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기로픈 깜빵생활] ① 국보와 까치방

몇 개월 만에 집에 갔다가 잠복해 있던 세 형사들에게 체포-연행되었다. 누구는 88일간 세계일주도 한다는데, 나는 88일간 서울구치소에 갇혀 지냈다. 재판받고 집행유예로 풀려난 게 스물일곱 살, 사면된 것도 김대중 대통령 때였다. 모두 수십 년 전 일이다. 생태적지혜연구소에서 사람들과 밥을 먹다가 불현듯 꺼낸 이야기가 이렇게 글로 쓰여지게 되었다. 이 또한 인연이겠다 싶다.

서울구치소 첫날은 한여름의 한밤중이었다.

6-7인 정도 수용되는 방에 배정되었는데, 모두들 잠잘 준비 중이었나 보다. 여간수의 안내로 그 방의 고요를 깨고 들어서자, 그들은 엉거주춤 일어서서 웅성거렸다. “국보야 국보”. ‘국가보안법’의 줄임말이 ‘국가의 보물’로 들려, 슬쩍 미소가 흘러나왔다. 나름 상석이 정해져 있었는지 화장실에서 가장 먼 자리에 안내되었다. 한밤중의 조용한 소란 속에서, 흰머리 분도 언뜻 보였다. 나중에 헤아려 보니, 우리 방에는 ‘사기’가 가장 많았고 ‘간통’도 있었다.

검사가 부를 때까지 대기하는 방은 먹방 혹은 까치방이라 불렸다.
사진 출처: Spencer Tamichi

그해의 무더위는, 검사한테 불려 다니며 소위 ‘까치방’에서 몇 시간을 보냈을 때 실감한 듯하다. 먹방 혹은 까치방이라 부르던 공간. 검사가 부를 때까지 대기하는 방. 처음 입소할 때 신체검사라는 걸 하며 재어 본 키 158센티미터. 누우면 수세식 변기 한 통과 꽉 들어차는 공간의 협소함과 함께 또렷하게 남는다. 어떤 날은 먹방에서 대기상태로 종일 기다리게 해놓고, 검사가 취조하지 않고 그냥 구치소로 돌려보내기도 했다. 초반 기싸움 뭐 그런 거였나 싶다. 누군가 까치방 안에 툭 던져놓은 하이틴 로맨스 소설 한 권 덕에 시간이 잘 갔다. 하지만 먹방에 다녀만 오면 다들 역한 냄새가 난다며 넌더리를 치던 게 더 힘들었다. 아마도 싸구려 나프탈렌이나 소독약 냄새였을 거다. 하루는 호송하는 간수에게 화장실을 가고 싶다 했다. 그는 화장실 안까지 따라오진 않았다. 덕분에 세면대에 찬물을 틀고는, 물속에서 수갑을 벗고 맨 물로 머리를 감았다. 당시에 수갑은 헐거웠고 원하면 언제든 손을 빼낼 수 있었다. 자유로운 두 손으로 재빨리 머리를 적시던 그 짜릿함이라니!

연행된 첫날은 형사들에게 조사를 받았다. 거의 열일곱 시간을 재우지 않고 묻고 또 묻고 했었다. 긴장해서였는지 졸리진 않았다. 이윽고 잠자라고 타일 바닥에 모포 하나 깔아 주길래, 아침에 그들이 옆에서 큰 소리로 떠들 때까지 잤다. “쟤 잘 자는 것 좀 봐라.” “야, 여기가 너네 집 안방이냐?” 어이없어하는 것 같기도 했다. 형사들의 차림새는 사복이었음에도 공통된 특징이 있다. 쫄티스러운 과하게 타이트한 반팔 티셔츠에 묵직해 보이는 체인 금목걸이. 게다가 전라도 사투리는 인상적이었다. 그중에 한 분이 중학생 아들이 공부를 곧잘 한다며 얘기를 걸어왔다. 사범대 출신 시국사범과 금목걸이 떡대는 어느새 아이 공부 이야기로 서로 격려 겸 위로를 뒤섞어 제법 친근한 대화를 나누기도 했다.

하지만 한가로운 사담 한편에, 형사들과 시국사범과의 치열한 알리바이 다툼이 있었다. 형사들의 짜놓은 얼개에 꼭 들어맞지 않았지만. “그러니까 그 노동절 집회에 갔었지?” 자신만만한 웃음을 짓는 떡대들. “아… 네. 이제 기억나네요. 가판대에서 노란색 배지. 그거 나눠줬었어요.” 순간 웃음이 지워지고 낭패한 표정. 그도 그럴 것이, 그들이 필요했던 건 그해의 집회 참가 시인이었고, 배지를 배포한 사실은 전년도 집회였던 거다. 주도면밀하게 계획된 진술이 아니었다. ‘진실은 이긴다. 정말.’

영화 《초혼》 Youtube 상영 예고 갈무리.

운동권으로 유명한 대학에 입학했다. 입학한 그해 5월은 ‘1991년 열사정국’이라 칭할 만큼 강경대 열사를 비롯한 많은 대학생들이 시위 도중 열사가 되고 말았다. 4학년이었던 ‘김귀정 선배’도 무자비한 공권력에 희생되었다. 검은 휘장과 검은 현수막으로 휩싸인 캠퍼스에서 모두가 소리 내 울었고, 가두 투쟁에 나선 누구나 그리될 수 있다는 분노를 드러내고 있었다. 고3 내내 교회 죽순이였던 스무 살 인생이 운동권 삶으로 뛰어든 것은 어찌 보면 자연스러웠다. 그들은 시위 중에 무리하게 좁은 골목에 많은 학생들을 몰아넣고, 넘어진 채 숨 한 톨 쉴 수 없게 만들었다. 곤봉을 휘두르는 전경들을 피해 담벼락을 넘어 도망하는 시위자들을 끝까지 쫓아, 죽음에 몰아넣었다. 악명 높던 ‘백골단’도 흔하게 출몰하던 당시였다.

한 학년 선배가 “너는 왜 운동하니?”하고 물었다. “양심과 용기?” 솔직한 대답이 미끄러져 나갔다. 스스로 대단한 이론으로 단련되지도, 투철한 프롤레타리아 계급의식으로 무장하지도 못했음을 부끄럽게 자백하며.

화염병 만들고 짱돌 깨며 전두환 노태우 정권 타도를 외치고, 주말 예배에서 찬송가를 부르는 평화로움 사이를 오가던 공존의 시기는 짧았다. 좋아하던 찬송가의 구절은 점점 동감하기 어려워졌고, 교회 청년부 선배와의 면담을 끝으로 교회에 발걸음을 끊었다. 학생회-학회와 공개학생조직 가입, 안가까지 갖춘 비공개조직 활동, 이어지던 맑스 원전 공부… 일학년 때부터 바빠졌다. 게다가 교회에서 주보를 만들던 글씨체는 선배들에게 발탁되어 이후 3년 내내 대자보와 현수막 글씨를 담당하는 ‘선전일꾼’이 되었으니 왜 아니겠나.

몇 개월 만에 집에 갔다가 잠복해 있던 세 형사들에게 체포-연행되었다. 누구는 88일간 세계일주도 한다는데, 나는 88일간 서울구치소에 갇혀 지냈다. 재판받고 집행유예로 풀려난 게 스물일곱 살, 사면된 것도 김대중 대통령 때였다. 모두 수십 년 전 일이다. 생태적지혜연구소에서 같이 밥 먹다가 불현듯 꺼낸 이야기가 이렇게 글로 쓰여 지게 되었다. 모든 걸 엮어다 붙이길 좋아하니, 이 또한 인연이겠다 싶다.


*참고자료

프레시안, 「이 시대의 강경대·김귀정을 소환하라」 권경원 영화감독, 2016.10.14.

영화 《초혼, 다시 부르는 노래》 예고 영상

마이티

‘마이티’는 ‘힘센’이라는 뜻도 있지만,
내가 좋아하던 카드놀이의 이름이기도 하다.
나우누리 시절, 나의 아이디였다.

한살림 조합원 사 년 차.
녹색당원 오 년 차.
생태적지혜 연구소 조합원 이 년 차.

나는 스러지는 불처럼 살고,
흐르는 물처럼 글 쓰며,
상처입은 나무처럼 남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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