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명 외부의 기후난민②

국제사회가 기후난민을 대하는 태도는 아감벤의 ‘호모 사케르’와 같다. 죽든 살든 상관없는 국외자로서 생명유지, 그 이상의 어떤 권리도 가지지 못한 존재들로 취급된다. 기후난민을 분리주의를 통해 처리하려는 태도는 비판받아야 한다. 기후위기에서 누구도 예외일 수 없으며 그들은 단지 우리보다 앞서 겪는다는 인식 아래 기후난민의 문제는 곧 우리 자신의 문제라는 점을 분명히 해야 한다. 캐나다가 시리아 난민 2만 5천만 명을 받아들일 수 있었던 것은 기존의 다양성 존중의 문화임을 깨닫고 새로운 주체성 생산을 말해야 한다. 단지 500명의 예멘 난민 앞에서 보여줬던 우리사회의 편협한 문화는 성장주의 세력이 자신만 누리고 살겠다는 파시즘의 태도와 이어져 있다. 이를 극복하고 나눔과 연대, 탈성장의 화두에 주목하자.

아감벤의 『호모 사케르』와 기후난민

호모사케르(Homo Sacre)는 죽여도 되나 신성하고 희생제물로 쓸 수 없는 경계선에 선 벌거벗은 생명이다. 바로 기후난민, 이주민, 죄수 등에 해당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러한 벌거벗은 생명과 주권의 통치가 어우러진 난민수용소라는 공간이 재조명될 수 있다. 푸코의 생명정치 기획을 확장시킨 아감벤의 이 기획에서 우리는 수용소, 생체실험, 안락사, 국가보건 정책 앞에서 생명의 상황을 직감할 수 있었다. 호모사케르는 생명만 유지하는 자, 열외자, 경계인, 삶밖에 없는 사람 등을 지칭한다. 여기서의 생명의 의미는 미셀 푸코가 말했던 생명정치(bio politics)라는 상황의 외부를 의미한다. 즉, 문명 내부는 잘 살도록 유지하려는 속성이 있어서 자기계발, 힐링, 웰빙, 소확행 등을 추구하지만, 그 문명의 외부는 죽든 살든 내버려두는 것이 생명정치 단계의 특징이다. 그런 점에서 문명이 네트워크 잠금을 했던 배제의 공식 속에 있는 기후난민의 상황이 주목되는 대목이다.

생명과 관련해서 조에(zoe)는 모든 생명체(동물, 인간, 신)에 공통된 것이며 살아있음, 삶의 내재성이다. 반면 비오스(Bios)는 개인이 속한 집단의 삶의 형태나 방식을 의미한다. 고대 그리스의 폴리스에서는 조에로서의 자연과 생명은 오이코스(Oikos)라는 가정살림에만 국한하고 비오스만을 매개하였다. 다시 말해 생명라는 조에는 사회를 유지하는데, 필수적이기에 포함하면서도 유독 정치현실에서는 배제하였다. 이러한 정치적인 배제와 포함의 이중성에 따라 예외적인 것이 된 조에에 기반한 사람과 생명은 ‘삶만을 유지하는 자’라는 특징으로 나타난다. 그런데 이러한 예외가 규칙이 되는 것이 근대주권 국가의 특징이라는 점에 아감벤은 주목한다. 배제와 포함, 비오스와 조에, 외부와 내부의 비식별역 즉 경계선의 예외상태에 선 존재가 호모사케르이다. 생명만 유지하는 상태, 주권정치의 외부에서 발언권이나 권리가 전혀 없는 상태, 예외상태로만 간주되는 상태, 더 나아가 예외가 규칙인 상태, 이러한 호모사케르의 상황은 기후난민의 상황과 오버랩되면서 그들이 현재 어떤 상태에 있는지에 대한 짐작을 하게 만든다.

호모사케르는 오로지 생존만으로 만족해야 하는 기후난민의 현실을 잘 조명해주는 개념이다. 생명 자체는 신성하지만 그 신성함으로 인해 늘 주권의 외부인 예외상태에 처한다. 그들에게 발언권과 인권, 주권 등의 권리들이 있다는 것을 누고도 믿지 않는다, 주권의 외부, 예외상태 속에서 그들에게 최소한 권리를 보장해줄 수 없다는 점에서 그들은 그저 삶을 살아갈 뿐이고, 그 이외의 권리의 사각지대 속에서 살아간다. 이러한 예외상태는 마치 추방된 사람과 같은 상태를 의미한다. 이러한 기후난민은 주권과 법의 한계테제가 곧 바로 법의 구성테제임을 의미한다는 것을 직감하게 만든다. 부드럽고 달콤한 1세계의 삶과 이를 구성하는 1세계 주권권력의 입장에서, 기후난민은 그 예외상태에 놓인 3세계의 현실을 의미한다. 그리고 기후난민이 발생되는 3세계의 삶으로부터 철저히 분리하고 배제하여 이를 예외상태로 만들어야 1세계의 주권권력이 구성될 수 있다는 점의 역설 속에 있다. 기후난민은 1세계의 난민수용소에서 생존을 위한 최소열량을 섭취하며 누워 지낸다. 생존은 가능하지만, 삶 자체만이 보장될 뿐 미래가 없다. 희망이 없다. 꿈이 없는 잠을 자야 한다. 예외상태는 규칙이 되어 계속 지속될 뿐이다.

기후난민, 우정과 환대 사이에서

미국과 멕시코 사이를 가르는 장벽은 1세계 국가의 특권의식, 분리의식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by Hillebrand Steve 출처 : https://pixnio.com/nature-landscapes/road/long-border-fence
미국과 멕시코 사이를 가르는 장벽은 1세계 국가의 특권의식, 분리의식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사진 출처 : Hillebrand Steve

프랑스 철학자들인 들뢰즈와 가타리가 『철학이란 무엇인가?』에서 언급한 우정의 공식은 이러하다. 우정은 사랑과 달리 동일시가 이루어지지 않으며, 착하면서도 악동 같고, 이타적이면서도 이기적이고, 협동하면서 견제한다. 친구는 곁에서 힘이 되어 주지만 동시에 질투할 수도 있고, 언제든 도움이 될 수 있는 존재들이다. 신, 국가, 아버지가 아닌 영원한 친구의 세계는 바로 공동체적인 관계망과 배치를 이룬다. 이러한 배치에 우정의 공식에 따르는 입체적인 인물들이 서식한다. 우정이 서식하는 배치는 친밀함과 유대감의 배치라면 그 반대편에 낯선 익명의 배치로서의 환대가 서식하는 배치가 있다. 만약 우정의 공식이 아니라 환대의 공식을 만든다면 어떨까? 환대의 공식은, 낯선 존재에 대해서 미리 선입견을 갖기보다 규정과 정의(definition)를 끊임없이 뒤로 미룸으로써 밀고 당기는 것이 아닐까? 그리고 양방향적인 상호작용 속에서 정동의 흐름에 몸을 싣고 감싸 안는 것이 아닐까? 관계없음과 환대 사이에 관계를 설립하고 이 속에서 서로 되기(becoming)의 과정적이고 진행형적인 것으로 다가가는 것이 아닐까?. 친밀하고 유대적인 관계망과 낯선 익명의 관계 사이 즉 우정의 공식과 환대의 공식사이에는 무수한 사회적 관계망과 배치를 실존한다. 물론 우정을 더 진행하면 간섭과 참견이 되고, 환대를 더 진행하면 관계없음으로 향한다. 공동체는 환대를 통해 마주침을 하고 우정을 작동시켜 친구로 만드는 열린 시스템을 내부에 갖고 있다. 낯선 존재로서의 기후난민은 환대의 공식을 거쳐 사회의 일원이 되고 우정의 공식을 거쳐 친구가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문제가 되는 것은 문턱이 있는 유토피아, 즉 타락한 유토피아다. 외부로부터 닫혀 있고, 경계를 엄격히 하는 문턱이 있는 공동체는 결국 환대를 약화시키고, 낯선 것에 대한 두려움이나 혐오를 통해서 반응한다. 결국 환대가 없는 공동체는 끊임없이 외부의 존재를 네트워크 잠금을 하면서 방조하고 방관하고 관계없음의 상태로 남기를 원한다. 마치 자본주의 사회가 아무런 관계도 없는 사람과 거래를 하고, 아무런 관계가 없는 사람의 소식을 듣고, 아무런 관계가 없는 사람과 벽을 맞대고 살아가는 것처럼, 관계 자체를 위생적이고 탈색되어 있고, 중화된 관계망으로 만드는 것이다. 문턱이 있는 유토피아는 현재의 1세계의 현실을 의미한다. 1세계에서 움츠려들고 방어적이고 두려움에 찬 어조로 기후난민에 대해서 언급하는 사람들의 모습이 등장한다. 그들은 철저히 열린 공동체가 아니라, 닫힌 공동체로 남기를 원한다.

결국 기후난민에 대한 이러한 대응방식은 하나의 극단주의를 낳게 된다. 유럽의 극우파와 미국 트럼프 행정부처럼 분리주의, 고립주의, 폐쇄경제를 통해서 기후난민의 문제를 해결하려 드는 것이다. 이러한 차별과 배제의 방법론은 파시즘이 작동하는 방식과 일치한다. 이러한 현대적인 파시즘의 기본정서는 바로 혐오이다. 혐오는 화처럼 관계 속에서 문제를 격발시키는 것이 아니라, 관계없음을 유지하는 방식 즉, “더럽다”라는 기본 인식의 틀 속에서 위생적인 관계망을 구축하려는 시도이다. 기후난민에 대한 혐오의 방식은 결국 기후위기에서 누구도 예외일 수 없다는 사실을 근시안적으로 바라본다. 자신에게 일말의 지켜야 할 것이 있다고 여기는 이러한 방식은 결국 편재성(偏在性)을 띤 기후위기 상황에서 누구도 예외일 수 없다는 점에 대해서 간과한다.

기후난민의 절박한 생존에 대한 열망이 만든 거대한 탈주선을 아무렇지도 않는 것이라는 듯이 보는 것은 오히려 인간과 삶과 생명에 대한 열망을 도외시하며, 생명의 아우성을 혐오하는 것에 불과하다. 수많은 파시즘의 상황이 도처에서 발생하고 있다. 그러나 파시즘은 기후난민이 전 세계를 떠돌며 따뜻한 식사와 달콤한 잠을 원하는 기본적인 생존욕구에 대해서 귀 기울이지 않는다. 결국 기후난민에 대한 환대는 생명에 대한 환대이자, 인간과 자연의 공존에 대한 미래적 약속을 하는 것에 해당할 것이다. 우리는 생명밖에 유지할 수밖에 없는 기후난민의 상황이 남의 일이 아니라 바로 우리 자신의 문제라는 점을 깨달아야 할 것이다.

그런 점에서 우리는 2015년에 캐나다가 보여준 환대에 대해서 지적해야 할 것 같다. 당시 쥐스탱 트뤼도 캐나다 총리는 공항에 직접 나와서 일일이 시리아난민에게 악수를 하면서 사회보장증과 아파트열쇠를 건넸다. 이를 통해서 2만 5천명의 시리아 난민이 성공적으로 캐나다에 정착할 수 있었다. 캐나다가 갖고 있는 다양성의 존중의 문화는 결국 문명의 외부로 추방되고 버려진 난민의 삶을 끌어안는 환대로 향할 수 있는 원동력이었다. 그런데 한국사회는 어떠했는가? 500명가량의 예멘 난민이 들어왔을 때 엄청난 혐오의 시각을 퍼뜨렸던 사건을 기억할 것이다. 청와대 국민청원에 제기된 “제주도 불법난민신청 문제에 따른 난민신청 허가 폐지” 청원요구에 약 60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참여했다. 그러나 이러한 혐오의 파시즘의 상황이 우리 안에서 벌어졌다 하더라도, 우리나라 국민 자신이 앞으로 다가올 기후위기 상황에서 누구보다 식량난민이 될 가능성이 높다는 점에 주목해야 할 것이다. 우리 자신이 다음 차례가 될 수 있는 것이다.

처음에 그들이 공산주의자들을 덮쳤을 때,
나는 침묵했다.
나는 공산주의자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 후 그들이 사회주의자들을 덮쳤을 때,
나는 침묵했다.
나는 사회주의자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 후 그들이 노동조합원들을 덮쳤을 때,
나는 침묵했다.
나는 노동조합원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 후 그들이 유대인들을 덮쳤을 때,
나는 침묵했다.
나는 유대인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

그후 그들이 나를 덮쳤을 때,
나를 위해 말해 줄 이들이
아무도 남아 있지 않았다.

[마르틴 니묄러 목사의 금언]

나가며 : 우리 모두가 기후난민이다!

기후난민의 상황에 대해서 얘기하면 그저 압도와 무기력의 마음이 들뿐이라는 것이 사람들의 반응이다. 기후위기의 막대함이 해결책이 보이지 않는 만큼, 기후난민 역시도 기후우울증의 터널효과로 이끌 뿐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희망의 불씨를 포기해서는 안 된다. 인간(人間)이라는 개념이 ‘사람 사이’라는 의미좌표를 갖듯이, 우리는 기후난민과의 관계 맺기를 통해서 어떤 색다른 주체성 생산(the production of subjectivity)의 가능성에 대해서 주목하게 된다. 우리는 ‘사람 사이’에 벌어질 하나의 사건에 대해서 두려워하거나 공포심을 가질 이유가 없다. 기후난민이 한국사회에서 정착하여 생존과 생활을 이루며 더불어 살아가는 것은 이제 그리 이상한 일이 아니며, 우리 사회가 함께 풀어나가야 할 과제라고 할 수 있다.

얼마 전 기후난민에 대해서 모 대학에서 특강을 한 적이 있다. 코로나19 사태로 인해서 온라인을 통한 형태였지만, 강의 내내 기후난민이 처한 현재의 상황과 앞으로의 상황에 대해서 고민했다. 요르단 국경에 있는, 지평선 끝까지 이르는 시리아 난민 캠프를 보여주었을 때, 사람들은 숨이 턱턱 막히는 것이 같다고 말했다. 그것은 우리가 직면한 하나의 현실이다. 그것은 감출 수 없고, 덮어버릴 수 없는 지구촌이 처한 현실이다. 기후난민의 현재의 상황을 목도하면서 어떻게 다시 미래세대와 희망과 꿈에 대해서 얘기할 수 있을까? 그것은 참 어려운 과제이다. 우리가 구성해야 할 과제이며, 과정적이고 진행형적인 과제이다.

기후난민에 대한 소식을 접하다 보면, 이미 1세계로 진입한 우리 한국사회의 부드럽고 달콤한 삶에서 경제가 이보다 더 성장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는 점을 알게 된다. 우리는 충분히 성장했고, 라이프라인이 없거나 생존 자체가 위협당하는 제 3세계 사람들과 절박한 삶을 살고 있는 기후난민의 상황을 비추어보면, 우리는 미안할 정도로 너무도 잘 살고 있고 누리고 살고 있다. 기후위기는 문명이 고장 나서 생기는 문제가 아니라, 문명이 너무도 잘 돌아가기 때문에 발생한 문제이다. 어쩌면 현 시점에서 성장주의 세력들이 파시즘의 숨결을 갖고 있는 것은 당연하다. 더 성장한다는 것은 기후난민의 상황을 분리시켜 이기적으로 자신만 누리고 살겠다는 의도를 갖고 있다. 그럴수록 기후위기는 더 심각해질 것이며, 기후난민의 발생은 가속화될 것이다. 우리는 나눔과 연대, 탈성장의 새로운 화두에 주목할 때이다. 지구라는 행성에서 살아가는 모든 사람과 숨결을 공유하고 있다면, 우리는 그들의 들숨날숨이 갖고 있는 생명의 열망에 대해서 도외시할 수 없다. 우리는 더불어 함께 가난해질 준비를 해야 할 것이다. 그것이 기후위기 시대의 라이프스타일일 수밖에 없는 이유도 그 때문이다. 지금도 기후난민들은 미래도 꿈도 희망도 없는 잠을 자고 있을 것이다. 우리가 그들에게 꿈과 희망과 미래를 다시 돌려줄 수 있을까? 생명의 작은 몸짓이라도 용기가 생긴다면 말이다.

강원도 전체 면적만큼이 불타버린 2020 캘리포니아 산불. 미국 역사상 최악의 산불로 꼽힌다. 기후위기는 다양한 모습으로 지구상 모든 지역을 강타할 것으로 예상된다. by Anthony Citrano 출처 : https://images.app.goo.gl/LrZfijXoXs6B5Z3e6
강원도 전체 면적만큼이 불타버린 2020 캘리포니아 산불. 미국 역사상 최악의 산불로 꼽힌다. 기후위기는 다양한 모습으로 지구상 모든 지역을 강타할 것으로 예상된다.
사진 출처 : Anthony Citrano

다가올 기후위기 상황은 누구에게도 예외일 수 없다. 그러나 기후정의의 관점에서 볼 때 라이프라인 설비가 되어 있지 않고, 기본 인프라와 냉난방기, 수도시설, 위생시설조차도 없는 제 3세계 사람들의 삶이 가장 취약할 것이다. 기후위기에 가장 책임이 없는 제 3세계 사람들이 기후위기의 최대피해자여야 한다는 불평등한 현실이 그들 앞에 기다리고 있다. 그리고 도저히 살 수 없는 상황에서 기후난민은 살아남기 위해서 자신의 터전을 떠난다. 이러한 뿌리 뽑힌 사람들이 발생하는 이유가 충분히 누리고 사는 1세계의 삶과 관련되어 있음에도 기후난민과 자신은 관련이 없다고 여기고 그들을 혐오하는 것이 1세계 현실의 모습이다. 그러나 이는 1세계 사람들이 자신의 위치재를 잘 활용했기 때문에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에 불과하고, 그러한 문명의 상단에 위치한 그들의 삶의 초래할 막대한 기후위기를 온 몸으로 직면한 기후난민의 상황은 그저 가십거리일 수 없다. 우리는 지구적 책임에 대해서 방관할 수 없을 것이다. 다가올 거대한 기후위기 상황은 우리의 삶의 양식을 송두리째 바꿀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우리는 운이 좋았을 뿐이며, 그 다음에 무너져 내리는 문명의 행렬, 순열의 일부일 수 있다. 왜냐하면 기후위기는 누구도 예외가 될 수 없기 때문이다. 중동의 가장 비옥한 나라였던 시리아가 한 순간에 무너져 내렸듯이 우리 한국사회도 그 다음 차례가 될 수 있다. 그저 남 나라 이야기가 아닌 것이다. 우리 자신의 문제일 수 있는 것이다. 우리 모두는 기후난민이다. 거기에는 예외가 있을 수 없다. 그래서 더욱 기후난민에 대한 연대와 나눔의 물결을 만들어야 할 때이다. -끝-

이 글은 작가와 사회 2021년 봄호에 실렸던 글입니다.

故신승철

1971.7.20~2023.7.2 / 평생 연구하고 글을 쓰는 사람으로 살다가 마지막 4년 동안 사람들 속에서 '연결자'로 살다 가다. 스스로를 "지혜와 슬기, 뜻생명의 강밀도에 따라 춤추길 원하며, 사람들 사이에서 공락(共樂)하고자 합니다. 바람과 물, 생명이 전해주는 이야기구조를 개념화하는 작업을 하는 글쟁이기도 합니다."라고 소개했다.

댓글 2

  1. 우리 모두는 기후 난민이라는 마지막 문구가 서늘히 다가옵니다. 들죽날죽하는 생활상에서의 불편함을 새로 시작해 봐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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