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양철학 조각모음] ⑪ 연대 범위 넓히기 문제와 맞닥뜨린 서(恕)

기소불욕 물시어인(己所不欲 勿施於人), 역지사지(易地思之), 추기급인(推己及人), 극기복례(克己復禮) 등등 오랜 세월 동안 사람들에게 일상의 지침이 되어주던 말들이 세계의 급격한 변화 속에서 이전과 다르게 자리매김될 듯하다. 서(恕) 개념을 통하여 이런 변화에 대처하는 데 있어서 짚어보아야 할 지점들을 살펴본다.

자기가 하고자 하지 않는 일을 남에게 억지로 시키지 않기

서(恕)는 유교 사상 속에서 큰 비중을 가지는 글자다.사진 출처: wikimedia

유교사상을 대표하는 말이 무엇인지 생각해보면, 충(忠)·효(孝)·인(仁)·의(義)·예(禮) 등이 먼저 떠오른다. 서(恕)는 어떨까? 유교사상을 연구하는 사람들은 충(忠)·효(孝)·인(仁)·의(義)·예(禮) 못지않게 서(恕)를 중시한다. 20세기 말, 미국에서 철학을 공부한 어떤 한국 사람이, 유교를 구성하는 요소 가운데 ‘지금 여기’에서 의미 있게 살아남을 수 있는 것들 가운데 하나로 서(恕)를 꼽기도 하였다.

우선 글자 자체를 살펴보며 추론하여 보자면, 서(恕)는 ‘같을 여(如)’와 ‘마음 심(心)’ 두 글자의 합으로 볼 수 있다. 여심(如心)은 ‘같은 마음’이라고 번역할 수 있다. 이런 추정 결과를 보면 누구나 공감이나 감정이입을 머릿속에 떠올릴 수 있을 듯하다. 이런 글자 서(恕)는 유교 사상 속에서 큰 비중을 가지는 글자다. 유교 경전 속에서 서라는 말이 쓰인 예로는 다음과 같은 것들을 들 수 있다.

(1) “자공(子貢)이 공자에게 “제가 평생 동안 행하여야 할 바를 한 마디로 말씀하여주실 수 있겠습니까” 하고 묻자, 공자는 “그것은 바로 서(恕)이다(其恕乎). 자기가 하고자 하지 않는 일을 남에게 억지로 시키지 말아야 한다(己所不欲 勿施於人)”라고 말하였다.”1

(2) “중궁(仲弓)이 어떻게 하는 것이 인(仁)이냐고 물었다. 공자는 말했다. “문을 나가서 일을 할 때는 마치 중요한 손님을 만나는 것같이 하고, 백성을 부릴 때는 마치 중요한 제사를 받드는 것같이 한다. 자기가 하고자 하지 않는 일을 남에게 억지로 시키지 말아야 한다(己所不欲 勿施於人). 이렇게 한다면 나라에서 일을 하는 가운데도 원망이 없을 것(無怨)이고, 가족생활 가운데서 원망이 없을 것(無怨)이다.” 중궁(仲弓)이 말했다. “제가 비록 총명하지 못하지만 반드시 이 말을 실천하겠습니다.”2

(1)에 의하면 공자는 제자 자공에게 평생 동안 행하여야 할 바를 한 글자[恕]로 압축하여 알려주었을 뿐만 아니라 설명(己所不欲 勿施於人)을 덧붙여주었다. (2)에 의하면 공자는 (1)의 행하여야 할 바를 행함에 따라 사회적으로 기대되는 바(無怨)를 제시한 셈이다. 여기에서 서(恕)는 보편적 적용이 가능한 윤리규범·도덕법칙이라기보다는 행위자가 항상 유지해야 할 태도·마음가짐·행동 방침이라고 해야 할 듯하다. 공자가 제자들에게 권한 행동방침 서(恕)의 실제 내용은 자기가 하고자 하지 않는 일을 남에게 억지로 시키지 않기(己所不欲 勿施於人)이며 그런 방침을 따르는 행동이 나라와 가족에게 가져다주는 바는 원망이 없음(無怨)이 된다. 서(恕)와 원(怨) 사이의 관계가 관심을 끌 듯도 하지만, 이 두 인용문들을 접하는 사람들은 대개 ‘기소불욕 물시어인(己所不欲 勿施於人)’ 즉 ‘자기가 하고자 하지 않는 일을 남에게 억지로 시키지 않기’라는 행동 방침에 가장 큰 관심을 보이는 듯하다. 이 행동 방침을 다음과 같은 말들을 가지고 설명할 수 있다.

(가) 역지사지(易地思之)3: 입장 바꿔 생각하기.

(나) 추기급인(推己及人)4: 나의 마음에서 출발하여 미루어가서 남의 마음에 닿기. 자기를 위하는 마음을 다른 사람에게까지 확장하기.

(다) 극기복례(克己復禮)5: 자기를 이기고 예로 돌아가기. 개인적 욕망을 스스로 통제하며 적절한 행동 방식에서 벗어나지 않기.

(가)는 ‘자기가 하고자 하지 않는 일을 남에게 억지로 시키지 않기’를 아주 쉽게 설명해주는 말 같다. (나)는 ‘자기가 하고자 하지 않는 일을 남에게 억지로 시키지 않기’가 실행되는 과정을 머리 속에 그려볼 수 있게 하여주는 말 같다. 어짊[인(仁)]에 대한 공자의 설명들 가운데 하나이기도 한 (다)는 곧 ‘자기가 하고자 하지 않는 일을 남에게 억지로 시키지 않기’에 대한 설명이기도 하다. (다)가 요구하는 자기를 이김/개인적 욕망을 스스로 통제함[극기(克己)]은 쉽지 않아 보이지만, 이것이 없이는, (가)의 ‘입장 바꿔 생각하기’도, (나)의 ‘미루어가서 남의 마음에 닿기’도, 해 볼 마음을 먹기 어려울 듯하다.

‘같은 마음’이라고 번역하고 나면 그만일 것만 같던 서(恕)라는 글자는 『논어』 속에서는 ‘자기가 하고자 하지 않는 일을 남에게 억지로 시키지 않기’로 정의될 수 있는 의미로 중요하게 사용되었다고 볼 수 있다.

‘~하지 말라로 억압 피하기

‘자기가 하고자 하지 않는 일을 남에게 억지로 시키지 않기’와 유사한 뜻을 가진 것으로 보이는 말이 기독교의 경전인 『신약성서』와 불교의 경전 가운데 하나인 『아함경』에도 나온다고 한다. 이슬람교에서 중요한 것으로 꼽히는 학자 이븐 아라비(Ibn Arabi)도 그런 말을 했다고 한다.

(A)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신약성서』 「마태복음」 7장 12절)

(B)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에게 대접하라.”(『신약성서』 「누가복음」 6장 31절)

(C) “누가 나를 죽이려 하면 나는 좋아하지 않는다. 내가 좋아하지 않는 것이면 남도 그럴 것이다. 그런데 어떻게 남을 죽이겠는가.”(『아함경』 「바뉴다라경」)6

(D) “너 자신이 싫어하는 것을 남에게 행하지 말라. 이것이 곧 율법의 전부이니, 나머지는 주석일 뿐이다.”(이븐 아라비(Ibn Arabi))7

서양에서는 (A)나 (B) 따위를 정리한 “다른 사람이 해 주었으면 하는 행위를 하라(Treat others as one would like others to treat them)”라는 말을 여러 원칙들 가운데 가장 상위의 원칙이라는 의미에서 황금률(黃金律; Golden Rule)이라고 해왔다고 한다.

이 황금률은 ‘~하라’라는 식의 긍정형 권고임에 비하여 ‘자기가 하고자 하지 않는 일을 남에게 억지로 시키지 않기’는 ‘~하지 말라’라는 식의 부정형 권고이다. 이 두 가지 권고 방식을 비교하는 적지 않은 논의가 있다. 그런 논의들 속에는, 긍정형 권고를 선의의 간섭으로 보면서, 그것이 선의에 기반한 것임에도 타자에게 나의 취향을 강요하는 억압이 될 수도 있다고 보는 주장도 있다고 한다. 왜냐하면 사람들의 외양과 말투, 행동이 모두 비슷하다고 해서 그들의 욕망도 똑같을 것이라고 가정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8 이러한 주장에 따르면 ‘자기가 하고자 하지 않는 일을 남에게 억지로 시키지 말라’와 같은 부정형 권고가 “자기가 서고자 하면 남도 서게 하고, 자기가 이루고자 하면 남도 이루게 하라”9 따위의 긍정형 권고보다 억압이라는 부작용을 덜 수반한다고 할 수 있게 된다.

연대 범위 넓히기 문제와 맞닥뜨린 서(恕)

그런데 이러한 주장은 유교 사상의 대전제 가운데 하나라고 할 수 있는 동류(同類) 의식이 ‘자기가 하고자 하지 않는 일을 남에게 억지로 시키지 않기’라는 행동 방침의 배후에 놓여있음을 충분히 고려하지 않았다는 지적을 피할 수 없을 듯하다.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천성은 비슷하지만 습성은 다르다.””10 『논어(論語)』 「양화(陽貨)」에 보이는 말이다. 유교 사상은 사람들 사이의 차이보다는 유사성을 압도적으로 중시하고 긍정한다. 수신·제가·치국·평천하가 차례로 늘어서 있는 것에서 볼 수 있듯, 유교 사상에서는 가장 유사성이 큰 인간관계인 가족관계의 안정[제가(濟家)]을 세계 전체의 평안[평천하(平天下)]의 조건으로 본다. 그리고, 인류가 모두 동류(同類)라는 의식이, 달리 말하자면 공자의 권위에 의해서 정당화되기도 하는 사람들 모두의 천성이 비슷하다[성상근(性相近)]는 믿음이, 그런 가족관계의 안정이 가능하리라고 기대하는 심리의 기저에 깔려있었다고 할 수 있다.

유교 사상과 그 사상을 중심으로 하는 유교적 사회에서, 사상은 모두의 천성이 비슷하다는 믿음을 제시 유포하고, 가족제도와 가족정서는 ‘비슷함’을 강력하게 증폭하여, 사람들이 상호 의존 관계(reciprocity11) 속에서 살아가야 한다는 마음가짐이 유교적 사회 구성원들의 마음속을 일관(一貫)하게 만들어, 그 마음가짐이 ‘수신-제가-치국-평천하’라고 집약 재구성할 수 있는 구조 혹은 체제를 일관(一貫)하게 만들었다고 볼 수 있다. 이런 구조 혹은 체제 속에서 사람들은 ‘개인적 욕망을 스스로 통제하며 관계적 삶을 이전처럼 유지하는 데 적절한 행동방식에서 벗어나지 않기[극기복례(克己復禮)]’를 가능하게 하는 이타주의(alyruism12)를 일상화하거나, 그렇지 못하다면, 자신이 이타주의적인 인간인 것처럼 꾸며대기라도 해야 하였을 것이다. 이러한 행위자들의 삶이 지속되는 구조 혹은 체제를 채우고 있는 일상사를 허례허식(虛禮虛飾)이라고 일축할 수도 있겠지만, 한편으로 이 구조 혹은 체제[유교적 사회]는, 오래 지속되었을 뿐만 아니라, 그것이 의지하였던 조건이 소멸되다시피 하여 판이한 조건이 생성되었음에도, 그 조건 속에서 새삼 긍정적으로 재평가되고 있다. 20세기 말, 미국에서 철학을 공부한 어떤 한국 사람이, 유교를 구성하는 요소 가운데 ‘지금 여기’에서 의미있게 살아남을 수 있는 것들 가운데 하나로 서(恕)를 꼽기도 하였다. 21세기에도 이와 유사한 평가가 다양한 지역에서 다양한 사람들에 의하여 제기되고 있다. 그러나, 오늘날 서(恕)가 보편적으로 채택 가능한 행동 방침이 되기 위하여 가야 할 길은 순탄하지 않다.

유교 사상에서 서(恕)는 한 가지 형태의 가족제도에만 최적화된 것이라고 할 수 있으므로, 다양한 형태의 가족제도들이 혼재하는 지금의 세계에서, 보편적으로 적용되기까지 많은 난관을 통과하여야할 듯하다. 유교 사상과 결합되어왔던 그 한 가지 형태의 가족제도가 변형되지 않고 앞으로도 이전처럼 유지될 것이라고 장담하기 어렵다.

‘전통적’ 인간 주체와 휴머노이드 주체 사이에서 경제적 이해관계가 엇갈리거나 정치적 갈등이 빚어질 수도 있을 듯하다. 사진 출처: Andy Kelly

서(恕)라는 행동 방침을 수행하여야할 주체는 이미 오래 전부터 내외적 요인에 따라 변형되어왔다. 외부기억장치의 사용에까지 이른 도구의 사용, 각종 능력의 증강을 한 신체의 변형, 각종 능력 증진을 위한 자기계발 등등 주체의 변형은 끊임없이 이어져왔다. 그러한 변형의 과정과 함께하면서, 서(恕)는 일상 언어였다가, 유교 사상의 주요 개념으로 재정의되고, 꽤 오랜 시간 동안 바람직한 행동 방침으로 권장되면서,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른바 황금률이 오늘도 주요한 행동 지침으로 이야기되고 있는 것이 서(恕)가 아직 누구에겐가는 행동 지침이 되면서 사회적 기능을 이어오고 있음을 보여주는 증거일 것이다. 그렇지만 지금 여기에서 벌어지고 있는 변형의 진폭은 이전의 역사에서는 예를 찾을 수 없을 정도로 크다고 해야 할 듯하다.

처음 기독교의 『성경』을 중국어문으로 번역할 때, 예수회 선교사들은 forgiveness를 서(恕)로 번역하였다고 한다. 그들은 용서(容恕)라는 말을 통하여 서(恕)를 이해하였던 듯하다. 그 번역자들이 가진 궁극적 실재에 대한 믿음을 가지고 있었던 선교사들로서는 용서와 무관하게 서(恕)를 이해하기 어려웠던 듯하다. 그런 일이 있은 후 지금까지도, 서양 사람들이 서(恕)를 이해하는 것은 쉽지만은 않을 것이다. 여기에서 볼 수 있듯 동서간의 상호 이해도 아직 원활하지 않아서 해소해야 할 문제상황으로 남아있지만, 다양한 주체의 변형과 휴머노이드 주체의 정교화와 다양화는 서(恕)가 맞딱뜨린 여타의 문제들을 부차적인 것들로 만들어버림을 넘어서, 기소불욕 물시어인(己所不欲 勿施於人)과 역지사지(易地思之)와 추기급인(推己及人)과 극기복례(克己復禮) 자체를 가능하게 하는 정동(情動; affect)에 대한 느낌 자체를 무색하게 만들고 있는 것 같다.

이렇듯 지금 여기에서 서(恕)가 맞딱드리고 있는 어려운 문제들 가운데 두드러진 하나는 가장 연대 범위 넓히기 문제라고 할 수 있다. ‘reciprocity’(상호 의존 관계)라고 번역되었던 데에서도 볼 수 있듯, 서(恕)는 인간관계와 관련된 행동 지침이었다. 관계에서는 형제애[fraternity(영)/fraternité(불)]를 기반으로 하는 관계가 작지 않은 비중을 차지하여 왔으며 그 비중은 점차 커져가고 있다. 자유[liberty/Liberté]와 평등[equality/Égalité]이 중시되어 온 역사에 대한 반작용만으로도 이러한 현상은 이해될 수 있지만, 이에 더하여 세계가 빠른 속도로 예전에 비하여 복합적으로 복잡화되고 있기 때문인 것으로 이해될 수도 있다. 이런 상황에서 휴머노이드의 정교화는 서(恕)를 행동 방침으로 존중하려는 사람들에게 휴머노이드 따위의 것들과 어떻게 연대(solidarity)관계를 맺을 것인지에 관하여 입장을 정할 것을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휴머노이드들에게까지 연대 범위를 넓혀야만 할 때가 곧 올 것만 같은 나날들이 지나가고 있다. 그때 어떤 방식과 깊이와 강도와 범위로 연대할 것인지에 대한 단서를 서(恕)를 둘러싼 기존의 논의들 속에서 더 치열하게 찾아보아야 할 시점 같다.


  1. 『論語』 「衛靈公」 “子貢 問曰 有一言而可以終身行之者乎 子曰 其恕乎 己所不欲 勿施於人”

  2. 『論語』 「顔淵」 “仲弓問仁 子曰 出門如見大賓 使民如承大祭 己所不欲 勿施於人 在邦無怨 在家無怨 仲弓曰 雍雖不敏 請事斯語矣”

  3. 『孟子』 「離婁」下에 있는 말이다.

  4. 『晏子春秋』 「諫」에 있는 말이다.

  5. 『論語』 「顔淵」에 있는 말이다.

  6. 이향준, 『서, 인간의 징검다리』, 마농지, 2020, 10쪽에서 재인용.

  7. 이향준, 『서, 인간의 징검다리』, 마농지, 2020, 10쪽에서 재인용.

  8. 이향준, 『서, 인간의 징검다리』, 마농지, 2020, 213쪽 참조.

  9. 『論語』 「雍也」 “己欲立而立人 己欲達而達人”

  10. 『論語』 「陽貨」 “子曰 性相近也 習相遠也”

  11. 서(恕)를 reciprocity[상호 의존 관계]로 번역하기도 한다.

  12. 서(恕)를 altruism[이타주의]으로 번역하기도 한다.

이유진

1979년 이후 정약용의 역사철학과 정치철학을 연구하고 있다.
1988년 8월부터 2018년 7월까지 대학에서 철학을 강의하였다.
규범과 가치의 논의에 도움이 될 만한 일을 하고 싶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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