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록산책] ⑪ 잡초의 쓸모, 인간의 쓸모

한여름 농사는 풀과의 전쟁이라고 합니다. 연일 지속되는 극한 폭염 속 밭에서 치러지는 이 전쟁의 막강한 적군, 잡초. 심지 않아도 자라나고 돌보기는커녕 뽑고 갈아엎어도 끝없이 올라오는 잡초의 쓸모는 무엇일까요? 입장을 바꿔 만약 잡초가 지구 생태계 속에서 인간의 쓸모가 무엇이냐고 물어오면 뭐라 답할 수 있을까요?

여름은 옥수수의 계절이라고 생각합니다. 매년 여름이면 홍천의 작은 교회에 옥수수 수확을 도우러 갑니다. 톱날처럼 날카로운 옥수수 잎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얼굴에 옥수수망을 뒤집어쓰고 무더위 속에서도 긴팔 긴바지를 입고 옥수수밭에 들어가 있으면 초록의 장막 안에서 익사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나보다 키 큰 옥수숫대에 둘러싸여 사방을 둘러봐도 머리 위 한 줌 하늘 밖에 안보이고, 발은 질퍽한 밭 속으로 빠져 들고, 온 몸이 땀과 이슬로 흠뻑 젖은 채 얼굴에 뒤집어 쓴 옥수수망 그물코까지 땀으로 메워지기 시작하면 바닷속 머구리가 된 느낌입니다. 엄살이 심한가요?

옥수수밭 숨은그림찾기. 밭 한가운데 사람이 보이시나요? 옥수수밭에 들어가 있으면 초록의 장막 안에서 익사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사진 제공 : 강세기

처음에는 각자 왼쪽과 오른쪽 두 개의 고랑을 맡아 간격을 유지하여 같이 출발하건만 서로의 작업 속도에 따라 거리가 차이나기 시작하면, 그리고 따낸 옥수수를 비료포대에 담아 중간중간 내놓고 다시 작업하던 고랑을 찾아 밭에 들어가다 보면 같이 출발한 동료는 어디론가 사라지고 혼자 옥수수 밀림 속에서 헤매는 상황이 됩니다. 바닷속 머구리는 산소를 공급해주는 동료와 호스로 연결이라도 되어 있지 난 이렇게 옥수수밭에서 외롭게 쓰러져 죽나보다 싶은 생각이 들 때 쯤 “잠깐 쉬었다 하자”는 반가운 목소리에 정신이 나곤 합니다.

이번 여름 옥수수 작업은 예년보다 더 힘들었습니다. 역대급, 기상관측 이래 최고, 최대, 최장 이런 수식어가 거의 매일 이어지고 있는데다 폭염과 폭우가 엇박자로 반복되며 옥수수 농사를 망쳐 버렸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런 옥수수 작황과는 달리, 나오지 말라고 지난 봄 정성껏 덮어준 비닐멀칭을 끝끝내 비집고 나온 온갖 풀들은 아주 잘 자란 듯합니다. 밭두둑에 앉아 더위에 벌겋게 달아 오른 얼굴로 숨을 고르던 후배가 한숨 섞인 목소리로 묻더군요. “저 잡초들의 쓸모는 뭘까요?”

봄에 빈틈없이 깔끔하게 덮어준 비닐멀칭. 하지만 풀들은 어떻게든 틈을 뚫어내고 자라납니다. 사진 제공 : 강세기

사실 잡초라는 이름을 가진 풀은 없습니다. 후배가 통칭해서 잡초라 부른 풀들은 쇠무릎, 바랭이, 한련초, 방동사니, 명아주 등등 각자 이름을 가지고 있는 엄연한 존재들이지요. 하지만 거기서 이런 답을 했다가는 선배고 뭐고 바로 멱살을 잡힐 것 같아 말하지 않았습니다.

옥수수를 얻고자 옥수수를 심고 가꾼 밭에서 심지도 않고 원하지도 않은 것들이 저절로 나서 아주 성황을 이루어 무더위 속 옥수수 농사를 방해하는 존재들을 바라보며 푸념하는 이 순간만큼은 잡초라 불러 마땅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게 잡초의 사전적 정의이기도 합니다. 가꾸지 않아도 저절로 나서 자라는 여러 가지 풀. 농작물 따위의 다른 식물이 자라는 데 해가 되기도 하는 풀. 그런데 이는 사람의 의도, 목적에 따라 구분되는 인간 중심적인 정의입니다. 예컨대 우리 옥수수밭에 난 쇠무릎은 잡초이지만 신경통, 관절염 등의 약재로 쓰이는 우슬이라고도 불리는 쇠무릎을 키우는 밭에선 옥수수가 잡초가 됩니다. 하지만 쇠무릎 농부가 ‘어, 우리 밭에 심지도 않은 옥수수가 열렸네. 따서 쪄먹어야지.’ 하고 즐거워한다면 옥수수는 더 이상 잡초가 아니지요. 이렇게 사람의 관점에 따라 달라지는 잡초는 그 쓸모가 어디에 있을까요?

밭, 길가, 공터에서 자주 만나는 풀들. 왼쪽부터 시계방향으로 쇠무릎, 한련초, 명아주, 마지막은 방동사니와 바랭이, 토끼풀 등이 가득한 사진. 사진 제공 : 강세기

미국의 자연주의 사상가이자 시인인 랄프 월도 에머슨은 ‘잡초는 아직 그 가치를 발견하지 못한 식물’이라고 했습니다. 가치를 쓸모라 해도 무관하겠지요. 농부철학자 윤구병 선생도 『잡초는 없다』라는 책에서, 생태영성가 황대권 선생도 한걸음 더 나간 제목의 『잡초야 고맙다』라는 책에서 모를 때는 땀 흘려가며 죄다 뽑아버리고 갈아버렸던 잡초들이 알고 보니 수고하지 않아도 얻을 수 있는 나물과 약초였더라는 이야기를 합니다. 또 두 분의 책에는 척박했던 땅을 비옥한 땅으로 일궈낸 것은 다름 아닌 잡초들이었다는 이야기가 공통적으로 나옵니다. 운동장마냥 도로마냥 영양가라고는 하나도 없이 딱딱하게 굳은 땅에 조금씩 천천히 쑥, 바랭이, 망초, 쇠비름, 별꽃, 광대나물과 같은 ‘잡초’들이 들어와 뿌리를 내리며 자리 잡더니 지렁이, 개미, 굼뱅이, 땅강아지들을 불러 들여 굳은 흙을 포실포실 보드랍게 만들어 점점 비옥한 땅으로 만들어 가더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런 잡초의 쓸모들도 잡초의 사전적 정의처럼 인간 중심적일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듭니다.

역시 여름은 옥수수의 계절입니다. 사진 제공 : 강세기

잡초라 부르든 각자의 이름을 부르든 풀들은 우리 인간들보다 훨씬 앞서 태어나 살아온 존재들이지요. 우리가 도시를 건설하여 모여 살기 전보다, 밭을 갈아 농사짓기 전보다, 들에서 먹을 것을 찾아 캐오거나 따오기 전보다, 인간과 관련된 그 모든 것의 시작 전부터 풀들은 이 지구상에 있었습니다. 이들에게 쓸모를 묻는다는 게 어쩌면 외람된 질문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오히려 풀들이 이 지구 생태계에서 인간의 쓸모를 묻는다면 뭐라 답해야 할까요?

지난 5월 타계한 아프리카 문학의 거장, 응기구 와 티옹오가 한 말, ‘지구는 인간을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인간이 이 지구를 필요로 하지요’가 답이 될까요? 아니면 그래도 ‘지구 상에서 자연에 경외감을 표현하고 돌볼 수 있는 유일한 존재는 인간 밖에 없지 않나’ 하는 생각이 답이 될까요? 잡초의 쓸모와 인간의 쓸모에 대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일어나던 이런 저런 생각이 이제 그만 쉬고 옥수수 마저 따야 한다는 소리에 가뭇없이 사라져 버린 것은 머리를 몽롱하게 만든 역대급 날씨탓입니다. 아, 그 날씨 때문에 비록 작황은 안 좋았지만 옥수수는 여전히 맛있었습니다. 역시 여름은 옥수수의 계절입니다.

강세기

빨리 이루고 많이 누리기 위해 무겁게 힘주고 살아야 하는 세상에서 천천히 조금씩 가볍게 살아도 괜찮다는 걸 풀과 나무로부터 배우고 있습니다. 숲과 산에서 시간 보내는 것을 좋아합니다.

댓글 1

  1. 푸른 초록별 인간만큼 이기적이고 자기중심적인 생물이 있을까요
    우슬을 잡초라 부르든 약초라 부르든
    우슬은 우슬일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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