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을, 가깝지도 멀지도 않은 거리

마을에서의 거리 조절 에피소드 세 개를 준비했습니다. 첫 번째는 한 마을에서도 내집단과 외집단의 구분이 필요하다는 이야기입니다. 두 번째는 마을에서 발생한 문제 역시 일상의 문제나 관계의 문제가 아니라 절차와 규범에 따라 대응해야 한다는 이야기입니다. 첫 번째, 두 번째가 ‘마을이라고 해도’로 시작하는 이야기라면 세 번째는 ‘마을이기에’로 시작하는 이야기입니다. 마을이기에, 몹시 어려운 문제가 아니라면 관계 회복의 필요성이 생기고, 그 때문에 회복의 가능성도 높아진다는 이야기입니다.

거주하는 지역에서, 지역을 키워드로 삼는 일을 하고 싶던 차에 은평구 주민자치회 지원관이 되었습니다. 은평구 주민자치사업단은 총 16개 행정 동을 대상으로 8명의 지원관을 2개 동으로 파견하여 실무 지원과 모니터링을 하도록 합니다. 파견할 동을 결정하는 과정에서 필자는 당연히(?) 사는 동 하나와 바로 옆 동네에 자원하겠다고 했습니다. 출퇴근 거리도 가깝고, 내가 사는 동네에서 일하면 동기 부여도 더 잘 되리라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은평구자치사업단에서는 자원한 동과 다른 동으로 파견을 결정했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아주 다행스러운 결정이 아닐 수 없습니다. 얼마나 다행이게요.

지원관의 업무를 관리하는 사업단에서 지원관의 동 배치를 거주하는 동과 분리한 데에는 다 이유가 있었습니다. 일하다 보면 언제나 좋은 일만 생기지는 않기에 지원관의 생활 영역과 일하는 영역 사이에 약간의 거리를 두도록 했습니다. 물리적 거리로 보자면, 현재 집과 직장의 거리는 약 3km입니다. 만약 거주하는 동에서 일했다면 약 300m 거리만 두고 출퇴근을 했을 겁니다. 5분 만에 출퇴근을 할 수 있다니 너무 편할 거 같긴 합니다. 하지만 퇴근 후에도, 주말에도, 집 근처 식당 어디에서도, 집 근처 카페 어디에서도 일하며 만났던 분을 만나는 게 썩 좋지만은 않을 것 같습니다.

제가 들려드릴 이야기는 마을에서의 거리 조절에 관한 경험담입니다. ‘거리 조절’은 필자에게 어려운 인생 과제이기도 하고, 마을에서 일할 때도 날마다 어렵게 느끼는 숙제입니다. 햇수로 2년 동안 마을에서 일하며 깨달은 건 마을 조직도 하나의 집단, 조직이라 여느 조직에서 일어날 법한 일이 일어난다는 점입니다. 그렇지만 마을이라는 특수성이 있긴 한 것 같습니다. 마을에서 직장을 다니면, 직장 동료와 일하는 현장에서 만나는 사람이 대부분 동네에서 쉽사리 만날 수 있는 지역 주민이라 사는 곳과 일하는 곳이 다를 때엔 생각해보지 못했던 상황을 염두에 두게 됩니다. 마을에서도 일어날 수 있는 ‘거리 조절’ 문제, 마을이기에 해결할 수 있을까요?

Episode 1. 마을에서도 외집단과 구분되는 내집단이 필요해!

은평에는 2018년부터 활동을 시작한 ‘은평시스터즈’라는 ‘은평구 1인 가구 여성 커뮤니티’가 있습니다. 최근 인스타그램에서 2022년 구성원을 모집하는 홍보물을 보았습니다. 홍보물 문구 중에 기억에 남는 내용이 있습니다. 혼자 살지만, 동네에서 연결되고 싶은 사람, 토착민 커뮤니티에서는 수평적인 관계 만들기가 어려웠던 사람, 나와 형태에 맞는 커뮤니티를 원하는 사람을 찾는다는 내용이었습니다. 듣는 토착민 입장에서는 기분 나쁠 내용일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조금만 헤아려 보면 이해할 수 있는 얘기가 아닐까 합니다.

한 마을에도 다양한 정체성을 띤 사람이 살아갑니다. 그래서 여러 집단이 구성될 수 있는데, 이렇게 집단이 여럿이라고 해서 무조건 갈등이 증폭되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여러 집단이 있을 때, 따로 또 같이 공존을 모색하기에 좋을 수 있습니다. 준거집단이 있으면 외집단과 만나 협의, 협력, 일시적 연대 등을 도모할 논의 절차를 마련할 수 있기에 그렇습니다. 그런데 내집단이 없이 홀로 다른 사람이 모인 외집단에 들어가야 한다면 어떨까요? 오히려 그런 상황에 부닥칠 때, 외집단에 배타적으로 될 가능성이 커지지 않을까요?

또, 준거집단이 있어야 외집단에서 이해받지 못해 자극받은 상태에서도 회복하고, 다시 마을에서 함께 살 힘을 낼 수 있습니다. 마을에서뿐 아니라 어디에서든 동의하기 어려운 자극에 노출될 일이 많습니다. 그런데 그렇다고 그때마다 대응하는 게 좋은 해결책이라고만 할 수는 없습니다. 중요한 건 자신이 소진되지 않고, 장기적으로 대응할 수 있는 역량입니다. 회복력을 충전할 방법이 바로 내집단에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죠.

Episode 2. 마을의 문제 역시 구조적으로 접근해야 해!

대학원 재학 시절, 교내 성평등센터를 찾은 일이 있습니다. 성차별하는 교수에게 대응하고 싶었고, 그러려면 도움이 필요했습니다. 당시 필자는 성평등센터에서 상담과 치유, 실제 대응까지 많은 도움을 받았습니다. 이때, 경험한 건 개인이 희생되지 않고도, 구조적으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점이었습니다. 성평등센터가 구조적인 문제 해결 기구로서 역할을 잘했다고 생각하는 점 두 가지가 있습니다.

첫 번째는 홍보가 잘 되었다는 점입니다. 성평등센터를 알리고, 학교라는 특수한 공간에서 발생하는 사건의 사례, 상담과 신고 방법, 사건 지원 절차를 한눈에 볼 수 있는 홍보물이 교내 곳곳에 게시되어 있었습니다. 그래서 사건을 겪기 전부터 이미 성평등센터에 관한 정보를 알고 있었고, 당황스러운 상황에서도 제일 먼저 스마트폰을 켜고 신고 방법을 찾아보았습니다.

두 번째, 센터의 실질적인 영향력이었습니다. 센터로 상담 접수를 하려면 양식에 따라 사실 정보를 적은 신청서를 제출해야 했습니다. 그리고 사건 처리의 규정에 따라 상담 접수를 한 센터 담당자는 신고인과 긴밀히 소통하고, 소통한 내용으로 피신고인에게 연락을 취했습니다. 피신고인은 이에 응해야 했습니다. 만약 피신고인이 신고인과 센터가 정리한 내용에 따르지 않으면 다른 방식의 책임을 져야 했습니다. 이 사건을 계기로 성평등센터와 같은 상설 기구가 있으면 신속한 해결, 책임 있는 개입이 가능하다는 점을 배웠습니다.

마을에서도 문제에 대응하는 영향력 있는 구조가 필요합니다. 물론, 마을이라고 하는 추상적인 단위에서는 권한과 책임의 범위를 특정하기 어려워 기구를 마련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마을의 각 집단이나 조직, 혹은 그 연대 조직에서는 문제에 대응할 수 있는 체계를 마련하는 노력을 기울일 수 있습니다. 사건 처리가 어렵다면 발생 가능한 문제를 염두에 두고, 예방 교육, 상담 체계 마련을 해나갈 수도 있을 겁니다. 마을에서는 서로 가까운 사이에서 발생하는 문제에 체계적으로 접근하기를 간과하기 쉽습니다. 좋을 때야 문제가 없지만 어떻게든 문제는 발생할 수 있기에 할 수 있는 만큼의 최선을 다하기 위해서는 문제를 객관적으로 다룰 수 있는 체계가 필요합니다.

그 사안이 중요한 것일수록 개인들 사이에서 사적으로 다퉈지기보다는 가능한 한 공적인 의제로 다뤄지길 바란다. 그래야 ‘책임 있는 변화’를 만들 수 있다고 본다.

〈정치관계법〉 일반을 포함해, 모든 공적 제도와 기구들은 적대와 갈등을 조정하고 다룰 절차와 규범을 갖고 있다. 공적 영향력을 갖는 곳이라면 예외 없이 분쟁이 있고 그것을 다룰 절차와 규범을 부과 받는다.

‘사적 갈등의 공공 정책화’는 민주주의의 다른 이름이라고 할 수 있다.

박상훈, 2018. 『청와대 정부』. 후마니타스[전자책]

Episode 3. 마을에서 사이가 나쁜 사람과 계속 같이 살아야 한다면

마을에서 마주치고 싶지 않은 사람이 없는 사람이 있을까요? 있다면, 부럽습니다. 필자는 최소 다섯은 최대한 피하고 싶습니다. 이 다섯은 일로 연결된 사이, 친구 사이였다가 갈등이 생겨서 피하고 싶게 된 그런 인연입니다. 그런데 정말, 마을이라 그런지 종종 마주치게 됩니다.

한 마을에도 다양한 정체성을 띤 사람이 살아갑니다. 사진출처 : Magda Ehlers https://www.pexels.com/ko-kr/photo/1319572/
한 마을에도 다양한 정체성을 띤 사람이 살아갑니다.
사진출처 : Magda Ehlers

시간 역순으로 마을에서 마주친, 피하고 싶었던 인연 이야기를 해보겠습니다. 가장 최근에는 출근길에 일로 만났던 동네 서점 사장님을 마주쳤습니다. 작년에는 횡단보도 신호를 기다리는 사장님의 옆모습을 지나쳐 갔지만, 이번엔 정면으로 마주 보고 걷게 되어 피할 길이 없었습니다. 계산된 건 아니었는데, 인사를 드렸고, 사장님은 못 알아보더니 찰나에 알아채고는 안부 인사를 건네주셨습니다. 그렇게 몇 마디 대화하고 헤어졌는데, 속이 다 시원했습니다. 언젠간 마주치게 될지 모른다는 생각에 조마조마했는데, 막상 만나 반갑게 인사를 나누니 마음이 아주 편안했습니다.

1월 중순에는 직접적인 갈등은 없었지만, 필자를 싫어하는 느낌을 잔뜩 주는 분을 마주쳤습니다. 이번에는 차별금지법제정연대 행사에서였습니다. 마주치리라 예상은 했습니다. 이번에 처음 마주친 건 아니고, 작년부터 치면 한 다섯 번은 마주쳤습니다. 그때마다 필자는 늘 어색한 묵례를 합니다. 그러면 상대는 늘 고개를 돌립니다. 그래도 계속 인사를 건네는 건 언젠가는 관계 회복이 될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 때문입니다. 뭐 꼭 그렇게 되지 않는다고 해도 못 본 척하기가 더 어려워 인사를 합니다. 또 같은 갈등으로 사이가 나쁜 사람이 더 있는데, 마주치면 역시나 묵례로 인사를 합니다. 역시 이 상대도 인사를 받아주지는 않지만, 인사를 하는 편이 속이 편합니다.

그리고 친구 사이인 둘이 있습니다. 12월이었습니다. 퇴근길에 저 옆쪽에서 통화하는 친구를 봤습니다. 다행히 서로 거리가 있어서 못 본 척 지나쳐 올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또 다른 친구를 작년 가을, 마트에서 마주쳤습니다. 이 친구와는 그전에도 몇 번 마주쳐 왔습니다. 장을 보고 횡단보도를 건너다가 두 번이나 마주쳤고, 한 번은 너무 놀라서 꺅 소리도 질렀습니다. 이번에는 마트 코너를 빠져나오면서 마주쳤는데, 자연스러운 느낌으로 잠시 근황을 나누고 헤어졌습니다.

아주 심각한 문제를 겪은 사이가 아니라면 마을에서는 관계 회복의 가능성이 같은 마을에서 살지 않는 사이보다 더 클 거라 생각합니다. 가뜩이나 비슷한 지향으로 한 마을에서 살아가는 사이라면 더 그렇지 않을까요? 같은 지역에서 살지만 않았더라도 이렇게 관계 회복의 가능성을 크게 염두에 두진 않았을 겁니다.

우리는 모두 마을에 삽니다. 어떤 조건과 심정에 따라 그 마을에 더 소속감을 느끼기도 하고 그렇지 않기도 합니다. 마을에서 지내는 방식에 따라 영향을 받는 내용이 달라지고, 대응도 달라집니다. 그래서 마을이라 어떻다거나, 마을이 아니라서 어떻다고 말하기가 어렵습니다. 최근, 2년 동안 그런 적이 없는데, ‘마을에 사는 게 참 갑갑하다’라고 생각했던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사실은 마을에 사는 게 원래 그런 게 아니라 ‘거리 조절’이 좀 잘 안 되던 차에 느낀 감정이라고 설명하는 게 더 정확할 겁니다. 최근 지역에서 여러 일을 벌이고, 또 수많은 반응을 접하게 되어 좀 지쳤던 상태였습니다. 이럴 때, ‘거리 조절’이 필요합니다. 생각해본 거리 조절은 다른 지역에서 약속 잡기, 다른 지역에 사는 인연 만나기입니다. 우리는 ‘마을이라서’ 갑갑한 게 아니라 마을에서 ‘거리 조절을 잘 못 하면’ 갑갑함을 느끼는 게 아닐까요?

참고문헌】

박상훈. 2018. 『청와대 정부』. 후마니타스[전자책].

김유리

녹색 가치를 정치로 실현하는 여러 방법론 가운데 지금 우리에게 필요하고 적절한 방법론이 무엇인지 고심하며 녹색당의 정치인으로 활동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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