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지 위로 속옷을 입자 – 기표적 기호의 고정된 의미 집어던지기

기표적 기호는 의미를 생산하여 고정시키기 때문에 권력이다. 하지만 비기표적 기호는 내재성의 원리에 의거하여 의미들을 가로지르며 옮겨간다. 그리고 이러한 옮겨감은 우발적인 연결접속을 통해 이루어진다. 기표적 기호의 고정된 의미를 집어 던져버리기 위해 우리, 오늘은 바지 위에 속옷을 입어보면 어떨까.

기표적 기호와 비기표적 기호

펠릭스 가타리, 『분자혁명』, 윤수종 옮김, 푸른숲, 1998.
펠릭스 가타리, 『분자혁명』, 윤수종 옮김, 푸른숲, 1998.

『분자혁명』에서는 기표적 기호와 비기표적 기호로 욕망의 미시정치학을 설명한다. 펠릭스 가타리(Félix Guattari)는 의미를 생산하는 기표적 기호를 두고서 기표권력이라 칭한다. 가타리가 기표를 권력이라고 단정하는 까닭은 기의와 기표의 이중분절로 인한 의미작용이 다른 상상력을 차단하기 때문이다. 의미작용을 하는 기표적 기호는 단순히 음운이나 음소와 같은 문법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기표와 기의의 이중분절로 인해 생산되고 통용되는 의미는 일종의 ‘깃발’로서 사람들의 머릿속에 부착된다. 가령 카네이션이라는 말을 들었을 때 우리는 곧바로 스승의 날을 떠올린다. 다르게 말하면 카네이션이라는 말을 듣자마자 머릿속에 스승의 날이라는 깃발이 곧장 세워지는 것이다.

깃발을 꽂는 행위는 적군의 땅을 점령했을 때 하는 행위다. 기표적 기호의 의미작용을 이렇게 표현해볼 수도 있을 것이다. 내 머릿속이 의미로 점령당했다고. 머릿속이 점령당하면 카네이션의 빨간 꽃 색과 삐죽삐죽한 꽃잎의 끄트머리를 보지 못하게 된다. 카네이션은 다른 꽃들과 달리 별다른 향이 없지만 풀내음은 강하다. 하지만 의미로 점령당하면 향을 느끼지 못하게 된다. 카네이션은 그대로 스승의 날이라는 의미로 고정되어, 혹은 박제되어 카네이션을 시작으로 다른 내용이나 형태로 넘어가지 못하게 된다. 달리 말하면 비기표적 기호의 옮겨감이 차단되는 것이다.

강렬도는, 처음은 기의 내용에 적합하게 그리고 다음에는 기표에 적합하도록 이중으로 축소된다. 기표의 독재적 야망은 항상 기표를 스스로에게로 되돌아가도록 하는 반복 과정을 통해 재현하는 것이다. 모든 것이 정상화되고 논리화되고 형식화된다. 기표적 기호구조의 언표는 무력화 지층 속에서 형성되고 끊임없이 반향을 불러일으킨다. 그 반향은 의미작용 효과를 이룬다. 기표는 기의를 모으고 구획하고 자율화하고 단조화한다. 이렇게 언표는 현실적인 생산에서 분리될 뿐만 아니라, 주체가 의미작용에 대해서 지닌다고 상정되는 지적능력에서 그리고 그 언표에 주체가 스스로 부여하는 위안에서 소외된다.1

그렇다면 비기표적 기호의 상상력은 어떤 것일까. ‘원숭이 엉덩이는 빨개’와 같은 상상력이다. 이 노래는 원숭이 엉덩이는 빨갛다는 처음의 시작에서 긴 건 기차라는 전혀 다른 곳으로 끝맺음을 한다. 이런 말놀이는 유사성의 구도로 진행된다. 하지만 이러한 유사성을 바탕으로 한 전환은 형태와 내용으로 번갈아 가며 이루어진다. 원숭이 엉덩이의 색깔을 사과의 색깔과 매치시켰다가 이내 사과의 시각적 특질이 아닌 촉각적 특질로 옮겨가서는 사과의 촉각적 특질과 유사한 바나나로 넘어간다. 그러고는 다시 바나나의 길다는 형태로 넘어가서 (실제의 규모는 전혀 다르지만) 그와 유사한 형태의 기차로 이어진다. 이처럼 비기표적 기호는 형태와 내용을 주어진 조건에 따라 바꿔서 다른 형태와 내용으로 넘어간다. 사실상 원숭이 엉덩이나 사과, 바나나, 기차는 특정한 기의로 고정되지 않음으로써, 즉 머릿속을 점령하지 않음으로써 자유롭게 각 구문마다 형태에서 내용으로, 또 내용에서 형태로 넘어가는 것이다.

기호의 이중분절을 두고서 가타리는 “의미를 나타내는 표상은 내용의 자율적 지층 위에 구조화된 것처럼 보일 뿐이며, 영혼에 ‘깃들어’ 있고 생각으로 하늘을 뒤덮고 생각을 일상생활의 대상으로 조직하는 것처럼 보일 뿐”이라고 설명한다.2 언어 실재론으로 불리는 일대일 대응설은 언어가 실제적 현실이 1 대 1로 매칭되어 적확하게 표시되며 언어가 현상을 가리키는 표지의 역할 뿐 아니라 역으로 언어에 의해서 현실이 포획된다고 보는 입장이다. 그렇기 때문에 언어로 포획되지 못한 현실을 존재하지 않는 현실로 취급해버리는 경향도 일정 정도 띠고 있다. 그렇게 언어 실재론은 기표와 기의의 구조적 정당성을 주장한다. 하지만 언어 실재론과 같은 의미론의 논리적 조직화는 “논리적 조직화에 일치하기는커녕 단순히 세력 관계, 모든 종류의 타협과 접근의 결집”일 뿐이라고 가타리는 일갈한다.

흔히 인권을 두고서 천부인권설이라고 한다. 즉 하늘에서 부여한 인간의 권리라는 것이다. 하지만 하늘에서 부여한 타고난 나의 권리라는 것은 없다. 도대체 어떤 하늘이 나에게 점지하듯 권리를 부여하였는가. 인권은 온갖 전쟁을 치르고서 외상후스트레스 장애를 겪는 후과를 경험한 후에서야 인간의 조건을 규정한 규약일 뿐이다. 달리 말하면 인권은 실존의 마지노선을 정해 놓은 선언이자 규약에 불과한 것이다. 앞서 가타리가 설명한 것처럼 인권은 “모든 종류의 타협과 접근의 결집”인 셈이다. 물론 가타리의 이와 같은 주장은 정치적 세력이 여타 계급보다 월등한 지배계급의 힘에 의해 타협과 결정이 이루어지는 것을 함의하기는 하나, 인권이라는 개념은 고정된 실재라기보다 서로 간의 규약이고 때에 따라 그 범위와 정도가 달라진다는 점에서 부분적이나마 성격적으로 유사한 측면이 있다. 그래서 시대마다 인권의 범위와 정도가 점차 달라지는 것이다.

하늘에서 부여한 권리로 인권의 개념을 고정하고 실재로 여기게 되면 무조건적인 소비자적 권리를 앞세우게 된다. 
사진 출처: Markus Spiske
하늘에서 부여한 권리로 인권의 개념을 고정하고 실재로 여기게 되면 무조건적인 소비자적 권리를 앞세우게 된다.
사진 출처: Markus Spiske

말인즉슨 어떤 사태에 직면하여 무작정 인권을 앞세우기보다 무엇이 어떻게 타인에게 상처를 입히고 실존의 불능에 이르게 만드는지 엄밀한 분석을 바탕으로 하여 그 타당성을 따져 물어야 하는 일을 우선되어야 하는 셈이다. 하늘에서 부여한 권리로 인권의 개념을 고정하고 실재로 여기게 되면 무조건적인 소비자적 권리를 앞세우게 된다. 무조건적인 소비자의 권리를 앞세워서 어떠한 점에서 인권을 침해했다고 볼 수 있는지 타당성을 검토하고 토의하지 않으면 인권의 실질적인 내용은 소거된 채 그 형식만 망령처럼 배회하게 된다. 이는 그러한 사태를 목도한 이들을 위축시키고 그로 인해 다른 양상으로 옮겨갈 수 있는 가망을 차단시키는 효과를 양산한다. 빌헬름 라이히(Wilhelm Reich)가 주장한 것처럼 발굴될 수 있는 새로운 사실들이 “감추어지거나 착각인 것처럼 얼렁뚱땅 넘겨져” 버리고 그로 인해 공허한 구호만이 남게 된다.3 공허한 구호는 옳고 그름에 대한 사유나 더 나은 미래에 대한 현실적 전략을 고려하지 않은 채 망상에 가까운 유토피아의 전망으로 대중들을 현혹시킨다.

자기 준거적인 비기표적 기호의 배치

비기표적 기호라고 해서 아무런 기준도 없이 자의적으로 끼워 넣으면서 옮겨가는 것은 아니다. 기표적 기호와 다르게 비기표적 기호는 매개를 통하지 않고 자기 준거적으로 형성된다. 기표적 기호의 준거는 타자에게 있다. 스승의 날이라는 기표의 준거가 카네이션에 정박되어 있듯이 말이다. 비기표적 기호의 자기 준거는 한나 아렌트(Hannah Arendt)의 말의 실재성으로 설명해볼 수 있다. 아렌트의 주장처럼 언어는 현실을 적확하게 직시할 수 있는 기능을 수행한다. 나치들은 유태인 학살을 최종 해결책, 완전 소개, 특별취급과 같은 다른 용어로 바꾸어서 사용하였다. 유태인 ‘학살’이라는 살해 행위를 직접적으로 지시하지 않고 최종 ‘해결책’이라는 다른 용어를 매개하여 변용해버리면서 자신들이 하나의 인종을 절멸하기 위한 집단 학살을 자행하고 있다는 잔혹한 사실을 은폐시켜 버린다. 사실이 사라지고서 추상으로 구성된 공허한 구호로만 작용하는 언어규칙은 사유의 불능으로 이어진다. 그래서 아이히만 자신이 사형당하는 날마저 장례식에서 상투적으로 쓰는 관용어를 구사해버린 것이다. 사유의 불능으로 자신이 어떤 현실에 처해있는지 자각조차 하지 못하게 되었다. 사태를 직접 지시하지 않는 기표적 기호의 권력은 이런 식으로 진행된다. 다시 한 번 더 말하지만 비기표적 기호는 자의적인 끼워 맞추기가 아니다. 그렇기에 비기표적 기호는 “순수한 사건이 되는, 자신을 벗어나서는 아무것도 의미하지 않는 기호”4인 것이다. 즉 내재성의 원리에 의해 자기 준거적으로 작용한다. 이러한 작용은 개개인의 욕망을 부정하고 뿌리 뽑아내려는 것이 아닌 승인하는 것에서부터 가능하다. 그렇지만 이러한 욕망의 승인은 주체의 고정이 아니다. “즐거움의 확장”이다.

가령 가타리는 머리를 벽에 찧는 어린이의 욕망을 다른 활동으로 전환시키거나 승화시키는 대신 “일정 수의 다른 비기표적 체계에 접합할 수 있는”5 기능을 먼저 따져 물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어린이의 욕망을 그대로 승인하되(어린이의 욕망을 부정하고 뿌리 뽑으려고 하는 게 아니라), 배치를 통해 연결접속해 머리를 벽에 박는 어린이의 욕망을 다른 욕망으로 옮겨갈 수 있는지 고민한다. “즐거움의 확장”이란 이런 것이다. 거세시키는 것이 아니라 당사자성을 중시하여 욕망을 승인하되, 이 욕망이 연결접속을 통해 다른 욕망으로 확장되거나 옮겨갈 수 있는 전략이 배치인 것이다. 다른 욕망으로의 확장이나 옮겨감은 다름 아닌 되기이다.

결국 비기표적 기호는 사실의 규명과 욕망의 승인을 우선하면서도 각각의 의미들을 가로지르면서 주어진 조건에 따라 옮아가는 내재성의 구도(일관성의 구도)를 유지한다. 일관성의 구도는 “고유한 차이들 속에서 상호작용할 때 나타나는 경향성을 말한다.”6 즉 “실존의 상이한 방식은 추상적 이념이 아닌 ‘발생과 변경의 실제적 과정’에서” 나온다.7 “재영토화는 그것이 창조적 배치를 통해 수정되는 한에서 또 다른 전망으로 열릴 수 있다. 사실 인칭론적 개인화 과정에 개입한 주체의 신경증적 원환과, 수정과 변형의 가능성으로 꽉 차 있는 집단의 특이한 속성들(idiosyncrasies)을 세심하게 구분해야 한다.”8 ‘특이한 속성’들은 앞서 설명한 것처럼 사실의 규명과 개개인의 특질이다. 이를 바탕으로 하여 고이지 않고 이행해가야 한다. 비기표적 기호는 고정된 의미가 아니다. 마찬가지로 고정된 주체도 없다. 다양한 욕망들과 연결접속하여 내재적 원리(자발성)에 의거해서 여성이 되었다가 아이가 되었다가 광인으로 옮겨가는 과정만이 있을 뿐이다.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은 무엇을 뜻할까? 언제나 군중 속에서 한 사람을 포착해내고 그가 속해있는 집단에서 그를 가려낸다는 것. 그것이 아무리 작은 집단이더라도 가족이든 다른 뭐든 간에. 나아가 그 사람에게 고유한 무리들을 찾아내고 그가 자기 안에 가두어 놓고 있는, 아마 완전히 다른 본성을 가졌을 그의 다양체들을 찾아낸다는 것. 그것들을 내 것에 결합시키고 내 것들 속으로 그것들을 관통하게 만들고 또한 그 사람의 것을 관통해 간다는 것. 천상의 혼례, 다양체들의 다양체들. 모든 사랑은 앞으로 형성될 기관 없는 몸체 위에서 탈개인화를 실행하는 것일 뿐이다. 또한 바로 이 탈개인화의 가장 높은 지점에서 비로소 누군가가 명명될 수 있으며, 자신의 이름이나 성(姓)을 얻고 자신에게 속하며 자신이 속해있는 다양체들을 순간적으로 포착하는 가운데 가장 강렬한 식별 가능성을 획득한다. 얼굴 위에 있는 주근깨의 무리, 여자목소리로 이야기하는 소년들의 무리, 샤를뤼스 씨에게서 들리는 소녀들의 재잘거림, 누군가의 목구멍 속에 있는 늑대 떼, 사람들이 골몰하고 있는 항문이나 입이나 눈 안에 있는 항문 다양체. 각자는 자신 안에 있는 그토록 많은 몸체들을 지나간다. 알베르틴은 나름의 숫자, 조직, 코드, 위계를 가지고 있는 소녀들의 집단에서 천천히 분리되어 나온다. 한 무의식 전체가 이 집단과 이 제한된 군중에 젖어든다.9

우발성의 연결접속

욕망의 옮겨감을 통해 주어진 상황에 따른 변화(되기)는 결국 연결접속을 해야 한다는 것을 뜻한다. 그러나 이러한 연결접속은 필연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우발적으로 이루어진다. 여기서 말하는 우발성은 인과론적 분석을 배제하고 신비스러운 힘에 의탁하여 실재를 가리자는 뜻이 아니다. 우발성은 사건을 뜻한다. 사건은 간단하다. 사고와 같은 충돌(접촉), 그로 인한 앙상블이다. “탈영토화 과정의 연접은 사건, 의미이며, 기계적 변이의 출현이다.”10

영화 《위플래쉬(Whiplash)》 스틸컷, 감독: 데이미언 셔젤, 국내 개봉: 2015년 3월 12일, 배급: 소니 픽쳐스 클래식스, 쇼박스, 워터홀컴퍼니
영화 《위플래쉬(Whiplash)》 스틸컷, 감독: 데이미언 셔젤, 국내 개봉: 2015년 3월 12일, 배급: 소니 픽쳐스 클래식스, 쇼박스, 워터홀컴퍼니

2014년에 개봉한 영화 「위플래쉬(Whiplash)」를 예로 들어볼 수 있다. 한때 「위플래쉬」를 두고서 자기계발 담론과 다를 바 없는 평들이 주를 이루었다. 미쳐도 좋을 만큼 무언가에 흠뻑 빠져본 적이 없는 자신을 성찰하는 평들이 그러하였다. 하지만 이 영화의 내용은 그렇게 거창하지 않다. 단순해도 너무 단순하다. 악마가 영혼을 뺏는대도 드럼을 쳐댈 두 미친놈들의 앙상블일 뿐이다. 하지만 이 두 미친놈들의 앙상블은 통일이라거나 총체라고 볼 수 없다. 각자의 호흡을 서로 주거니 받거니 하면서 하나의 세트가 되기 때문이다. 탁구를 예로 들어도 좋다. 탁구는 이기고 지는 게임이다. 하지만 게임을 하는 순간만큼은 각자의 호흡대로 공을 주고받으며 한 세트를 만들어낸다. 공을 상대방이 원하는 대로 주지도 않고 바라는 대로 받지도 않는다. 각자의 방식대로 공을 던지고 받는다. 그렇게 부딪치며 하나의 세트가 생긴다.

영화 「위플래쉬」의 두 미친놈들은 인격적으로 고매하다고 보기 어려운 인물들이다. 플레쳐(J.K. 시몬스 역) 교수는 실력은 좋지만 학생들을 이간질해대면서 경쟁 심리를 부추기고 그에 의한 경쟁심리가 극에 달한 그의 학생 앤드류(마일즈 텔러 역)는 플레쳐 교수가 지도하는 밴드의 드러머 자리를 놓치지 않기 위해 교통사고를 내고도 사고 수습도 하지 않은 채 경연장으로 달려가는 광기의 인물이다. 그럴 듯한 지위를 점하기 위해 경쟁하고 노력하기보다 안정을 더 중시하는 그의 여자친구에게 막말을 쏟아내기도 한다. 이 영화에는 좋은 놈도 없고 마냥 피해자이기만 한 인물도 없다. 플레쳐는 교활한 술수를 구사하는 폭군이고 앤드류는 그에 못지않은 왕싸가지에다 바보멍청이다. 이 영화에서는 흔히 볼 수 있는 선악도 없고 권선징악의 서사구조도 없다. 하지만 그런 폭군과 왕싸가지의 충돌은 환상적이기만 하다. 영화의 결말이 되는 장면, 즉 경연장에서 엿 먹이려는 플레쳐에게 앤드류는 “I’ll cue you.”라며 주어진 상황을 반전시킨다. 여기에서 충돌로 인한 다른 양상, 즉 앙상블이 펼쳐진다. 플레쳐는 앤드류의 돌발행동에 당황하지만 이내 앤드류의 호흡에 동참하며 앤드류의 박자를 지휘한다. 평화롭게 지낼 생각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없는 둘은 더할 나위 없는 앙상블을 펼친다.

사건은 바란 적도 없었고 예상한 적도 없었던 충돌이다. 하지만 이 충돌은 파열음과 함께 다른 양상을 펼쳐낸다. 다른 양상이 펼쳐지면 그 전의 상태로는 결코 돌아갈 수 없다. 달라진 양상에 적응하고 변화하여 대처해야 한다. 앤드류는 주어진 상황을 반전시켰고 플레쳐는 변화하여 대처했다. 우습게도 이런 앙상블은 성격 파탄자들인 두 사람이기에 가능했을 수도 있다. 앤드류가 스승의 가르침에 순종하는 제자였다면 충돌은 벌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학생이라는 주체로서의 정해진 자리에만 머무르려고 했다면 이런 앙상블은 가능하지 않았다. 플레쳐 역시 앤드류에게 복수만 하려고 들었다면 둘의 합주는 이루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탈영토화된 기호는 어쨌든 방어적인 것에 집착하게 되는 ‘자연적’ 입자를 폭발시켜 ‘복수화’할 수 있는 최강 입자”11이다.

또한 우발성은 철저하게 현재적 시점이다. 필연성은 현재의 기원을 추적하기 위해 시선을 과거로 향한다. 하지만 이러한 시점은 지금 당장 눈앞에 펼쳐지는 전율을 차단시켜 버린다. 앞서 인용된 구절처럼 강렬도는 기의와 기표에 적합하게 축소되어 버리고 만다. 「위플래쉬」의 두 미친놈들의 앙상블을 예기치 못한 충돌의 화합이라는 뻔하고 당연한 실재를 필연성에 매여서 보지 못하게 되면 그 둘의 젖꼭지가 곤두설 정도로 짜릿한 합주를 놓치게 된다. 앤드류가 그토록 광기에 사로잡힌 인물로 변화하게 되었는지 알기 위해 그의 어린 시절을 추적하면 그의 광기의 폭발을 ‘느끼지’ 못한다. 또한 그들의 순간순간마다 아다지오에서 안단테로, 안단테에서 아다지오로 변화무쌍하게 리듬을 만들어 가는 장면을 놓치게 된다.

바지 위로 속옷을 입자.

기표적 기호의 이중분절을 집어 치워버리면 낙인도 자유와 해방이 될 수 있다. 낙인은 특정 인물이나 인종에 붙이는 딱지다. 딱지가 붙으면 주변인들은 특정 인물의 행동에 대해 붙여진 딱지대로 생각하게 된다. 가령 “네가 그럼 그렇지.” 낙인찍힌 이는 그 낙인을 벗겨내기 위해 발버둥을 친다. 주변인들에게 공손한 태도를 취해보기도 하고 수줍은 웃음을 지어보이기도 한다. 그래도 주변인들은 낙인의 깃발에 머릿속이 점령당해 특정인에게 부착된 기표로만 인식한다. 하지만 뒤집어서 생각해보자. 어떤 행동을 해도 그 낙인을 벗겨낼 수 없다면 처음부터 그들이 원하는 대로 행동하지 않아도 된다고. 오히려 공손한 태도 따위 집어 치워버리면 되는 거라고. 이렇게 저렇게 해보아도 “네가 그럼 그렇지.”라는 소리를 들을 거라면 차라리 하고 싶은 걸 왕창 해보자고. 그렇게 규범에 매이지 않아도 되는 거라고. 행동의 범위가 확장된 것이라고 말이다. 비틀어 생각해보면 낙인은 오히려 자유와 해방이 될 수 있다. 기표적 기호의 고정된 의미를 집어 던져버리기 위해 우리, 오늘은 바지 위에 속옷을 입어보면 어떨까.


  1. 펠릭스 가타리, 『분자혁명』, 푸른숲. 1998. p. 287

  2. 위의 책, p. 285

  3. 빌헬름 라이히, 『파시즘의 대중심리』, 그린비. 2006. p. 299

  4. 펠릭스 가타리, 『분자혁명』, 푸른숲. 1998. p. 447

  5. 위의 책. p. 182

  6. 신승철, 『모두의 혁명법』, 알렙. 2019. p. 459.
    *위 구절은 모두의 혁명법의 참고자료인 ‘들뢰즈 가타리 철학 개념어’에서 참조하였다. 이 책에 실린 ‘들뢰즈 가타리 철학 개념어’는 분자혁명의 역자인 윤수종 선생님께서 작성한 사전임을 밝힌다.

  7. 펠릭스 가타리, 『분자혁명』, 푸른숲. 1998. p. 451~2

  8. 위의 책. p. 321

  9. 질 들뢰즈‧펠릭스 가타리, 『천개의 고원』, 새물결. 2001. p. 76~7.

  10. 펠릭스 가타리, 『분자혁명』, 푸른숲. 1998. p. 206

  11. 펠릭스 가타리, 『분자혁명』, 푸른숲. 1998. p.205

정혜인

안녕하십니까. 저는 정혜인이라고 합니다. 주 전공은 사회학이지만 저는 제가 하는 공부를 세상살이라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그래서 고양이를 좋아하고 가만히 오래도록 들여봐야 아름다움을 깨달을 수 있는 잡초풀꽃들도 좋아합니다. 또 각 개인들의 얼굴 모양새와 눈 매음새를 좋아합니다. 결국 궁극적으로 관심있는 건 개인화가 극화되는 시대의 연대와 조직화이지 않을까 싶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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