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철학 조각모음] 한국적 수양은 어떻게 만들어졌는가?

고대 그리스를 발원지로 하는 철학이 비판과 반성의 태도를 견지하여온 것에 대비되게, 한국사상을 이루는 다양한 흐름들은 수양과 깨달음을 핵심으로 한다고 볼 수 있다. 그 가운데 수양은, 깊은 산 속에 숨어 도를 닦는 것인 양 세간에 알려지기도 하였으나, 실제로는 참회와 도덕적 실천을 적극적으로 행하고 권하는 행위라는 주장도 있다.

수양(修養)[development/cultivation]은 몸과 마음을 단련하여 능력·품성·지식·도덕심 등을 기르는 일이라고 할 수 있다. 더 나은 삶을 위한 이와 같은 노력은 동서고금의 대부분의 사상에서 다양한 형태로 나타났다. 지금 여기에서 성행하고 있는 자기계발[self cultivation]도 수양의 한 예로 볼 수 있다. 한국과 같이 불교·유교·노장사상이 큰 영향력을 가졌던 문화권에서는 수양이 사상과 학문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여왔다.

늙지 않고 오래살기

늙지않고 오래살기[불로장생(不老長生)]위한 노력이 아마도 가장 먼저 등장한 수양의 예일 것 같다. 이는 유한성을 자각하고 극복하려는 노력이라고 할 수 있다. 많은 사람들이 이런 노력을 하여왔고 이것이 문화 발달의 동력으로 작용하기도 한 듯하다. 최근 많이 보이고 있는 저속노화(低速老化)를 이 범주에 속하는 것의 예로 들 수 있을 듯하다. 피상적으로만 보면, 이런 종류의 수양은 내부의 힘을 강화하는 것과 외부의 힘을 끌어들이는 것으로 크게 나눌 수 있을 듯 보인다;

① 내부의 힘을 강화하는 것:

– 신체 단련(鍛鍊)

– 기공을 수련해서 내단을 만드는 연단(煉丹)

– 다양한 방면의 공부(工夫)

② 외부의 힘을 끌어들이는 것:

– 몸에 좋은 음식을 가려먹음

– 금(金), 석(石) 등의 광물을 원료로 삼아 일정한 방법으로 제련[연단(煉丹]하여 단약(丹藥)을 만들고 복용하는 연단술(煉丹術)[alchemy/training of active substance]을 실천

– 접신(接神)

– 신 내림[강신(降神)]을 받음

① 내부의 힘을 강화하는 것과 ② 외부의 힘을 끌어들이는 것 둘 다 명백한 한계를 가지는 것들이지만, 늙지 않고 오래살기에 대한 바람이 남아있는 이상 둘 다, 변화된 양태로라도 지속되며 여러 사람들이 실천하는 것으로 남을 것이다. 오늘날에도 이런 원시적인 수양론을 답습하는 사람들은 쉽게 찾아볼 수 있다.

궁극적 실재를 믿거나 내재화함

이들 가운데 특히 ‘접신(接神)’과 ‘신 내림[강신(降神)]을 받음’은 신의 힘에 의지하려는 시도라 할 수 있다. 사람들은 불안정적이며 불완전하며 유한하여 한정된 시간동안 한정된 공간만을 점유하였다가 사라질 수밖에 없다. 이러한 사람의 반대개념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 ‘궁극적 실재’ 즉 신(神)이다. 유한한 인간은 자신의 한계를 메우기 위하여 이 궁극적 실재를 요청하였던 듯하다. 그것 또한 외부의 힘이었지만, 그것은 불안정적이며 불완전하며 유한한 사람과 극적으로 대비되는 안정적이며 완전하며 경우에 따라서는 그 속성에 있어서 한정되지 않는[무한한] 실재로 상정되거나 그런 실재라는 믿음의 대상이었다. 많은 사람들이 그런 궁극적 실재의 존재를 믿고 그에 의지함으로써 유한성을 극복하려고하고 있던 때, 어떤 사람들은 그 궁극적 실재와 자신들이 같은 질서 속에 함께 있는 것일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이는 궁극적 실재의 내재화라고 할 수 있다. 『도덕경』에 보이는 다음 구절이 그 예라고 할 수 있다.

도는 항상 함이 없으나[無爲] 하지 않음이 없다. 제후나 제왕이 만약 이를 능히 지킬 수 있으면 만물이 장차 스스로 화한다[自化].1

여기에 보이는 무위(無爲)에 대하여 어떤 주석가는 자연을 따름[순자연(順自然)]이라고 설명하였다. 여기에서 자연을 글자 그대로 풀면 ‘스스로 그러함’이다. 원문과 주석을 결합하면 ‘항상 함이 없음은 스스로 그러함을 따름이다’라는 주장을 만들어낼 수 있다. 이를 거칠게 의역하면 다음과 같다.

‘이미 작동하고 있는 세계의 질서를 따르기 위해서는 자꾸 뭔가를 일부러 하는 짓은 말아야 한다.’

여기에서 이미 작동하고 있는 세계의 질서에 대한 설명은 충분치 못하였다. 그러나 이미 존재하는 질서에 부합되도록 함 즉 그렇게 수양함으로 해서 삶의 안정을 찾을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은 분명해 보인다. 그리고, 어떤 사람들은 세계의 질서가 자신 속에 깃들어있다는 믿음을 가지는 것으로 한 걸음 더 나아간다. 유교경전 『대학』에서는 사람의 내면에 밝은 덕[명덕(明德)]이 이미 들어있으며 최고의 학문[대학(大學)]은 그 밝은 덕을 밝히는 것이라고 했다. 동학에서는 사람의 마음 속에 하늘이 깃들어있다[인내천(人乃天)]고 하고 사람 섬기기를 하늘 섬기듯 하라[사인여천(事人如天)]고 했으며, 사람이 그렇게 귀한 그의 마음을 지키는 것[수심(守心)]을 수양의 시작이자 핵심으로 보았다. 그것을 신이라 하든, 궁극적 실재라 하든, 세계의 질서라 하든, 그것을 밖에 있는 대상으로서 믿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내 속에 깃들어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어떤 연구자는 이 단계에 이르러 수양의 가능성이 내 몸에 쉽게 지닐 수 있는[portable] 것이 되었다고 말하기도 하였다. 이렇게 본다면 궁극적 실재를 내재화하는 것은, 어려운 일로 볼 수도 있지만, 수양을 모두에게 가능한 것으로 만들어주는 것으로 볼 수도 있다.

언제 어디서 누구에게나 TPO에 부합되게 행동할 수 있도록 함

한편 『논어』에는 강조점이 조금 다른 수양의 최고 경지가 제시되어있다.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나는 열다섯에 학문에 뜻을 두었고, 서른 살에 확립하였으며, 마흔 살에 혹하지 아니하였고, 쉰 살에 천명을 알았고, 예순 살에 귀가 순했고, 일흔 살에 마음이 하고자 하는 바를 따르지만 법도에 넘지 않았다.”2

여기에서 ‘마음이 하고자 하는 바를 따르지만 법도에 넘지 않았다’는 것은 모든 행위가 TPO3에 부합된다는 말에 다름 아니다. 단순하고 평범해 보이는 이 말은 평생을 인간관계 속에서 살아가야하는 인간이 수양의 최고 목표로 삼을 만한 것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논어』가 유통되기 시작한 이후 긴 역사가 흐르면서 유교의 수양론은 점차 복잡한 체계가 되었지만, 이 ‘마음이 하고자 하는 바를 따르지만 법도에 넘지 않는’ 경지는 모든 유교 수양론의 공통된 목표였다고 할 수 있다. 사람이 살아가는 데 있어서, 평생 다양한 인간관계 속에서 살아가야 한다는 것은 물적 조건 못지않게 중요한 조건이다. 그러니까 수양을 이 조건 속에서 모색한다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유교는 물적 조건보다 이 조건 즉 인간은 타인과의 관계적 삶을 벗어날 수 없다는 현실을 조금 더 많이 중시했던 사상이라고 할 수 있겠다.

참회(懺悔)와 적선(積善)

한국에서의 수양은 산 속에서 도 닦는 것이 아니었다. 적선을 통해 참회하는 도덕적 실천이 수양이었다.
사진출처 :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논어』에 보이는 수양과 마찬가지로 인간관계를 중시하지만 겉모습은 크게 달라 보이는 것이 참회(懺悔)와 적선(積善)을 중심으로 하는 한국불교의 수양이다. 저명한 불교연구가 김상현은 참회(懺悔)를 중시하는 것이 한국불교의 특징인 듯하다고 말하였다. 아닌 게 아니라 김상현이 평생 연구하였던 『삼국유사』를 보면 그 속에 나오는 고승 거의 대부분이 참회에 용맹하게 정진한다. 승려라 하면 속세를 떠난 수도자들일 터인데, 그들이 참회를 한다면 그것은 출가 이전에 쌓은 악업(惡業) 때문일 것이라고 추정할 수 있다. 당연한 추정이다. 그런데 그 승려들이 생각한 시간은 자신의 생애에 국한된 것이 아니었다. 짧게 잡으면 그들의 부모의 생애가 그 시간에 포함되며, 길게 보면 그와 그의 부모가 태어나기 이전에 거쳤던 윤회가 진행된 무한히 긴 시간[억겁(億劫)]이 그 시간에 포함된다. 참회는 그 긴 시간 동안 그와 그의 부모가 쌓은 악업에 관한 것이다. 그 참회는 더 나은 내세를 기약하여 업(業)이 만든 장애물을 걷어내서[업장소멸(業障消滅)] 해탈을 앞당기려는 노력이기도 하지만, 현세에서 행할 때 그것은 현실 속에서 보다 도덕적인 자가 되기 위한 수양이기도 하고 모든 사람에게 도덕적인 삶을 권하는 계기가 되어주는 모범 역할을 할 수도 있었던 것이다. 그 과정을 통하여 그 자신도 선업을 쌓은 것[적선(積善)]이겠지만, 그의 수양은 그것에 감화된 사람들 모두가 각자 힘껏 적선에 나서도록 한 것처럼, 『삼국유사』의 몇 대목은 암시하였다. 여기에서 하나 더 특이한 것은 그 승려가 자신뿐만 아니라 부모의 업에 관해서도 참회한 것으로 기록되어있다는 것이다. 불교의 삼세인과(三世因果)는 과거·현재·미래를 끊임없이 이어지는 원인과 결과로 본다. 부모 자식의 관계도 그 인과에 포함되며 부모는 나를 세상에 태어나게 하여줌으로써 깨달음[각(覺)]을 이룰 수 있는 계기를 준 사람인 것이다. 그런 부모를 보살피는 마음[효(孝)]을 가지는 것은 선업(善業) 짓기의 최우선이자 최소한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만약 한국불교가 이러한 것이라면, 한국불교는 출세간의 종교이면서도, 한국불교의 수양은, 효를 중시하면서 자신의 잘못을 삼세를 통틀어 참회하고 선업을 쌓는 적선을 통하여 참회를 현실적인 것일 수 있게 하는, 지극히 도덕적인 행위이며, 적극적으로 사회에 널리 도덕적 삶을 권하는 행위라고 할 수 있다.

지금까지, 한국 역사 속에서 수양이란 어떤 것이었나를 살펴보았다. 단적으로 그것은 속세를 등지고 깊은 산 속에서 도를 닦는 것은 아니었다. 참회와 적선을 행하고 권하는 한국불교의 수양은 그 대표적인 예라고 할 수도 있다. 그리고 『논어』가 제시한 ‘마음이 하고자 하는 바를 따르지만 법도에 넘지 않음’이라는 경지 또한, 용어가 완전히 부합되지는 않으나, 참회와 적선을 행하고 권하는 전형적인 예라고 할 수 있다. 어떤 행위도 법도를 어기지 않으려면 주변의 모든 사람들 그리고 그들과 나의 관계를 고려할 자세가 되어있어야 한다. 유교적 교양인들이 입에 올리기를 좋아하는 성찰(省察)이라는 것의 실제는 주변의 모든 사람들 그리고 그들과 나의 관계를 충분히 고려하는 것일 듯하다. 다른 한편으로, 적선이라는 말은 유교적 사회의 처세론의 바탕에 자리잡고있는 말이다. 『주역』 「문언」에 “선행을 쌓은 집안에는 반드시 남는 복이 있다”4는 말이 있다. 유교적 사회에서 기층민중들에게 널리 권장된 처세서인 『명심보감(明心寶鑑)』이 공자에게 가탁(假託)하여 제시한 첫 번째 처세훈(處世訓)은 다음과 같다.

선한 일을 하는 자는 하늘이 복으로서 갚아주고, 악한 일을 하는 자는 하늘이 재앙으로써 갚아주느니라.5

이런 사례들은 적선이라는 것이 유교에서도 중시되었음을 보여준다. 따라서 참회와 적선을 행하고 권하는 수양을 한국불교 속의 수양일 뿐만이 한국철학을 대표하는 수양 개념으로 볼 수도 있을 듯하다. 한국에서 수양은 산 속에서 도를 닦는 신비한 것이 아니었다.


  1. 『道德經』 37: “道常無爲, 而無不爲. 侯王若能守之, 萬物將自化.”

  2. 『論語』 「爲政」 4: “子曰: 吾十有五而志于學, 三十而立, 四十而不惑, 五十而知天命, 六十而耳順, 七十而從心所欲不踰矩.”

  3. Time, Place, Occasion의 약자로, 시간, 장소, 상황을 말한다.

  4. 『周易』 「文言」: “積善之家, 必有餘慶.” 건괘 문언과 곤괘 문언에 동일한 표현이 있다.

  5. 『明心寶鑑』 「繼善」: “子曰; 僞善者, 天報之以福, 僞不善者, 天報之以禍.”

이유진

1979년 이후 정약용의 역사철학과 정치철학을 연구하고 있다.
1988년 8월부터 2018년 7월까지 대학에서 철학을 강의하였다.
규범과 가치의 논의에 도움이 될 만한 일을 하고 싶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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