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케데헌》 열풍이 몰아친다
열기도 이런 열기가 없다. 가히 신드롬이다. 그냥 영화도 아니고 아이들이 주로 본다는 애니메이션 무비인데, 역대 모든 영화, 특히 넷플릭스 영화의 통계를 넘어섰다. 어지간한 나라별 넷플릭스 조회수는 모두 1위를 달리고 있고, 이 엄청난 인기로 인해 미국 일부 극장에서 개봉한 싱얼롱 상영관이 모두 매진될 정도이다.

사진 출처: RosZie
6월 20일 개봉하여 3개월이 지난 9월 14일 현재도 미국 빌보드 핫 100 차트에서 ‘골든(Golden)’이 1위이고, 영국의 오피셜 싱글 차트에서는 6주째 1위를 차지하고 있다. ‘유어 아이돌(Your Idol)’은 미국에서 4위, ‘소다팝(Soda Pop)’은 5위에 올라와 있고, 영국에서도 비슷하게 랭크되었다. 이 노래들은 각기 개성이 있으면서도 완성도가 높고 한번 들으면 빠져들 정도의 중독성이 있어 강력한 확산의 힘을 발휘하고 있다. 그러나 이 영화의 인기가 노래 때문만이 아님이 분명하다.
최근 시내에는 눈에 띄게 늘어난 외국인들로 종로와 북촌, 안국동 일대와 남산, 경복궁, 낙산 등지가 붐비고 있다. 국립중앙박물관은 연일 최대 관람객 수를 돌파하고 있고, 유튜브에는 헌트릭스와 사자보이즈를 따라하는 노래와 춤, 그리고 한국뿐만 아니라 세계의 유명 가수들이 스스로 가창력을 입증하는 곡으로 주제곡 ‘골든’을 부르는 행렬이 끝없이 이어지며 그 열기는 더욱 커지고 있다.
흥미로운 것은 이 영화를 바라보는 한국인과 서구인들의 차이다. 한국인들은 대체로 한국적 문화 고증과 특성 등, 내셔널리티에 주목하는 반면, 미국과 같은 영어권의 서구에서는 이 영화가 갖는 자기 긍정과 구원의 서사에 주목하는 듯하다. 그래서 외국에서는 이 영화가 갖는 자기 치유 효과로 여러 번 반복해서 눈물을 흘리며 보는 사람들이 많고, 상처 있는 많은 이에게 큰 감동을 주고 있다. 그래서 어린이뿐만 아니라 부모들도 즐겨 보게 되어 가족의 유대를 만드는 매개가 된다고 말하기도 한다.
본인은 이 영화를 통해 생태사회를 위한 두 가지 대립구조에 대해서만 언급하고자 한다.
타율적 의존과 자율적 각성의 대립구조
《케이팝 데몬헌터스》는 단순한 판타지 애니메이션을 넘어 현대 문명의 근본적 모순을 다루는 깊이 있는 작품이다. 작품은 두 가지 대립을 묘사하고 있다. 하나는 인간을 타율적·종속적 존재로 전락시키려는 악마들과, 진정한 자아를 깨닫고 내재된 불성을 실현하여 자율적 존재로 향하는 헌트릭스 간의 대립이다. 두 번째는, 나누고 구분하는 위계적 세계에 대항하여 연결하고 통합하는 평등의 사회를 만들려는 세력의 대립이다. 이러한 구조는 현대 사회의 물질주의적 유혹과 영적 각성 사이의 근본적 갈등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헌트릭스가 이루려는 세상은 ‘혼문이 완성된 세상’이다. 혼문이란 세상이 본래 촘촘히 나눌 수 없이 연결되어 의존하며, 그래서 서로 협력하고 돕는 모두가 평등한 공동체 회이다. 그러나 ‘혼문이 파괴된 세상’은 가르고 분열되고 나뉘어 서로 갈등하고 투쟁하는 세상이며, 수직적인 위계와 지배·종속의 세계이다. 헌트릭스는 바로 나뉘어 갈등하는 혼문이 파괴된 세상을 다시 이어 인간과 자연이 연결되어 상호의존하는 세상으로 혼문을 완성하려는 존재이다.
이 영화는 혼문을 완성하는 것, 즉 세상을 구원하는 것과 자신을 구원하는 것이 동일한 과정임을 말하고 있다. 나를 변화시키는 것과 세상을 변화시키는 것의 통일이다. 나아가 세상을 변화시키는 과정에서 자기가 변화되고 완성되는 것, 나아가 자기 깨달음을 얻는 과정이 세상을 바꾸는 과정과 분리되지 않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상구보리 하화중생(上求菩提 下化衆生)’, ‘좌구보리 우화중생(左求菩提 右化衆生)’인 것이다. 데몬들이 대표하는 것은 개인의 자율성을 박탈하고 끝없는 소비와 의존성으로 인간을 속박하려는 현대 자본주의 시스템의 어두운 면이다. 반면 헌트릭스는 상처와 아픔마저 자신의 일부로 받아들이며, 외부 의존 없이 스스로의 내재적 가치를 발견하는 자율적 존재의 모델을 제시한다. 이는 자력본원(自力本願) 사상과 현대 심리학의 자기실현 이론이 만나는 지점이다.
사자보이즈와 유어 아이돌: 우상의 유혹
사자보이즈가 부르는 ‘유어 아이돌’과 ‘소다팝’은 현대 소비주의 문화의 핵심 메커니즘을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그래, 나는 네가 필요한 전부야, 나는 너의 아이돌(우상)이 될 거야(Yeah, I’m all you need, I’ma be your idol)”라는 가사는 개인의 자율성을 박탈하고 외부 대상에 대한 절대적 의존을 조장한다. “너의 죄까지도 사랑할 사람은 나뿐이야(I’m the only one who’ll love your sins)”라는 구절은 특히 교묘하다. 진정한 자기 수용이 아닌, 철저한 종속을 통한 가짜 구원, 거짓 해방을 강요한다.
데몬들의 전략은 크게 세 가지이다. 첫째, 의존성을 조장한다: “아무도 널 구하러 오지 않아(No one is coming to save you), 이제 넌 내 거야(cause you’re mine now)”라며 개인의 자구력을 무력화한다. 소비주의사회가 개인의 창조성과 자급자족 능력을 약화시켜 시장 의존도를 높이는 전략과 일치한다.
둘째, 감각적 탐착의 자극이다. “내 황홀에 취해, 너는 눈을 뗄 수 없어(you can’t look away)”라고 말한다. 욕망과 욕구를 자극하는 현대의 광고와 SNS가 사용하는 주의력 경제(Attention Economy)의 핵심 메커니즘이다. 셋째, 거짓 구원의 약속이다. “내가 너의 피난처가 될 테니(I can be your sanctuary)”라며 진정한 내적 평안이 스스로가 아닌 외부 의존적 위안을 제공한다.
데몬들의 가장 큰 무기는 인간의 본래 욕구를 왜곡해 끝없는 집착과 욕망의 갈증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너의 집착이 우리의 연결을 강화시켜(Your obsession feeds our connection)”는 이러한 조작된 욕망의 본질을 보여준다. 이는 마르쿠제(Herbert Marcuse)가 말한 ‘허위 욕구(False Needs)’의 개념과 정확히 일치한다. 자본주의 시스템은 인간의 진정한 욕구 대신 시장에서 판매 가능한 상품으로 해결될 수 있는 인위적 욕구를 만들어낸다. 데몬들도 마찬가지로 인간의 본래 고유의 존재가치(불성)을 가리고, 외부 우상에 대한 의존성을 통해서만 해결될 수 있는 가짜 갈증을 조장한다. 이는 마라(魔羅)의 유혹과 동일한 구조다. 마라는 욕망 자체를 없애려 하지 않고 오히려 욕망을 영원히 충족되지 않도록 조작하여 끝없는 순환의 고리에 묶어두려 한다. 데몬들이 “영원히 너희를 불길 속에서” 지배하려 한다는 시작 부분의 라틴어 주문은 이러한 영원한 속박의 의지를 직접적으로 드러낸다. 귀마에게 사자보이즈는 아이돌을 조직하여 수만 명의 팬들이 동시에 넋을 잃고 욕망을 부추기는 행동을 하는 집단적 최면 상태, 즉 개별 의식을 완전히 소거하여 산업사회의 수동적 주체로 만들려는 계획인 것이다.
헌트릭스의 각성 : 자율적 존재로의 깨달음
헌트릭스의 영적 여정은 ‘골든’에서 ‘왓잇 사운즈 라이크(What It Sounds Like)’로 이어지는 과정에서 극명하게 드러난다. ‘골든’은 여전히 완전함에 대한 집착, 즉 ‘영원히 깨질 수 없는’ 상태에 대한 열망이다. 일종의 아집(我執)이자 법집(法執)이라고 할까? 그런데 ‘왓잇 사운즈 라이크’에서 헌트릭스는 근본적 전환을 이룬다. ‘산산이 부서져 조각조각 나 다시 이어 붙일 수 없지만, 그 수만 개의 조각난 유리 조각으로 모든 아름다움을 보고 있어’라는 경지는 화엄의 깨달음이자 불교의 공성(空性) 체험을 직접적으로 보여준다. 이는 서구 심리학의 ‘포스트 트라우매틱 성장(Post-Traumatic Growth)’ 이론과도 일치한다. 외상 경험을 통해 오히려 더 깊은 자기 이해와 의미를 발견하는 과정이다. 헌트릭스는 상처와 아픔을 숨기거나 극복해야 할 대상으로 보지 않고, 자신의 본질적 일부로 수용한다.

”나는 투명인간이었고 혼자였고, 내게 주어진 왕좌도 여왕이 될 운명이었는데 믿지 못했다”고 말한다. 동학에서 자기가 곧 하늘임을, 불교에서 스스로가 불성을 갖는 부처 될 존재임을 알지 못하고 낮은 자존감으로 “두 가지 인생을 살았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제 숨지 않아, 지금의 나는 빛나니까 이게 내 본모습이야(I’m done hidin’, now I’m shinin’ like I’m born to be)”라는 깨달음을 얻는다.
실제 루미는 자신이 혼혈이라 악귀의 문양을 갖고 태어났기 때문에 동료들에게 숨기고, 목욕탕마저 같이 가지 못하지만, 이제 “흉터조차도 나의 일부고 어둠과의 조화도 가능하다”고 외치며 당당히 자기 긍정을 만들어 나갔다. 세 명의 멤버들이 저마다의 상처를 갖고 있지만 “왓잇 사운즈 라이크”에서 자신의 수치와 약점을 그대로 받아들이면서도 당당히 극복해 낸다.
그래서 자기를 묶고 있는 의식의 감옥에서 벗어나 그 사슬을 끊고 “더 올라가 보는 거야. 함께라면 더 빛나는 거야. 금빛으로 빛날 거야(We’re goin’ up, up, up,…..You know together we’re glowing, Gonna be, gonna be golden)”, “깨어나 진짜 나로 느끼기까지 계속되는 고통은 과거에 남겨두고… 진짜 나로 살아가(To wake up and feel like me. Put these patterns all in the past now. And finally live like the girl they all see)”겠다고 말한다. 이런 깨달음은 외부 의존적이며 타율적인 정체성과 정반대의 자율적 자아실현이다.
흥미롭게도 헌트릭스의 개체적 각성은 고립된 개인주의로 귀결되지 않는다. “너의 내면을 보여줘, 너의 하모니를 찾아 줄게(Show me what’s underneath, I’ll find your harmony)”라는 가사는 진정한 자아실현이 타자와의 깊은 연결을 통해서만 가능함을 보여준다. 모든 존재는 독립적으로 존재하지 않고 상호 의존적 관계 속에서만 의미를 갖는다. 하지만 데몬들이 조장하는 의존성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데몬의 의존성이 일방적 복종과 자아 상실을 요구한다면, 헌트릭스는 상호의존성은 각자의 고유한 개성과 자율성을 전제로 한 진정한 만남이다. 또한 여기서 말하는 하모니는 단순히 음악적 조화를 넘어 우주적 조화, 화엄의 일즉다 다즉일(一卽多 多卽一) 사상을 구현한다. 하나의 개체가 전체를 담고 있고, 전체가 각 개체에 완전히 현현하는 상태다. 헌트릭스의 각 멤버는 고유한 개성을 잃지 않으면서도 더 큰 우주적 의식과 하나가 된다.
“우린 침묵을 부수고 당당히 일어서 조용히 외쳐 ‘넌 혼자가 아니야'”라는 메시지는 개인의 고통을 사회적 차원에서 함께 치유하려는 의지를 보여준다. 이는 현대 사회의 개인화된 고통이 실제로는 시스템적 문제에서 비롯되며, 집단적 각성을 통해서만 근본적 해결이 가능함을 암시한다.
무한성장의 욕망에서 성찰적 주체성의 회복
데몬헌터스가 이루려는 사명은 혼문(魂門)을 완성하고 지키는 것이다. 혼문이란 우주와 사회의 연결성과 조화, 균형을 의미한다. 혼문을 깨는 것은 연결된 사회를 가르고 나누고 쪼개는 일이다.
지금 우리는 세계가 나누어져 있고 갈라져 있다고 생각하고 “네가 죽든 말든 나는 관계없다. 생명이 죽고 아마존의 밀림이 파괴되든, 바다의 생명이 죽든 말든 나는 상관없다”고 생각한다. 위계적 사회에서는 위로 올라가는 것이 성공이다. 내가 올라가려면 너를 밟고 올라가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렇게 경쟁과 대립과 갈등과 전쟁의 시작이다. 그 시작은 바로 “관계없다. 상관 없다”는 생각, 너와 내가 구분되고 분리되어 있다는 곳에서 시작된다. 모든 사회적 고통은 이렇게 갈라져 있다는 집단적 관념이 그 출발이다. 세상은 본래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수많은 자연적 사회적 고통은 곧 나의 고통과 아픔과 연결되어 있다.
이렇게 갈라지고 나눠진 혼문이 깨어져 버린 사회를, 다시 연결되어 서로 협력하는 사회적 질서, 혼문을 닫는 사회로 가야 한다.
그동안 나눠진 사회에서 경쟁과 대립은 곧 성장과 팽창, 확대를 위한 행위였다. 바로 이러한 남성적 질서가 바로 기후위기와 생명 위기를 초래한 원인이었다. 그러나 이를 구원할 새로운 질서는, 연결하고 과정을 소중히 생각하고 관계를 잘 만들어가는 순환적인 여성적 질서로의 전환이다. 그래서 혼문을 완성하는 데 이 영화에서 전통적으로 샤먼인 무당이 그 역할을 했고, 그 정동적 음악인 율려(律呂)’를 위해 여성 전사들이 주인공이 된 것은 각별한 의미를 갖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