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울컴퍼니] ⑩ 기도하는 마음으로

종교를 가지지 않은 사람도 기도하는 순간을 마주할 수 있다. 이때 기도는 종교적 형식을 넘어서, 세상을 깊이 들여다보는 '주의'와 사랑의 감각에서 비롯된다. '기도'란 무엇인지 다시 묻고 싶었다. 그리고 기도하는 마음을 나누고 싶다. 기도하는 사람과 시인은 공통적으로 세상을 주의 깊게 바라보는 존재다. 사랑의 힘에서 나오는 몰입의 행위, '역능(force)'을 갖춘 사람이라고 할 수도 있다. 기도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세상을 응시하는 태도'로 확장하며, 그런 태도가 어떻게 삶과 세상을 바꾸는 힘이 되는지를 사유해본다. 변화가 더디게 느껴지는 시간 속에서도, 다시 바라보고, 다시 사랑하며 살아가는 법을 고민하는 모두와 기도하고 싶다.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 윤동주, 「서시」 중에서

신 존재를 믿지 않거나 종교를 가지지 않는 이들도 ‘기도’할 때가 있다. 기도하는 사람을 떠올리면 어떤 이미지가 그려지는가. 학창 시절 한 번쯤 외웠거나 외우기를 시도했던 윤동주의 「서시」는 내게 ‘기도’로 다가온 첫 번째 시다. 교회에서 배우는 기도는 대부분 ‘주여 삼창’으로 시작되는 통성기도였다. 앞뒤좌우, 사방에 둘러싸인 그 분위기에서 목이 쉬어가며 ‘주여!’를 외쳤다. 그게 기도의 전부인 줄 알았다. 돌이켜보면 도대체 무엇을 위해 그렇게 소리 내어 기도했는지 모르겠지만.

아마도 친구와 사이좋게 지내고 싶다거나, 갖고 싶은 물건을 얻게 해 달라거나, 가정의 평화나 시험을 앞두고 공부한 것보다 좋은 성적을 얻게 해달라는 내용이 주를 이뤘을 것이다. 기도의 질은 양과 길이에 의해 결정되는 줄 알았다. 끊임없는 말을 신께 내뱉으면 그 노력이 가상해 기도를 들어주신다고 믿었나 보다. 그렇게 열심히 기도를 하다가 윤동주의 시를 읽었다.

시인과 기도하는 사람의 공통점이 있다. 그들은 ‘관찰을 잘하는 사람’이다. 사진출처 : Lina Trochez

시인의 태도는 비장해 보였다.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 없기를’ 바라는 마음은 얼마나 큰 마음일까. 또 ‘잎새에 이는 바람’에 괴로워하는 마음은 도대체 어떻게 하면 느낄 수 있는 감각일까. 그것이 잘못되었다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윤동주의 시 앞에서 그동안 내가 했던 기도는 처절하게 무너졌다. 시인의 바람과 내 기도에 담긴 부끄럼과 괴로움의 욕망이 다르게 느껴졌고, 나는 대체 무엇에 매달려 기도하고 있는지 그때부터 고민한 것 같다.

시인과 기도하는 사람의 공통점이 있다. 그들은 ‘관찰을 잘하는 사람’이다. (이 표현은 마종하 시인의 「딸을 위한 시」에서 빌려왔다.) 어떤 의지나 결심으로 존재나 상황을 바라보기보다, ‘주의'(主意) 깊게 상황을 바라본다. 프랑스 출신의 철학자 시몬 베유(Simone Weil)는 기도란 “어떠한 불순물도 섞이지 않은 주의”(『중력과 은총』, 132쪽)라고 말하며, 이 ‘주의 깊은 노력’은 사랑을 통해 배우려는 의지에서부터 배울 수 있는 행위라고 소개한다. 자세히 말하자면 ‘주의’와 ‘사랑’은 이런 것이다.

“사람은 자기 내부에서 에너지를 해방한다. 그러나 그 에너지는 언제나 또다시 구속되고 만다. 어떻게 하면 에너지를 완전히 해방할 수 있을까? 우리 내부에서 그것이 이루어지기를 간절히 염원해야 한다. 진정으로 염원해야만 한다. 다만 염원하는 데만 머물고, 그것을 스스로 실행하려 하지 말 것. 그런 방면에서의 시도는 모두 헛되고 또 비싼 대가를 치르기 때문이다. 그런 종류의 행위에서는 내가 ‘나’라고 부르는 것이 모두 수동적이 되어야 한다. 오직 주의만, ‘나’가 사라져 버릴 정도로 긴장한 주의만이 필요할 뿐이다. 나의 이른바 ‘나’ 전체에서 주의의 빛을 거둬들여 상상도 미치지 않는 곳에 그 빛을 비출 것.” (『중력과 은총』, 133쪽)

주의 깊게 응시하는 태도, 응시하다가 내가 사라져 버릴 정도로 몰입하는 경험, 거기서부터 나를 넘어서는 용기가 생긴다. 또 하나 이들의 공통점이 있다면 ‘주의 깊게 바라보는 힘’을 사랑에서 길러 올린다는 것이다. 사랑은 관찰하고 응시하는 사람의 유일한 힘이다. 참견하고 실행하려는 의지에 앞서 끝까지 바라보는 힘, 가만히 지켜봐 주는 힘은 오롯이 사랑에서부터 시작되고, 사랑으로 지속할 수 있다.

사랑은 바라보는 사람, 기도하는 사람을 변화시키는 힘이다. 신승철은 이를 “역능(force)”이라고 말한다. “세상에는 권력의 논리라는 게 있고 힘이 있는 자와 없는 자로 나뉘며, 권력과 재물에 호소해서 자신의 의지대로 삶을 바꾸려는 힘이 있다.” 이와 반대로, “자신의 내재적인 자기원인에 따라 창조적인 역능에 기반하여 세상을 바꾸려는 움직임이 가장 위대한 변화의 시작”(인용은 모두 『눈물 닦고 스피노자』, 76쪽)이다.

사랑을 역능으로 받아들이는 사람이 오래 바라볼 수 있다. 깊이 들여다볼 수 있다. 사진출처 : Mohamed Nohassi

사랑을 역능으로 받아들이는 사람이 오래 바라볼 수 있다. 깊이 들여다볼 수 있다. 그들을 시인이라고, 기도하는 사람이라고 부르지 못할 이유가 있을까. 나를 둘러싸고 너무 당연하게 돈과 권력, 명예, 성공과 유명세로 부추기는 욕망을 틀어 새로운 역능을 발휘하는 사람. 이 세상에서 무엇에 부끄러워해야 하며, 어떤 상황에 괴로워해야 하는지를 깨우치는 사람.

세상 돌아가는 소식을 접하면 힘이 빠질 때가 많다. 염원하던 순간이 현실이 되었지만, 그 순간은 찰나이고 여전히 아무것도 바뀐 게 없어 보인다. 심지어 기대하는 세상은 바뀐 현실에서도 더디게 올 것 같다. 이럴 때 우리는 무엇을 가장 먼저 해야 할까. 꾸준한 실천, 의식적인 관심, 낮아진 관심을 포기하지 않는 의지. 모든 것이 가능하지만, 우선 기도하는 마음으로 살아보면 어떨까. 밑힘(중력)과 뜰힘(부력) 사이에서 우리가 진정으로 사랑하는 것이 무엇인지, 주의 깊게 살피는 것은 또 무엇인지. 잠시나마 그동안 쏟았던 열정을 두고, 오롯이 응시하는 시간이 필요할 때가 있다.

서시의 남은 부분을 읽어보자.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

오늘 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참고문헌

시몬 베유, 『중력과 은총, 철학강의/신을 기다리며』, 이희영 옮김, 서울: 동서문화사, 2017.

신승철, 『눈물 닦고 스피노자』 서울: 동녘, 2017.

윤동주,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서울: 미르북컴퍼니, 2016.

김준영

세상에 여러 얽힘, 연결망에 대해 관심을 두고 있습니다.
학교에서 세계기독교와 상호문화를 공부하고 있고,달리기를 좋아합니다.

댓글

댓글 (댓글 정책 읽어보기)

*

*

This site uses Akismet to reduce spam. Learn how your comment data is processed.


맨위로 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