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성댁 이야기] ㉗ 느그 아부지 초상은 집에서 할란다

상덕 씨 부고를 들은 자식들과 친척들, 최씨 집안의 사람들이 와서 장레준비를 시작하고 상처한 후 재혼을 한 큰아들은 예상보다 많이 늦은 시간에 도착을 한다.

보성댁으로부터 아버지의 죽음을 통보받은 자식들이 하나둘 들어오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가까운 순천에 사는 자식들이 먼저 도착했다. 토요일이어서 다들 퇴근을 한 상태라 금방들 도착했다. 아버지와 헤어질 날이 멀지 않았다고 생각해 왔지만 막상 아버지의 죽음을 맞이하고 나니 북받쳐오는 슬픔은 어찌할 수가 없었다. 먼저 도착한 둘째 아들 용식, 셋째 아들 응식, 큰딸 선자, 셋째 딸 미자를 모아 놓고 보성댁은 장례를 집에서 치르겠노라고 선언했다.

“느그 아부지 초상은 집에서 할란다.”

장례식장으로 가서 장례를 치르는 것이 대세로 되어가는 추세여서 다들 무슨 말이냐는 듯 보성댁을 쳐다봤다.

“나가 그동안 여그 최씨 집안 일 있을 때마다 찾아다님스로 울력해놓은 거 있응게 다들 와서 거들어 줄 거다. 대숲골 석균이 최센한테 연락해 놨다.”

대숲골 석균이 최센은 이 동네 최씨 집안의 종손이어서 다들 연결이 되어 있을 터였다. 그렇게 다들 연락이 갔는지 이 집 저 집 살림꾼들이 하나둘 도착했다. 그들은 조문을 먼저 하고 보성댁에게 이것저것 묻고 필요한 것들을 주문하며 한 가지씩 도맡아 일을 시작했다. 석균이 최센도 거의 상주하면서 가족이 미처 챙기지 못한 부분을 일깨워줘 가며 장례를 도왔다.

사흘 만에 미자는 꼬막 삶기에 통달했다. 사진출처: soscs

꼬막이 많이 나는 동네여서 꼬막은 손님 대접에 중요한 음식 중 하나였다. 집 앞 길 건너에 꼬막을 고르는 공장 ‘국보수산’이 있어 손님 접대에 필요한 꼬막은 그곳에 가서 조달했다. 처음에는 꼬막을 20kg짜리 두 자루를 가져오고 자루에 반쯤 남으면 가서 두 자루씩 가져왔다. 일을 거들어 주러 온 석균이 최센의 댁인 둑실댁이 장손 며느리인 만큼 입김이 세서 이 사람 저 사람에게 일을 나누었다. ‘꼬막도 삶아야 흘건디’ 하는 보성댁의 말을 듣고는 어정쩡하게 서있는 미자에게 꼬막 삶는 일을 맡겼다.

“애기씨, 꼬막은 애기씨가 삶으씨요. 다른 거 다 냅두고 꼬막만 끝까지 책임지씨요. 알겄지라?”

미자는 ‘처음 보는 것 같은데도 스스럼없이 일을 시키네…’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지금 그런 것 갖고 문제 삼을 때가 아니다 싶어 군소리 없이 꼬막을 삶았다. 부엌 문 앞 수돗가에서 꼬막을 씻은 다음, 그 옆, 마당 한쪽에 만들어 둔 아궁이에 불을 지피고 거기에 걸어둔 큰 솥에 꼬막을 삶았다. 초상 치르는 삼일 동안 꼬막을 삶다 보니 미자는 꼬막 삶기의 달인이 되어 버렸다.

작은 사위는 화장실이 하나밖에 없는 집에서 일을 치르려면 간이 화장실이 있어야 한다며 어딘가로 연락을 했다. 저녁 무렵에 여기저기 행사장에서 사용하곤 하는 플라스틱으로 만든 간이 화장실이 트럭에 실려 왔고 장정들이 달려들어 빈 것이라 어렵잖게 끌어내렸다. 울 밖에 있는 텃밭 한쪽 구석에 자리를 잡아 두었다. 초상을 집에서 치르기로 결정하면서 가장 마음에 걸렸던 게 화장실 문제였는데 한 칸짜리나마 야외에 두니, 오며 가는 손님들이 일을 보기에 좋았다. 처음 미자의 짝으로 마땅치 않아하는 기색을 감추지 못했던 보성댁에게 복수라도 하듯이 미운 소리와 행동으로 속을 종종 상하게 하던 사위였지만 이럴 때에는 쓸모가 있다 싶었다. 그러는 사이 양평 사는 일곱째, 서울 사는 막내 아들이 도착했다. 성장하여 객지로 가서 학교도 다니고 직장도 다니는 손주들도 하나둘 도착해서 잠든 듯 누워있는 상덕씨를 보고 눈물을 흘리고 할머니인 보성댁을 끌어 안고 잠시 흐느끼기도 했다. 충주 사는 큰아들과 서울에 있는 둘째 딸은 아직 소식이 없었다.

아들, 딸들은 각자 일하는 직장이며 지인들에게도 부고를 알렸다. 사위, 며느리들도 알릴 곳에는 알리는 모양이었다. 가까운 순천에 사는 자식이 넷이나 되다 보니 첫날이지만 저녁이 되자 하나둘 소식 듣고 찾아오는 사람들이 제법 많았다. 가까이 사는 큰집 조카들도 보성댁 동생들도 왔다. 보성댁의 바로 아랫동생인 안자는 다른 동생들과 함께 도착해서 대문간으로 들어오면서부터 엉엉 울면서 들어왔다. 어려서 열병을 크게 앓은 후 조금 바보스러워진 동생은 자신의 희로애락을 늘 있는 그대로 드러냈다.

“아이고, 우리 형부! 불쌍해서 어짜까이. 어엉–”

울음을 터뜨리며 방으로 들어가 고인 앞에 엎드려 한참을 엉엉 우는 이모를, 익히 알고 있는 자식들은 같이 눈물을 보이기도 하고 조문 온 손님 중에는 호기심의 눈길도 보는 이도 있었다. 보성댁이 좀 자제가 안 된다 싶으니 이제 그만 울어고 동생에게 조용히 말했다. 보성댁의 말에 동생은 조금 더 울다가 그치고 조카가 차려온 밥상을 받아 동생들과 둘러앉아 맛있게 밥을 먹었다.

그 와중에 보성댁은 자꾸 대문 쪽을 쳐다봤다. 아직 오지 않은 큰아들과 둘째 딸을 기다리는 거였다. 좀 더 확실한 것은 큰아들을 기다린다는 게 맞았다. 죽은 큰며느리 소생의 아이들 셋은 이미 도착해서 일을 거들고 있었지만 큰아들과 재혼한 새며느리, 그 사이에서 태어난 손주는 아직도 소식이 없었다. 보성댁의 연락을 받고 바로 출발했으면 두 시간 전에 도착하고도 남았을 터였다. 삶은 꼬막 양푼을 고방에 갖다 두고 나가는 딸 미자를 불렀다.

“아이, 느그 큰오빠한테 전화 한번 잠 해봐라. 어디만큼 온가.”

미자가 전화를 들고 전화를 걸었다. 전화기를 귀에 대고 한참 있다가 “전화 안 받는디요.”

하더니 “운전허느라 안받는 갑소. 오고 있겄지요.”

그러고는 또 꼬막을 씻고 삶기 위해 밖으로 나갔다. 보성댁은 내색하지 않았지만 마음이 초조했다. 큰아들이 상처한 후 재혼한 새며느리는 세상을 떠난 큰며느리하고는 너무도 달랐다. 처음 새며느리를 맞을 때 보성댁은 세상 떠난 큰며느리를 생각하며 그 역할을 이어주기 바랐다. 그러나 새며느리는 그런 역할을 할 생각이 도무지 없어 보였다. 결혼한 후 첫 명절에 한 번 오곤 그 뒤로는 일절 발걸음을 하지 않았다. 그 며느리가 아들을 하나 낳았다는 소식에 매우 기뻐하며 얼굴 보기를 원했지만 손주조차 보내지 않아 큰아들은 명절이면 늘 혼자 오거나 전처 소생 삼남매의 막내인 한길만 데리고 왔다. 그리고 새며느리는 전처 자식인 손주들과도 삐걱거리는 모양이었다. 큰아들이 재혼하고 3, 4년 동안 이러저러한 일들이 있었고 마냥 보고만 있을 수 없어 한두 번 보성댁이 전화해서 며느리의 역할 내지 엄마의 역할에 대해 이러니저러니 한 말들이 더욱 앙금을 만든 듯 했다. 그러다 보니 아직 소식이 없는 큰아들이 왜 안 오는지, 혼자 오는지, 같이 오는지 말은 안 했지만 보성댁은 초조하게 기다리고 있었다.

손님을 맞이하는 데에 필요한 일손은 손주들로 채워졌다. 일을 거들기에 아직 어린 아이들도 있었지만 중학생 이상에서 성인이 된 손주가 열 명이나 되니 손님들에게 음식 나르는 일을 할 사람은 부족하지 않았다. 손주들이 다들 싹싹하고 예의 바르게 일을 해 부러워 하는 손들도 있었다. 그 중에서 가장 눈에 띄는 아이는 큰딸 선자네 큰아들 규환이었다. 서울에서 대학에 다니고 있던 규환은 뭔가 반항하고 싶은 일이 있었는지, 아니면 세상의 고정관념에 도전하고 싶었는지 등허리까지 머리를 길러 질끈 묶고 있었다. 큰 키에 긴 머리를 하고 낫낫하게 쟁반을 들고 음식을 나르는 규환을 사람들은 조금은 신기한 눈길, 흥미로운 눈길로 바라보곤 했다. 일요일에 미사를 하고 조문을 하러 온 논나 할머니는 ‘아, 그 큰애기가 키가 껀정흐니 커가꼬 낫낫흐게도 일을 잘 허네.’라고 하였다. 규환이 아들임을 아는 사람들은 재밌어했다.

“야야, 규환이보고 큰애기란다. 흐흐흐”

“긍게 그 큰애기가 영 낫낫하구만.”

‘키 껀정하고 머리 긴, 낫낫한 큰애기’ 이야기는 상덕씨의 장례 이후에도 종종 가족들의 이야기꺼리가 되었다.

큰아들은 저녁 여덟시가 넘어서야 도착했다. 소식이 가고 준비해서 오는 데에 걸릴 시간을 대충 계산해 봐도 꽤 시간이 걸린 터였다. 재혼한 처와 두 돌이 조금 지난 손주도 함께 왔다.

“엄마, 큰오빠 왔어요.”

미자의 말에 나가보니 큰아들이 마당으로 막 들어서고 있었다. 큰아들이 왜 인제 오는 거여? 석균이 최센이 못마땅한 듯 한마디 했지만 큰아들은 멀리서 오느라 그렇게 되었습니다 하곤 별 말을 하지 않았다. 큰아들과 재혼을 한 후 첫 명절에만 오고 그 뒤로 발걸음을 끊었던 큰며느리는 어색하게 인사하곤 고개를 외로 꼬고 있었고 아이는 제 엄마의 옷자락을 꼭 쥐고 자기를 내려다 보는 사람들을 두리번거리며 살피고 있었다.

“아이, 왜 인자 왔냐. 얼릉 들어와 아부지 봐라.”

아들 내외는 방으로 들어와 아직 입관을 하지 않은 채 아랫목에 뉘여 흰 천에 덮여 있는 상덕씨 앞에 절을 올렸고 제 부모를 따라 들어온 아이는 영문도 모른 채 뒤에 서서 멀뚱멀뚱 바라보고 있었다. 절을 하고 나오자 밥상을 차려 오게 했다.

“배고프제, 밥부터 묵어라. 아가 준성이도 얼릉 밥 묵고.”

세 식구는 밥상에 둘러 앉아 밥을 먹기 시작했고 본처 소생인 큰 애들이 들어와 제 아비에게 인사했지만 큰아들댁은 그 아이들에게 눈길을 주지 않고 밥만 먹었다. 언젠가 텔레비전에서 자기보다 덩치가 큰 개에 맞서 하악대는 고양이가 나오는 장면을 본 적이 있는데 뭔가 며느리의 모습이 그 고양이 같다고 느껴졌다. 큰 개는 고양이에게 별 신경 안 쓰건만 개가 자신을 건드리기만 하면 가만히 있지 않겠다는 듯 하악대고 있던 고양이. 큰며느리가 세상을 뜨고 1년 남짓 지나서 들어온 새 며느리는 보성댁의 마음에도 차지 않았고 동서들하고도 잘 지내지 못 했다. 재혼하고 첫 명절에 왔다 가고는 이번 초상이 나기까지 한 번도 오지를 않았다. 그런 모습을 보고 미자는 엄마가 벌받는 거라고 말했다. 엄마 잃은, 그 어린 아이들 앞에서, 초상도 안 끝났는디, 느그 아부지 재혼해야 한다는, 그런 인정머리 없는 말을 한 벌을 받는 거라고 했다. 그래서 저런 며느리가 들어온 거라고 말해 보성댁은 서운하게 했다. 상덕씨의 부고를 큰아들에게 알리며 내심 설마 시아부지 초상에도 지가 안 오겠나 했다. 모르긴 모르되 큰아들이 생각보다 늦게 온 것은 가자느니 안 간다느니 실랑이를 하다 늦은 게 아닌가 생각했다. 보성댁 가족의 대부분이 재혼한 큰며느리가 낳은 조카도 처음 보는 상황이었다. 그런 큰며느리가 와서인지 식구들 사이에는 은근 긴장의 기운이 떠돌았다. 그렇지만 아무도 그 며느리에게 그동안 오지 않은 것도 이번에 늦게 온 것도 책망하지 않았다. 이런 자리에서 그런 걸 따져 무엇하랴 싶은 것도 있었고 모처럼 왔으니 맘 상하지 않게 보내고 다음에도 오기를 바라는 마음도 있었다.

소식 듣고 이르게 조문하러 온 손님들을 방으로 들이기에는 많은 것이 부족했다. 소방서 공무원인 큰사위가 어디로인지 전화를 하더니 조금 후에 천막들을 실은 트럭이 왔다. 마당에도 작물들이 애매하게 자라고 있는 텃밭에도 천막을 치고 자리를 깔았다. 추석에서 보름 남짓 지난 시점의 날씨가 춥지도 덥지도 않은 데다 맑기까지 해서 손님들을 방으로 모시지 않아도 문제가 되지 않을 만큼 좋았다. 초상집의 분주함과 복잡함을 아는 조문객들도 문제 삼는 사람은 없었다. 아직 입관을 하지 않은 시신이 방에 누워 있는지라 가까운 친척이나 지인이 아니면 고인 앞에 절하러 들이지 않았다.

첫날 저녁이라 그런지 아홉 시가 넘어가자 손님이 뜸해지기 시작했다. 보성댁과 석권이 최센댁인 둑실댁은 틈틈이 식구들과 일하는 사람들도 밥을 챙겨 먹게 했다. 일을 도와주러 대숲골에서 온 친척네 여자들도 하나둘 저녁을 먹고 일어섰다. 온 집안 식구가 모이다보니 잠자리가 넉넉지 않아 순천 사는 아들 둘과 며느리들은 아침에 일찍 오마고 하며 각자 집으로 자러 갔다. 그래도 손자들만 열이 넘어가니 다들 불편한 대로 끼어 잘 수밖에 없었다. 상덕씨가 누워 있는 안방에도 보성댁이 눕고 큰딸도 따라 들어와 옆에 누웠다. 앞쪽 작은 방에는 아들들과 큰사위가 눕고 뒷방과 거실에 각자 알아서 자리 잡고 누웠다. 미자는 제 남편이 잠자리 불편하면 투덜댈 것이 뻔하다 싶어 집에 가서 자라고 보냈다. 보성댁은 큰며느리의 잠자리가 신경이 쓰였지만 바깥잠은 잘 수 없는지라 적당히 알아서 끼어 자리라 생각했다. 큰며느리도 집이 생긴 게 그러니 어쩔 수 없이 어딘가에 적당히 자리 잡고 누웠다. 생전에 상덕씨는 코를 많이 골아 보성댁의 막내 동생인 아가다는 늘 ‘우리 형부, 또 팥죽 낋인다. 히히’ 하며 웃곤 했는데 자식들이 상덕씨를 닮아 코를 고는 이가 여럿 있었다. 이 사람 저 사람이 여기저기에서 코를 골아대는 소리가 높아가는 중에 누군가는 잠 못 드는 밤이 깊어갔다. 여기저기 들려오는 코골이 소리를 들으며 보성댁은 아직 오지 않은 둘째 딸을 생각하느라 쉬이 잠들지 못했다.

최은숙

35년의 교직생활을 명퇴로 마감하고 제 2의 삶을 살고 있습니다. 어머니의 이야기를 듣고 소설로 쓰고 있습니다. 올해 91세인 어머니가 살아 계실 때, 어머니의 이야기를 많이 듣고 글로 남기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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