깊은 슬픔–비탄
Is that the sound of something calling us from within the grief-the sound of the ecological thought? (p.2, Introduction: Critical Thinking, 『The Ecological Thought』)
그 소리는 비탄 속에서 우리를 부르는 생태학적 사유의 소리일까요? (p.2, 서문: 비판적 사고, 『생태적 사유』)
처음 읽은 날의 기록:
사이먼&가펑클의 노래 ‘The sound of silence’의 가사는 ‘within the sound of silence’이다.
다시 읽은 날의 기록:
처음에는 within the grief를 슬픔 속에서라고 해석했는데 sad, sadness를 쓰지 않은 이유를 생각해 본다. grief에는 ‘[불행·상실·사별 등에 대한] 깊은 고뇌 [슬픔], 한탄, 비통, 비탄’이라는 뜻이 있다. 비탄이 어울리겠다.
한 겹 한 겹 다른 슬픔의 결
최근에 강렬한 감정에 휩싸여 주체할 수 없이 눈물이 쏟아진 일이 있었는데 ‘슬프다, 뼈 때리는 아픔이다, 서럽다’는 말로는 표현이 안 되었다. 나를 집어삼키는 파도로 다가온 감정을 막을 수도 멈출 수도 없어 그 소용돌이 속에서 이건 뭘까 생각하게 되었다.
처음에는 단순히 서운하다는 sadness였는데 grief로 점프했고 한 차례 파도가 밀려가며 차분히 응시하는 sorrow로 슬픔의 감정들이 결을 달리한다.

saddness
나는 좋은 뜻으로 했는데 아닐 수도 있구나, 실망인데. 그래도 뭐 어쩌겠어. 나는 내 뜻대로, 상대방은 그의 뜻대로니까. 앞으로는 존중을 담아 물어봐야겠어. 이렇게 3단계 정도로 생각이 정리되기까지 마음속으로는 오만가지 생각이 날아다녔지만 크게 두 가지 생각의 대립이다.
내가 어떻게 했는데 그렇게 (말)할 수 있어? vs 누가 시켜서 한 거 아니고 내가 하고 싶어서 했잖아.
grief
약간의 슬픔이 시작이었는데 걷잡을 수 없는 감정의 파도가 몰아쳤다. 단순히 서운해서 슬픈 감정이 아니라 무언가 무너져 내렸다는 느낌이다. 파도가 쓸어가 버린 게 뭐였을까
sorrow
학교협동조합을 만든 것, 후회하지 않는다. 하지만 민주적 운영이라는 조합의 원칙을 잘 지키지는 못했다. 설립 초기의 의욕적인 기운이 잦아들자 생소한 행정 실무와 늘 해오던 아이들과의 프로그램을 진행하며 일을 해치우는 게 중요해졌다. 도와준다고 옆에 온 사람들은 가치에 동의하고 조합원이 된 것이니 당연하게 생각했다고 해야 할까. 그렇더라도 의견을 더 물어보고 감정을 알아주었어야 했을 텐데 거기까지는 마음을 내지 못했다.
보조금 사업-마을학교, 마을공동체-을 한 것. 어느 정도 후회한다. 일로 만나지 않았더라면 오히려 편했을 관계들인데 잘 해보려는 의욕이 앞서 사소한 감정들이 생기는 것을 살펴보는 데까지는 마음을 내지 못했다. 어떤 때는 감정적으로 부딪쳤고 어떤 때는 한쪽이 바빠지며 자연히 멀어졌다. 왜 그렇게 열심히 했는지, 뭘 위해 했는지 스스로에게 물어본다.
몇 년 전의 일은 후회한다. 아이가 다니는 초등학교 방과후학교 프로그램 개선을 위해 학부모회 연수를 받고 많은 학부모들이 뜻을 모아 ‘놀이체육’과 ‘숲체험’을 개설하는 활동을 한 것이다. 몇 년이 지나고 보니 아이들은 학교 정규수업과 방과후학교에 학원까지 다니며 더 바빠졌다. 좋은 뜻으로 한 일이 지속되지 못하는 것은 좋은 일이 아니었기 때문이 아닐까 자책하게 된다. 그러면서도 다시 그때로 돌아간다면 나는 또 학부모 연수에 참가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게 가장 좋은 선택이라고 생각할 것이니까. 하지만 이제는 다른 선택을 하고 싶다. 학부모 연수에 참가하지 않을 것이고, 아이와 의논해 방과후학교 참여를 결정하고, 내 아이와 내 아이의 친구들을 위해 뭔가를 하지 않고 오로지 나를 위한 일을 해야겠다고 생각하고 나를 보며 흠칫 놀랐다. 10여 년의 시간 동안 일관되게 해온 생각이 무너졌다. 나는 내 아이에게 고향을 만들어주고 싶었다. 고향이 없는 시대에 고향이라는 뿌리가 주는 단단함을 가지고 세상과 만났으면 바랐다.
시간을 더 거슬러 올라간다.
지금 여기에 고향을 만들려는 시도는 결국 내 유년의 기억을 재현하려는 욕심이었다. 잃어버린 고향(낙원)을 만들고 싶었고, 만들 수 있을 줄 알았다. 하지만 유토피아는 말 그대로 어디에도 없는 곳이다. 나에게 덮쳐온 비탄(grief)의 정체는 상실감이었다.
슬픔을 바라본다

sadness 아! 실망.
grief 앗! 파도가 나를 삼켰다.
sorrow 음~ 파도가 지나가고 이 슬픔은 무엇인지 찬찬히 돌아본다. 후회와 연민
다시 grief 에휴! 유토피아는 없어
(모튼의 grief 우리 완전 저 푸른 초원 위의 멋진 자연에 사는 거? 그거 아니잖아!)
다시 sorrow 그래 슬퍼하자. 그리고 뭘 좀 구분하자. 잃어버린 건 잃어버린 대로 마음에 품고 있으면 되고, 없는 건 없는 거잖아.
스토아 철학의 처방
현자가 인간의 운명에서 벗어났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실수에서 벗어났다고 말하는 것이며, 현자에게는 모든 것이 바람대로 된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생각한 대로 된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특히 현자는 일이 자신의 계획과는 달리 진행될 수 있음을 염두에 둡니다. 바람대로 되지 않을 것을 예상한 사람이 좌절의 고통을 좀더 홀가분하게 받아들이는 것은 당연합니다. (『세네카의 대화: 인생에 관하여』 ‘제9권 평상심에 관하여’ 288쪽, 루키우스 안나이우스 세네카/ 까치글방, 김남우, 이선주, 임성진 역, 2016)
내가 해야 한다, 내가 할 수 있다는 의욕은 오만함이다. 조약돌을 하나하나 놓으면서도 이 조약돌로 골리앗에 맞서겠다는 생각이 조금은 있었나 보다.
조약돌 다섯
끝까지 이 조약돌을 놓아야 할지가 고민이었다. 이번 조약돌은 ‘나’이다. 어떻게 해볼 수 없었던 어떻게 해볼 수 있는 ‘나’, 나의 슬픔과 기쁨, 그냥 나를 봐주는 것이 ‘생태적 사유’의 시작이라는 생각이 어렴풋이 든다.

이렇게 끝까지 돌아보고 들여다보려는 노력하는 마음이 애틋하고 안아주고 싶네요.
후회하지 않는것과 조금 후회하는것과 후회하는것을 나누어서 생각해 보았다는게 새롭고, 귀여워요.
내 마음을 이렇게 들여봐주는 그런 마음은, 다른 사람에게도 확장된다고 생각해요. 들여다보는 마음도 에너지가 있어야 하는거라도 생각하고요, 우리들은(생지연 회원들은) 아직은 참 젋구나 – 헤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