하고 있는 현재의 국면을 본다면 틀림없이 생명과 자연의 보호와 보존을 주장할 것입니다. 혹자는 스피노자의 외부성에 대한 논의는, 기술 발전이나 문명의 포획의 힘이 적을 때 외부를 생각했던 것이 아니냐고 반문합니다. 즉 스피노자가 살던 당시에는 주어진 외부가 있었지만, 이제는 생명과 자연이 파괴되고 포섭되어 외부가 더 이상 남아 있지 않다는 것이지요.
그러나 스피노자의 내재성 이성, 즉 욕망과 이성의 평행론은 외부가 사라져가고 있는 현대의 우리를 대안적인 사유로 인도해준다는 점에서, 우리는 그의 사상에 귀 기울일 필요가 있습니다. 즉 이성이 욕망을 억압하거나 도구화하는 것이 아니라, 평행을 달리는 것은 결국 생명과 자연과 인간과의 공존과 평화, 즉 생명평화 세상에 대한 스피노자의 구상이라는 생각도 듭니다. 결국 외부성의 사유는 오히려 우리가 보호하고 보존해야 할 야성적 사유임이 분명합니다. 그런 점에서 스피노자의 사유는 생명과 자연을 사랑하는 공동체에서 환대받을 만한 사상이겠지요.
음악이 언어가 되고

사진 출처: Joshua J. Cotten
아침마다 새들이 지저귀는 소리에 잠을 깹니다. 저희 집이 공원에 인접해 있기 때문인지 유난히 새소리가 크게 들립니다. 기도나 주문 같기도 하고, 노래 같기도 한데, 한 마리가 울면 다른 새도 함께 웁니다. 새들은 울음소리로 소통한다는 점에서 음악이 언어인 동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제가 쓰레기 분리수거를 하러 가면 ‘꺄르르’ 하다가도 ‘떼르르’ 하기도 하고, ‘빠뚜뚜’ 하기도 합니다. 어떤 고정된 단어가 없는데도 침입자가 나타났다고 알리는 걸 보면 화음을 통한 의사소통의 방법이 참 재미있다는 생각도 듭니다.
이러한 새들의 언어를 듣고 있노라면, 멕시코 원주민의 휘파람 언어인 사보텍어가 떠오릅니다. 스페인이 멕시코를 점령하자 원주민들은 점령자들 몰래 소통하려고 휘파람을 불었다고 합니다. 그것은 정확한 의미나 고정된 형식이 없었지만 동족들에게 위험하다거나 피하라는 뜻을 전달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물론 스페인 점령자들은 그 소리들의 의미를 전혀 알 수 없었지만 말이지요.
제가 이 얘기를 꺼낸 이유는, 새소리나 원주민들의 휘파람 언어에서도 스피노자의 범신론을 엿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스피노자의 ‘신 즉 자연’의 구도는 매우 간단해 보입니다. 신이 곧 자연이라는 의미로 생각되기 때문이겠지요. 그런데 신은 자연의 다양한 양태에 내재해 있고, 이를 통해서 표현됩니다. 이에 따라 신은 자연으로 표현되는 것을 통해서만 알 수 있게 되는 것이지요. 즉 그 배후에 있는 정확한 인과론이 아니라, 표현을 통해서만 드러나는 인과론인 셈이지요. 다시 말해서 새들이나 휘파람은 고정된 어떤 의미를 갖는 것이 아니라 단지 표현을 통해서만 소통되듯이, ‘신 즉 자연’의 구도 역시 단지 표현을 통해서만 드러나는 구도인 것입니다. 즉 따로 고정된 의미가 없듯이 신 역시 자연과 다른 실체가 따로 없는 셈이지요.
범신론의 신은 꺄르르 웃는 아이에게도, 무지갯빛 호수 위에도, 시끄럽게 우는 원숭이에게도, 새들의 날갯짓과 울음소리에도 내재하고 있으며 이를 통해서만 표현됩니다. 따로 신이 있는 것이 아니지요. 스페인 침략자들이 원주민들에게 ‘삐리리’, ‘뽀삐삐’, ‘쁘쁘삐’ 같은 휘파람 소리의 뜻을 물어도, 그들은 모른다고 말합니다. 그저 상수가 없는 변수의 무한한 변주를 통한 표현만이 있을 뿐 고정된 의미가 따로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스피노자의 범신론은 동물에 대해 또 다른 생각을 하게 만듭니다. 동물들은 무한한 변주 속에서 일관된 흐름을 갖고 살아갑니다. 동물에게는 언어나 고정관념이 없고 삶과 욕망, 신체변용의 자기원인만이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동물은 스피노자의 ‘신 즉 자연’을 가장 잘 표현하고 있다는 생각도 듭니다.
동물들의 영토, 범위 한정 기술
동물들의 특성 중 하나가 영토를 만드는 능력입니다. 어떤 구획, 경계, 범위를 설정하고 그 행동반경 안에서 활동하는 것이지요. 영토 안에는 매우 부드러운 환경이 조성됩니다. 그 안에서 지속적으로 서로를 돌보고 가까이서 삶을 살아갈 수 있는 내부 반경을 만드는 것입니다. 외부의 척박하고 열악한 환경과 달리 내부 환경은 동물들이 새끼를 양육하고 돌볼 수 있는 곳입니다. 동물들에 따라 영토는 작을 수도 있고 클 수도 있으며, 보통 먹이 사냥과 서식 범위에 의해 결정됩니다.
현상학에도 범위 한정 기술이 있습니다. 주변과 경계를 분명히 하고 앎의 범위를 한정해야 인식이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텔레비전을 보는 행위를 위해서 옆에서 끓고 있는 찻주전자의 소리와 아이들의 우는 소리, 동물들이 오락가락하는 몸짓 등을 자신의 인식 범위에서 분리시키고 인식 범위를 텔레비전에 한정시켜야 한다는 것이지요. 결국 인식의 확실성은 경계와 범위를 어디로 한정했느냐와 관련됩니다.
들뢰즈의 국지적 절대성 개념, 즉 가까이에 있는 사람들의 깊이와 잠재성을 발견하자는 내용은 이러한 동물들의 범위 한정 기술이나 영토 만들기와 유사한 측면이 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모습들은 스피노자의 행동방식을 연상시키는 측면이 있습니다. 스피노자는 헤이그 교외로부터 벗어나지 않는 삶, 하숙집과 도제 작업장을 벗어나지 않는 삶, 즉 한정되고 제한되고 유한한 삶을 살아갑니다. 이것은 어쩌면 들뢰즈가 말한 제자리에 멈추었을 때라야 비로소 시간이 개방된다고 한 말과 통하는 삶이 아닌가 합니다.
들뢰즈의 말을 간단히 해석하자면, 시간은 흐름이나 파동의 속성을 갖지만 입자나 화음의 속성도 갖고 있어서 제자리에서 리듬과 화음을 만들어야 입자와 같이 퍼져나가 어떤 시간의 장이 만들어진다는 것이지요. 즉 암모니아 입자가 교실의 작은 부분에서 퍼지다가 점차 교실 전체로 퍼져나가듯이 시간 역시도 그러한 브라운 운동을 한다는 것입니다. 여하튼 들뢰즈의 생각은 무척 어렵게 느껴지지만 평생 제자리에서 여행했던 스피노자를 이해할 수 있는 아이디어와 단서를 제공해주는 듯합니다.
스피노자는 은둔자처럼 살았습니다. 범위 한정 기술에 따라 제한된 범위를 오갔고, 정보 값도 굉장히 낮았습니다. 그러나 소박하고 단순한 삶은 자기원인을 드러내기 좋은 내재성의 평면이라는 생각도 듭니다. 그는 그 평면 위로 정동의 기하학을 세모, 네모, 동그라미, 별표, 원으로 그려냅니다. 그리고 현대인들은 스피노자의 기하학적 도형을 통해서 신체 변용과 욕망, 정동이 어떻게 작동하며, 우리의 몸으로 무엇을 할 수 있는지에 대한 작은 단서를 찾고 있습니다.
동물들의 무리 짓기
동물들의 또 다른 특성 중 하나가 무리를 이루는 것입니다. 들뢰즈와 가타리는 동물들의 무리 짓기의 특성을 통해 다양체로서의 공동체를 구상합니다. 이는 스피노자의 ‘특이성을 사랑하는 공통성’에 대한 구상과 통하는 면이 있습니다. 즉 개성과 의견 차이, 색다른 측면, 소수자를 사랑하는 공동체를 구상한 것이 바로 스피노자의 ‘특이성을 사랑하는 공통성’의 구도입니다.
들뢰즈와 가타리는 이러한 스피노자의 개념을 계승하여 새로운 해석을 내놓습니다. 그들은 계급이익, 이해관계 등으로 모인 군중과, 욕망과 신체 변용에 따라 모인 무리를 구분합니다. 이를 통해서 ‘몰(mole)적 군중’과 ‘분자적 무리’라는 이분법을 구상합니다. 몰적인 것은 하나의 모델에 집중하고 수렴되는 것을 의미하는 데 비해, 분자적인 것은 여러 모델을 횡단하고 이행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즉 이익과 이해는 수렴모델이라면, 욕망과 변용은 횡단모델인 셈이지요. 이러한 구분은 학교, 감옥, 군대, 병원, 시설, 정신병원에서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군중’과, 반대로 팬덤 무리, 오토바이 폭주족, 축구 관중 등의 욕망에 따라 움직이는 ‘무리’는 사뭇 다르다는 점으로도 이해됩니다. 즉 강권이나 의무에 따라 모였느냐, 아니면 자발적으로 모였느냐에 따라 같은 100명이어도 질적 차이가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공동체가 자연과 생명의 자기원인, 즉 욕망에 따라 움직일 때 가장 자율적이고 자유롭다는 것을 상상해 볼 수 있습니다. 욕망이 이끄는 대로 모인 사람들이라면 더 유쾌하고 상상력을 발휘할 것이며 관계가 더욱 성숙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들뢰즈와 가타리는 이러한 공동체를 동물 되기의 능력이 발휘된 것이라고 보면서, 사랑과 욕망의 흐름에 따르는 분자적인 무리가 되는 것을 동물 되기라고 말했습니다. 그것을 가장 잘 보여준 것이 68혁명이었고요. 68혁명은 계급이익이나 이해관계가 아니라, 비루하고 단조로운 체제에 대한 저항이었습니다. 이념, 가치, 의미에 따라 조직되었던 기존 공동체나 집단은 새로운 세대에 맞지 않은 고루한 것이었습니다. 대신 자발성, 상상력, 쾌락 등의 욕망의 슬로건들이 등장했지요. “금지를 금지하라!”, “더 많이 사랑할수록 더 많이 혁명을 하고 싶어진다”, “노동하지 마라!”, “지루해서 못살겠다!” 같은 구호들이 68혁명의 성격을 잘 보여줍니다.
결국 들뢰즈와 가타리의 동물 되기, 즉 분자적 무리 되기의 개념은, 공동체가 자신의 내재성의 평면에 기입된 자연과 생명의 능력인 사랑, 욕망, 정동을 배반해서는 안 되며, 그것의 자연스러운 생명 에너지와 활력에 따라 조직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는 소수자 집단이나 대안 집단, 생태주의 집단에 대해 색다른 조직화를 욕망할 것을 주문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다시 말해 “올바른 것이 있으니, 나를 따르라”고 말했던 기성세대의 이념형 공동체가 아니라, “우리 안에 활력과 생명 에너지가 이끄는 대로 움직이자”라는 새로운 세대의 공동체가 조성되었다는 의미입니다. 우리 자신의 생명과 자연의 능력이 바로 공동체를 구성할 수 있는 역능임을 잊어서는 됩니다. 우리 안의 자연스러운 욕망이 발현될 수 있는 공동체를 상상할수록 어쩐지 기분이 좋아집니다.
욕망, 동물 되기의 지평

사진 출처: Simon Berger
스피노자의 코나투스, 즉 자기보존 욕구는 자기원인에 따르는 욕망, 즉 정동의 개념입니다. 우리는 들뢰즈와 가타리의 동물 되기를 통해서 우리 안의 동물성인 욕망의 야성성을 긍정함으로써 자율적인 행동과 무리 짓기, 영토 만들기 등의 능력을 갖고 있음을 깨닫게 됩니다. 이를 통해 아무리 열악하고 절박한 상황에서도 우리의 삶과 욕망, 정동이 갖고 있는 잠재적인 능력에 따라 행동할 때 색다른 영토가 개척될 수 있다는 것도 알게 됩니다. 결국 우리 안의 야성성은 곧 자율성입니다. 우리가 색다른 삶과 색다른 욕망을 가질 수 있는 우리 안의 생명과 자연의 능력인 셈이지요. 그리고 그러한 자연의 능력, 생명의 능력을 사랑한다는 것은 우리 신체의 무한한 잠재력을 긍정한다는 의미입니다.
우리는 들뢰즈와 가타리의 동물 되기를 통해 스피노자 사상의 야성적인 면모를 되살릴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들뢰즈와 가타리는 스피노자의 다소 모범생 같은 개념들에 색다른 의미를 부여해서 더 야성적이고 더 혁신적인 개념으로 바꿔냅니다. 그렇다고 해서 스피노자의 사유의 지평을 크게 벗어나지는 않지요. 우리가 느끼는 스피노자는 어떤 사람일까요? 들뢰즈와 가타리의 동물 되기는 스피노자를 이해하는 데 참고할 만한 하나의 창을 제공해줍니다. 물론 우리가 느끼고 형상화하는 스피노자는 제각각 다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수많은 위험이 도사리는 황야를 개척하여 삶의 내재적인 영토를 만들어내는 동물 되기의 욕망의 능력을 응시한 스피노자를 상상하기란 어렵지 않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