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틀라스와 노동의 자율성

기술이 백퍼센트를 결정하는 미래는 없고, 알파고 이후에도 바둑은 계속된다. ‘전부 아니면 전무’ 방식의 접근이 아니라면 노동에도 다른 여러 미래가 열릴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로봇과 AI 도입 이전에, 자본주의가 강제하는 임금 노동과 생산관계에서 우리가 어느 정도 자율성을 갖느냐에 달려 있다.

인간의 일자리와 삶을 빼앗는 로봇에게 너희는 그러면 안 된다고 할 수 있을까? 사진 출처: David Levêque

지난 달, 어느 고속도로 휴게소에 커피를 사러 들어갔는데 ‘로봇 카페’라는 게 눈에 띄었다. 사람 얼굴 모양의 액정 화면과 기계 팔 한 개가 달린 로봇이 커피를 만들어주는 부스였다. 이 로봇 자체가 특별한 것은 아닌 것이, 로봇이 하는 일은 또 하나의 기계인 커피머신에 종이컵을 넣고 기기의 메뉴 버튼을 누르고 커피가 다 내려지면 뚜껑을 덮어서 배출구로 옮겨주는 것이었다. 이 로봇의 기능 정도는 커피 머신에 통합해서 설계할 수도 있을 테고 종이컵을 넣고 빼는 일이 그리 귀찮은 것도 아니지만, 어쨌든 로봇의 얼굴(로 간주되는 화면)이 있고 팔이 움직이니 그럴듯해 보이는 것이다. 마침 바로 옆 점포에는 인간 노동자가 세 명이 일하는 카페도 있었다. 동일한 아메리카노 한 잔의 가격은 로봇 카페보다 6백 원인가 비쌌던 것 같다. 어차피 커피 머신이 뽑아내는 것이라 맛도 차이가 없다. ‘저 로봇이 커피 한 잔당 그만큼의 인건비를 절약하고, 동시에 그만큼 사람의 일자리를 빼앗겠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틀라스 로봇 이야기는 차원이 다르다. 올해 1월 6일 공개된 양산형 아틀라스는 키 190cm, 무게 90kg이며, 여러 관절에서 56개의 자유도를 가지고 50kg의 무게를 들어 올릴 수 있으며, 30kg의 무게를 들고 이동하는 작업이 가능하다고 한다. 이 로봇이 현대자동차 생산 공정에 들어온다는 것이다.

생산 공정의 로봇 도입이 처음도 아니고 현대차에서 어느 정도 적용될지도 아직 알 수 없는, 검토 단계의 발표였지만 충격은 상당했다. 산업혁명의 여명기엔 ‘양이 사람을 잡아먹는’ 인클로저 운동이 일어났는데, 이제 로봇이 노동자를 잡아먹는 상황이 온다는 공포가 엄습하는 분이기다. 아마도 아틀라스가 ‘이족보행 휴머노이드’, 즉 두 다리로 걷는 사람 모양의 로봇이라는 점에서 충격을 더했던 것 같다. 이 로봇이 사람의 일, 일자리, 밥, 위신과 자존감, 그리고 정체성까지 빼앗을 것 같기 때문이다. 게다가 인간을 흉내 내는 것을 넘어 더 좋은 결과물을 만들어내는 AI(인공지능)까지 우리의 삶에 성큼 들어온 때다. 아이작 아시모프의 ‘로봇 3원칙’부터 스탠리 큐브릭 감독의 유명한 1968년 영화 《2001년 스페이스 오딧세이》의 인공지능 HAL 9000까지가 머릿속을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간다. 로봇 3원칙에 따르면 로봇은 인간에게 해를 가할 수 없으며 인간이 내리는 명령에 복종해야 하는데, 인간의 일자리와 삶을 빼앗는 로봇에게 너희는 그러면 안 된다고 할 수 있을까?

아틀라스가 가져온 충격

그런데 이 아틀라스가 갑자기 논쟁의 중심으로 들어온 것은 이재명 대통령의 언급 때문이었다. 이 대통령은 지난 1월 29일 수석 보좌관 회의에서 휴머노이드 로봇의 생산 현장 투입과 관련하여 “흘러오는 거대한 수레를 피할 수 없다”는 식으로 말했다. 노동조합은 신기술에 저항할 게 아니라 잘 적응해야 한다는 논리였다. 이 대통령은 지난해 9월 유엔에서 AI를 주제로 한 회의에서도 “과거 ‘러다이트 운동’처럼 기술 발전을 역행시키는 일은 가능하지도 않고 현실적이지도 않습니다”라고 발언했다. 로봇 투입에 저항하는 노동조합은 21세기판 러다이트 운동으로 자연스레 프레임이 만들어졌다.

보수 신문들도 때를 만난 듯 반응했다. 민주노총 금속노조 현대자동차지부가 발표한 “노사 합의 없는 신기술 도입은 단 1대의 로봇도 현장에 들어올 수 없다”는 입장을 자극적으로 확대하여, 시대착오적인 기득권 노동조합이 혁신을 막고 있다는 투의 기사와 칼럼을 쏟아냈다. 금속노조는 원래 생산 공정 변화나 신기술 도입은 노사간 합의를 거치게 되어 있다는 것을 상기시키는 반박문을 냈지만 이미 여론은 일방적으로 정리된 후였다.

금속노조가 분개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한국의 주요 제조업 부문 노동조합은 대부분 이런 조항을 경영진과의 단체 교섭 사항으로 명시하고 있다. 오히려, 노동자의 일자리 숫자와 작업 조건에 직접적 영향을 미치는 변화에 대해 노사가 정보 공유와 토론을 하지 않는다면 그게 더욱 이상하고 시대착오적인 일일 것이다.

또 하나, 몇몇 이들은 이재명 대통령이 언급한 ‘러다이트’의 비유가 역사적 사실과 어긋난다는 점을 지적했다. 러다이트는 기계의 도입으로 일자리를 잃게 된 장인 노동자들이 좌절한 나머지 기계를 때려 부순 아둔한 운동이 아니었다. 영국의 마르크스주의 역사가 E.P. 톰슨이 『영국 노동계급의 형성』에서 설명하는 러다이트 운동은 차라리 고귀하고 사려 깊은 운동이었다. 그들은 새로 도입된 기계가 찍어내는 조잡한 생산물을 참을 수 없었고, 자신들의 가치까지 떨어지게 하는 것에 분노했다. 그래서 지역 공동체 차원에서 조직적인 항의와 저항에 나선 것이었고, 아무 기계나 부순 것도 아니었다. 그리고 러다이트 운동의 이러한 정신과 동력은 이후 차티스트 운동으로 이어졌다. 그러니까 현대차지부의 반응은 21세기판 러다이트로 비하될 게 아니라, 새로운 21세기판 러다이트 운동의 필요성을 알려주는 것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금속노조의 항변이 정당하더라도, 그리고 언론과 정부가 문제를 부당하게 단순화하는 게 잘못이라 하더라도, 질문은 남는다. 과연 로봇과 AI는 노동자와 일에 어떤 미래를 가져올 것이며 어떻게 받아들이거나 거부해야 할 것인가? 게다가, 기후변화를 포함하는 지구행성적 경계 돌파의 시대, 한계비용 제로의 시대, 그리고 극단적 불평등과 정치적 파편화의 시대에 노동은 어떤 모습이어야 할까? 그리고 노동조합과 사회운동은 신기술의 민주적이고 선택적인 도입을 요구하는 것으로 충분할까?

러다이트 논쟁을 넘어서

다시 아틀라스로 돌아가 보자. 이 휴머노이드 로봇은 두 다리로 인간처럼, 아니 인간보다 더 빨리 그리고 높이 뛰어오를 수 있다. 심지어 공중제비를 돌고 인간이 할 수 없는 각도와 속도로 관절을 움직일 수 있다. 하지만 아틀라스가 실제로 자동차 생산 공정에 얼마나 빨리 그리고 전면적으로 투입될 수 있을지는 불확실하다. 아니, 그렇게 인간 노동자의 자리에 아틀라스를 그대로 투입하는 게 경영자 측에서도 도움이 된다고 보기 어려운 면들도 있다.

인간의 형상이 왜 필요할까? 사진 출처: John Schaidler

어린 시절 보았던 많은 거대 로봇 만화영화들을 떠올려보자. ‘태권브이’의 머리에 우주선을 탑재하는 ‘철이’와 태권브이는 한 몸이다. 철이가 태권도의 동작을 하는 것을 따라 태권브이도 움직이는 것에 우리는 열광했지만, 한참 지나고 보니 좀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우주에서 싸우는 로봇이 인간을 닮는 게 효과적일까 하는 의문이었다. 작은 철인 ‘아톰’부터 ‘마징가Z’ 그리고 ‘건담’까지, 주로 일본에서 제작된 로봇 애니메이션들은 대부분 인간의 모습을 닮은 로봇이 등장한다. 그러나 우주 공간에서 인간의 형상이 빨리 날거나 광선 무기를 발사하거나 다른 우주선과 도킹하는 데에 도움이 될 리가 없다. 오히려 비효율적일 공산이 크다. 《스타워즈》에 나오는 사족보행 기갑 로봇이나 정비 로봇 ‘R2-D2’, 《월-E》의 쓰레기 수집 로봇처럼 기능에 최적화된 구조가 현실적이다. 우주에서의 생존을 위해서라면 《에일리언》의 외계 생명체 모습이 더 나을지 모른다. 여하튼 인간의 형상은 그다지 도움이 되는 구조가 아니다.

자동차 생산 현장도 마찬가지다. 인간의 형상이 왜 필요할까? 도리어 인간은 자동차 공장의 컨베이어 벨트 노동에 맞게 진화한 게 아니다. 30만 년 전쯤 출현한 현생 인류의 몸과 머리는 들판을 걷고 뛰고 사냥을 하고 채집을 하고 공예품을 만들면서 지금의 모습과 기능을 갖추었다. 원래 하루에 몇 시간씩 한 가지 일만을 하는 것은 인간과 거리가 멀다. 그러니 공장과 사무실에 붙들려 오랜 시간 부자연스러운 노동을 하는 인간은 근골격계, 소화기, 정신에 문제가 생기는 것이 당연하다. 인간 노동자들은 오랜 투쟁 끝에 ‘8시간 노동’을 쟁취했지만 그러나 하나의 직무에 고착된 노동은 인간의 몸과 마음에 잘 들어맞지 않는다. 그런 노동은 가급적 줄어드는 게 좋고 그래도 해야 하는 노동이라면 더 인간적인, 실은 자연 상태에 가까운 특질을 더 갖추도록 하는 게 좋다.

그런데 아틀라스는 굳이 인간을 흉내 내어 공장으로 들어가려 한다. 하지만 아틀라스의 개발자와 현대자동차 사측에서도 고민을 하고 타협을 하게 될 것 같다. 어차피 아틀라스는 특히 인간의 미묘하고 섬세한 손을 갖고 있지 않다. 대신 서너 개의 손가락과 관절이 있는 것인데, 이 손에 드라이버를 쥐게 하는 것보다는 차라리 드라이버를 로봇의 손목에 장착하는 게 나을 것이다. 그리고 자동차 차체 아래로 들어가서 부품을 장착하고 조이는 작업에 돌출한 머리는 거추장스러운 부위가 될 수도 있다. 요컨대 인간을 닮은 아틀라스의 구조는 생산 현장에서 최적이 아니다. 인간의 몸이 공장에서 최적이 아닌 이유와 같다.

실제로 지금 자동차 공장은 이미 프레스, 용접, 도장 등 주요 공정의 90%가 자동화, 즉 인간과 닮지 않았을 따름이지 로봇에 의해 이루어지고 있다. 아틀라스는 낭만과 기업 가치를 위해 인간의 형상을 발전시킨다. 물론 휴머노이드 로봇은 다른 용도들이 많으므로 계속 개발되고 더 인간을 닮아갈 것이다. 하지만 생산 공정에서의 적용을 과다하게 기대하거나 염려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오히려, 인간이 부자연스러운 노동을 하고 있었음을 환기하는 기회일 수도 있다.

인간의 몸과 공생공락의 노동

올더스 헉슬리(Aldous Huxley), 『멋진 신세계 Brave New World』, 샤토앤윈더스(Chatto & Windus), 1932. 초판본 표지, 사진 출처: wikipedia

아틀라스가 아니더라도 생산의 자동화는 상당히 진행되었다. 그리고 더욱 진척될 기계화, 전기화, AI의 활용은 현대자동차 공장뿐 아니라 법률, 의료, 프로그램 개발, 육체적이고 감정적인 서비스 노동을 더욱 대체하게 될 것이다. 인간은 원치 않은 노동의 고역으로부터 해방될 가능성이 늘어나겠지만, 가치있는 노동과 부는 더욱 소수의 인간에게 집중되고 나머지는 더욱 심한 결핍 상태에 내던져지는 잉여 인간이 될 것이라는 전망도 비등하다. 가속주의자들이 기대하는 ‘특이점’, 즉 기술과 인공지능이 발전이 인간에게 무한한 가능성을 열어줄 순간에 대한 기대가 있는가 하면, 『멋진 신세계』(1932)의 디스토피아가 오지 않을 것이라고 확신하기도 어렵다.

기술이 모든 것을 결정하는 미래는 없고, 알파고 이후에도 바둑은 계속된다. ‘전부 아니면 전무’ 방식의 접근이 아니라면 노동에도 다른 여러 미래가 열릴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로봇과 AI 도입 이전에, 자본주의가 강제하는 임금 노동과 생산 관계에서 우리가 어느 정도 자율성을 갖느냐에 달려 있다. 우리의 삶 중 10~20퍼센트라도 자본주의 노동과 권력 관계에서 자유로운 영역이 있다면 우리는 신기술 도입과 구조조정의 압력에 대해 그만큼의 상대적 교섭력과 상상력을 가질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이런 자유로운 영역은 기본소득과 기본 사회서비스 같은 제도의 도움으로 더 넓어질 수 있고 사람들에게 다 많은 선택지를 줄 수 있다.

우리가 속해 있는 노동 조직, 그리고 종사하는 노동은 더 인간화되고 더 민주화되는 게 바람직하다. 기술은 우리의 숙의와 투쟁을 통해 선별적으로 적용되어야 한다. 하지만 모두에게 그럴 수는 없을 것이다. 그리고, 노동 자체에 대한 의존 특히 자본주의 임금 노동에 대한 의존도 줄어드는 게 바람직하다. 우리는 더 적은 시간을 공장과 사무실에서 보내고 더 많은 시간을 동네의 문화센터와 도서관, 그리고 기후운동 모임에서 보내는 게 좋다. 그런 게 이반 일리치가 말한 공생공락(conviviality)이다. 우리는 자본주의 임금 노동으로부터 자유로운 만큼 로봇의 위협으로부터 자유롭다. 그럴 수 있다면 아틀라스가 우리 대신 더 고생하게 해도 괜찮을 것이고, 우리는 아틀라스에게 덜 생산하고 덜 폐기하고 너도 더 쉬라고 명령할 수 있을 것이다.

김현우

한국노동사회연구소, 민주노동당, 진보신당에서 활동했다. 에너지기후정책연구소에서 10년간 선임연구원으로 일하면서 에너지체제의 정의로운 전환과 에너지 민주주의를 연구했으며, 에너지 전환, 도시 정치, 대중교통, 거버넌스의 민주화 등에 관심을 갖고 글을 썼다. 지금은 탈핵신문 운영위원장으로 신문 발간을 돕고, 기후위기를 알리는 교육과 탈성장 연구에 주력하고 있다. 지은 책으로 『안토니오 그람시』, 『정의로운 전환』 등이 있고, 옮긴 책으로 『국가를 되찾자』, 『GDP의 정치학』, 『녹색 노동조합은 가능하다』, 『다른 세상을 위한 7가지 대안』(공역)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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