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이건스럽게 이미지-장착된 미국의 대통령들 – 브라이언 마수미 『가상계』 2장 「출혈」 독후기

과학적 사고를 통하여 실체(實體)[substance]의 존재(存在)[being]를 증명하였다고 확신하면서, 실체성에 기반하여 세계를 이해하는 사람들 가운데, 일말의 지적 호기심을 가진 사람이라면, 당연히도 끊임없이 자신의 세계관과 현실 사이의 충돌을 경험하며 살아갈 것이다, 20세기말에서 21세기초에 걸쳐, 미국에서 꽤 많은 사람들이 경험한 실체성 기반 세계 이해와 레이건스럽게 이미지-장착된 대통령직의 충돌은 그 사례 가운데 하나다.

가상계
브라이언 마수미 저, 『가상계; 운동, 정동, 감각의 아쌍블라주(assemblage)』 (갈무리, 2011년)

2002년, 듀크 대학교 출판부는, Post-Contemporary Interventions [지금과 그 다음 사이에 끼어들기]라는 기획의 한 부분으로, 브라이언 마수미의 원고를 스탠리 유진 피쉬와 프레드릭 제임슨이 편집한 책 Parables for the Virtual : Movement, Affect, Sensation [가상계우화 : 운동, 정동, 감각]을 펴냈다. 이 책은 2011년 『가상계; 운동, 정동, 감각의 아쌍블라주(assemblage)』라는 제목을 달고 한국어로 번역 출판되었다. 한국어 번역본의 제목에는, 원서본 제목에 들어가 있던 ‘Parables[우화]’라는 단어가 빠진 대신, ‘얽기[assemblage(아쌍블라주)]라는 단어가 들어갔다. 이 번역본의 서문에는 “구체적으로 행하지 않아야 구체적이다” 라는 부제목이 붙어있다. 이 책과 그 한국어 번역본의 서지정보는 다음과 같다.

Massumi, Brian , Fish, Stanley Eugene (EDT) , Jameson, Fredric (EDT), Parables for the Virtual : Movement, Affect, Sensation (Post-Contemporary Interventions), Duke University Press, 2002.04.09.〕

브라이언 마수미(지음), 조성훈(옮김), 『가상계 -운동, 정동, 감각의 아쌍블라주(assemblage)』, 아우또노미아총서 28, 갈무리, 2011.07.30.

아래의 글은 위의 책의 제2장 「출혈 -육체가 이미지를 만나는 곳」1의 독후기이다.

다른 사람의 몸 속에 나를 집어넣기

2016년, 도널드 트럼프는 미국 대선 캠페인 슬로건으로 MAGA, Make America Great Again!, “미국을 다시 위대하게!”를 내세웠다. 그로부터 36년 전, 로널드 레이건은 미국 대선 캠페인 슬로건으로 MAGA, Let’s Make America Great Again, “미국을 다시 위대하게 만들자”를 내세웠다. 그리고 그로부터 15년 전인 1965년, 로널드 레이건은 《나머지 내 몸은 어디에?》2라는 제목의 책을 공저로 출판하였는데 이는 그의 자서전으로, 정계 진출에 대비하여 펴낸 책인 듯하다. 책 출판에 이어 그는 정계에 진출하여 제33대 캘리포니아 주지사에 당선되어 8년간[1967~1975] 재임하였고, 제40대 대통령에도 당선되어 8년간[1981~1989] 재임하였다.

레이건은 《나머지 내 몸은 어디에?》에서 영화배우를 시작하였던 1937년에 자신의 연기에는 품격이 결여되어 있었다고 회고하였다. 타인들이 보는 대로 자기 자신을 보기를 할 줄 알아야 배우라고 할 수 있는데, 자신은 그렇게 하지 못하였다는 이유에서였다.3 《나머지 내 몸은 어디에?》에서 레이건은 샘 우드[Sam Wood] 감독이 연출한 영화 《킹스 로우[King’s Row]》[1942]4에 출연하며 겪은 경험을 회고하였다. 그러면서 “《킹스 로우》가 없었다면 지금의 나는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라고 주장하였다.5 이 영화는 ‘킹스 로우’라는 마을에서 살아가는 두 친구 패리스와 드레이크의 우정 이야기다. 여기에서 로널드 레이건은 드레이크 맥휴를 연기하였다. 이 영화에서 두 친구는 어떤 갈등도 겪지 않는 우정을 나눈다. 드레이크는 파산을 한데다 두 다리를 잃는 사고를 겪는데, 의학도가 된 패리스는 그런 친구를 헌신적으로 돕는다. 이 영화에서 레이건은 두 다리가 잘려지는 사고를 당하면서 의식을 잃었다가 깨어나서 “나머지 내 몸은 어디에?”라는 질문을 하는 연기를 하였다. 1937년 레이건이 자신의 연기에 결여되어있다고 생각하였던 품격이 1942년의 이 연기에서는 갖춰져 있었을까? 그것은 분명하지 않다.

그 품격이라는 것과 관계있는 것인지는 불분명하지만, 레이건은 1942년 《나머지 내 몸은 어디에?》에서 했던 연기에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던 것은 분명하다. 그는 “나머지 내 몸은 어디에?” 라는 대사가 나오는 대목의 연기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자평하였다고 한다.

“재촬영은 없었어요. 훌륭한 장면이었고, 영화에는 그대로 나왔죠. 아마도 단 한 번의 촬영으로 그렇게 잘 찍을 수는 없었을 거예요. 그 이유는, 다른 사람의 몸 속에,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서, 나 자신을 집어넣었기 때문이겠죠.”

레이건은 여기에서의 연기 비결을 ‘다른 사람의 몸 속에 나를 집어넣기’라고 설명한 것이다. 조금 까다로운 사람들에게는, 특별히 참신한 이야기도 아니며, 다소 유창하지 못하다는 느낌을 주며, 논리적으로도 정합적이지 못하다는 평을 들을 듯도 한, 이 연기 비결에 주목한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은 다음과 같이 비평하였다.

“레이건은 자신의 잘려진 자아로 인한 감격에 첫 장뿐만이 아니라 자서전 전체에 걸쳐 이 침대 장면을 넣었고, 그 결정적인 구절을 책의 제목으로 썼다 : 나머지 내 몸은 어디에? 이 구절은 너무나 의미심장해서, 특히 레이건의 후기 대통령직 수행과 연관시켜, 아무리 꼼꼼히 읽어도 지칠 줄을 모를 것이다.”7

영화 <킹스 로우> 포스터. 출처 : 위키피디아

레이건은 영화 속에서 자신의 두 다리가 잘려져 나간 것을 처음 알게 되는 사람을 연기하여야 했는데, 그런 연기를 무척 어려워 여러모로 고심하였다고 자서전에서 회고하였다. 그리고 촬영장에서 두 다리를 가리는 가리개에 하반신은 숨기고 꽤 긴 시간을 연기한 것이 무척 어려웠노라고 고백하였는데, 비평가는 그때 레이건이 느낀 감정을 ‘잘려진 자아로 인한 감격’이라고 바꿔 말하여 주었다. 비평가는 레이건이 자서전 속에서 이 감정을 대통령직 수행과 연결시키려 하였다고 보았다. “그 전기의 주요 임무는, 연예인과 주지사의 역할이 근본적으로 양립할 수 없다고 믿었던 당시-대중의 인식과는 반대로, 악당8으로 살아온 반평생 인생이 실제로 어떻게 그에게 고위직의 자격을 주었는지를 설명하는 것이다. 그는 공적인 무대 위에서만 극복될 수 있는 영화 연기의 결정적인 결함을 설명한다.”9 이런 비평을 보다 보니 마치 레이건이 그 기름지고 억양이 가식적인 말투로 다음과 같이 말하는 앞에 내가 서 있는 것 같았다.

‘나의 영화연기는 결정적 결함을 가진 것이었소. 내가 나의 영화연기의 결정적 결함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아무래도 주지사가 되어야 할 듯하오. 한 인간의 정신적 치유를 위하여 여러분이 협조하여 주기 바라오.’

바보가 아닌 한 이런 이유 때문에 누군가를 주지사와 대통령으로 선출하여 주는 사람들은 없을 듯하지만, 레이건은 주지사로 선출되었고 대통령도 되었다. 합치면 16년 동안, 그는 엄청나게 많은 사람의 생사를 좌우하는 권력을 가졌으며, 살아있을 때부터 위대한 소통가[the Great Communicator]라는 찬사도 받았다.

미국 영화사 아니 세계 영화사를 장식한 주요 업적이 레이건의 정치 행로에 붉은 카펫을 깔아주는 역할을 하기도 하였다. 레이건 스스로도 그의 출연작 가운데 중요한 작품으로 꼽았던 영화 《킹스 로우》. 존 윌리엄스는 에리히 볼프강 콘골드가 작곡한 이 《킹스 로우》의 메인 테마에서 기본 선율을 따서 《스타워즈》의 메인 테마를 만들었다고 한다.10 《스타워즈 에피소드 4 – 새로운 희망》는 1977년 개봉하였다. 모든 미국인이 《스타워즈》를 사랑하는 것은 아니지만, 대단히 많은 미국인의 뇌리에 《스타워즈》가 새겨져있는 듯하다. 《킹스 로우》와 《스타워즈》 사이에 메인 테마라는 접점이 있다는 것은 레이건의 대선 선거운동에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레이건은 당선되었고 레이건이 대통령으로 취임할 때 《킹스 로우》의 음악을 맡았던 에리히 볼프강 콘골드의 테마 음악이 연주되었다고 한다.11 재임 시 레이건은 소련의 핵공격에 대한 대비를 핑계로, ‘스타워즈’라는 이름을 내세워, 무기의 대량생산을 추진하기도 하였다.

무비와 스틸 사이를 끊임없이 오가다

그런데, 레이건이 누렸던 이러한 겹경사를 재앙으로 받아들인 사람들도 적지 않았다. MAGA라는 슬로건을 사용한 사람들의 면면을 보면 알 수 있듯, 레이건식의 정치는 그의 재임기간 8년으로 끝난 것이 아니었다. 도덜드 트럼프가 MAGA 라는 슬로건이 적힌 빨간 모자를 쓰고 다시 대통령직에 도전하고 있는 2024년 현재까지, 1980년 이후 44년 넘게, 레이건식의 정치는 작동 중인 듯하다. 신자유주의[Neo-Liberalism]·신보수주의[Neoconservatism]로 함축되는 레이건식의 정치는 레이건의 임기 8년으로 끝나지 않고 이어졌다. 그 사이 소련의 해체·걸프전·911·이라크전쟁·아프간전쟁·미중 갈등·후쿠시마 원전 붕괴·북미 관계 격변 등의 사건이 일어났고, 이 모든 사건은 아마도 기후환경위기라는 블랙홀로 빨려들어 가는 듯하다.

기후환경위기의 모든 책임을 레이건식 정치가 져야 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레이건 이후 미국의 정치가 민주 공화 구분 없이 레이건의 방식으로 물들어있다면, 그 방식은 적어도 연구의 대상은 되어야 할 것이다. 일부 비평가가 레이건 이후 미국의 대통령직은 레이건스럽게 이미지-장착된[Reaganly deja-rigged12]13 것이 되어 버렸다고 평가하였다. 그렇다면 레이건스러운 이미지는 어떤 것일까? “레이건은 《킹스 로우》의 러시에서 자신을 알아보지 못했다. 영사실에서 그는 그 자신의 새로운 이상으로 자기를 오인했다. 마침 그가 운동-비전에 의해 영원히 드러났을 때, 그는 자신을 이미지 없는 육체인 타자 없는 타자로 보았다. 그리고는 눈을 깜빡거리며 다시 자기 자신을 미래의 거울 이미지 속에 있는 타자-내-자아로 보았다. 그의 이어지는 경력은 이 두 개의 비전 사이에서의 끊임없는 명멸로 특징지을 수 있을 것이다.”14 인용한 비평에 의하면, 《킹스 로우》에서 연기할 때, 촬영 결과를 보면서 레이건은 영상 속의 자기가 평소 거울 속의 자기와 다르다고 느끼며, 자기가 성공적인 연기를 하고 판단하였다고 볼 수 있다. 여기에서 두 세계가 대비되었다.

⓵ 거울-비전 세계 ≒ 정지 사진 [스틸] / 타자-내-자아

⓶ 운동-비전 세계 ≒ 활동 사진 [무비] / 이미지 없는 육체인 타자 없는 타자

⓵의 거울-비전 세계는, 과학적 사고를 통하여 실체(實體)[substance]의 존재(存在)[being]를 증명하였다고 확신하면서, 실체성에 기반하여 논하는 세계라고 할 수 있다. 이런 논의에서는 대체로 인식주관-감각소여[sense-data]-인식대상이 실재한다는 것을 전제로 하면서 인식을 논하는 것이 가능할 듯하다. ⓶의 운동-비전 세계는, 인식·인식주관·인식대상 그 어느 것도 일정한 상태와 모습을 유지하지 않는 상태라고 할 수 있다. 현존하기는 하지만 발생 계통을 달리하는 개념어를 동원하여 우화적으로 설명해 보자면 이 세계는 무상(無常)·무아(無我)라고 해 볼만은 하다. 무상은 ‘일정한 모습을 유지하지 않음’, 무아는 ‘나라고 할 수 있는 것이 내 안에 쌓여있는 상태를 믿는 존재가 유지되고 있다고 믿지 않음’이라 말해 볼 수 있다. 운동-비전을 지향하는 사람들은 실체론을 부담없이 경쾌하게 버렸기 때문에 실체론으로부터 언어적·논리적 설명 도구를 미처 챙겨나오지 못하였다. 그럼에도 그들은 거울-비전에 ‘머무르는’ 자들이 사용하는 언어를 비교적 부담없이 사용하여 자신들이 뇌 내에 형성시킨 관념을 곧잘 언급하곤 한다. 이때 그들의 알리바이는 그들이 하는 말이 우화라는 것이다. 이는 얕보거나 비난할 일은 아니다. 그들은 세계를 관념화하는 방식을 다양화함으로써 관념의 지평을 확장하였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다. 그들은 거울-비전에 고착된 인식론이 발견하지도 말해주지도 못한 것을 우화의 형식을 빌어서나마 이야기하려고 시도하였다. 소박한 거울-비전을 비판한 결과로 생성된 것이 운동-비전인 것이다. 이렇게 해서 형성된 거울-비전과 운동-비전의 대비를 간명히 드러내기 위한 우화적 방식이 양자를 각각 스틸과 무비에 짝지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다시 인용문으로 돌아가 보면, 레이건은 《킹스 로우》의 영사실에서 본 기존 촬영 영상에서 자신을 알아보지 못하고 감격하였다. 거울로 보던 자기, 정지 사진 속의 자기와 꽤 달랐던 듯하다. 그는 영화를 시작하면서 영화 속 자기가 품격 없다고 생각하였는데, 《킹스 로우》에서 연기할 때는 ‘다른 사람의 몸 속에 나를 집어넣기’를 실행하였고, 그 결과에 만족하였다. 미끈한 외모를 가졌으며 정치적 수완도 뛰어난 배우로서 영화계에서 가진 야망에 못 미치는 실적으로 인하여 스스로 품격이 없다고 자학하던 레이건은 자서전에 적어 넣을 정도로 성공적인 연기를 했다고 느낀 듯하다. 어쨌든 훌륭한 몸매를 가진 레이건이 두 다리가 잘린 것을 처음 알게 되는 드레이크 맥휴를 연기한 것. 이런 사건을 비평가는 레이건이 영원히 ‘이미지 없는 육체인 타자 없는 타자’가 되기에 성공한 것이라고 스스로 착각한 찰나라고 설명한 듯하다. 그러나 비평가는, 찰나만큼만 지속되었을 뿐, 마음의 그러한 움직임은 눈을 깜빡거리는 사이 다시 거울-비전 속에 있는 ‘타자-내-자아’로 ‘퇴행’하여 버렸다고 설명하였다. 건장한 레이건은 고생 끝에 두 다리가 없는 남자로 보이는 데 성공하였다. 그 성공은 소품의 활용, 세트의 설계, 조명, 배경 음악, 연출 그리고 배우의 인내심 등등이 어우러져서 가능하였지만, 레이건은 자기의 지분을 강조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듯 강조된 지분을 내세워 레이건은, 자신이 훌륭한 배우가 되었기에 다음 단계로 정치에서 훌륭하게 성공할 것이라는 기대를 사람들에게 심어주고자 하였다. 그것은 아마도 미국 유권자들의 기대수준에 맞추어주는 선택이기도 하였지만, 배우로서 최정상에 오르지 못하였던 레이건 스스로 자기를 평가한 결과물이라고 볼 수도 있을 듯하다.

거울-비전 세계는, 과학적 사고를 통하여 실체[substance]의 존재[being]를 증명하였다고 확신하면서, 실체성에 기반하여 논하는 세계이다. 사진출처 : cottonbro studio
 

정치인이 되기 위하여, 레이건은 작심하고 자서전을 쓰는 과정에서 《킹스 로우》에서 나머지 내 몸은 어디에?를 묻는 장면을 연기한 것을 상세하게 자서전에 넣게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주지사가 되려고 하였던 것이지 운동-비전과 거울-비전의 차이를 설명하려 하였던 것은 아니다. 이에 비하면 비평가들은 양자의 차이를 가지고 레이건스러움의 형성을 설명하고, 그것이 레이건 이후의 모든 대통령직을 물들였음을 설명한다. “레이건주의는 그럴듯한 존재를 가시화하는 정권이다. 레이건의 전문적 신체장애, 즉 그의 공적인 삶에의 진입은 나라 전체의 국민들이 감정과 관념을 그와 동일한 노선을 따라 전개하도록 허용한 예증적 사건이었다. 정치배우로서 그는 사회에서 이미 작동하고 있는 과정들을 촉진했다. 그는 위대한 유도체the Great Inducer였으며, 전후 국민단결postwar unity이라고 하는 숭고한 매력을 쫒아 한 나라가 액션을 취하도록 큐 사인을 외치는 국가의 배우-겸-무대 감독이었다. 이 대본에 쓰인 신체불구는 베트남의 “상처”이다. 쉽게 찾을 수 있는 장비는 바로 TV였다.”15 문자 그대로 쉽게 찾을 수 있는 장비는 TV였다. TV는 케네디의 대선 캠페인 때부터 위력을 발휘하였다. 실체성에 기반하여 세계를 이해하던 사람들은, 그것이 실체적이라는 증거가 없음에도, TV에서 명멸하는 무비[활동 사진]를 빠르게 받아들였다. 무비는 비평가가 말하는 이른바 활동-비전이 ‘실재’하는 듯한 느낌을 아주 짧은 순간 보여준다. 그렇다고 비평가들이 TV를 운동-비전과 동일시하는 것 같지는 않다. 다만 운동-비전과 유사한 듯한 환영(幻影)을 잠깐 보여줄 뿐이라고 생각하는듯하다. 한편 레이건은 《킹스 로우》에서 거울 속 자신의 모습과는 다른 모습을 설득력있게 연기해 내는 데 성공하였으나, 하필 영화 속 그 역할은 불구였다. 그는 두 다리를 잃은 사람 역할을 피부로 느낄 수 없었다. 그가 정말 두 다리를 잃은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여러 장치가 만들어낸 분위기에 힘입어 피부 아닌 것으로라도 느껴야 연기가 가능한 상태에 처하여 있었다. 그리하여 피부의 ‘아래’에 있는 살을 동원하여 가상의 관념 차원에서 세계와 만나야 했고, 아주 짧은 시간 동안이라도 그 만남에 성공한 듯한 느낌을 지속함으로써 연기를 무난히 마칠 수 있었던 듯하다, 그리하여 연기는 연기대로 성공하였지만, 캐릭터는 캐릭터 그대로 불구의 상태로 남는 분열적 상황이 연출된 것이다. 여기에서 비평가는 베트남의 상처를 들먹였다. 비평가는 베트남의 상처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아무 일 없었던 듯 살아가는 사람들은 분열적 삶을 살아가는 것이라고 보면서, 바로 그런 면에서 우연히도, 레이건이 이들과 공명할 수 있는 조건을 갖추고 있어서, 광범위한 지지를 받을 수 있었을 것이라고 판단한 듯하다. 결국 레이건은 《킹스 로우》에서 두 다리가 잘린 사람을 연기하였는데 그것은 아주 잠깐 운동-비전의 ‘이미지 없는 육체인 타자 없는 타자’인 듯한 모습을 사람들에게 비춰주었지만, 실제로 그는 두 다리가 없어 보이도록 하여주는 장치 속에 하반신을 숨김으로써 ‘타자-내-자아’를 잠시 훌륭하게 연기한 것에 지나지 않았던 것 같다.

2000년을 전후하여, 평론가들은 미국 정치가, 거울-비전에도 미치지 못하면서도, 다양한 환영을 끊임없이 송출하여 대중을 과잉 자극함으로써, 마치 자신들이 운동-비전을 아는 것처럼 꾸며대는 TV로 인하여, 분열적임을 감추지 않고 드러내서 공명을 유도하는 레이건스러움으로 물들어가고 있다고 판단한 듯하다. 레이건 이후에는 클린턴도 오버마도 레이건스러움을 차용하여 모두가 순간순간 소탈하면서도 다다르기 어려운 높은 곳에 임한 연기자-정치인 노릇을 해야만 했다고 본 듯하다. 평론가들은 그것을 현실로 인정하면서도, 사람들이 거울-비전을 이해할 수 있기를 기대하면서, 그런 이해와 인식에 도움이 될 수 있는 권고들을 ‘Scenario’16라는 소제목 하에 제시한 듯하다. “육체를 특히 잘 나타내는 문화-이론적 어휘를 찾아보라”는 권고로 시작한 Scenario는 “변화는 존재론적으로 동일성에 선행한다고 생각하라”, “정체와 정지 상태를 운동의 한 특별한 계기로 보라”, “육체, 주관성, 그리고 사회적 변화를 운동, 정동, 세력과 폭력의 수준에서 재고하라”, “1980년대 전체에 걸쳐 일어난 레이건광-되기를 기억하라”, “한 명의 나쁜 배우가 어떻게 자기-닮음을 내뿜어 한 나라를 동향sameward으로 이끌었는지를 기억하라” 등을 거쳐 다음과 같은 권고로 끝을 맸었다, “글 쓸 채비를 하라, 재미없는.”17 이는, 운동-비전은 설명하기 어려우니, 대중의 비난을 받을 각오를 하고 설명의 ‘의무’를 행하라는 이야기 같다.

실체성 기반 세계 이해와 레이건스럽게 이미지-장착된 대통령직의 충돌

철학의 전통적인 분과 가운데 하나인 존재론은 ‘존재란 무엇인가’를 첫 번째 물음으로 하면서 출발하곤 하였다. 그런 철학의 영향권 안에 있던 사람들은 과학적 사고를 통하여 실체(實體)[substance]의 존재(存在)[being]를 증명하였다고 확신하면서, 실체성에 기반하여 세계를 이해하고자 하기 마련이다. 그러나 그런 사람들 가운데에서도, 일말의 지적 호기심을 가진 사람이라면, 존재론의 더 깊은 물음 즉 “무엇이란 무엇인가”를 소홀히 하지 않았다. 그런 태도들이 있어서, 자기 이전에 수립된 모든 것에 의심의 눈길을 던지면서 철학은 전개되어 왔다. 그런 사람들에게도 끊임없이 자신의 세계관과 현실 사이의 충돌을 경험하며 살아가는 것은 힘겨운 일이었을 것이다. 20세기 말에서 21세기 초에 걸친 시기에도 충돌은 조용하면서도 파괴력있게 전개되어, 일부 사람들을 힘들게 하였다. 사물의 실체성에 대한 확신을 기반으로 하면서 그 위에 쌓아올린 미국인들의 실용적 사고는 TV로 대표되는 끊임없이 변화하는 시각화 정보로 인하여 동요하였다. 정보 시각화 기술은 잘 드는 칼이었다. ‘좋게’ 쓰일 수도 있었고 ‘좋지 않게’ 쓰일 수도 있었다. 그렇지만 일단 존재하는 한 잘 드는 칼은 다방면으로 많이 쓰이기 마련이었다. 이 잘 드는 칼을 꽤 익숙하게 쓸 수 있었던, 루즈벨트도 링컨도 아닌, ‘2류’ 배우 출신의 레이건은, 어떤 사상가나 비평가들에게는, 오래된 체제와 제도에 남아있던 일말의 미덕들까지도 모두 농담거리로 만들어버릴, 마음씨 넉넉하고 씩씩해 보이는 악당처럼 느껴진 듯하다. 그럼에도 비평가들은, 레이건스러움이 풍미하는 세태가 열어주는 기회에도 주목한 듯하다. 그들은 정보 시각화 기술 등의 급격한 발전이 오래된 세계 인식 방식[거울-비전]을 대신할만한 관념[운동-비전]을 상상할 수 있게 하여주는 면을 가지고 있음을 주목한 듯하다. 운동-비전과 관련된 우화적 논리 전개들은 난삽하고 생소하다. 그러나, 바로 그러하기에, 그 논리 전개와의 부딪침은 다양한 상상력을 촉발한다 하겠다.


  1. 이 글에서는 「출혈 -육체가 이미지를 만나는 곳」으로 줄여 쓰겠다.

  2. Ronald Reagan and B. Hubler, Where Is the Rest of Me? (New York: Elsevier-Dutton, 1965: reprint Karz Publishers, 1981)

  3. 「출혈 -육체가 이미지를 만나는 곳」 89쪽 참조.

  4. 한국에서는 ‘폭풍의 청춘’이라는 제목으로 개봉하였다고 한다.

  5. 〈우정에 관하여; 폭풍의 청춘, Kings Row, 1942〉, 《고품격 예술 CAFE/문화공간 조나단》[https://drfa.co.kr/free/79724] 참조.

  6. 「출혈 -육체가 이미지를 만나는 곳」 99쪽.

  7. 「출혈 -육체가 이미지를 만나는 곳」 99쪽.

  8. 레이건이 주로 악당을 연기한 것도 아니건만, 비평가는 그가 악당으로 살아왔다고 하였다. 아마도 비평가는 한때 헐리우드를 휩쓴 매카시즘에 레이건이 올라타서 동료를 공산주의자라고 고발하였다고 생각하였을런지도 모르겠다.

  9. 「출혈 -육체가 이미지를 만나는 곳」 88쪽.

  10. 〈우정에 관하여; 폭풍의 청춘, Kings Row, 1942〉, 《고품격 예술 CAFE/문화공간 조나단》[https://drfa.co.kr/free/79724] 참조.

  11. 〈우정에 관하여; 폭풍의 청춘, Kings Row, 1942〉, 《고품격 예술 CAFE/문화공간 조나단》[https://drfa.co.kr/free/79724] 참조.

  12. 불어 ‘deja’는 ‘이미’라는 뜻이고, 영어 ‘rigged’는 ‘(장비가) 갖추어진, 조작된, 고정된’ 등의 뜻이니, ‘Reaganly deja-rigged’는 ‘레이건의 행태를 판박이하듯 답습하는’ 이라고 의역할 수도 있을 듯하다.

  13. 「출혈 -육체가 이미지를 만나는 곳」 123쪽 각주 41 참조.

  14. 「출혈 -육체가 이미지를 만나는 곳」 120쪽.

  15. 「출혈 -육체가 이미지를 만나는 곳」 121쪽.

  16. 「출혈 -육체가 이미지를 만나는 곳」 121쪽.

  17. 「출혈 -육체가 이미지를 만나는 곳」 121~124쪽 참조.

이유진

1979년 이후 정약용의 역사철학과 정치철학을 연구하고 있다.
1988년 8월부터 2018년 7월까지 대학에서 철학을 강의하였다.
규범과 가치의 논의에 도움이 될 만한 일을 하고 싶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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