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살려면, 인간의 물러섬이 필요하다: 자연의 권리를 인정한다는 것, 그리고 자연의 권리 운동을 한다는 것을 무엇을 뜻하는가?
자연의 권리를 (법으로) 인정한다는 것은 무엇을 뜻할까? 스페인의 어떤 판결은 이 질문을 해결하는 데 도움이 된다. 2022년 말, 스페인은 유럽 최초로 자연의 권리 법안을 입법했다. 마르 메노르(Mar Menor) 석호潟湖1 를 법인화한 것이다. 이 법에서 눈길을 끄는 문장이 있다.
“마르 메노르를 지배하는 것은, 하나의 석호 생태계이자 그 유역에서의 하나의 육지 생태계로서 그것이 존재하도록 하는 생태적인 법 또는 자연의 질서이다. 존재할 권리란 바로 이 생태적 법을 존중한다는 것을, 주로 높은 지대로부터 오는, 인간에 의한 압력에서 비롯되는 부조화에 직면한 해당 생태계의 균형 및 조정 능력이 유지되도록 확실히 한다는 것을 뜻한다.”2

이 문구는 ‘마르 메노르를 지배하는 생태적 법을 존중하는 것이 곧 마르 메노르의 존재할 권리를 인정하는 것’이라고 정리하고 있다. 어떤 자연물을 존중하는 것과, 그 자연물을 지배하는 더 큰 자연의 질서인 생태적 법을 존중하는 것은 분명 다르다. 북한산을 존중한다는 말과, 북한산 생태계를 지배하는 생태적 질서를 존중한다는 말에는, 뉘앙스의 차이가 있다. 후자의 언명에는 북한산이라는 생태적 복합물의 물리적 질서를 실제로 어떻게 보호하고 존중할 것인가에 관한 구체적인 관심과 염려가 깃들어 있다. 마르 메노르처럼 북한산 역시 하나의 생태적 단위체(entity)라고 볼 수 있지만, 동시에 그것은 외부 생태계와 물질과 에너지의 교환이 가능한 열린계(open system)이며, 동시에 자기 안에 무수한 생물 및 비생물 단위체를 포함·포섭하고 있는 복잡계이기도 하다. 북한산이 제 존재를 존속하려면, 외부와의 교환이 순조로워야 할 뿐만 아니라 내부에서 발생된 교란 요소의 영향력이 전체를 교란할 정도로 크지 않아야만 한다. 그러니까 북한산이 존재할 법적 권리를 보장하기 위해 애쓰는 사람이 있다면, 그이는 북한산이 존재를 지속한다는 것이 무엇인지부터 알아야 하고, 그것을 알려는 사람은 반드시 북한산 외부와 내부를 관통하며 생태적 균형을 유지하는 질서(생태적 법)의 보존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을 수 없다. 이것은 곧, 어떤 자연의 법적 권리를 인정한다는 것이 그 자연의 존속 방식에 관한 구체적인 이해, 곧 그 존속 방식을 존중할 길에 관한 구체적인 고민 없이는 아무런 의미도 없는 것임을 시사한다. 어떤 자연의 법적 권리를 인정한다는 뜻은, 그 자연이 실제로 자기존속을 하는 방식을 이해하고, 그 이해에 기초한 자기존속 방식을 충분히 존중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결론 역시 충분치 않다. 예를 들어, 북한산의 법적 권리를 인정하려는 사람들-그러니까 북한산의 자기존속 방식을 존중하려는 사람들이 있다고 가정해보자. 이 집단 안에서도 서로 다른 관점이 얼마든지 충돌할 수 있다. 어떤 이는 (북한산의 존속 방식에 대한 이해에 기초하여 제정한 법률 개정을 통한) 북한산 생태계 보호에는 동의하지만, 북한산을 비롯한 모든 자연물의 내재가치(intrinsic value)를 인정하는 방식의 법체계 전환에는 반대할 수 있다. 반면, 어떤 이는 모든 자연물의 내재가치를 인정하는 것이 옳으므로 북한산의 권리 또한 같은 맥락에서 인정할 수 있다는 생각을 고수하며, “인간과 비인간 자연 간의 이익 균형을 근본적으로 재구상”3 하는 식의, 존재론의 전환을 수반한 법체계 전환을 주장할 수도 있을 것이다. 전자는 ‘전체의 전환’에 관심이 없지만, 후자는 그렇지 않다.
‘존재론의 전환’이란 정확히 무엇을 뜻하며, 이 전환에 대한 요구는 자연의 권리 담론과 어떻게 이어지는 것일까? 전환을 이야기하는 진영에서는, 비인간 자연/비인간 존재자 일반의 고유한 행위성, 자율성, 수행 능력, 결정 능력, 주체성을 이야기하곤 한다. 이러한 성질 혹은 능력을 지녔기에, 그 존재자들은 내재가치를 지닌다고 봐야 하고, 또 충분히 존중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기존의 인간중심적 관점을 전복한다. 즉, 비인간 자연 또는 비인간 존재자를 비활성적이며, 고유한 내적 능력을 결여하고 있고, 죽은 것이나 다름없는 수동적 객체, 인간이 소유하는 것이 당연한 인간의 소유물(재산)로 바라보는 관점을 전복하는 것이다. 이는 비인간 존재자에 관한 탈인간중심적 관점으로의 이동이 필요하다는 역설과 같다.
물론 자연의 권리 운동이 이러한 존재론 전환, 법체계 전환 운동으로, 나아가 존재론의 전환이나 법체계의 전환으로 이어질지 아닐지는 아무도 알 수 없다. 그러나 이러한 사고의 전환, 법체계의 전환으로 이어질 수 있는 하나의 물꼬이기에 자연의 권리 운동은 비로소 가치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제주남방큰돌고래를 생태법인으로 정하고 생태후견인을 만들자는 운동 역시 마찬가지이다. 이 운동 과정에서 정말로 중요한 것은 제주남방큰돌고래에게 법적 인격체(legal person)의 지위를 부여하는 것 자체는 아닐 것이다. 그러한 시원한 결론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 어떤 이유에서 그렇게 해야 하는가에 관한 사회적 토론과 합의를 생산하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그리고 이 생산 과정에서 고등 지능을 갖춘 포유동물에게만 법적 인격체의 지위를 부여해야 하는가, 아니면 그렇지 않은가, 또는 어떤 생물이나 생물종, 생태계든 그렇게 하는 것이 옳은가라는 주제가 반드시 토론의 테이블 위에 올라가야 한다.
4. 인간기술권 비대화의 시대, 자연의 권리 운동에 관한 새로운 규정
하지만 이 주제를 다룬 토론 과정에서 어떤 난제가 도출될지는 쉽게 예측할 수 있다. 가령, 유익균과 유해균을 모두 거느린 박테리아, 대기나 흙 어디에나, 심지어 인체 안에도 무수히 존재하는 박테리아의 법적 권리를 인정할 수 있을까? 식용 대상인 토마토나 배추, 벼의 법적 권리는 어떨까? 그 작물이 자라는 농지의 법적 권리는?
앞서도 암시했지만, 이러한 난제들은 단 하나의 결론으로 우리를 안내할 뿐이다. 그것은, 어떤 자연물을, 나아가 어떤 비인간 존재자를 존중하는 일은, 어떤 경우 해당 존재자의 법적 권리를 보장하는 것으로 가능하지만, 다른 경우는 가능하지 않다는 결론이다. 제주남방큰돌고래의 경우는 생태법인이나 생태후견인의 설립으로써 그들을 존중하는 길이 가능하다. 그러나 우리가 존중해야 마땅한 존재자는 제주남방큰돌고래나 그와 유사한 부류의 고등동물만은 아니다. 존중되어야 하는 존재자들의 목록에는 우리의 몸 안팎에 편재하는 박테리아, 우리의 입으로 들어가는 작물, 그것을 키워낸 농지도 포함되고, 심지어는 집이나 옷 같은 인공물 역시 포함되는 것이 옳다. 아니, 지구의 모든 생태적 과정이나 그것에 참여하는 행위자들 전체가, 심지어는 산소나 탄소 원자 하나하나도 존중되어야만 한다.

어째서 이렇게까지 말할 수 있단 말일까? 그것은 지금 거론한 존재자 모두가 “존재하고 있고, 어떤 장소에서 존재하고 있으며, 지구 공동체의 부단한 갱신 과정에서 제 역할을 충분히 수행하고 있는” 존재자들이기 때문만은 아니다. 그렇기도 하지만 동시에 기후재앙으로 치닫고 있는 오늘의 시대는 인간기술권(technosphere)4 이 급속히 비대해진 시대이며, 생물권에 기생한 채로 생물권의 안녕을 위협하고 있는 인간기술권 비대화 흐름을 멈추고 그 권역을 조정하려면, 그리하여 지구 평균온도를 낮추고 지구 기후 시스템을 재안정화하고 인류 자신을 포함한 생물종 멸종의 흐름을 막으려면 비인간 존재자 전체에 대한 존중이 반드시 요구되기 때문이다. 정반대로 말해, 비인간 존재자에 대한 존중이 결핍되었기에, 그들에 대한 무차별적인 착취와 지배가 끊임없이 지속될 수 있었고, 바로 그것을 기반으로 오늘의 인간기술권 비대화가 가능했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작금의 상황에서 긴요한 해법의 실마리는 비인간 존재자들을 새롭게 인식하고 새롭게 대우하는 것, 즉, 그들과 새로운 관계를 맺는 것이다.5
이런 맥락에서 자연의 권리 운동은 비대해진 인간의 영역을 줄여가는 운동, 비인간 존재자들과 새로운 관계를 맺는 운동, 우주 안에서 합당한 인간의 자리를 되찾는 운동으로 재규정할 필요가 있다. 자연의 권리 운동가인 케이시 캠프-호리넥(Casey Camp-Horinek)은 자연의 권리 운동이 법적 권리를 보유하게 되는 자연에 관한 운동이 아니라 인간 자신에 관한 운동이라는 점을 지적한다.
“우리 자신이 자연을 보호하는 강대한 보호자들이 아니라는 점을 인식하는 것이 중요하다. 우리는 자기를 보호하는 자연이다. 또한 우리가 자연에 권리를 주는 것이 아니다. 그 권리가 본래부터 그들의 권리임을 우리가 인식하는 것이다.”6
케이시는 인간의 인식 전환, 앎의 증대를 이야기하고 있다. 그에 따르면, 자연의 권리를 인정한다는 것은 그들이 본래부터 그러한 권리를 지닌 자들임을- 즉, 그들이 그 권리를 누리고 살아가는 것이 당연함을- 인간이 인식한다는 것을 뜻한다. 다시 말해 핵심은 인간이 생각을 바꾸는 것이다. 자연의 권리 운동은 인간의 생각 변화, 인간의(인식, 앎, 정신의) 진화에 관한 운동이라는 말이다.
물론 어떤 논자들은 이 점에 동의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인류세라는 난국에 빠진 오늘의 인간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인간 자신의 변화/진화라고, 오직 이것에 기여할 때만 자연의 권리에 관한 법 운동도 유의미하다고 생각한다. 제주남방큰돌고래 생태법인화 운동 역시 그 운동에 직간접으로 참여하는 이들의 (동물과 자연물에 대한) 정신적인 태도의 변화, 정서와 시선의 변화, 깊은 문화적 치유에 기여할 때만 가치 있다.
살기 위하여, 오늘의 인간은 나아가지 말고 물러서야 한다. 기어코 그런 시점에 우리는 도달하고야 말았다. 이제는 비대화를 멈추고 다이어트를 고민할 시간이다. 성장 대신 성장 없는 행복을, 덧셈의 문명 대신 뺄셈의 문명을, 노모스(Nomos: 도시, 인간계)의 확장 대신 노모스-퓌지스(Physis:자연)의 균형을 고민할 시간이다. 오래, 종달이, 제돌이, 춘삼이, 삼팔이와 그 친구들은 고마운 이들이다. 이들은 분명 우리를 이 물러섬의 새 길로 이끌고 있다.
-끝-
개펄호수. lagoon. ↩
Epstein et al., 「Science and the legal rights of nature」, Science 380, 2023, 3. 강조는 인용자. ↩
J. Michael Angstadt, Marion Hourdequin, 「Taking Stock of the Rights of Nature」, in Daniel P. Corrigan, Markku Oksanen (eds), Rights of Nature: A Re-examination, Earthscan, 2021, 15. ↩
‘기술권’이라고 흔히 번역된다. 약 30조 톤의 중량을 가지고 있으며, 인간, 농지, 농작물과 가축, 각종 기술인공물, 사회 시스템 등으로 구성된 (광물권, 대기권, 수권, 생물권과는 별도로, 그러나 그것들과 얽힌 채로 존재하는) 지구의 한 권역이다. 이 권역은 생물권의 한 파생물이지만 현재 생물권에 기생한 채로 생물권을 비롯하여 지구 시스템 전체를 변형하고 있다. 생물권에서 나온 인간 시스템이 만들어낸 기술 시스템이지만, 이 기술 시스템은 다시 인간 시스템을 강제하고 규제하고 부추겨 새로운 인간기술 시스템으로 진화하게 한다는 점에서, 인간 시스템과 기술 시스템의 공진화물이자 공진화 과정이라고 볼 수 있다. 인간기술권을 이야기하는 대표적인 논자는 지질학자인 피터 하프Peter K. Haff로 알려져 있다. 인간기술권에 관해서는 다음을 참고하라. Nathanael Wallenhorst & Christoph Wulf (eds), Handbook of Anthropocene, Springer, 2023; Erle C. Ellis, Anthropocene: A Very Short Introduction, Oxford UP, 2018; 줄리아 애드니 토머스 외, 박범순 · 김용진 옮김, 《인류세 책》, 이음, 2024. ↩
우석영, 「인류세의 비인간 돌봄」, 《기후 돌봄》, 산현글방, 2024, 128. ↩
Kylie Flanagan, Climate Resilience: How We Keep Each Other Safe, Care for Our Communities, and Fight Back Against Climate Change, North Atlantic Books, 2023, 4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