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콜로키움 특집] ① 얽힘과 말걸기 – 『도플갱어』를 읽고

클라인은 『도플갱어』를 통해 극우 성향을 보이는 음모론자들을 별세계에서 온 이들이 아니라 이 사회에서 배태된 이들로 바라보고자 한다. 다시 말해 저자는 도플갱어를 ‘타자화’하지 않고 계속해서 우리와 연결한다. 그래서 우리는 깨닫게 된다. 결국 우리가 알던 그리고 살던 이 세계 자체가 거짓말이며, 극우 세력의 “개소리”는 그 거짓말의 또 다른 버전일 뿐이라는 것을.

나오미 클라인 저, 『도플갱어』(글항아리, 2024) 

제목에서 시작해보자. 왜 도플갱어인가? 나오미 클라인이 이 책에서 주로 다루는 도플갱어는 (부제가 암시하듯) 좌파의 입장에서 본 우파, 특히 극우 세력이다. 저자인 좌파 나오미 (클라인)의 입장에서는 우파 나오미 (울프)가 그렇다. 그런데 왜 클라인은 이 관계를 도플갱어, 즉 어딘가를 돌아다니는 분신으로 보려 하는 걸까? 이건 단지 우파 나오미가 좌파 나오미와 이름이 같아서, 그래서 사람들이 그 둘을 종종 헷갈려 해서만은 아니다. 이 책에서 도플갱어는 극우 세력을 살피기 위한 렌즈이지만 그것에 한정되지 않고 더 넓은 영역을, 궁극적으로는 오늘날 생사의 갈림길에 있는 세계를 조명하기 위해 채택된 용어다. 어떤 점에서 그러한가?

우선 우파가 좌파의 거울 이미지라는 건 어떤 의미에서일까. 클라인이 이 책 전반에서 거듭 강조하는 것은 분신들이 살아가는 거울세계에는 언제나 일말의 진실이 있다는 것이다. 반백신 음모론자들은 백신과 백신 증명서, 백신여권 등에 어떤 음모가 있다고 여긴다. 백신이 몸에 치명적인 결과를 가져올 뿐만 아니라 백신 증명이 모든 이들을 감시하기 위한 도구라는 것이다. 울프는 백신 접종자들을 심지어 유령으로 묘사하기도 했다. “이들한테는 곁에 인간 존재라는 게 있는 듯한 냄새가 나질 않아요.”(185) 그러나 클라인은 이들의 경계심이 “지극히 이성적인 결과”라고 쓴다. 문제는 이들의 합리적인 의심에 충분히 잘 대응하지 못한 당국과 전문가들에게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즉 “토론장이나 백신에 합리적 의심을 제기할 기회가 여러 진보 공동체에 부재한 상태에서, 많은 이는 “직접 연구하러” 나섰다. 그러다가 내 도플갱어(울프)를 만나게 되고, 그녀와 비슷한 여러 사람을 만나게 되고, 백신 부스러기론과 집단 불임론을 만나게 된 것이다.”(198) 그러니 주로 극우 경향을 보이는 이 음모론자들은 별세계에서 온 이들이 아니라 이 사회 안에서 배태된 이들이다. 마크 피셔가 말하듯 오늘날 음모로 불리는 것은 대부분 “지배층의 계층 연대”이며, “이런 음모는 진짜다.”(380) 그러므로 우리가 어떤 사건에 관해 통용되는 상식 너머를 발굴하려 애쓰는 건 합리적이다. 그러나 그러한 노력들이 사회적으로 부정될 때, 충분한 논의와 소통 없이 일방적으로 특정한 해석만을 강요받을 때 사람들은 다른 서사를 찾아 나선다. 이 책에서 자주 등장하는 스티브 배넌 — 트럼프 당선의 주역으로 전 백악관 수석전략가 — 은 그러한 욕구를 포착하여 사람들을 결집시켰다.

극우 정치상에 반대하는 사람의 다수는 배넌을 귓등으로도 들으려 하지 않지만 그(배넌)는 우리를 유심히 관찰하고 있다. 우리가 방치한 주제들, 우리가 열지 않은 토론들, 우리가 모욕하고 내친 사람들. 이 모든 것을 긁어모아 문제의식을 짜깁기하고 있다. 이 뒤틀린 정치 의제가 차기 선거에서 승리의 물결을 일으킬 거라 자신한다.(202)

클라인은 배넌의 이러한 전략이 2016년 트럼프의 당선을 이끌었다고 평가한다. 집주인이 함부로 버린 손톱을 주워 먹고 주인으로 둔갑하는 설화 속 쥐처럼 우리가 내친 사람들이 우리가 방치한 문제들을 먹고 도플갱어가 된다. 지금의 극우 세력을 도플갱어라는 용어로 살피려는 이유다.

이들이 거울 이미지인 또 다른 이유는 자신들의 주장을 펼치는 과정에서 저항과 비판의 언어들을 전유하는 데 있다. 배넌은 좌파와 자유파가 독재주의 무장 빈병대를 “타자화”했다고 말하고, 백신을 맞지 않은 울프는 접종자만 매장 이용이 가능한 식당에서 커피를 마시며 자신을 1960년대 백인 전용 정책에 반대했던 흑인 민권 운동가와 연결한다. 이런 일은 우리도 최근 겪은 바 있다. 계엄 이후 전광훈과 전한길은 내란범을 지키기 위해 “국민 저항권”을 행사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일군의 내란범 지지자들은 서울서부지방법원에 난입하며 “1・19 혁명이다. 이거 민주화운동이야!”라고 소리쳤다. 이런 사태를 겪은 우리는 이제 국가 폭력에 대해 ‘저항권’을 주장하기도, ‘민주화’를 말하기도 어렵게 된다. 오염된 말을 쓰기는 껄끄러우니까. 클라인의 말처럼 “타자화 개념 자체를 비웃는 덕분에 그(배넌)가 이주민들에게, 흑인 유권자들에게, 성소수자 아이들에게 일상적으로 가하는 배척을 같은 단어로 설명하기는 어려워졌다.”(240) 클라인은 이렇게 기존의 언어를 “죄다 무용지물로 퇴행시키는 — 죄다 우스꽝스럽게, 죄다 익살스럽게, 죄다 얄팍하게 바꾸는 반비극의 힘”(240)을 피피키즘 이라고 부른다. 그는 수많은 단어와 개념들이 피픽화되면서 말문이 막히게 된 이 상황을 단지 말이 학대 받는 것만이 아니라 “말의 역할, 기본적인 효용성이 점차 흐려지고 있는 현상”(249)으로 이해한다. 기존의 맥락에서 제거되어 아무렇게나 던져지는 말은 말 자체를 한없이 가볍게 만든다. 말은 그저 말장난으로만 기능하는 듯 보인다. 내란 우두머리로 잡혀가는 놈이 “이 나라에는 법이 모두 무너졌”다고 하고, “부정선거가 내란이다”라는 현수막이 아무렇지 않게 거리에 걸려 있는 계엄 이후의 한국 사회에서도 정말 무너진 건 말의 무게인 듯하다.

클라인은 이렇게 말의 쓸모 자체를 의심하게 만드는 도플갱어들의 음모론을 “적대적 현재주의”로 명명한다. 이는 “불편한 진실이라면 반추하지 않으려는 태도”(423)다. 어렵고 불편한 현실을 마주하지 않고 회피하기 위해선 다시 다른 서사가 필요하고 음모론은 이에 부응한다. 그러나 클라인은 여기서 더 나아간다. 그는 기후 변화를 부정하는 등 세계의 위기를 보지 않고 음모론에 매달리는 이들에게 모든 잘못을 전가하기를 거부하며 다시 거울 세계를 우리에게로 끌고 온다.

기후변화 부인 현상도 비슷하게 흘러간다. … 명백한 부인자들이 있다. 하지만 언제나 가장 큰 난관은 드러나지 않는 부인자들이었는지도 모른다. 진짜라는 것을 알면서도 그렇지 않은 양 행동하고, 진실을 크고 작은 다양한 방식으로 자꾸만 망각하는 사람들.(426)

기후변화를 부정하는 이들과 기후변화를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잘 알기만 하는 ‘나’의 차이는 무엇일까? 그들과 나의 거리는 생각보다 멀지 않을 지도 모른다. 클라인은 다시 거울 세계를 이제는 우리 사회 안으로 깊숙이 끌고 온다.

배넌은 그 자신이 ‘거대한 절도’라 부르고 — 바이든이 2020년 대선을 훔쳤다는 주장 — 민주당 지지자들은 ‘거대한 거짓말’이라 부르는 것에 맹공을 계속 가한다. 실로 거대한 거짓말이고, 위험한 축에 속한다. 하지만 거대한 거짓말이 그것 하나뿐인가? … 유한한 행성에서 무한히 성장하겠다는 의기보다 거대한가? … 테라 눌리우스, 발견주의 원칙보다 거대한가? 우리가 음영 지대를 응시할 담력이 콩알만큼이라도 있다면 우리가 자멸적인 거짓말의 덫에 걸려들어 있으며 거울세계가 이번 주에 무엇을 주제로 또 주접을 떨든 그것은 최악의 허언도 최대의 사태도 아니라는 점을 똑똑히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배넌과 울프가 치르는 현실과의 전쟁은 어쩌면 근대세계의 기둥이던 거대한 거짓말들이 허물어지면서 발생하는 자연스러운 결과다.(426-7)

우리가 도플갱어라는 렌즈를 통해 “거대한 거짓말”은 저편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이 세계의 뼈대라는 것을 깨닫게 될 때 이 세계와 우리의 일상은 섬뜩해진다.
사진 출처 : Paweł Kielar

도플갱어가 별세계에서 온 것이 아니라 우리가 다진 토양에서 태어난 것처럼, 그들의 “거대한 거짓말” 역시 그들의 독창적인 작품이 아니다. 작금의 지구적인 생태 위기 상황에서도 여전히 널리 퍼져 있는 무한 성장에 대한 비전과 약속이 정말 우리가 듣는 가장 크고 위험한 거짓말 아닐까? 그러니 우리는 사실 거짓이 그 근간인 사회를 살고 유지해 왔다. 거울세계의 분신들은 그 거짓된 기둥이 금이 가며 출현하는 바이러스들이다. 이렇게 저자는 도플갱어를 ‘타자화’하지 않고 계속해서 우리와 연결한다. 그래서 우리는 깨닫게 된다. 결국 우리가 알던 그리고 살던 이 세계 자체가 거짓말이며, 극우 세력의 “개소리”는 그 거짓말의 또 다른 버전일 뿐이라는 것을. 이 깨달음은 우리를 언캐니한 상황으로 이끈다. 저자는 프로이트가 묘사한 이 단어를 자주 언급하는데 이는 “한때 익히 알았고 오랫동안 친숙했던 대상에게서 느껴지는 섬뜩함”(210)을 뜻한다. 우리가 도플갱어라는 렌즈를 통해 “거대한 거짓말”은 저편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이 세계의 뼈대라는 것을 깨닫게 될 때 이 세계와 우리의 일상은 섬뜩해진다. 유한한 행성에서의 무한한 성장이라는 거짓으로 짜인 이 세계를 지탱하는 건 우리의 일상이기 때문이다. 그 거짓에 기반 한 자본이 우리의 터전을 위태롭게 하는 지금, 이제 우리의 일상은, 아니 우리 자신이 스스로를 잡아먹는 괴물이 되었다. 사실 이 언캐니한 풍경은 이미 오래전부터 진행된 것이긴 하지만 그 섬뜩함이 점점 거칠어질 전망이다.

그래서 우리는 음영 지대와 그곳의 분신을 계속해서 응시해야 한다. 음영 지대는 우리의 일상을 지탱하는 일상의 도플갱어라 할 수 있는데, 우리가 입고 먹고 마시며 소통하고 즐기기 위해 필요한 모든 것을 생산하고 제공하는 곳이다. “과잉 착취와 인적 봉쇄, 생태계 파괴가 벌어지는 이 사각지대는 시스템의 일시적 결함이 아니라 우리 세계의 기저다.”(380) 우리가 의지하고 있지만 자세히 알고 싶지는 않은 지구 ‘어딘가’ 그리고 그곳에서 일하는 사람들. 저자가 책에서 인용하는 소설가 데이지 힐드야드는 우리가 음영 지대에 의지하고 엮여 있다는 점에서 두 개의 몸이 인간의 조건이라고 말한다. 첫 번째는 우리가 아는 그런 몸으로, 이 몸은 아침에 일어나서 밥을 먹고 일하고 운동하고 잠을 잔다. 두 번째는 이 몸을 지탱하는 그림자 자아다. 이 몸은 “우리를 대신해 평행세계에서 자원을 추출하고 물품을 제조”한다.(391) 다시 말해 나는 원하든 원치 않든, 좋든 싫든 지구 ‘어딘가’ — 우리가 어쩌면 영원히 알고 싶지 않은 혹은 화면이나 기사 속에서 재현된 방식으로만 접하고 싶은 그곳 — 를 파괴하는 나와 얽혀 있다. 그 두 번째 몸이 지금 이 글을 쓰는 나, 기후 변화를 걱정하는 나를 유지하기 위해 어딘가를 파괴하고 있다. 이 세계의 가장 커다란 거짓말은 그 얽힘을 부정하고 보지 않는 것이다. 우리는 얽혀 있지만 그 파괴를 “차마 견딜 수 없”어서 회피한다. 그럴 때 우리는 다른 자아를 찾아 떠나곤 한다. “완벽해진 브랜드로서의 자아, 디지털 아바타로서의 자아, 데이터 광산으로서의 자아, 이상화된 신체로서의 자아, 인종주의와 반유대주의 투영물로서의 자아.“(516) 이 분신들은 “세계와의, 우리 사이의 연결을” 보지 않는다. 그러나 어디 이런 자아들뿐일까? 기후 변화를 부정하지도 않고, 세계와의 얽힘을 인식하고 있지만 그저 부정하지 않고 인식하기만 하는 자아는? 그래서 저자의 과제는 이 두 번째 몸과의 얽힘을 직시하는 것이다. 어떻게 해야 “우리의 두 번째 몸과 육신을 직시할까? 어떻게 해야 도망을 멈출까? 어떻게 해야 우리가 이미 알고 있는 것을 — 진정 — 알 수 있을까?”(517-18)

문제는 우리가 사회적인 문제를 개인의 과제로 치환하고 알아서 해결하도록 하는 문화에 젖어 있다는 것이다. 세상을 바꾸는 데 실패한 사람들은 이제 통제가능한 대상에 집착한다. 나의 몸이 그 대상이다(물론 여기서 두 번째 몸은 고려되지 않는다). “러닝머신이 가두시위를 대신하고 프리웨이트가 프리러브를 대신”하고(282), 코로나 같은 전염병도 자신의 몸을 가꾸는 데 실패한 사람들이 져야 할 개인적인 책임이 된다. 마스크를 거부하는 사람들은 그것이 타인을 위협할 수 있다는 데 동의하지 않는다. “그 사람들 건강은 그 사람들 책임이고 내 건강은 내 책임이라는 걸 인정하고 깨달으면 … 끝!”(299) 하지만 우리가 코로나 시기를 거치며 여실히 알게 된 사실은 혼자서만 안전하기는 어렵다는 점이다. 우리 가족만, 회사만, 학교만, 동네만, 도시만, 국가만 안전할 수는 없다. 그러나 그 깨달음은 어떻게 집합적 주체화로 이어질 수 있을까? 저자는 여러 투쟁을 그 과정이 실현되는 장으로 이해한다. 투쟁은 우리로 하여금 서로를 보도록 돕고, 그 과정에서 개인주의와 각자의 정체성에서 벗어나도록 돕는다는 것이다. 클라인은 존 버거를 인용하며 집회가 거리에 모인 사람들에게 새로운 깨달음을 준다고 쓴다. 그들이 개별화된 개체가 아니라 “어떤 계급에 속한다는 사실. 그리고 그 계급에의 소속은 더는 공동의 숙명을 예고하지 않고 공동의 기회를 암시한다”(530)는 것. 우리는 그런 깨달음을 여러 차례 집단적으로 겪었고 최근에도 겪은 듯하다. 그러나 그런 운동은 어떻게 사회로 나아갈 수 있을까? 광장에서의 나는 ‘우리’를 이루더라도 집으로, 일터로 돌아온 나는 다시 고립되는 것만 같다. 광장을 어떻게 사회화할 수 있을까?

우리는 이 문제를 책의 말미에서 저자가 강조하는 돌봄의 인프라와 연결지어 이해할 수 있다. “돌봄의 인프라를 구축하는 데 실패한다면 코비드 시기를 수놓은 냉혹과 착란은 앞으로 드러날 야만의 한 귀퉁이밖에 안 될 것이다.”(542) 이 돌봄은 무엇보다 말걸기여야 할 것이다. 도플갱어가 “우리가 방치한 주제들, 우리가 열지 않은 토론들, 우리가 모욕하고 내친 사람들”에서 비롯된다면, 우리는 그 주제들을 다시 끌어안고 열리지 않은 토론을 열면서 우리가 간과하고 내친 이들에게 말을 걸어야 할테니 말이다. 이는 위기 상황에서 갈수록 중요해지는 문제다. 우리를 집어 삼키는 위기는 단지 기술적인 문제가 아니라 사회적이고 정치적인 위기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지금의 위기에 어떻게 대처해야하는지 이미 잘 안다. 해법들은 이미 여러 보고서들에 잘 나와 있다. 문제는 단지 특정한 기술이나 정책을 만들어 내지 못한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어떤 사회를 살아갈 것인가를 함께 정하지 못한 데 있다. 그 결정은 홀로 할 수 없다. 그러니 우선은 ‘나’에게서 벗어나는 일이 필요해 보인다. 버틀러의 말처럼 “내가 너무 완고하게, 혹은 너무 확고하게 나 자신을 소유한다면, 나는 윤리적 관계 안에 존재할 수가 없다. 윤리적 관계란 특정한 자아주의적 관점을 포기하고 말걸기의 형식에 의해 근본적으로 구성되는 관점을 취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이는 무엇보다 다음과 같은 길, 우리 중 많은 이들이 빠져 있는 길에서 벗어나는 것을 의미한다. “그들은 모두가 잘 살 세상을 만드는 방법을 궁리하는 게 아니라 무너지고 있는 세상에서 자기 자식이 잘 살 방법을 강구하고 있어.”(355)

이 글은 [제19회 생태적지혜연구소 콜로키움_ 『도플갱어』 – 거울 너머의 우리를 마주하다]에서 발표된 발제문이다.

권범철

도시 연구자라고 쓰곤 하지만 정말인지 의심스럽다. 사실 주업은 육아고 다른 건 다 부업이다. 주양육자가 되면서 사회 활동과 멀어져 거의 집에만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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