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철학 조각모음] 박혁거세 이야기로 읽는 자기객관화

역사적 상상력을 발휘하는 데 있어서, 비교는 대단히 유용한 수단 내지는 계기가 되어줄 수 있다. 이는 일상에서도 마찬가지이다. 비교는 자기객관화와도 연결될 수 있으며 이 또한 균형 잡힌 사고를 위하여 유용하다. 『삼국사기』의 첫 부분을 읽어보며 비교와 자기객관화에 관하여 고찰한다.

믿을만한 소년왕도덕적 국가, 사실의 조각들

『삼국사기』는 다음과 같이 시작된다.

“시조의 성은 박씨, 이름은 혁거세(赫居世)이다. 전한(前漢) 효선제(孝宣帝) 오봉(五鳳) 원년 갑자(기원전 57) 4월 병진[정월 15일 이라고도 한다.]일에 왕위에 올랐다.1 왕호는 거서간(居西干)이다. 이때의 나이는 열세 살이었으며 나라의 이름은 서라벌이었다. 이에 앞서 조선(朝鮮)의 유민들이 산골에 나뉘어 살면서 여섯 개의 마을을 이루고 있었다. 첫째는 알천(閼川)의 양산촌(楊山村)이라 하고, 둘째는 돌산(突山)의 고허촌(高墟村)이라 하고, 셋째는 취산(觜山)의 진지촌(珍支村)[혹은 간진촌(干珍村)이라고도 한다.]이라 하고, 넷째는 무산(茂山)의 대수촌(大樹村)이라 하고, 다섯째는 금산(金山)의 가리촌(加利村)이라 하고, 여섯째는 명활산(明活山)의 고야촌(高耶村)이라고 하는데, 이것이 진한(辰韓) 6부가 되었다. 고허촌의 촌장 소벌공(蘇伐公)이 양산(楊山) 기슭을 바라보니 나정(蘿井) 옆의 숲 사이에 말이 무릎을 꿇고 앉아서 울고 있었다. 곧장 가서 보니 말은 보이지 않고 다만 커다란 알이 있었다. 그것을 쪼개자 속에서 어린 아이가 나왔기에 거두어 길렀다. 나이 십여 세가 되자 뛰어나고 영리하며 몸가짐이 조신하였다. 6부의 사람들이 그의 출생을 신비롭고 기이하게 여겨 높이 받들었는데, 이때에 이르러 임금으로 삼은 것이다. 진한 사람들은 박[匏2, 조롱박]을 ‘박(朴)’이라고 하였는데, 처음의 커다란 알이 마치 박의 모양과 비슷하게 생겼으므로 그의 성을 ‘박’으로 한 것이다. 거서간은 진한의 말로 임금을 뜻한다.[혹은 존귀한 사람을 칭하는 말이라고도 한다.]”3

『삼국사기』의 맨 앞, ‘시조 혁거세 거서간’을 얼른 읽기란 쉽지 않다. 그렇지만, 각종 사전이나 인터넷 그리고 AI의 도움을 받으면 뜻은 어렵지 않게 파악할 수 있다. 오히려 더 어려운 것은 이 부분의 역사기록이 믿을만한 소년왕 이야기와 도덕적 국가 이야기 그리고 사실의 조각들을 뒤섞어 놓은 듯한 모습을 이룬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런 인상과 달리, 이 기록 속에는 풍부한 정보와 이야기가 있다. 이 정보와 이야기를 재구성 하는 방법으로 몇 가지 비교 방법론을 떠올려 보자.

■ 다른 역사와 비교해 보기

이 기록에는 이방인인 조선4의 유민들이 지금의 경주 일대에 진한 사회를 형성하였다고 적혀있다. 조선의 유민들은 조선을 떠나 누군가가 이미 살고 있었던 경주 일대로 들어갔을 것이다. 그리고는 박혁거세로 상징되는 또다른 이방인들이 들어와 13세의 박혁거세를 진한의 최고 권력자로 옹립하게 하면서, 서라벌이라는 정치체를 새롭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기록은 어떤 사회가 겪은 3단계의 변화(조선 유민 유입 이전-진한 사회-서라벌)에 관한 설명이라고 볼 수 있다. 이 기록은 대단히 역동적인 변화를 겪는 사회를 보여주었다. 이 기록 속에, 조선 유민 유입 이전 사회와 그 사회의 주인이었던 선주민들에 관한 설명이 들어있지는 않지만, 진한 사회에서 서라벌로 이행(移行)하는 과정에 관한 설명은 들어있다. 백마가 품었던 알을 깨자 거기에서 아이가 나왔다는 설명은 가히 신화적이다. 이 신화를 단서 삼으면, 진한 사회에서 서라벌로 이행(移行)하는 과정이 평화로웠을 것이라는 추정이 가능하다. 진한 사회 사람들이 새로 유입된 이방인인 박혁거세를 자신들의 최고 권력자로 옹립하였다. 이방인들이 선주민을 노예로 삼았다거나 대량 학살하였다는 정보는 기록에 없다. 기록 속에 없다고 해서, 단정할 수만은 없으니, 이 과정이 평화로웠을 것이라는 추정을 검증할 수 있는 방법 하나는 ‘다른 역사’와 비교하는 것일 것이다.

이를테면 어떤 지역에 이방인들이 유입하면서 선주민들과 빚는 갈등을 보이는 역사 기록은 상당히 많다. 세계사를 살펴보면 정복의 과정에서 이방인들이 선주민을 거의 멸종시키다시피 한 경우가 허다하다. 이방인과 선주민의 만남이 공존으로 귀결되는 경우가 오히려 희귀할 수도 있다. ⓐ공존의 역사의 연장선상에 있는 정치체와 ⓑ일방적 절멸의 역사의 연장선상에 있는 정치체는, 같은 사회문제를 해결하는 방식뿐만 아니라, 진단하는 방식에서도 그 차이를 충분히 고려해야 하는데, 지금까지 ⓑ의 방식을 ⓐ의 방식으로 사용하는 것과 같은 시도들이 빈번했고다. 여러 역사를 비교하며 읽는 것은 이러한 과정을 돌아보고 유사한 오류가 일어나지 않도록 하기 위하여 반드시 거쳐야 하는 과정일 것이다

■ 공시적 비교

역사를 비교하는 공시적 방법.
사진 출처: TheAndrasBarta

박혁거세가 속한 역사를 그것과 동시대 다른 지역 다른 나라의 역사와 비교해 보는 공시적(共時的)[synchronic] 비교는 보다 더 쉬울 듯하다. 예를 들어, 중국사 연표를 펼쳐놓고 보면 박혁거세가 즉위한 기원전 57년을 전후한 시기 중국의 연대기는 온통 서역과의 교류로 장식되어있다. 이 시기 중국은 흉노의 위협을 받고 있었다고 한다. 당시의 중국 한나라는 흉노에 함께 맞설 동맹을 맺을 대상을 서역에서 찾았다. 그 시점은 한나라가 고조선을 정복하고 한사군을 설치한 기원전 108년으로부터 그리 멀지 않다. 그로부터 한사군이 모두 폐지되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렸지만, 한나라가 서역에 관심을 집중함에 따라 요동과 한반도로 이어지는 지역에 대한 한나라의 영향력은 약화될 수밖에 없었을 것이라는 추론이 가능하다. 이와 같은 추론의 연장선상에서 보면, 다음과 같은 『삼국사기』 ‘시조 혁거세 거서간’ 속의 여러 충돌과 교섭의 기사가 보다 입체적으로 이해될 수 있다.

“30년(기원전 28) 여름 4월, 그믐 기해일에 일식이 있었다. 낙랑(樂浪) 사람들이 병사를 일으켜 쳐들어오려다가, 그곳 사람들이 밤에 문을 잠그지 않고 지내며, 들에는 노적가리가 잔뜩 쌓여 있는 것을 보고 서로 말하였다. “이 지방 백성들은 도둑질을 하지 않으니, 법도가 있는 나라라고 할만하다. 우리가 몰래 군대로 습격한다는 것은 도적과 다름없으니, 어찌 부끄러운 일이 아닌가?” 곧바로 병사를 이끌고 돌아갔다.”5

“38년(기원전 20) 봄 2월, 호공(瓠公)을 보내 마한(馬韓)을 예방하였는데, 마한왕이 호공을 꾸짖으며 말했다. “진한과 변한은 우리나라의 속국인데, 근래에는 공물을 보내오지 않았도다. 대국을 섬기는 예의가 이렇단 말인가?” 호공이 대답하였다. “우리나라에 두 분의 성인이 출현하면서, 사람은 바르게 되고 하늘은 온화하여, 창고가 가득 차고, 백성들은 서로 공경하고 겸양하니 진한의 유민들로부터 변한ㆍ낙랑ㆍ왜인에 이르기까지 우리를 두려워하지 않는 자가 없습니다. 그런데도 우리 임금께서 겸허하게 저를 보내어 예방하게 하였으니, 이는 오히려 과한 예절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대왕께서 크게 노하여 힘으로 핍박하시니, 이는 어떤 의도입니까?” 왕이 분노하여 그를 죽이려 하였으나, 가까운 신하들이 간언하여 말리자 겨우 호공의 귀국을 허락하였다. 이보다 앞서 중국 사람들 중에 진(秦)나라가 일으킨 난리로 고생하다 동쪽으로 온 사람들이 많았는데, 그들 대부분이 마한 동쪽에서 진한 사람들과 섞여 살았다. 이 시기에 이르러 그들이 점점 번성하자 마한이 그것을 꺼려 책잡으려 했던 것이다. 호공이란 사람은 그 집안과 성씨가 자세히 알려져 있지 않다. 본래 왜인으로, 처음에 박을 허리에 차고 바다를 건너 왔기 때문에 호공(匏公)이라고 부른 것이다.”6

“53년(기원전 5), 동옥저(東沃沮)의 사신이 와서 좋은 말 20필을 바치며 말하였다. “우리 임금이 남한에 성인이 나셨다는 말을 듣고, 저를 시켜 바치도록 하였습니다.””7

이상의 기사들은 낙랑·마한·동옥저 그리고 왜국 등과 박혁거세의 서라벌 사이의 충돌과 교섭 그리고 인적 교류 양상을 보여준다. 기사의 내용에서는 박혁거세와 서라벌의 정치적 도덕적 우월성을 돋보이게 만드는 수사(修辭)가 상당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작은 나라의 건국 초창기의 상황 묘사라기에는 많이 과장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같은 시기에 한나라가 요동과 한반도보다는 서역에 관심을 집중시키고 있었음을 공시적으로 파악하고 나면, 한반도 남부에서 이제 막 태동한 서라벌이라는 작은 정치체가 강대국의 정치 군사적 압력이 약화된 공간에서 상대적 독립성을 누리며 여러 정치체들과 활발히 교섭하면서 성장하는 모습을 그려볼 수 있게 된다.

자기객관화

나만 어려움에 빠져있다고 생각하며 억울해하거나 서러워할 때, 나의 삶과 남의 삶의 간단한 비교가 그런 마음을 눈 녹듯 녹여주는 경우가 있다. 비교를 통하여 모두들 이런저런 어려움을 겪으며 살고 있다는 것을 알았을 때, 내가 겪던 어려움의 무게에 대한 생각이 달라지는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역사 이해에 있어서 비교도, 위에 언급한 개인의 일상사에 있어서의 비교와 마찬가지의 원리를 가지고 있는 듯하다. 역사 속 한 정치체가 가지는 문화 역량·군사력·국력의 무게도, 일상 속 한 개인이 느끼는 어려움의 무게도, 다른 것의 무게와 비교해 보지 않으면 제대로 측정할 수 없는 듯하다. 앞서 말한 비교를 해보지 않으면 문제가 되는 어려움을 객관화해 보지 못하게 되는 듯하다. 이런 객관화를 자기객관화라고 하기도 한다. 자기객관화는 아직 학술적 개념어로 정립되지는 못한 말 같다. 자기객관화를 독립된 항목으로 설명하고 있는 사전을 찾을 수 없다. 하지만, 개인의 심리로부터 역사적 사고, 더 나아가 과학적 탐구에 이르기까지 자기객관화라는 말을 사용하여 언급하고 설명할 수 있는 상태는 넓게 퍼져 존재하고 있는 듯하다.

이런 자기객관화는 자기과신에 대한 반성적 사고라고 할 수 있다. 다음의 예를 통하여 자기과신을 설명해 볼 수 있다.

“…… 신라에서 왕호가 거서간(居西干), 차차웅(次次雄), 니사금(尼師今) 등의 신라 방언으로 표현되었는데 최치원과 같은 유학자는 이것이 야비하다고 하여 그의 「제왕 년대력」에서 왕(王)으로 고쳤다. 김부식은 지증 마립간(智證麻立干) 조에서 왕호를 방언으로 기록하는 것이 중국의 좌전(左傳), 한서(漢書)에서도 흉노(匈奴)의 방언을 있는 그대로 기록한 사실을 들어 신라의 사실을 기록함에 있어서 신라 방언을 쓰는 것이 당연함을 주장하였다.”8

이 글은 당나라에 유학하여 유교적 신념체계에 투철한 지식인이 된 최치원이 자신에게 체화된 유교적인 기준을 과신한 나머지 신라 문화 전통을 유교문화를 기준으로 재단하려 하였던 반면, 김부식은, 그 자신은 유교적 신념체계에 투철하였을 듯함에도, 『삼국사기』를 편찬하면서 자신의 내면에 신념화된 유교에 입각하여 신라 문화 전통을 변형시키는 일을 하지 않았다는 비평을 담고 있다. 자기 확신을 가지는 것 자체가 비난받을 일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세계의 변화에 따라 그 확신을 성찰하지 않는다면, 확신은 과신(過信) 즉 지나친 믿음이 되어 큰 부작용을 일으킬 수도 있다.

자기객관화는, 자기 과신에 대한 반성적 사고일 뿐만 아니라, 자기 내면으로만 움츠러드는 자기연민과 열등감의 부작용에서 벗어날 수 있는 계기가 되어주기도 할 것이다. 다시 『삼국사기』 ‘시조 혁거세 거서간’으로 돌아가서 그것을 다시 읽어보아도, 그것을 신라가 형성 초기부터 도덕적으로 우월한 정치체였고 박혁거세가 위대한 군왕이었다는 것을 강조하는 과장된 미화의 기록으로 볼 수 있는 여지가 다분하다. 그러나 앞서 몇 가지 비교를 통하여 파악한 바에 따르면 그 기록은 한 국가의 형성 초기 단계를 알려주는 것이기도 하다. 그리고 여기에, 앞서 시도해 본 바와 같이, 중국사를 공시적으로 비교하는 방법에 의한 읽기를 더하여 보면, 주변의 강대국에서 일어나는 변화와 연결되어 있으면서도 상대적으로 충분히 독립되어 있었던 신라 국가 형성 초기의 모습을 상상할 수 있었다.

비단 중국사뿐만 아니라 중앙 유라시아사·일본사·세계사 등 다양한 역사들 속에서, 『삼국사기』 속 특정 국면이나 사건과 유사한 ‘다른 역사’를 찾아 비교하고, 이에 앞서 시도하였던 공시적 비교도 더한다면, 『삼국사기』 읽기는 곧 세계사 입체적으로 읽기가 될 것이고, 지금 여기의 세계 변화 속에서 나를 적절히 자리매김하여 과대망상과 자기비하의 양극단을 피할 수 있는 계기도 되어줄 듯하다.


  1. [네이버 지식백과] 시조 혁거세 거서간 [始祖赫居世居西干] (원문과 함께 읽는 삼국사기, 2012. 8. 20., 김부식, 박장렬, 김태주, 박진형, 정영호, 조규남, 김현)에 따르면, 재위기간은 BC 57년 ~ AD 4년이다.

  2. 포(匏)라는 한자는 박을 뜻한다. ‘호’라고 발음하기도 한다. 한편 호(瓠)라는 한자는 표주박을 뜻하며, 포(匏)라는 한자 대신 호(瓠)라는 한자가 쓰여있는 『삼국사기』 판본도 있다.

  3. [네이버 지식백과] 시조 혁거세 거서간 [始祖赫居世居西干]

  4. 고조선을 말한다.

  5. [네이버 지식백과] 시조 혁거세 거서간 [始祖赫居世居西干]

  6. [네이버 지식백과] 시조 혁거세 거서간 [始祖赫居世居西干]

  7. [네이버 지식백과] 시조 혁거세 거서간 [始祖赫居世居西干]

  8. 고전 연구 출판 위원회, 「삼국 사기 해제」, 조선 민주주의 인민 공화국 과학원 고전 연구실(번역편찬), 『삼국 사기(三國史記)』 상, 조선 민주주의 인민 공화국 과학원, 1958, 4쪽.

이유진

1979년 이후 정약용의 역사철학과 정치철학을 연구하고 있다.
1988년 8월부터 2018년 7월까지 대학에서 철학을 강의하였다.
규범과 가치의 논의에 도움이 될 만한 일을 하고 싶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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