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울컴퍼니] ⑭ 간단하게 볼 일이 아니다

개인의 인식과 정체성은 언제나 사회적 경험과 문제와 연결되어 있다. 생김새와 사용하는 언어, 입은 옷으로만 간단히 볼 일이 아니다. 한국 사회는 획일화된 외모 기준과 단일민족 신화로 다문화 배경을 가진 사람들을 쉽게 타자화한다. 모든 존재의 존엄성이 존중받는 사회가 되기 위해서는 점점 더 복잡해지는 혐오와 차별의 태도를 간단히 보지 않을 지향과 생각의 힘이 좀 더 필요하다.

어릴 적부터 짙은 눈썹, 쌍꺼풀, 낮은 콧대, 어두운 피부색으로 인해 ‘동남아인’ 또는 ‘서남아시아인’이냐는 질문을 숱하게 들었다. 지금보다 그런 질문에 내재한 사회적 편견이 강했던 때라 그런 질문에 맞서 날 선 채로 부정하거나, 내 모습을 콤플렉스로 여겼던 적이 있다. 특정 국가를 콕 집어 ‘그 나라 사람 같다’라는 말과 함께 새어 나오던 히죽거림에 한없이 주눅이 들기도 했다. 다행인 것은 그런 질문을 오랫동안 받아오면서도 그들의 무례한 질문을 혐오와 차별의 언어로 번역하지 않고, 그 경험이 쌓이면서 혐오 발언과 타자에 대한 차별 문제를 좀 더 사려 깊게 고민하고 연구하는 태도로 이어온 것은 오히려 그런 생김새가 준 예기치 않은 기회이기도 하다.

한국 사회는 ‘단일민족’이라는 신화에 기반한 정체성이 유독 강하다.
사진 출처: Matheus Viana

한국 사회는 ‘단일민족'(한민족)이라는 신화에 기반한 정체성이 유독 강하다. 특히 그 ‘한 핏줄’은 겉으로 드러나고 보이는 것으로 증명되어야 한다는 경향이 있다. 생김새나 옷차림과 같은 외양으로 인종적 정체성을 구분하려는 태도는 내가 아무리 ‘한국 사람’이라고 해도, 그렇게 보이지 않는 구석이 있으면 공허한 차별이 되기 쉽다.

이러한 한국의 인종적, 민족적 정체성은 일제강점기의 식민주의와 산업화 시기의 ‘한국인으로의 정체성’, 신자유주의에서 서구 중심의 경제와 문화를 맹목적으로 좇으면서 더욱 복잡한 인종주의로 변모하며 자리 잡게 됐다. 오랫동안 한국에서 기자로 활동해 온 라파엘 라시드(Raphael Rashid)는 한국 사회에서 갖는 인종주의의 경향성을 다음과 같이 구분한 바 있다.

“한국 사회에서 환영받는 외국인은 (이른바) 서양이나 부유한 나라에서 온 사람들뿐이다. 외국인의 피부색은 부유한 나라에서 왔는지 아니면 가난한 나라에서 왔는지를 짐작하게 하는 수단이다. 부유한 나라에서 온 백인에 대한 대우는 그렇지 않은 외국인보다 훨씬 후한 편이다. … 피부색이 어둡거나 한국보다 가난한 나라에서 온 사람들을 어떻게 대우하는지는 여러 뉴스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온갖 매체들이 가난한 나라에서 온 사람들을 열심히 일하지 않고, 게으르고, 그저 한국의 (상대적으로) 관대한 건강·복지 시스템을 악용하는 사람들이라고 은연중 그려 내고 있다. 또한 그들이 떠나온 국가는 한국보다 못사는 나라이기에 배울 점이 전혀 없고, 오로지 한국의 성공 사례를 따라 배우고 추앙해야 한다고 여긴다.”1

2010년 병역법 개정 이후 다문화 배경을 가진 약 4,400명의 장병이 군 복무를 수행하고 있다고 한다.2 베트남어, 러시아어, 우즈벡어, 중국어가 더 익숙한 한국군의 모습은 여전히 낯설다. 이렇듯 국가의 정당한 구성원으로서 의무를 다함에도 불구하고, 누군가에겐 일상적인 차별과 혐오에 노출된 것이 여전히 당연하게 다가올 수도 있다. 동일화된 정체성을 그 어디에서보다 강하게 요구받는 공간에서 그들은 ‘별 뜻 없는’ 질문에 하루에도 얼마나 많이 당황스럽고 어이없는 현실과 직면하고 있을까.

무의식적인 인종적 편견은 특정 집단에 대한 우월성과 외모 기준의 획일성을 강화하기 쉽다. 외모뿐만 아니라 언어, 식습관 등의 문화 역시도 마찬가지다. 한국의 인종주의를 종교 맥락에서 연구한 이들은 “인종화를 ‘인종적’인 특징들을 특정 집단의 사람들이나 대상에게 부여해서 그(것)들의 ‘인종 정체성’을 형성하는 과정”3이라고 정의한다. 이 과정은 ‘신체적’ 특징에 제한되지 않고 문화, 종교, 행동양식, 출신 지역, 언어, 관습, 의복 등을 포함한 인종화된 그룹이나 대상에 대한 분류, 배제, 소외, 차별 등을 동반한다. 예를 들자면, 무슬림은 이슬람을 따르는 종교적 범주의 용어지만, 그렇든 아니는 상관없이 무슬림으로 ‘보이거나’ 또는 무슬림이 다수인 국가(Muslim-majority country)에서 온 사람들은 무슬림이란 인종으로 분류되는 것이다.

부유한 국가에서 이주해 온 이들은 ‘대담한 모험가’로 긍정적으로 표상되는 반면, 특정 개발도상국 출신의 이주민들은 ‘기생충’과 같은 멸시적 언어로 대상화된다. 사진 출처: Matheus Viana

이러한 문제의식은 이주민과 난민 문제로 확장될 때 더욱 복잡한 양상을 드러낸다. 이주민에 대한 태도는 그들의 출발지에 따라 현저히 달라진다. 부유한 국가에서 이주해 온 이들은 ‘대담한 모험가’로 긍정적으로 표상되는 반면, 특정 개발도상국 출신의 이주민들은 ‘기생충’과 같은 멸시적 언어로 대상화된다.4 이는 이주민을 동등한 주체로 인정하기보다, 자본과 국경을 중심으로 재편된 신식민주의적 시선에 따라 서열화하고 상품화하는 담론의 단면을 보여준다. 이주민 노동력에 대한 경제적 필요성을 인정하면서도 그들에게 사회적 권리를 부여하지 않으려는 모순적인 태도는, 인간을 단순한 생산 요소로만 간주하는 사회에서 이주민을 둘러싼 갈등이 심화될 수밖에 없음을 예고한다. 나아가 난민에 대한 정의가 여전히 좁은 의미로는 ‘박해에 대한 충분한 근거 있는 두려움’으로 제한되어 있어, 빈곤, 기아, 기후변화로 인한 이주민들을 난민 지위에서 배제하는 한계를 드러내기도 한다. 법적, 제도적 경계가 취약한 이들에게 더 불리하게 작용되고, 인간의 보편적 위기를 도외시하는 동안 이들의 삶은 더 크고 고통스러운 현실에 노출될 수밖에 없다.

故신승철은 이처럼 취약한 사회를 ‘타락한 유토피아’라고 소개한 적이 있다.

“문제가 되는 것은 문턱이 있는 유토피아, 즉 타락한 유토피아다. 외부로부터 닫혀 있고, 경계를 엄격히 하는 문턱이 있는 공동체는 결국 환대를 약화시키고, 낯선 것에 대한 두려움이나 혐오를 통해서 반응한다. 결국 환대가 없는 공동체는 끊임없이 외부의 존재를 네트워크 잠금을 하면서 방조하고 방관하고 관계없음의 상태로 남기를 원한다. 마치 자본주의 사회가 아무런 관계도 없는 사람과 거래를 하고, 아무런 관계가 없는 사람의 소식을 듣고, 아무런 관계가 없는 사람과 벽을 맞대고 살아가는 것처럼, 관계 자체를 위생적이고 탈색되어 있고, 중화된 관계망으로 만드는 것이다. … 결국 기후난민에 대한 이러한 대응 방식은 하나의 극단주의를 낳게 된다. 유럽의 극우파와 미국 트럼프 행정부처럼 분리주의, 고립주의, 폐쇄경제를 통해서 기후난민의 문제를 해결하려 드는 것이다. 이러한 차별과 배제의 방법론은 파시즘이 작동하는 방식과 일치한다. 이러한 현대적인 파시즘의 기본 정서는 바로 혐오이다. 혐오는 화처럼 관계 속에서 문제를 격발시키는 것이 아니라, 관계없음을 유지하는 방식 즉, ‘더럽다’라는 기본 인식의 틀 속에서 위생적인 관계망을 구축하려는 시도이다.”5

결론적으로, ‘다름’에 대한 획일적 시선은 개인적인 외모 콤플렉스를 넘어 사회적 타자화를 구조화하는 근본적인 메커니즘으로 기능한다. 개인의 경험은 지극히 주관적인 “개인의 경험”으로만 치부되지 않아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우리가 이주민, 난민 문제를 어떤 정책이나 법률만으로 간단히 해결할 수 있는 문제로 보는 순간 다양한 배경을 가진 이들이 한국 사회에서 겪는 구조적 불평등과 혐오의 복잡함은 점점 더 이해하기 힘든 영역이 될 것이다.

더 나은 삶을 위해 어디론가로 거주지를 옮기는 것조차 누군가에게 자유롭게 허용되지만, 급박하게 떠나야 하는 상황에서도 그 기회가 제한되는 현실을 살아가고 있다. 또, 이주민을 단순히 ‘노동력’으로 소비하고, 이주를 정치적·경제적 논리로만 환원하는 사회에서는 상호 존중과 공존은 불가능하다. ‘다름’을 인정하는 것을 넘어, 타자화의 메커니즘을 비판적으로 성찰하고 한 존재의 주체성과 존엄성을 회복하는 사회로 가는 과정은 간단하지 않다. 그러나 우리 사회가 이 과정을 제대로 숙고하지도, 이에 필요한 논의와 시스템을 만들지도 않는다면 그로 인해 닥쳐올 문제 역시 간단하게 볼 일이 아닐 것이다.

∎참고문헌

  • 김나미·김응교·김진호·이보영·조민아·최진영, 『‘우리’라는 신화의 폭력: 한국의 인종주의와 그리스도교』, (서울: 동연, 2025)
  • 라파엘 라시드, 『우리가 보지 못한 대한민국』 허원민 옮김 (서울: 민음사, 2022)
  • 샘 밀러, 『이주하는 인류』, 최정숙 옮김, (서울: 미래의 창, 2023)

*관련글

11.12.13


  1. 라파엘 라시드, 『우리가 보지 못한 대한민국』 허원민 옮김 (서울: 민음사, 2022), 123.

  2. 고유찬, 「한국말 서툰 다문화 병사 늘자… 軍, 때아닌 통역 전쟁」, 『조선일보』, 2025.08.27.

  3. 김나미·김응교·김진호·이보영·조민아·최진영, 『‘우리’라는 신화의 폭력: 한국의 인종주의와 그리스도교』, (서울: 동연, 2025), 33.

  4. 샘 밀러, 『이주하는 인류』, 최정숙 옮김, (서울: 미래의 창, 2023), 11.

  5. 신승철, 「문명 외부의 기후난민②」, 『생태적지혜연구소』, 2021.04.25.

김준영

세상에 여러 얽힘, 연결망에 대해 관심을 두고 있습니다.
학교에서 세계기독교와 상호문화를 공부하고 있고,달리기를 좋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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