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기로픈 깜빵생활] ⑤ 엄마의 편지

지금도 간직하고 있는 편지 한통. 빛바랜 편지봉투에, 받는 사람은 이렇게 적혀있다. 〈경기도 군포시 군포우체국 사서함 20호 김미화 5022번〉 구치소 안에서 받아든 엄마의 편지는, 삼십 년이 다 되어 가는 시간이 흘렀지만 아직 온전한 상태로 내게 쥐어져 있다.

지금도 간직하고 있는 편지 한통. 빛바랜 편지봉투에, 받는 사람은 이렇게 적혀있다. 〈경기도 군포시 군포우체국 사서함 20호 김미화 5022번〉 구치소 안에서 받아든 엄마의 편지는, 삼십 년이 다 되어 가는 시간이 흘렀지만 아직 온전한 상태로 내게 쥐어져 있다. 살면서 엄마에게 편지를 받는 이가 많을 것 같지 않다.

빛바랜 편지와 어머니의 사랑

대학 때였다. 방에서 후배와 통화하는 걸 마루에서 들었는지, 넌지시 한 마디 하는 거였다. “남의 인생에 함부로 이래라 저래라 하는 건, 걔 인생 책임질 거 아니면 조심해야지.” 조직회합에 이제 그만 나오겠다는 후배를 만류하는 전화였다. 저간의 사정을 단박에 파악하고 그에 대한 엄마의 생각을 슬쩍 꺼내놓는 데 무척 놀랐지만, 아무 대꾸 없이 넘어 갔었다. 그러곤 시간이 많이 흘러, 구치소에서 엄마의 편지를 받게 되었다.

엄마편지. 사진제공 : 김미화

“유난이 더웠던 올여름, 그곳에 있는 너를 생각하면 가슴이 미어졌는데…

어느새 조석으로 싸늘해진 가을이구나.

추석 명절도 별 의미없이 무거운 마음으로 안동할머님 뵈러 다녀왔고..

어제 23일 재판일에, 아빠랑 참석 했었지.

판사님의 질문에 엄마는 방청석에서 마음 조렸는데, 넌, 또박,, 침착하게 대답을 잘하고 있더구나 (어렵고 힘들었겠지만)

아빠는 돌아오는 길에 검사의 구형이 (공소 내용에) 비해 높았다고 불만이셨다.

아무튼 다음 선고 때는 좋은 결과로 나왔으면 하는 간절한 바램이다.

구치소 창 너머로 너를 볼 때마다 마음 아프지만 그래도 넌 늘 밝은 얼굴로, 나를 만나니 다소 가벼운 마음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그 안에서도 나름대로 시간을 유용하게 보내고 있는 네가 기특하게 여겨진다.

대학을 나와도 신문을 막힘없이 읽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드라.

한자공부 열심히 하고, 책도 많이 본다니 알찬 독서시간이 되길 바란다.

어디 가서든, 잘 적응하는 너의 낙천적인 좋은 성격으로, 잘 견뎌내고 있는 네가 대견하구나.

엄마는 널 면회 다니면서, “인덕원” 지하철 높은 계단을, 무거운 다리로 한 계단씩 오를 때마다, 이런 생각을 하게 되더라.

“자식은 편하게 쉽게 얻어지는 게 아니라고”

엄마가 모처럼 펜을 들었을 때 간절한 부탁하나 하자.

출소 후에는 네가 평범한 마음으로 평범한 삶을 살아가는 딸이 되어주었으면 하는 바램이다.

엄마는 아주 가끔씩 네가 어려서 한말이 한 가지 생각나곤 해서 혼자 소리 없이 웃을 때가 있단다.

“나도 이 다음에 엄마를 기쁘게 해줘야지”라고.

넌 기억할지 모르겠다만, 초등학교 때, 언니하고 너희 둘이 있을 때 말이다.

평택에 살 때, 진숙이가 “노을”동요를 불러서 방송에 출연했을 때, 그때 그걸 보고 깜찍하게 했던 얘기지.

어린 네가 한 말이지만, 엄마를 기쁘게 해주겠다던 그 말이 흐뭇하고, 네가 그렇게 사랑스러울 수가 없었지.

나에게 큰 기쁨을 안겨 달라 바라지는 않는다,

다만 평범한 삶을 살아준다면, 무엇보다 큰 기쁨이겠지.

어제는 법원으로, 오늘 구치소로 너를 만나고 돌아와, 네가 나오기 전에 꼭 쓰고 싶었던 편지를 오늘에야 쓰는구나.

이 편지가 너에게 전해지기 전에, 널 또 보러가야겠구나. 긴 T셔쓰를 가지고 가야하니까.

그럼 낮과 밤, 기온차가 심한 환절기에 감기 조심하고, 또 접견 때 보자구나.

9월 24일 엄마가.”

평범한 삶에 대한 간절한 바람

울 엄마는 여덟 남매나 되는 집에서 태어났다. 유복한 유년기를 무탈하게 보냈으면 좋았겠지만, 외할아버지 사업이 쫄딱 망한 후에 갖은 고생을 다 겪었다. 가난이 너무나 싫어서, 고향 순천에서 서울 외삼촌네로 상경하여 공장에 취업 했노라 전해 들었다. 게다 더부살이 눈칫밥에도 집에 매달 생활비를 부쳤다고. 아마도 추측컨대 억척스러움 좋게 말해 알뜰함은 그때부터가 아닐까싶다. 외할머니는 유복한 집안의 곱디곱고 허약한 외동딸이었기에, 그로부터 배웠다거나 따라 했다고 보이진 않고, 쌀 떨어지면 엄마는 할머니댁에 쌀 얻으러 심부름 했던 기억이 생생하다.

얘기 나온 김에 꺼내 놓자면, 일등만 기억하는 이 나라에서 잊혀진 마라토너 남승룡 선수의 여동생이 울 외할머니다. 그는 손기정이 금메달을 딴 그 올림픽에서 3등을 했다. 아주 예전에 어느 다큐멘터리에서 그 동메달리스트가 매우 가난한 환경에서 어렵게 살았다고 묘사되었을 때, 엄마는 코웃음 치며 “말도 안 돼. 얼마나 잘 살았는데, 기막혀” 했었다. 엄마의 외가는 나의 외할아버지의 빚보증을 잘못 서며 무너졌다.

자식을 키우며 깨닫는 부모의 마음

안동 뒷산 세살 때. 사진제공 : 김미화

나는 세 살 때 멜빵 바지 입고 언니 손잡고, 옆에 선 엄마가 내 귀 뒤로 머리칼을 넘겨주던 사진을 제일 좋아한다. 어렸을 때는 이웃이 먹을 걸 나누어 주러 오면, “고맙습니다” 소리를 잘도 했다. 엄마도 그 기억을 여직 간직하고 있는데, “참 인사성도 밝았지, 누가 시키지 않았어도.” 하고 그때 이야기를 하곤 했다.

그저 평범하게 살기를 바란다는 건, 딸이 평범치 않은 삶을 살고 있음을 인지하고 있음을 역으로 표현한 거겠지 싶다. 그 순탄치 않은 길에서 옆으로 비껴나기를 바라는 간절한 마음. 자식 키워보니 새삼 저절로 스민다.

마이티

‘마이티’는 ‘힘센’이라는 뜻도 있지만,
내가 좋아하던 카드놀이의 이름이기도 하다.
나우누리 시절, 나의 아이디였다.

한살림 조합원 사 년 차.
녹색당원 오 년 차.
생태적지혜 연구소 조합원 이 년 차.

나는 스러지는 불처럼 살고,
흐르는 물처럼 글 쓰며,
상처입은 나무처럼 남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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