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남방큰돌고래 생태법인화 운동의 가치와 한계 ―깊은 문화적 치유로 이어지는 자연의 권리 운동을 생각하며①

2023년 11월, 제주도는 제주남방큰돌고래를 대상으로 국내 1호의 생태법인을 창설하겠다고 공표했다. 어떤 자연물의 법적 권리를 인정한다는 것은 그 자연물을 충분히 존중한다는 것과 같은 것인가, 다른 것인가? 법이 충돌하는 이익 주체의 갈등을 해소하는 최종적인 판단 주체가 되는 사회에서는, 어떤 자연물을 존중하는 방법으로 그 법적 권리를 인정하는 것이 최선의 방법일까? 생태법인화 운동의 가치와 한계를 ’자연의 권리운동‘의 측면에서 살펴본다.

1-1 제주남방큰돌고래 생태법인화 운동의 가치

제주남방큰돌고래 서식지를 보호구역으로 지정하라!는 이 글을 쓰는 지금, ‘캠페인즈’라는 사이트에서 제주남방큰돌고래 서식지를 해양보호구역1으로 지정하자고 촉구하는 서명 운동이 진행되고 있다. 해양다큐멘터리 감독 돌핀맨, 핫핑크돌핀스, 해양동물생태보전연구소(MARC), 제주 돌고래 서포터즈가 이 캠페인을 주도하고 있다. 서명수는 아직 적지만 이 동물에 대한 사회적 관심의 폭은 꽤 넓다. 갓난 남방큰돌고래들이 작년부터 지금까지 일곱이나 죽었다는 뉴스가 최근 보도되어 많은 이들을 심란하게 했다.

사회적 관심이라고 했지만, 편차는 있을 것이다. 어떤 사람은 그저 이들의 모습을 현장에서 관찰하고 싶은 욕망이 강할 뿐일 수도 있고, 어떤 사람은 이들이 고통받지 않고 살아가도록 인간의 부당한 개입을 차단하고 싶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전자라 하더라도 꼬리가 잘린 ‘오래’(꼬리 없는 녀석의 이름)의 모습이나 낚싯줄에 주둥이가 걸린 채 돌아다니는 아기 돌고래 ‘종달이’의 모습을 직접 눈으로 보게 된다면, 생각이 사뭇 달라지지 않을까.

제주 바다를 돌고래를 위한 해양보호구역으로 지정하자는 운동이 일어나고 있다. 사진 출처 : YHBae

한국 사회가 이 동물들에게 관심을 보이는 건 어찌보면 당연하다. 제주 앞바다가 제주도(민)의 것인지, 한국(인)의 것인지는 의문의 여지가 있지만, 제주도 연안을 서식지로 삼는 이 동물들에게 악하고 선한 영향을 끼칠 수 있는 이들은 한국 거주민이기 때문이다. 정반대로 이들이 살아가는 모습에서 위안이나 즐거움을 가장 많이 받을 이들 역시 한국 거주민이다. 만일 한국사회 구성원을 묶어 ‘우리’라고 부를 수 있다면, 우리는 우리의 이웃 동물인 이들에게 관심을 기울여야 마땅하다. 게다가 제주남방큰돌고래는 국제 보호종 돌고래이기까지 하다. 동시에 이들은 제주 바다의 환경 상태가 어떤지를 말해주는 ‘핵심종’, ‘지표종’으로 지정되어 있다. 2012년 이들을 해양보호생물로 정한 정부 역시 표면적으로는 이 점을 인정하고 있다.

문제는 당위와 현실 사이에 있는 커다란 간극이다. 이들의 삶을 보호해야 한다는 사회의 의식과 감성은 높지만, 다른 한편으로 이들의 삶을 여전히 해치고 있는 어업이나 관광업, 또는 풍력해상발전 사업 등에 대한 제도적 규제는 거의 없다시피 하다. 기후위기 대응과 비슷한 꼴이라고 해도 무방할 것이다. 어떤 행동이 바람직하다는 사회적 인식은 있으나 정작 결행은 계속 유보되는 형국.

왜 그럴까? 여러 이유 중 한 가지는 굳어진 생각, 감성, 행태의 관성이다. ‘문명적 관성’이라고 할까, 미시적 차원의 행위 선택을 좌우하는 이 무서운 관성은 경제 이익을 증대해 온 역사와 끈끈히 얽혀 있다. 그러니까 경제 이익 증대라는 결과물과 문명적 관성은 합체되어 있다. 후자가 전자를 키우고, 커진 전자는 후자를 더 굳힌다.

그러니 경제적 이익을 부분적으로나마 포기하더라도 다른 생물종과 행복하게 공존하는 새로운 삶으로 나아가려면, 기존의 문명적 관성의 해체와 재구성이 반드시 수반되어야 한다. 문명적 관성의 해체는 어떻게 가능할까? 인간사회에 이미 틈입해 있고 인간사회와 병존할 수밖에 없는 다른 생물들을 그 전과는 다르게 보는 시선의 확보, 그들과 다른 방식으로 관계 맺는 새로운 삶에의 적응이 긴요하다. 그리고 이와 같은 변화를 지칭하는 용어로는 토마스 베리Thomas Berry가 언급한 ‘깊은 문화적 치유a deep cultural therapy’라는 말이 적합할 것이다.2 그러니까 깊은 차원의 문화적 치유가 시행되지 않는 한 남방큰돌고래를 진정으로 보호하며 그들과 공존하는 삶의 시작도 요원할 것이다.

1-2 제주남방큰돌고래 보호 방법생태법인, 생태후견인 설립 운동의 흐름

당위와 현실 사이의 간극이 큰 상황에서 제주도가 제주남방큰돌고래의 생태법인legal personhood 제도화를 위해 나서고 있다는 점은 퍽 고무적이다. 2023년 11월, 제주도는 제주남방큰돌고래를 대상으로 국내 1호의 생태법인을 창설하겠다고 공표했다. 도의 후원 속에서 생태법인 제도화 워킹그룹(위원장: 최재천 이화여대 석좌교수)이 구성되었는데, 이 그룹에서 도출된 안은 크게 두 가지이다. 하나는 제주특별법에 “제주남방큰돌고래 종의 법인격 부여 조항”을 넣는 안이다. 또 하나는 “생태법인 창설 특례 조항”을 집어넣는 안이다. 여기서 후자는 도지사가 도의회의 동의를 받아 이 돌고래 종을 생태법인으로 설립하는 방안이다. 제주도는 이 두 안 가운데 하나를 제주특별법에 반영하도록 국회에 요청해 법안을 발의하고, 늦어도 2025년에는 이들을 생태법인 1호로 지정한다는 계획이라고 한다.3

우리는 어떻게 고래의 권리와 이익을 보호할 수 있을까? 사진출처: joakant

그렇다면 이제 막 임기를 시작한 22대 국회가 관련 법안을 발의하기만을 기다리면 되는 것일까? 2024년 5월 24일 제주도의회에서 열린 한 정책토론회에서는, 국회만 바라보지 말고 당장 할 수 있는 행동을 실행해서 생태법인 설립에 우호적인 사회적 분위기를 만들어내자는 제안이 나왔다. 제안자인 강원대 박태현 교수는 가칭 「제주 남방큰돌고래의 상징종 지정 및 생태후견인 설립에 관한 조례」를 제정하자고 하였다. 이 제안의 근거로 그는 지방자치단체가 “해당 지역을 대표할 수 있는 중요 해양생물을 해당 지방자치단체의 상징종象徵種으로 지정하여 이를 보전 활용”할 수 있게 한 해양생태계법 제55조를 들었다. 바로 이 법 조항에 의거해 제주남방큰돌고래를 제주도의 상징종으로 지정하고 이 동물을 보전하는 내용의 조례를 제정하자는 제안이다.4 이 조례안에서 정작 중요한 것은 ‘생태후견인’을 설립하자는 것으로, 구체적으로는 “정부 및 지자체와 관련 전문가 및 환경보전시민단체 그리고 지역주민 등으로 구성되는 위원회”를 설치하자는 것이다. 이 ‘후견인-위원회’는 당연히 남방큰돌고래의 이익을 대표하기 위한 적절한 권한과 의무를 져야 할 것이다. 제안자는 생태후견인의 역할로 다음을 특정했다. “◎서식지 보호·보전을 포함하여 남방큰돌고래의 권리를 보호·보장하기 위한 법과 정책 및 제도(프로그램)제안(건의)◎어업이나 관광 등을 포함하여 남방큰돌고래의 권리에 부정적 영향을 미치는 법과 정책 및 제도(프로그램,개발사업) 등에 관한 의견 표명 ◎과학적 조사연구(모니터링)◎그 밖에 남방큰돌고래의 권리와 이익을 보호하기 위한 필요한 행위.”5

이 조례 제정 운동은 그 결과와 무관하게 남방큰돌고래 생태법인화를 추진하는 사회적 힘을 강화한다는 지점에서 소중하다. 그러나 이 운동의 참 가치는, 그 사회적 힘을 강화하는 과정에서 참여자들과 주변자들의 ‘깊은 문화적 치유’가 대동될 가능성에 있다.

제돌이, 춘삼이, 삼팔이와 그 친구들, 자식들을 어떻게 보호할 수 있을까? 그들도 잘 살고 우리도 잘 사는 새 길을 어떻게 열 수 있을까? 관건은 당위와 현실의 간극을 좁히는 것이다. 제주남방큰돌고래 생태법인화 운동은 자연(물)의 권리를 침해하는 것을 당연시 해온 현실의 흐름(A)과 이제는 자연(물)의 권리를 인정하면서 인간의 권리도 찾아야 한다는 당위의 흐름(B)이 충돌하고 있는 작금의 상황에서, 흐름 B가 흐름 A를 일시적으로나마 압도함으로써 당위와 현실의 간극이 실제로 좁혀질 수 있음을 만인에게 알리는 계기가 될 수 있다는 점에서 소중하다.

2-1. 어떤 자연()의 권리를 인정할 것인가?

이 지점에서 나는 조금 결이 다른 이야기를 해보고자 한다. 제주남방큰돌고래를 제주도의 상징종으로 지정하고 생태법인으로 설립하는 일은 소중하고 가치 있는 일임에 틀림없다. 그런데 이 일이 유의미하게 추진될 수 있었던 것은 제주도라는 지방정부 권력이 이 일의 주체로서 나섰기 때문이라는 점을 생각해 보아야 한다. 그렇다면 제주도는 어떻게 해서 이 일의 주체로 나설 수 있었을까?

우선 환기해 볼 만한 것은, 지난 10여 년간 대도시의 수족관에 감금되어 있던 돌고래들이 바다에 방류되는 기적 같은 사건들이 국내에서 일어났다는 역사적 사실이다. 제돌, 춘삼, 삼팔, 태산, 복순, 금등, 대포, 비봉이 등 제주남방큰돌고래들이 수족관에서 줄줄이 해방된 사건은 감동 그 자체였다. 특히 춘삼, 삼팔, 복순이는 바다로 돌아온 후 아기까지 낳아 기르고 있는데, 이것은 세계 최초라고 한다. 이런 흐름이 이 돌고래들에 대한 사회적 공감대를 넓힌 기본적인 이유가 될 것이다.

다른 하나의 사건은, 세간에서 화제작으로 떠올랐던 TV 드라마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에서 제주남방큰돌고래가 등장하면서 사회적 공감의 폭이 크게 증대한 일이다. 이 드라마의 시청자와 주변자들은 드라마를 시청하고 피드백을 나누는 과정에서 앞서 언급된 모종의 ‘깊은 문화적 치유’를 경험했다고 볼 수 있지 않을까.

그러나 이보다 더 근원적으로 작동한 것은, 돌고래가 고지능을 보유한 포유류라는 상식이다. 돌고래가 매력적인 것은, 인간과 같은 포유류인 데다 협동이나 놀이같은 고등동물로서의 행동 방식이 우리에게 친근하게 다가오기 때문이다. 그러면서도 ‘바다’라고 하는 상대적인 외계를 삶의 무대 삼아 살아가는 이들이다. 이 양자의 조합에서 발생하는 ‘낯선 친근함’이라는 묘한 감정이야말로 우리가 그들에게 매혹되는 까닭이다. 그들은 우리와 비슷한 생물계의 친족이다. 그러나 그들의 경험 세계에 우리는 절대로 접근할 수 없다. 즉, 그들은 ‘가까이 있는, 눈에 보이는 에이리언(alien)’이다. 또는 어느 정도는 친숙하게 알고 있지만, 절대로는 전부를 알지 못하는 어떤 존재를 상징하는 결정적인 숨탄것6이다. 그들은 인간만큼이나 신비롭다. 인간 세상 밖에도 인간만큼이나 복잡한 생물의 신비로움이 실재함을 보여주는 눈에 띄는 실물이다. 우리가 그들이 헤엄치고 뛰어오르고 즐기고 이야기 나누는 광경을 봐야 하는 이유는 바로 이것이다.

마지막으로, 제주도가 이 일의 주체로 나선 데에는, 자연의 권리를 법으로 인정하는 세계적인 법 개정의 흐름도 하나의 자극제로서 작용했을 것이라고 짐작된다. 대중에게는 널리 알려지지 않았지만, 관심 가진 법조인들 사이에서는 에콰도르, 볼리비아, 콜롬비아, 파나마, 뉴질랜드, 인도, 미국과 캐나다의 지방정부, 우간다, 스페인 등의 사례가 이미 알려져 있다.

이렇게 보면, 제주도라는 지방정부 권력이 이 동물의 보호와 보전 문제에 관심을 기울이기에 충분한 사회적 조건이 형성되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새로운, 언뜻 듣기에는 기이한 질문을 던져보자. 제주남방큰돌고래는 정말로 보호해야 하는 동물, 그 삶의 권리를 보장해야 하는 동물인가? 어떻게 보면 제주남방큰돌고래는 운 좋은 녀석들이다. 제주 앞바다에 서식하는 숱한 다른 동물들을 생각해보라. 바다거북, 나팔고둥, 비단가리비, 오분자기, 군소 같은 녀석들 말이다. 전복, 소라, 보라성게, 곰치, 산호 같은 이들은 어떤가. 왜 이들은 배제되고, 오직 한 종만이 선택되어야 한단 말인가. 제주남방큰돌고래에 대한 폭넓은 사회적 관심과 공감대는, 뒤집어서 생각하면, 고등동물로 여겨지지 않거나 포유류조차 아닌 집단의 동물, 인간에게 호감과 신비감을 주는 동물이 아닌 동물, 나아가 다른 자연물의 경우, 세인世人의 관심과 공감대가 크게 좁아질 수 있음을 시사한다. 그러나 그 좁아짐은 과연 온당한 것일까?

제주남방큰돌고래를 보호하는 일은 옳고 필요하다. 그러나 동시에 제주남방큰돌고래만을, 이 생물종만을 콕 집어서 특별히 보호해야 할 이유는 없다. 어떤 동물을 보호해야 한다고 할 때, 우리는 어떤 동물종과 동물개체를 어떤 이유에서 보호해야 하는 것일까?

이러한 언명은 우리에게 하나의 골치 아픈 질문거리를 제공한다. 그것은, 어떤 자연물까지 그 권리를 (법으로) 인정해야 하는가라는 무거운 질문이다. 이 질문을 좀 더 구체적으로 바꾸어보면 이렇게 된다─만일 동물의 권리를 인정할 수 있다면, 대체 어떤 동물까지 그 권리를 인정해야 할까? 신경계를 갖춘 동물은 쾌고감수능력(sentience)이 있을 것이라 가정하는 것이 맞으므로, 신경계를 갖춘 동물까지는 그 권리를 인정해야 할까? 자연의 권리를 인정한다고 할 때, 그 자연에는 식물이 포함되어야 하나, 아니어야 하나? 풀과 나무 말고 지의류와 이끼는 어떨까? 생물계의 다른 멤버들, 즉 원생생물과 세균, 균류는 정말로 배제되어도 되는 걸까? 자연의 권리 운동에서 ‘자연’은 생물 개체, 생물종, 생태계 등의 자연물(natural entity)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집, 옷 같은 인공물의 경우, 존중의 대상에서 제외되어도 되는 걸까?

2-2 토마스 베리의 생각과 빈 곳

이렇게 펼쳐지는 이 질문 앞에 어떤 대답이 나올 수 있을까? 2006년에 출간된 《황혼의 사색Evening Thought》에서 토마스 베리는 아래와 같이 정리된 답변을 제출한 바 있다. 그가 정리한 「법률 개정을 위한 10대 원칙Ten Principles for Jurisprudence Revision」에 따르면, (법적) 권리는 ‘존재하고 있음’ 자체에서 나온다. 지구 공동체의 구성인자 모두(every component of the Earth community)가 지금 존재하고 있고, 따라서 (법률상의) 권리를 지닌다. 그 권리는 크게 세 가지로서 존재할 권리, 어떤 장소에서 존재할 권리, 지구 공동체의 부단한 갱신 과정에서 제 역할을 충분히 수행할 권리를 뜻한다. 물론, 이 구성인자에는 비생물 존재(흔히 무생물, 무기체라고 표현된다)도 포함된다.7

여기서 중요한 점은, 권리권자로서 인간에 의해 존중되어야 하는 지구상의 물질/물체로 ‘지구 공동체의 구성인자 모두’가 제시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하지만 지구 공동체를 구성하고 있는 인자-요소에는 수소와 탄소, 산소의 원자, 금, 은, 다이아몬드 같은 광물의 원자, 석유를 구성하는 탄소분자, 석유의 변형물, 물 분자, 기체분자, 세포를 구성하는 유기분자와 비유기물질, 다세포 생물 등 실로 다채로운 것들이 포함된다. 그렇다면, 원자나 분자 수준의 자연물에게도 법적 권리가 부여되는 것이 맞다는 말일까?

토머스 베리 저작 『황혼의 사색』

토마스 베리는 강이나 산 같은, 인류문화사에서 존중감과 경외감을 불러일으켜왔던 자연군집물이나 그 자연군집물 내의 생물과 생물종을 언급하곤 한다. 하지만 원자나 분자 수준의 자연물, 그리고 그것의 비교적 단순한 합성물인 돌이나 물은 언급하지 않는다. 의자나 종이, 옷, 컴퓨터, 집 같은 비유기체(유기체적인 성격을 잃어버렸거나 지니고 있지 않은) 인공물들 역시 이 구성인자의 사례로서는 언급하지 않는다. 이것은 한편으로는 자연스럽게 이해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서는 고개가 갸우뚱해지는 대목이다. 한편으로는 자연스럽게 이해되는 것은, 자기 존속, 자기실현이라는 이익에서 해를 입고 있는 자연물들을 보호하기 위해서 그들의 권리가 생각되고 논의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토마스 베리가 ‘지구 공동체의 구성인자 모두’라고 말해두고는 강이나 산 같은 특정 자연물에 국한해서 그 사례를 들었던 것은, 그 자연물이 특정한 해를 입고 있는 상황을 염두에 두었기 때문일 것이다. 마찬가지로, 뉴질랜드의 마오리족에게는 황거누이 강이 특정한 피해를 겪지 않게 할 필요가 있었고, 그렇기에 이 강의 권리를 요구할 이유가 발생될 수 있었다. 이런 점을 생각해보면, 토마스 베리의 언술 방식은 충분히 이해할 만한 것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원자나 분자 단위의 자연물, 예컨대 기체분자나 물 분자의 자기존속/자기실현 방식은, 토마스 베리가 언급한 세 권리 개념쌍의 내용, 즉 존재하고 있고, 어떤 장소에서 존재하고 있으며, 지구 공동체의 부단한 갱신 과정에서 제 역할을 충분히 수행한다는 것과 썩 잘 부합한다는 사실도 생각해봐야 한다. 아니, 기체분자나 물분자는 제주도민이나 제주남방큰돌고래만큼이나 지구 공동체의 부단한 갱신 과정에서 생태적으로 중요한 자기의 역할을 수행하는 존재자들이다. 면 소재 옷과 종이 같은, 화석연료 기반 기술문명이 출현하기 이전부터 존재해왔고, 비교적 단순한 형태의 분자결합물인 인공물들 역시 특정 장소를 점유하며 존재하고 있고, 연소되거나 마모되는 방식으로 그 몸(body)이 해체될 때 지구 공동체의 갱신 과정에서 일정하게 긍정적인 역할을 수행한다. 그렇다면 만일 지구 공동체의 구성 인자 모두가 존재할 권리를 지닌다면, 이들 역시 그렇다고 말해야 하지 않을까?

그러나 종이와 옷의 권리, 물과 질소와 산소와 탄소의 권리라는 개념은 부당하다는 느낌을 준다. 그건 무엇보다도 권리라는 법적 개념 자체가 (개인의)이익과 피해(이익침손)라는 틀 안에서 유의미한 것으로 생각되기 때문이다. 법적 판단이 필요한 상황에서 어떤 이익을 침해받은 자는 권리의 보유자로, 그 이익을 침해한 자는 그 침해를 보상할 의무를 진 자로 간주된다. 즉, 이익과 피해가 존재하는 상황에서 한쪽은 권리를, 한쪽은 의무를 지니게 된다. 하지만 어느 개인이 종이나 옷 같은 어떤 사물을 사용할 때, 그리고 그것을 사용하면 그만인 사물로만 간주할 때, 그 개인을 가해자로, 종이나 옷을 피해자로 간주하기는 어렵다. 물과 질소와 산소의 경우도, 그것들이 자기존속/자기실현의 이익을 가진다고는 생각할 수 있지만, 인간이 물을 마시거나 사용할 때 물의 이익을 침해하고 있다고는, 산소를 들이쉴 때, 그 기체분자의 자기존속/자기실현 이익을 침해하고 있다고는 생각하기 어렵다.8

문제는 종이와 옷을, 물과 기체를 특정한 법적 권리 보유자로 여길 이유나 필요는 없다 해도, 이것들 역시 호모 사피엔스만큼이나 “존재하고 있고, 어떤 장소에서 존재하고 있으며, 지구 공동체의 부단한 갱신 과정에서 제 역할을 충분히 수행하고 있는” 존재들로서 인간으로부터 충분히 존중받을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이 지점에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일련의 질문들과 만나게 된다. 어떤 자연물의 법적 권리를 인정한다는 것은, 정확히 무엇을 뜻하는 걸까? 그것은 어떤 자연물을 충분히 존중한다는 것과 같은 것인가, 다른 것인가? 어떤 자연물을 존중하는 방법으로는, 법이 충돌하는 이익 주체의 갈등을 해소하는 최종적인 판단 주체가 되는 사회에서는, 그 자연물의 법적 권리를 인정하는 것이 최선의 방법인 것일까? 아니면 그 밖에 다른 방법도 있는 것일까?

-다음에 계속


  1. ‘해양보호구역’은 특별히 보존할 가치가 있는 특정 공유수면의 해양생태계와 해양생물 등을 국가나 지자체가 지정하고 관리하는 구역(해양생태계법 제2조 제14호)이다. 글로벌해양조약이 2023년 3월 UN에서 합의되었는데, 그 내용은 2030년까지 지구 공해公海의 30% 이상을 보호구역으로 지정하자는 것이다. 한국은 이 조약에 서명했지만, 국내 비준 절차가 남아 있다. 현재 한국의 해양보호구역은 1.8%에 불과하다.

  2. Thomas Berry, Evening Thought, Counterpoint, 2006, 17.

  3. 허호준 기자, 「제주 남방큰돌고래에 ‘인격체’를…국내 1호 생태법인 추진」, 한겨레신문, 2023. 11. 13.

  4. 「남방큰돌고래 생태후견인 제도설계방안을 위한 정책토론회」 토론자료집. (2024. 5. 24.) 그는 이 조례 안에 남방큰돌고래의 권리가 선언되어야 한다고도 제안했는데, 그 내용을 다음과 같이 제시하기도 했다. “▲남방큰돌고래는 개체로서 또한 종種으로서 존재하고 번영하며 자연 상태에서 진화할 권리를 가진다. ▲남방큰돌고래는 자연환경에서 이동하고 거주할 자유를 권리로 가진다. ▲남방큰돌고래는 자신들의 자연환경을 보호받을 권리를 가진다. ▲남방큰돌고래는 자신들의 문화가 파괴되지 아니할 권리를 가진다. ▲이 조례에 따른 권리와 자유는 적용 가능한 관련 국제법과 국내법에 따라 보호되어야 한다. ▲국가와 지방자치단체, 기업,개인 및 단체 등은 이러한 권리와 자유 및 관련 규범을 침해하는 행위를 하거나 관여하여서는 아니된다.” 어느 것 하나 뺄 것 없는 소중한 문구들이다.

  5. 같은 토론자료집.

  6. 살아 있는 유기체를 뜻하는 조선말.

  7. Thomas Berry, Evening Thought, Counterpoint, 2006, 149.

  8. “인간이 물을 마신다”, “산소를 들이쉰다”는 것도 인간을 중심에 둔 사고방식에서만 가능한, 어설프고 어리숙한 표현일 뿐이다. 물의 입장에서는 인간은 자신의 이동 통로이고 이동을 위한 도구일 뿐이고, 산소의 입장에서 인간은 자기존속/자기실현에 필요한 하나의 도구-생물체일 뿐이다.

이 글은 동물권연구변호사단체PNR의 연구지 《동물권리와 법》 2024-1호에 실린 바 있으며, 저작권자의 동의를 얻어 《생태적지혜》에 재개재한다.

우석영

철학자. 작가. 탈근대전환 연구자.
출판 & 연구 공동체 산현재 대표.
생태적지혜연구소 학술위원.
생태문명원. 동물권연구변호사단체 PNR 등에서 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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