샛길들을 잠복시킨 색채론 – 『가상계』 제7장 「밝기 혼동」 독후기

‘단도직입적으로’ ‘딱 잘라’ 말하는 것은 나름 멋있어 보일 수 있다. 그러나 그런 식의 말로 설명하기엔 너무 복잡하거나 흐릿한 면도 세상에는 있는 법이다. 때로 그런 흐릿함·혼동 그리고 회색은 사람들을 피곤하게 하고, 상대주의는 피곤을 넘어서 혼란과 파괴를 초래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런 것 또한 세상의 일부이다. 나아가 세상 자체가 흐릿하고 회색인데 여태 그렇지 않다고 우기는 데 너무 많은 힘을 쏟아 온 것일는지도 모른다.

가상계
브라이언 마수미 저, 『가상계; 운동, 정동, 감각의 아쌍블라주(assemblage)』 (갈무리, 2011년)

2002년, 듀크 대학교 출판부는, Post-Contemporary Interventions [지금과 그 다음 사이에 끼어들기]라는 기획의 한 부분으로, 브라이언 마수미의 원고를 스탠리 유진 피쉬와 프레드릭 제임슨이 편집한 책 Parables for the Virtual : Movement, Affect, Sensation [가상계우화 : 운동, 정동, 감각]을 펴냈다. 이 책은 2011년 『가상계; 운동, 정동, 감각의 아쌍블라주(assemblage)』라는 제목을 달고 한국어로 번역 출판되었다. 한국어 번역본의 제목에는, 원서본 제목에 들어가 있던 ‘Parables[우화]’라는 단어가 빠진 대신, ‘얽기[assemblage(아쌍블라주)]라는 단어가 들어갔다. 이 번역본의 서문에는 “구체적으로 행하지 않아야 구체적이다” 라는 부제목이 붙어있다. 이 책과 그 한국어 번역본의 서지정보는 다음과 같다.

Massumi, Brian , Fish, Stanley Eugene (EDT) , Jameson, Fredric (EDT), Parables for the Virtual : Movement, Affect, Sensation (Post-Contemporary Interventions), Duke University Press, 2002.04.09.〕

브라이언 마수미(지음), 조성훈(옮김), 『가상계; 운동, 정동, 감각의 아쌍블라주(assemblage)』, 아우또노미아총서 28, 갈무리, 2011.07.30.

아래의 글은 위의 책의 제6장 「밝기 혼동」1의 독후기이다.

블랙핑크

빨강, 파랑. 노랑, 검정 등등 색에는 이름이 있고, 사람들은 색을 구별하는 데 그 이름을 사용한다. 그런데 빨강이라는 이름이 붙은 색들이 모두 똑같지는 않다. 블랙핑크를 생각해 보자. 이를 핑크이긴 한데 검은 느낌이 도는 색이며, 넓은 의미의 빨강에 속한다고 설명하는 사람이있을 수 있다. 검정이긴 한데 핑크의 느낌이 도는 색이며, 넓은 의미의 검정에 속한다고 설명하는 사람이 있을 수 있다. 둘 중 하나는 반드시 맞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 듯하며, 둘 다 블랙 핑크가 주는 느낌을 각자 그럴듯하게 설명하였다고 하는 사람도 있을 듯하다.

어떤 사람이 뭔가를 상상하는 동시에 블랙핑크라는 말을 30명의 사람들 앞에서 했다고 하자. 그가 아직 그 말을 정의하지도 않았음에도, 블랙핑크라는 말을 들은 사람들 가운데 몇몇은 앞서 말한 설명 즉 ‘핑크이긴 한데 검은 느낌이 도는 색’ 혹은 ‘검정이긴 한데 핑크의 느낌이 도는 색’ 혹은 핑크 바탕에 검정 줄무늬 문양의 피부를 가진 얼룩말을 머리에 떠올릴 수 있다. 여기에서 잠시 샛길로 가보자. 만약 30명의 사람 모두가 블랙핑크라는 말을 한 사람이 이 색의 정의를 내려줄 때까지 판단 중지 상태를 유지한다면, 그 30명으로 이루어진 사회는 어떤 사회일까? 그 사회를 그저 지극히 이성적이며 자제력 강한 사람들로 이루어진 사회라고 할 수 있을까? …… 이런 의문에 대한 답을 구하는 일은 뒤로 미루고 다시 본래의 화제로 되돌아와 보면, 색 이름으로써 블랙핑크라는 말이 통용 가능하다는 것은 색이 시각과 1:1로 대응하는 것이라기보다는 여러 감각과 관련된 것이라고 할 수 있는 근거가 될 수 있다는 데로 생각이 뻗어나갈 수 있을 듯하다. 이런 생각은 모든 감각을 공감각적인 것으로 대하는 태도로 귀결될 수도 있을 것이다.

색상환이 알려주는 경계의 흐릿함

‘색상환’이라는 것이 있다.

색상환(color circle)은 가시광선의 스펙트럼을 고리형태로 연결하여 색을 배열한 것을 말한다. 모든 색은 몇 가지의 기본 요소를 바탕으로 한 혼합으로 표현될 수 있다는 생각에서 출발한다.”2

이상의 사전적 정의를 보면, 앞부분은 색상환이라는 것이 색 구분의 객관적 기준이 되어주는 것으로 만들어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그런데 뒷부분은 모든 색이 ‘몇 가지의 기본 요소를 바탕으로 한 혼합으로 표현될 수 있다’는 생각에서 출발하여 색상환이 만들어졌음을 보여준다. 색상환을 만들고 사용하는 사람들은 다양한 혼합의 결과인 색들 사이의 경계가 흐릿한 것임을 색 인식의 바탕으로 하였을 것이다.

이때의 흐릿함을 마수미는 색이라는 범주에 밝기라는 범주를 결부시켜 설명하려 한 듯하다.

우리가 지금 바라보고 있는 것은 언제나 색과 명도[밝기 정도]의 혼합이다. 실제의 외양은 색이든 밝기든 따로 떼어내진 것과 정확히 “같지”않다. (「혼동」, 284쪽)

적확한 용어 사용이 아닐 수도 있지만, 채도와 명도는 각기 다른 범주이다. 그러나 실제에 있어서 사람이 색을 인식할 때 채도와 명도가 구분될 수는 없다. 상황이 악화되어있는 경우, 빨강 같기는 한데 너무 강렬한 조명 아래 보는 중이라 자신있게 빨강이라고 판단하기 어려운데도, “아 그러니까 그게 도대체 무슨 색인지 정도는 이야기해 줄 수 있쟎냐? 왜 그 정도 답도 못 해주냐, 답답하게!” 따위의 성화에 시달리면 “아 그래 빨강이야 ……” 라고 대답했다가 나중에 거짓말했다는 비난을 당하기도 하는 것이다. 여기에서 또 잠시 샛길로 가보자. 아직도 한국인들이 완전히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이른바 ‘레드 콤플렉스’을 생각하여 보면, 그 기원으로 소급할 필요도 없이, 지금 여기에서 아직도 ‘빨갱이’라는 말이 엄청난 힘을 가지고 쓰이고 있다. 빨갱이라는 말의 힘은 한 사람 한 사람이 정치적으로 확실한 색깔[입장]을 가져야만 한다는 극도로 단순한 확신을 모든 사람에게 강요한 위에서 가능하다. 정치적 입장이라는 것이 상황에 따라 변할 수도 있는 것인데도 그렇다. 그리고 지금 여기에서는 아주 흐리고 옅은 빨갱이 딱지가 붙는 것조차 살아가는 데 큰 어려움을 준다. 그래서 사람들은 자신의 정치적 입장에 대해서 생각해볼 시간과 자유를 빼앗기고 정형화된 대응을 하게 되며 그런 대응에 익숙해지면 색깔[정치적 입장] 역시 그가 반복해 온 대답에 물들게 되는 듯하다 …… 이제 다시 본래의 화제로 되돌아와서 보면, 외견상 마수미는 색깔[색채]을 소재로 가상계인 세계를 공감각적으로 인식하는 상황을 설명하였을 뿐인 듯하다. 레드 콤플렉스는 그가 직접적으로 논하고자한 주제가 아닌 듯하다. 그러나 그는, 레드 콤플렉스에 시달리는 한국인들 못지않게, 사람들이 색과 색 사이에 확연한 경계가 있다는 고정관념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는 듯하다.

그런 고정관념의 대척점에 서기 위해서인지 그는 다음과 같이 썼다.

색은 본성적으로 공생적이다. 색들의 동반성을 제거하면 그들은 “공백”이 된다.(「혼동」, 285쪽)

색과 색 사이에 확연한 경계가 있다는 고정관념에서 벗어나지 못하면 아무것도 제대로 볼 수 없다고 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는 또 다음과 같이 썼다.

객관적 관찰이 힘든 문제는 이 두 장[색의 장과 무색의 장]의 경계를 구분할 수 없다는 점에 있다. 이들의 이 흐릿함은 이들의 절대성과 모순되지 않는다. 오히려 정반대로 흐릿함은 절대성을 생산한다. 시각적 흐림의 주변 언저리는 비교 불가능하게 하는 것으로, 전반적으로 모호한 상태 속에서 가장 강렬하게 보인다. / 절대성은 관계 전체의 모든 요소들이 가지는 속성이다. 다만, 절대적일 때 그것들은 요소들이 아니다. (「혼동」, 285쪽)

“색과 색 사이에 확연한 경계가 있다는 고정관념에서 벗어나지 못하면 아무것도 제대로 볼 수 없다.” 출처. Kanenori

이는 마치 흐릿함과 절대성이 적대적 공생을 하고 있다고 주장하는 듯 읽히는 글이었다. 그러면서도 절대성이라는 것이 질감을 가지고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변화의 한 계기 같다는 느낌을 주었다. 절대성도 다른 모든 것들과 마찬가지로 끊임없는 변화 속에서 불쑥 모습을 드러냈다가 변화의 다음 단계로 넘어가면 이미 사라져버리는 하나의 계기 같다는 느낌을 준 것이다.

혼동

흐릿함의 강조가 색 인식을 어렵게 만든다는 우려가 있을 수도 있다고 의식한 듯, 마수미는 ‘혼동’에 대한 재정의를 통하여 색 인식에 대한 자신의 자기의 설명을 변주한다.

경험적 연구로 인해 종종 빚어진 일이지만, “혼동이라는 단어가 부정적 함의를 수반하는 것으로 간주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그것은 그 어원학적 의미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간단히 말해 그것은 함께 있는이다. 비하조의 의미를 피하기 위해 혼동을 대신할 수 있는 말은 윌리엄 제임스의 합류”conflux이다. 들뢰즈와 가따리의 용어로, 합류는 일종의 경험의 블록”block이다. 융합적 측면을 전면에 내세우는 그들의 용어는 합성어인 유년기블록에서 가장 자주 쓰인다. 이 용어는 어떠한 퇴행이나 원시성도 함의하고 있지 않다. 들뢰즈와 가따리는 조심스럽게 강조한다. 유년기블록이란 모든 세대에 걸쳐 동시에 존재하는 발생의 동반적 차원이다. 그들은 말하자면 철학자블록이라고 불렀던 셈이다, 철학적으로 보는 어른의 아이되기와 마찬가지로 그것은 아이의 철학자되기이다. (「혼동」, 299-300쪽)

밝기 혼동 때문에 색을 명확히 구분 지어 이름 붙여 부를 수 없는 것이 아니라 색과 밝기 정도[채도와 명도]는 뒤섞여 있는 것이라는 것이다. 그리하여 색이라는 인식 사건이 한 덩어리[블록]로 가상계인 세계 속에 나타난 것을 사람이 만나는 것이라는 것이다. 그렇게 세계의 한순간을 만났을 때, 자기가 만난 덩어리를 굳이 색과 빛으로 억지고 ‘분석’하지 않고 놓여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을 철학자-되기라고 한 듯하다. 명도 채도 등 분리 가능한 범주들에 따라 대상을 분석하는 인식 방식이 강하게 현실세계를 지배하고 있기 때문에, 거기에서 벗어나서 나뉘어지지 않는 것을 그냥 나뉘어지지 않은 한 덩어리로 보는 태도를 견지하는 어려움을 철학자-되기라고 한 듯하다.

가상

마수미는 비트겐슈타인·괴테·클레·제임스 등의 색채론들을 인용하고 하누누인·고대 그리스인 등의 색채 관련 언어관습을 거론한 끝에, 가상계인 세계를 ‘혼동으로부터 발생’하는 사건의 명멸이라고 설명하는 데 이른다.

, , 형태, 3차원 공간, 그리고 선형적 시간은 모두가 발생한다. 그리고 함께, 상호간에 매번 다르게, 보다 많은 차원의, 자기변용하는 혼동으로부터 발생한다. (「혼동」, 300쪽)

마수미는 엄밀하게 나누는 태도[분석]에 사로잡히지 않을 때 가상계인 세계를 이해할 수 있다고 보는 듯하다. 그리고 그렇게 하여 느낄 수 있는 세계를 창조가 일어나는 곳이라고 주장하려고 한 듯하다.

특이한 표현을 끌어들이고, 혼동으로 감싸여 봉인된 것으로 전개하는 것은, 말 그대로 하나의 세계의 창조이다. (「혼동」, 301-302쪽)

그것은[전체는] 항상 끄트머리로 옮겨가거나 끝없이 그늘 속으로 후퇴한다. 그것은 어떤 윤곽선도 경계도 아니다. 그것은 정확히 규정할 수 없는 테두리 장식이다. 그것은 폐쇄closure도 틀잡기framing도 포섭subsumption도 아니다. 그것은 닫힌 형태의 개방, 즉 끊임없이 존재의 다른 차원들과 만나고 그로부터 떨어져 나오는 형태의 개방이다. (「혼동」, 303쪽)

테두리’, ‘흐릿한 보풀’ 등 그가 사용한 말들은 세계가 물적 특성을 가지고 자리를 차지하는 것으로 고착되는 것을 경계하는 차원에서 사용된 것이라고 볼 수 있을 듯하다.” 출처. Clapton

그는 비지역적 상대성, 창조적 사건의 절대 필요성 등이 가상이라고 하면서, 그런 세계에서는 오로지 관계의 항들만이 실제적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면서도, 그 세계가 특정 시각 특정 상황이라는 계기에 고착되는 것을 경계한 듯, 가상적 전체를 실제적인 것의 변형을 통한 혹은 이행을 통한 테두리 장식이라고 설명한다. 여기에서 주목하여야 할 말은 당연히도 ‘테두리 장식’일 것이다. 마수미는 이것을 “응고된 형상에 흐릿한 보풀을 일으켜서 폐쇄에 혼동을 일으키는 사건성의 후광”과도 같다고 하였다. 마수미는 또 이것을 “실제적으로 발생하는 것을 둘러싸고 채우는 새로움의 “아우라””라고 하였다. 흐릿하고 혼동되는 것이라는 것이다. ‘테두리’, ‘흐릿한 보풀’ 등 그가 사용한 말들은 세계가 물적 특성을 가지고 자리를 차지하는 것으로 고착되는 것을 경계하는 차원에서 사용된 것이라고 볼 수 있을 듯하다. (「혼동」, 305쪽)

나름의 색채론으로도 보일 수도 있었던, 위와 같은 마수미의 말과 글들은, 그것들이 2000년대 초에 정리된 것임을 감안하면, 미래에 대한 예측이라고 볼 수도 있다. 이런 특성은 다음과 같은 마수미의 주장들에서 엿볼 수 있다.

아무리 기술적으로 낮은 것이라 해도, 모든 매체는 실제로 자신의 가상성을 생산한다(심지어 그림에서조차 그렇다). (「혼동」, 305쪽)

변함없는 변화? 변성 또는 진화의 잠재력이 내장된 개방형 하이퍼텍스트 환경(월드와이드웹과 같은)쌍방향”(상관적) 환경은 진정으로 새로운 가상의 개념들을 필요로 한다. 또는 환원적인 공간 혹은 심지어 시공간적 틀 잡기framing에 의해 방해받지 않은 과정을 파악할 수 있는 새로운 진짜 가상의 개념들을 필요로 한다. 그들은 철학이 필요하다. (「혼동」, 306쪽)

2000년대 초로부터 20여 년이 지난 지금, 사람들은 빠른 속도로 기존의 지식 정보 거의 전부를 학습한 AI가 사람보다 작곡도 더 잘하고 그림도 더 잘 그리는 것을 보고 있다. 오늘 대화형 AI가 다소 부족한 작업결과를 내놓는다 하더라도 그 부족함을 아주 빨리 극복할 것임을 누구도 부인하지 못한다. 어느 정도의 확신을 가졌었는지 알 수 없지만, 마수미는 2000년대 초에 AI가 지금과 같은 역할을 하리라는 것을 예측한 것이다.

샛길들을 잠복시킨 색채론

앞서 마수미의 글을 읽으면서, 두 차례 샛길로 접어들어 보았다. 하나는 만약 30명의 사람 모두가 블랙 핑크라는 말을 한 사람이 이 색의 정의를 내려줄 때까지 판단 중지 상태를 유지한다면, 그 30명으로 이루어진 사회는 어떤 사회일까 하는 의문을 가져보는 것이었다. 다른 하나는 ‘레드 콤플렉스’에 대하여 생각하여 보는 것이었다. 아직도 한국인들이 완전히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이른바 ‘레드 콤플렉스’을 생각하여 보면, 그 기원으로 소급할 필요도 없이, 지금 여기에서 아직도 ‘빨갱이’라는 말이 엄청난 힘을 가지고 쓰이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빨갱이라는 말의 힘은 한 사람 한 사람이 정치적으로 확실한 색깔[입장]을 가져야만 한다는 극도로 단순한 확신을 모든 사람에게 강요한 위에서 가능하다는 것이었다.

마수미가 직접 이런 샛길로 걸어 들어가는 모습을 보여주지는 않았으나, 그의 글은, 색채론의 겉모습을 하고 있음에도, 거의 모든 사람들이 인식에 있어서 특정한 고정관념에 단단히 결박되어있는 세태에 대한 우려를 보여주는 듯하였다. 블랙 핑크라는 말을 들으면 사람들이 다양한 색을 상상하는 것을 넘어 다양한 느낌을 상상하는 상태여야, 사람들이 세계를 제대로 이해할 것이라고, 마수미는 생각한 듯하다. 그런데 사람들은 지나치게 이성에 사로잡혀있어서 사고의 균형을 잃고 있다고 우려한 듯하지만, 마수미는 그런 우려는 따로 부각시키는 샛길을 가지는 않았다.

마수미는 색채론에 빗대어 가상계인 세계를 설명하였다고 볼 수 있는데, 이런 설명은 세계를 물적 실체로 보는 세계 설명과 충돌할 수밖에 없으며, 두 설명을 사람들은 각각 상대와 절대라는 말로 규정해버릴 수 있을는지 모르지만, 마수미의 세계 설명을 상대라는 말만으로 대신할 수는 없을 듯하다. 그러나 세계를 물적 실체로 보는 세계 설명이 워낙 강고하다 보니 그것이 마수미의 세계 설명에도 다양한 제약을 가하고 있는 듯하였다. 그래서인지 마수미는 흐릿함·혼동 그리고 회색이라는 말들을 그의 색채론에서 쉽게 내지르지 못하는 듯 보였다. 그의 색채론에는 이를테면 ‘상대 콤플렉스’가 내재하고 있는 듯하였다. 그런 콤플렉스가 있다면, 마수미가 그것을 드러내는 샛길로 가는 모습을 보여주지 않았음에도, 가상계인 세계에 대한 그의 설명을 읽는 사람이 그 콤플렉스를 찾아 챙겨야 할 듯했다.


  1. 이 글에서는 「혼동」로 줄여 쓰겠다.

  2. 《위키백과》 ‘색상환’

이유진

1979년 이후 정약용의 역사철학과 정치철학을 연구하고 있다.
1988년 8월부터 2018년 7월까지 대학에서 철학을 강의하였다.
규범과 가치의 논의에 도움이 될 만한 일을 하고 싶어 한다.

댓글

댓글 (댓글 정책 읽어보기)

*

*

This site uses Akismet to reduce spam. Learn how your comment data is processed.


맨위로 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