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록산책] ⑬ 제철 즐거움

잊고 있었지만 ‘지금’ 같은 즐거움을 누릴 수 있는 시간은 ‘지금’뿐입니다. 숲에는 가을이라는 계절이 베푸는 도토리 축제가 열리고 있습니다. 이 제철이 주는 즐거움을 누리러 참나무 아래를 찾아가 보시기를 권유 드립니다.

계절도 국적도 상관없이 아무 때나 온갖 먹거리를 살 수 있는 이 시대에 제철이 주는 풍요로움의 의미는 희미해졌습니다.
사진 제공: 강세기

‘더도 말고 덜도 말고 한가위만 같아라’ 속담이 딱 맞는 시기가 찾아 왔습니다. 이 시절이 주는 풍요로움과 즐거움을 누리고 계신지요? 보릿고개나 춘궁기 같은 단어는 사어가 된지 오래인데다 아무 때나 대형마트에서 계절도 국적도 상관없이 과일과 채소와 먹거리를 살 수 있고 클릭 한번으로 온갖 음식이 집으로 배달되는 시대에 아이들이 이 속담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그저 학교 안가도 되는 휴일이 길어서 좋으니 한가위만 같아라 하는 거 아닐까요? 사과가 냉장되어 사계절 유통되고 딸기마저도 한겨울에 제철과일로 광고되고 소비된 지 이십여 년이 넘었으니 아이들뿐만 아니라 청년들도 한가위가 주는 계절의 풍요로움이 무엇인지 모를 가능성이 큽니다.

대체로 나이나 세대와 관계없이 도시에서 태어나 성장한 분들은 먹거리에 대한 계절감각이나 생태감각이 무딥니다. 저도 그렇습니다. 그런 제가 농촌과 도시, 생산자와 소비자가 서로 협력하여 자연과 생명을 살리는 일에 연대하고 있는 생활협동조합에 참여하여 활동하게 된 계기는 우연찮게 소고기 선물세트를 구입하면서였습니다. 수년 전 추석 무렵 한 생활협동조합의 한우 광고를 보고 유기농이니 친환경이니 동물복지니 이런 건 잘 모르겠지만 나도 먹고 부모님 선물로 보낼 생각으로 구입을 했습니다. 저는 고기가 살짝 질긴 거 아닌가라는 생각을 했는데, 부모님께서는 이건 질긴 게 아니라 씹는 맛이 있는 거라며 옛날에 먹던 그리운 소고기 맛이라고 더 구입해 달라는 부탁을 하셨습니다. 추가주문을 위해 생협에 전화를 거니 고기가 다 팔렸기에 저만을 위해 아직 키우고 있는 소 한 마리를 잡을 수는 없으므로 먹고 싶으면 다음 도축이 계획되어 있는 설까지 기다리라는 답을 주었습니다.

고기는 돈만 내면 살 수 있는 잘 포장된 상품이 아니라 돈으로는 어찌할 수 없는 자연과 생명의 순환 과정의 일부입니다.
사진 제공: 강세기

처음에는 이게 무슨 말인지 잘 못 알아들었습니다. 거리마다 고깃집이 즐비하고 마트에는 냉장고마다 부위별로 가득 가득해서 돈만 내면 24시간 아무 때나 먹고 싶은 만큼 먹을 수 있는 것이 고기인데 다음 도축 때까지 기다리라는 말이 무엇인지 말입니다. 전화를 끊고 나서야 공장에서 만들어 내는 공산품과 달리 고기는 살아 있는 생명을 죽여야만 얻을 수 있는 거라는 당연한 사실을 뒤늦게 깨달았습니다. 깔끔한 공장 안에서 기계를 가동시켜 찍어 내면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살아 있는 생명체가 피 흘려 태어나고 숨 쉬고 먹고 싸고 성장하고 죽임을 당해야만 얻을 수 있다는 것을요. 그제야 비로소 고기가 돈만 내면 살 수 있는 잘 포장된 상품이 아니라 돈으로는 어찌할 수 없는 자연과 생명의 순환 과정의 일부로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내가 먹는 것이 무엇인가에 대한 생태적 각성이 일어났다고나 할까요. 그 후로 생활협동조합에 참여하여 생산자 조합원들의 밭, 과수원, 농장을 찾아다니며 철에 따라 내리는 햇빛과 비와 구름과 바람과 그것에 순응하여 일하는 사람의 노력이 빚어내는 계절의 풍성한 수확들을 감사함으로 받아드는 경험을 할 수 있었습니다.

모두 다른 모양의 잎과 나무껍질, 도토리를 가진 떡갈나무, 신갈나무, 갈참나무, 굴참나무, 졸참나무, 상수리나무이지만 통칭해서 참나무라 부릅니다. 사진 제공: 강세기

지금 숲이야말로 ‘더도 말고 덜도 말고 한가위만 같아라’는 노래로 가득 차 있습니다. 꽃 진 자리에 맺힌 열매와 씨앗들이 보기에도 탐스럽고 먹음직하게 익어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시간을 일부러 내서라도 숲에 가보시기 바랍니다. 숲을 찾아 멀리 가기 어렵다면 가까운 공원이라도 좋습니다. 숲이든 공원이든 어렵지 않게 만날 수 있는 참나무가 도토리 비를 뿌리며 한가위의 풍성함을 나누어주고 있습니다. 진짜 나무라는 이름을 가진 참나무는 숯부터 도토리까지 아주 유명하지만 정작 이 이름을 가진 나무는 식물도감에 나오지 않습니다. 참나무는 떡갈나무, 신갈나무, 갈참나무, 굴참나무, 졸참나무, 상수리나무처럼 열매로 도토리를 맺는 나무를 통칭해서 부르는 이름이기 때문입니다. 다 같아 보이는 도토리이지만 엄마나무가 누구인가에 따라 생김이 다릅니다. 흔히 도토리 모자라고 부르는 깍정이가 떡갈나무, 굴참나무, 상수리나무는 복슬복슬한 털모자 같고 신갈, 갈참, 졸참나무는 매끈매끈한 베레모 같습니다. ‘도토리 키재기’라지만 크기와 모양도 달라 졸참나무 도토리는 작고 홀쭉한 반면 상수리나무 도토리는 크고 둥글둥글 통통합니다. 잎 모양도 나무껍질 모양도 모두 다른 참나무 6형제들이지만 이들을 굳이 구분하는 게 지금 이 계절에 뭐가 중요하겠습니까. 그저 참나무 아래 앉아 있으면 투둑투둑 도토리가 비처럼 떨어지는 것을 듣기도 하고 보기도 하고 때론 머리에 맞기도 하는 즐거움을 누릴 수 있습니다. 이 즐거움은 지금 아니면 누릴 수 없는 제철 즐거움입니다.

다람쥐, 청설모, 어치가 먹으려고 숨겨 놓았다가 잊어버린 도토리가 새싹을 틔워 다음 세대 숲이 됩니다. 사진 제공: 강세기

우리만 도토리의 즐거움을 누리는 건 아닙니다. 씨앗 치고는 꽤 큰 크기를 가진 도토리는 전분으로 가득해서 겨울잠을 자야 하는 곰이나 다람쥐들은 물론 멧돼지, 청설모, 그리고 어치 같은 새들에게 아주 중요한 식량입니다. 그래서 참나무 아래에는 여러 동물들이 분주히 들락날락거리며 도토리 만찬을 즐기지요. 특히 청설모나 어치는 열심히 도토리를 모아 여기저기 묻어 숨겨 둡니다. 숲이나 공원에서 보면 이 아이들이 도토리를 땅에 묻은 후 잠깐 하늘을 보며 쉬는 듯할 때가 있습니다. 누군가는 도토리를 묻은 장소를 기억하기 위해 구름을 보는 거라고 하더군요. ‘내가 요 구름 아래 도토리를 묻었어. 나중에 꺼내 먹어야지’하고요. 구름이 흘러가 버렸기에 장소를 못 찾은 건지, 묻은 사실조차를 까맣게 잊어버린 덕분인 건지, 땅에 묻힌 채 겨울을 난 도토리는 이듬해 봄 뿌리를 내리고 새로운 나무로 자랄 새싹을 틔울 기회를 갖게 됩니다. 청설모와 어치가 다음 세대를 위한 숲을 가꾸고 있는 거지요. 이 귀여운 것들의 분주한 움직임을 지켜보는 즐거움도 지금 아니면 누릴 수 없는 제철 즐거움입니다.

이 가을, 자연 속에서 계절이 주는 기쁨을 뭇 생명들과 풍성히 누릴 수 있는 시간을 가져보시기를 권유 드립니다. 제철을 잊게 만든 과일과 채소, 생명 순환의 과정을 공산품처럼 취급한 고기를 철없이 먹으며 자연과 계절이 베풀어주는 풍요로움에 대한 감사함을 잃어버린 우리로 말미암아 이 기회가 점점 더 줄어들기 전에 말입니다.

강세기

빨리 이루고 많이 누리기 위해 무겁게 힘주고 살아야 하는 세상에서 천천히 조금씩 가볍게 살아도 괜찮다는 걸 풀과 나무로부터 배우고 있습니다. 숲과 산에서 시간 보내는 것을 좋아합니다.

댓글 3

  1. 가을 계절을 느끼게 하는 잔잔한 한변의 수필 잘 읽고 갑니다 등산화와 등산복을 차려 입고 오늘은 어디론가 훌훌 떠나보고 싶네요

  2. 참나무 아래서

    다 여문 도토리가
    후드득! 잎을 후려치며 널을 뛰다가
    탁! 굵은 가지에 부딪쳐 공중제비를 돌더니만
    툭! 이내 땅바닥에 곤두박질을 치고서는
    데굴데굴! 비탈을 넋을 잃고 굴러가는데
    착! 발재간 꾼 청서가 잽싸게 물고 달아납니다.

  3. 잔잔한 글속에 어릴적 숲에서 놀던 추억과 미래에 내 자손들을 위한 지구환경을 함께 생각해보게 하는 좋은 글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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