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02년, 듀크대학교 출판부는, Post-Contemporary Interventions [지금과 그 다음 사이에 끼어들기]라는 기획의 한 부분으로, 브라이언 마수미의 원고를 스탠리 유진 피쉬와 프레드릭 제임슨이 편집한 책 Parables for the Virtual : Movement, Affect, Sensation [가상계우화 : 운동, 정동, 감각]을 펴냈다. 이 책은 2011년 『가상계; 운동, 정동, 감각의 아쌍블라주(assemblage)』라는 제목을 달고 한국어로 번역 출판되었다. 한국어 번역본의 제목에는, 원서본 제목에 들어가 있던 ‘Parables[우화]’라는 단어가 빠진 대신, ‘얽기[assemblage(아쌍블라주)]라는 단어가 들어갔다. 이 번역본의 서문에는 “구체적으로 행하지 않아야 구체적이다” 라는 부제목이 붙어있다. 이 책과 그 한국어 번역본의 서지정보는 다음과 같다;
Massumi, Brian , Fish, Stanley Eugene (EDT) , Jameson, Fredric (EDT), Parables for the Virtual : Movement, Affect, Sensation (Post-Contemporary Interventions), Duke University Press, 2002.04.09.〕
브라이언 마수미(지음), 조성훈(옮김), 『가상계; 운동, 정동, 감각의 아쌍블라주(assemblage)』, 아우또노미아총서 28, 갈무리, 2011.07.30.
아래의 글은 위의 책의 제6장 「시각적 “전체장”의 카오스」1의 독후기이다.
바라보기의 참을 수 없는 가벼움, 흘러넘친 뒤의 잔여라는 새로움을 창조하다

누군가 감각지각이 완전하지 않고 안정되어있지 못하다는 불만을 가진다 치자. 그는 불완전과 불안정이 발생하기 이전으로 감각을 돌려놓으려고 할는지도 모른다. ‘원래’ 감각은 완전하고 안정적이었다고 그가 생각한다면, 그는 감축·재구성·이질성[inhomogenieties] 제거 등 경험의 내재환원[endoreduction]을 거치던(「카오스」, 250~251쪽 참조), 아니면 다른 이름이 붙은 다른 환원과정을 밟던, 감각을 원초적·물리적·생리적 조건으로 되돌려 보려고 할는지도 모른다. 이러한 환원은 감각지각에 대한 불만을 해소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 아니다.
“순수 비전, 즉 시각의 가장 단순하고 충만한 경험적 상태들은 시각적 카오스이다.”(「카오스」, 255쪽)
마수미는 ‘단순하고 충만한 경험적 상태’에서 발휘되는 시각이 카오스 상태라고 한 듯하다. 나아가 그는 “순수 비전은 순수 운동감각[pure kinesthesis]”(「카오스」, 257쪽)이며, 운동은 바라보기[seeing]로 이어지고, 바라보기는 복잡한 형태들을 산출(「카오스」, 259~260쪽 참조)한다고 한 듯하다. 이어 마수미는 “습관은 실재에 더해진다”(「카오스」, 264쪽)고 하였다. 여기에서 실재를 세계라고 보면, 마수미는 세계의 변화가 인간의 감각지각 습관에 의한 것이라고 주장한 셈이다.
이러한 변화의 과정에서, 세계에서는 흘러넘치는 현상이 일어났다고 설명해 볼 수 있을 듯하다. ‘흘러넘치는’이라는 말을 마수미가 사용한 것은 아니다. 하지만 이 말을 사용하면 왠지 마수미가 사용한 잔여라는 낱말을 잘 설명할 수 있을 듯하다.
“잔여의 퇴행성은 그 표면 같은 평온에 균열을 낸다. 그것은 경험적 조건들을 그 발생적 조건들로부터 탈구시킨다. 그럼으로써 심연의 구별을 사유할 것을 요구한다.”(「카오스」, 295쪽)
퇴행성이라 함은 기존의 질서에 비하면 완결성이 떨어지는 방향으로 세계가 바뀌도록 하는 경향성을 말하는 듯하다. 중요하다거나 반드시 필요하다거나 귀하다고 할 수 없는 잔여[찌꺼기]가 생겨나도록 하는 변화는 일단 퇴행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변화가 남긴 잔여는 새로운 것이다. 변화에 새로운 것이 수반된 것이다. 이렇게 주장하면서도 마수미는 하늘 아래 새로운 것이 없다는 오래된 격언을 의식하고 그것에 동의할 수밖에 없음을 보여주기도 한다.
“지각의 중심에 있는 차이는 발생[세계의, 항상-새로운]과 기능[세계 안에서의, 언제나 또다시 나오는] 간의 존재론적 차이이다 : 즉 상호 부양적 리듬을 이루는 현세화[worlding]와 재인지[recognition].”(「카오스」, 266쪽)
마수미는 ‘항상-새로운’과 ‘언제나 또다시 나오는’ 사이의 존재론적 차이를 인정하지만, 그것은 마치 닫힌 세계 속에서 존재들이 벌이는 가면 바꿔쓰기 놀음 같다고 생각한 듯하다. 이 놀음에서 존재 자체의 양은 늘어나지도 않고 줄어들지도 않는다[부증불감(不增不減)]고 해야 할 듯하다. 왜냐하면 마수미가 이 놀음이 일어나고 있는 곳을 닫힌 세계로 상정하고 있는 듯하기 때문이다. 이런 생각은 다음의 글에서도 엿볼 수 있다.
“경험적인 것으로의 이행 없이는, 가상적인 것은 어디에도 잠복해 있지 않을 것이다. 가상적인 것의 경험으로의 이행 없이는, 경험적인 것은 기능적으로 사라질 것이다. 가상계는 자신의 통일성과 항구성을 너무도 차분하게 동반하기 때문에, 조종을 할 만한 존재론적 자리를 가지지 않을 것이다. 즉 성공 초과로 인한 엔트로피적 죽음이다.”(「카오스」, 279쪽)
엔트로피란 닫힌 세계 내에서 에너지를 사용했을 때 남는 것 즉 찌꺼기라 할 수 있다. 이 남는 것[엔트로피]을 사용되지 않고 남아있는 에너지와 합산해보면 닫힌 세계 내에서는 변화가 없는 상태로 나온다고 한다. 그러니까 새로움이 수반되는 감각지각 활동을 계산해 보면, 결과는 존재 자체의 양이 늘어나지도 않고 줄어들지도 않음[부증불감]이라는 것이다. 이는 인식대상이 시간과 공간과 연장[延長, extension]을 가지고 물적[material]으로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우회적으로 표현한 것인 듯하다.
세계는 늘어나지도 않고 줄어들지도 않았으나, 감각지각 활동 혹은 바라보기는 뭔가 흘러넘친 뒤의 잔여를 남겼고 그것이 새로운 것이며 가상계인 세계다. 마수미의 말은 이렇게 보다 건조하게 요약할 수 있을 듯하다.
환각, 공감각, 보이는 것과 앉는 곳이 일치하지 않는 촉지
마수미는, 환원의 원점이라는 시좌(視座)에서 보았을 때 뿐만 아니라 그 자체의 성격상으로도, 발생은 카오스라고 설명한다; “압력 같기도 하고 간지럼 같기도 하고 찌름 같기도 한 요소들의 카오스적 발생이 존재한다.”(「카오스」, 267쪽) 이 카오스에서는 혼란보다는 새로움이 강조되고 있는 듯하다. 그는 감각지각은 곧 새로움이라고 생각하는 듯하다. 그는 그것이 생산적이라고도 생각하는 듯하다.
“실제로 보이는 것은 지각되지 않는 것에 생산적으로 덧붙여진다. 즉 간과되는[overseen] 것이다. 시각 대상들은 체험에 덧붙여진 구성요소들, 즉 체험된 간과[experienced oversights] 혹은 초과 보기[exseeings]이다. 한 마디로, 환각이다.”(「카오스」, 271쪽)
“지각과 환각의 차이를 엄밀히 구분하기는 불가능하다.”(「카오스」, 271쪽) 예컨대 섬광 혹은 순식간에 눈앞을 스쳐 지나간 광경이 있다고 하자. 그것은 이미 눈앞에서 떠나갔다. 섬광은 이미 세계에 존재하지 않는다. 그런데 그것은 ‘보았다’라고 하여야 한다. 이런 논리의 연장선상에서, 그것은 “실제로 보이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렇게 생각하면 “체험된 간과” 혹은 “초과 보기”라는 표현이 이해가 될 듯하다. 마수미는 환각이라는 말을 써서 자신이 말하는 감각지각이 인식주체와 인식대상을 확연히 나누고 대상이 실재하는 물질임을 전제로 해야하는 것이 아님을 강조하려 한 듯하다. 이런 의도는 “접촉의 전체장은 가상적이기 때문에 파악하기 쉽지 않으며, 접근을 시도하려 하면 순간적으로 움츠러든다”(「카오스」, 268쪽) 라고 한 데에서도 엿볼 수 있다. 이런 설명이 짐작하게 하는 것 가운데 하나는 마수미가 인식대상이 일정한 모습을 유지한다고 보지 않는다는 것이다.
마수미는 감각지각이 여러 감각기관들의 연결 속에 복합적으로 행하여진다고 보았다. 마수미는 1950년에 출간된 저서에 파울 쉴더(Paul Schilder)가 적어놓은 글을 다음과 같이 인용하였다.
“우리는 모든 감각이 일반적으로 공감각적이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이것은 서로 다른 감각들 사이에는 어떠한 근원적인 고립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고립은 2차적이다. 우리는 지각한다. 그리고 우리는 지각의 한 부분이 광학적 인상에 토대하고 있다는 것을 힙겹게 결정할지도 모른다,. 따라서 공감각은 정상적인 상황이다. 고립된 감각은 분석의 산물이다. ‧‧‧ 지각은 공감각적이다.”2
쉴더는 감각지각이 여러 감각기관들의 연결 속에 복합적으로 행하여진다고 주장하였다. 그는 감각지각이 행하여진 후 분석을 하여보면 하나하나의 감각기관의 역할을 사후적으로 논할 수 있다고 하였다.

마수미는 “조망 외에 무엇이 한 눈에 직물을 느낄 수 있겠는가?”(「카오스」, 277쪽) 라고 한다. 이 말은 처음 보는 직물을 관찰하는 사건을 예로 들어서 특정 감각이 그 감각을 행하고 있는 기관의 본래 기능과 무관한 지각 활동을 하는 경우가 특이한 것이 아니라 감각지각 현상 일반의 일부라는 말이다. 이를테면 어떤 옷감을 처음 접하고 살펴볼 때, 만져보고 촉감을 이야기하기 이전에 넓게 펼쳐놓고 그것을 한 눈에 보면서[시각적으로 조망하면서] 바로 촉감과 관련한 판단과 평가를 하는 경우, 그런 판단과 평가가 제3자들에게 거부감 적게 받아들여지는 경우가 있다. 그런 판단과 평가는 이렇게 말하여질 것이다. “야 그거 참 따뜻하고 부드러워 보인다.” 그리고 제3자들이 이런 말에 대체로 토달지 않고 넘어가는 일이 일어나기도 한다. 실제로 촉각을 사용하여 지각하여 본 결과 차갑고 뻣뻣함이 확인되는 경우도 있어서, 시각에 의존하여 촉감과 관련한 판단과 평가를 하는 감각지각 행위를 전적으로 신뢰할 수는 없다. 그런데도 마수미는 이 예를 공감각의 직관적 이해에 동원한 셈이다. 마수미는 “감각들의 상호연결이 완벽하기 때문에 촉각적/자기수용적 자극을 공급하기 위한 인위적인 패치를 제거하면 과정 전체에 기능장애를 초래한다”(「카오스」, 275쪽)고 하였다. 이는 감각기관들을 각각 분리하였을 때 제대로 된 감각지각이 이루어질 수 없다는 말로 볼 수도 있다. 그는 “보는 것과 우리가 앉은 자리를 분리할 수 있다 ……”(「카오스」, 275쪽)고도 말했다. 이는 바로 앞에서 예로 들었던 처음 보는 직물을 관찰하는 사건을 다시 가져와서 설명할 수 있는 말이다. 즉 앉는 자리[시각]과 보는 것[직물의 촉감]을 외견상 서로 부합되지 않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그와 같이 부합되지 않음에도 감각지각은 가능하며, 그와 같이 부합되지 않아야 가능한 감각지각이 있다는 말이다. 마수미는 ‘눈만이 만질 수 있는 접촉’이라는 말을 사용한다.
“시각은 촉각 기능을 점유했다. 시각은 접촉의 기능을 사칭했다. 이러한 순수 시각적 접촉은 시각 고유의 공감각이다 : 오로지 눈만이 만질 수 있는 접촉. 이것이 바로 질 들뢰즈가 촉지[haptic]라고 불렀던 것이다.”(「카오스」, 276쪽)
눈으로 했을 때 촉감을 느낄 수 있는 경우가 있다는 말이다. 그리고 이런 감각을 이미 들뢰즈가 ‘촉지[haptic]’라는 말을 사용하여 설명하였다고 한다. 조성훈은 촉지를 “촉각에 대한 느낌”(「카오스」, 276쪽, 주41[옮긴이]) 그리고 “모든 원근법적 질서가 소멸한 상태에서의 감각 작용”(「카오스」, 276쪽, 주41[옮긴이])이라고 설명하였다.
마수미는 감각지각을 운동이라고 보는 데로 나아간다. “우리가 시각체험을 할 때, 시각은 유도자들의 상호작용에 의해 지배되는 운동들 간의 긴장으로부터 발생한다.”(「카오스」, 277쪽) “가상적인 것이 형태를 경향성들 간의 어떤 긴장으로 받아들이면서 실제적인 단계로 진행해 가는 방식이 바로 추상적 운동들이다.”(「카오스」, 278쪽) 가상계인 세계에서 가상적인 것이 실제적인 단계로 진행해가는 방식이기도 하고 과정 자체이기도 한 감각지각이 추상적 운동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가상성에 머물러 있으면서도 실제적 효과들을 가지는 능력”(「카오스」, 279쪽)을 소위 힘[force]이라고 부른다고 하였다.”(「카오스」, 279쪽 참조)
감각지각을 실마리로 한 가상계 설명
마수미는 힘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한다.
“‘힘’이란 효과들의 반복가능성 혹은 되풀이가능성을 나타내는 말이다.”(「카오스」, 279쪽)
“하나의 사건, 하나의 이행, 즉 ‘힘’은 동사이다.”(「카오스」, 280쪽)
후자가 자체적으로 물성(物性)을 드러내지 못하는 힘에 대한 상당히 낯익은 설명이라면, 전자는 새롭다. 이는 세계를 가상계라고 보는 사람이 힘 특히 감각지각의 힘을 설명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마수미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유효한 발생의 조건들은 실제로 발생하는 것과 분리할 수 없다.”(「카오스」, 280쪽, 주44) 여기에서 “유효한 발생의 조건”을 감각지각이라고 본다면 “실제로 발생하는 것”은 감각지각 활동이 유발한 ‘환각’으로써의 세계이면서 감각지각 자체라고 할 수 있을 것같다.
다음은 감각지각인 동시에 세계인 것에 대한 마수미의 시적 설명이라고 할 수 있을 듯하다; “지각의 대상들이란 지각이 내부와 외부로 이행하는 가운데 증대되는 통증에 대한 감각 없는 내역서들이다. 무감각한 것은 지각되는 것[the perceived]이다. 그것은 지각하는 것[the perceiving]과 구별된다.”(「카오스」, 282쪽) 감각지각 활동은 잔여를 남기는데, 가상계인 세계는 그 잔여로 인하여 ‘있는 것’으로 느껴진다. 그것은 물성을 가졌기에 지각되는 것과는 구별된다. 비유하자면 그것은, 번쩍임을 보아서 내 눈에 남은 잔상처럼, 명확하지만, ‘있다’고 설명할 근거를 남기지 않기에, 근거를 제시할 수 없는 어떤 것이다. 마수미가 통증이라고 하는 데 그치지 않고 통증에 대한 감각 없는 내역서라는 말을 만들어낸 것도 그 어떤 것 즉 가상계인 세계의 이러한 ‘물성 없음’ 때문이라고 할 수 있을 듯하다. 가상계인 세계는 잔상을 남긴 번쩍임처럼 있다. 달리 비유하자면, 가상계인 세계는 무겁고 빨리 움직이는 물체와 내 머리가 부딪쳤다는 착각 때문에 순간적으로 생긴 통증처럼 있다.
마수미는 감각지각을 실마리로 한 가상계 설명을 한길 더 깊은 시적인 분위기로 마무리하였다.
“고통은 새로 발생하는 세계의 아름다움이다.”(「카오스」, 282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