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성댁 이야기] ⑤ 가난한 집안의 맏딸과 여동생들의 사연

보성댁의 아버지는 천식을 앓다가 젊은 나이에 세상을 뜬다. 아버지가 살아 계실 때에도 가족은 고생을 했지만 안 계시게 되면서 더 힘든 시간을 보내게 된다. 수녀가 되고 싶었던 보성댁은 아버지도 안 계신 집에 돈 벌러 다녀야 하는 어머니와 어린 동생들을 내버려 두고 갈 수 없어 수녀가 되는 것을 포기한다.

“(외)할아버지는 어쩌다 일찍 돌아가셨어요?”

내 질문에 어머니는 이야기를 시작하셨다.

“여수반란이 일어난 뒤에 그 해에, 말하자믄 여순 반란이 가을에, 초가을엔가 일어났어. 그 반란이. 뭐이냐 할아버지는 음력으로 11월달에 돌아가셌제.”

“어디가 편찮으셔가꼬 돌아가신 거예요?”

“원래 할아버지가 천식이 있었어. 천식이 폐병이나 마찬가지여, 그때는. 그래가꼬 아무리 약을 써도 안 닿아. 지금같이 좋은 약이 없잖아 그때는……. 그렁께로, 그래 가꼬는 마흔아홉에 돌아가셌제. 젊을 때 돌아가셨지. 마흔아홉이라도,”

“그렇게 할아버지가 아프셨으면 생활은 어떻게 했어요?”

“긍께 인자 할머니가 장시를 댕겠제. 보성에서 쌀을 폴아가꼬 회천으로 득량으로 이고 댕김서 그걸로 돈을 샀제. 글고 그 바닷가 동네에서 나는 걸 사가꼬 와서 보성 장에 가서도 팔고 돌아 댕김서도 팔고.”

“할머니가 그러고 다니시면 집안일은 엄마가 하셨겠네요.”

“옴마 그랬다냐. 나가 밥하고 청소하고 빨래하고 아가다 업고 댕기고 했제. 아부지 병구완도 다 내가 하고.”

“엄마는 어려서부터 고생을 타고난 팔자였는 갑소.”

“긍께 말이다. 나가 그렇게 아버지 병구완함서 미음 끼래 디리고 약 다래 디리고 해논께 시집 와서도 느그 아부지 구완을 그렇게나 했제.”

“아버지도 젊어서부터 건강이 안 좋으셨나 봐요.”

“옴마 말도 못 해야. 느그 아부지도 어려서부터 천식끼가 있었제. 총각 때 만주 가서 농사짓고 살았는데 그 동네는 겨울에 엄청 추웠디야. 배깥에서 오줌싸면 그거이 그대로 얼어 버리는 동네였단다. 추운 디서 고생을 해서 긍가 천식이 있었제. 그거 뿐이다냐. 온몸에 먼 부스럼은 그리 많아가꼬 엄청 고생 많이 했제.”

“엄마가 할아버지 병구완하던 실력(?)으로 아부지를 사람 만들어 놓은 거네.”

“나가 느그 아부지랑 삼서 일찍 죽어불까봐 엄청 애썼다. 그래논께 느그 아부지가 팔십살까지 살았냐 안.”

“엄마 정성을 하느님이 알아 주셨는 갑소.”

“긍게, 느그 아부지가 생각보다 오래 살아서 참 다행이었제.”

보성댁은 아픈 아버지를 돌봐야 했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에는 줄줄이 딸린 여동생을 어머니께만 맡길 수 없어 수녀원에 가지 못한다. 가족은 한 인생의 발목을 움켜잡고 쉽사리 놓아주지 않는다. 사진출처 : gunman47
보성댁은 아픈 아버지를 돌봐야 했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에는 줄줄이 딸린 여동생을 어머니께만 맡길 수 없어 수녀원에 가지 못한다. 가족은 한 인생의 발목을 움켜잡고 쉽사리 놓아주지 않는다.
사진출처 : gunman47

“근디 할아버지는 너무 일찍 돌아가셔 부렀네요. 할머니도 참, 할아버지 돌아가셨을 때 슬픈 것도 슬픈 거지만 새끼들 데리고 살 일 생각하믄 참 깝깝하셨겄네요.”

“아 그렁께 나가 수녀원을 갈라고 했는디 할아버지 돌아가신 바람에 수녀원 안 간다 했당께. 엄마 혼자 어린 동생들 놔두고 저거 가기가 도저히 맘이 안 내키드라니까. 나가 별 도움은 안 되지마는 그래도…… 나가 그래도 그렁께는 인자 시집을 와가꼬 인자 살면서 쩌 건네 밭에 인자 가서 밭을 메면 인자 여수 가는 차가 내려가믄 저 차로 울 엄니가 또 쌀을 싣코 여수로 장시하러 갔는가 모르겄다 그 생각에 인자 밭을 멤섬 그것을 느끼고 살다가 칠갑산 노래가 나온께 왜 그리 나 노래냐 싶어가꼬 나가 바로 배워븠당께 나가 칠갑산 노래를 그때게. 저그 머시냐 아리께 주머시드냐 칠갑산 부른 놈이 여수 놈이드만. 주병선이라드냐? 이름이? 근디, 그 놈이 그 노래 불러가꼬 히트쳐븠다냐. 그 노래를 아조 여자들이 너어무나 좋아해가꼬 그 시기에 좋아하게 돼가꼬 있어. 여자들이 그 시기에 다 세상을 모도 그러고 살아노니까 더군다나. 주병선이라 글드라 여수 멀매인디.”

“그럼 할아버지는 집에서 돌아가신 건가? 병원에 안 가시고?”

“항, 보성서, 성당 집이서. 병원에도 별라 가보도 못 해. 나가 임종을 했제. 그 때게 차가 댕기기가 힘들어가꼬 작은 할아버지도 오도 못 했어. 순천허고 보성 댕기는 차가 없었어 차가 없어. 해방 막 된 뒤에.”

“그러믄 엄마하고 할머니하고만 했어?”

“하, 그랬제. 막 교우들이 와 가꼬 멧 사람 와서 거들어가꼬. 그래가꼬 난중에 인자 아니 그때 연락하기가 힘들었든가 어쨌든가 그래가꼬 가별(갑열)이가 왔든가 누가 한나나 왔등가 어쨌등가 그랬을 꺼이다. 난중에 작은 할아버지가 난중에 와 봤제. 그래가꼬 인자 우리가 순천으로 이사감시로 인자 이장허자, 성당 산으로 이장을 허자 그래가꼬는 인자.”

“그럼 처음에는 보성에다 모셔가꼬?”

“이, 이장을 헌디 인자 메똥을 모른다고 날보고 와서 찾아보란디 딱 본께 여거 기여. 앞에다 뭣을 해놨냐믄 인자 성수물을 갖다 뿌리고는 인자 성수병을 거그다 묻어놨어. 교우들은 그런 습관이 있었어 그때는. 딱 그것이 찾은께 그것이 나오드라고 따악 인자 묵주를 갖다가, 지금같이 나무 묵주가 없응께 그때는 뿔로 된 묵주가 있었어. 그걸 손에 쥐어 드맀는디 그 묵주가 옴씬 살아있드라 와. 뼈가 있는 데다, 뿔이라논께. 나무가 아니라 안 썩고, 말하자믄 뿔이라논께로 옴시래미 거가 살아 있어.”

“그럼 할아버지 돌아가시고 몇 년만에 이장을 했는디요?”

“나가 시집을 와 가꼬 성당에서 아부지가 회장을 헐 때게 가서 모시고 왔응께 십 년이 넘었제.”

“그러면 성묘도 자주 못 갔겄네.”

“못 갔지. 그렁께 메똥을 어떤 건지 못 찾아가꼬는 찾기 힘들다 그래가꼬는 나가 가가꼬는 인자 딱 본께로 그 메똥이 긴 거 같애 아무리 봐도, 그렁께 앞에 딱 본께는 성수병이, 그 김, 그 사람이 김미카엘인가 강미카엘인가 미카엘씨라고 그 사람이 그런 일을 잘 해. 저그 저전동 성당에 그 저그, 왜 성당 앞에 요리 나오므는 골목에 사는디 그 양반이 그런 걸 잘 하는디 그 양반 있을 때 허자고 가서 해주자 그래가꼬 아부지랑 와가꼬 나랑 가가꼬 그래가꼬 찾았지.”

보성댁은 아픈 아버지를 보살피고 동생들을 키우고 시집을 간 이후에는 아픈 남편을 보살펴야 했다. 여성의 고단한 삶은 바다 건너편 세계 곳곳에서 여전히 반복되고 있다. 사진은 네팔의 여성 농민들. 사진출처 : DFID - UK Department for International Development  https://flic.kr/p/dQr7Hd
보성댁은 아픈 아버지를 보살피고 동생들을 키우고 시집을 간 이후에는 아픈 남편을 보살펴야 했다. 여성의 고단한 삶은 바다 건너편 세계 곳곳에서 여전히 반복되고 있다. 사진은 네팔의 여성 농민들.
사진출처 : DFID – UK Department for International Development

“그러믄 그게 아가다 이모가 몇 살 때에요? 엄마하고 아가다 이모하고 열다섯살 차이예요?”

“아가다 낳고, 아가다를 나놓고 돌아가셨을 것이다. 바로 나놓고. 긍께 나가 시집갈 때, 음, 열……, 열 다섯 살 차인가? 돌이 안 돌아 왔등가? 어쨌등가 것 그런 같애. 그래가꼬 인자 돌 넘어가꼬 세 살인가 묵었는디, 나가 인자 키우다시피 했제. 인자 뭐냐 할머니는 장사한다고 돌아다니고 나가 순전히 업고 기냥 나만 엄마맹이로 통……”

“큰 이모도 데레사 이모도 통 멋도 모르고 그랬겄네요?”

“데레사 이모는 한 여나무 살 묵어서 너무집을 보내 부렀어. 통 묵고 살 길이 없어가꼬 그렁께 데레사 이모가 그러니까 지금 가끔 가다가 아니 지금 가끔 가다가 데레사 이모가 그런 거 있단마다. 자기 혼자 소외돼 받은 어렸을 때 그런 걸, 말하자면 골롬바 이모는 아파싸코 모자래고 그런 게 있응께 골롬바 이모는 아무래도 못 보내고 이러고 떠받고”

“엄마는 큰 딸잉께 살림을 도와줘야 해서 못 보내고 아가다 이모는 애기라서 못 보내고?”

“응”

“데레사 이모가 좀 억울하기도 했겄다.”

“그래 그런 거 있어. 지금도 그걸 해, 그 성질을 부려 가끔 보므는, 그럼 나가, 나는 이해를 헌디 인자 저기 아가다 이모는 이해를 못 흘라그래 나가 그거를 우리가 이해를 해야흘 꺼이다. 이러고저러고 해논께 근다 그러믄 아가다 이모가 썽질을 팍 냈다가도 금방 싸그라지믄서도 그런 거 있어. 그래가꼬”

“아가다 이모 입장에서는 그 성질을 자기한테 내면 자기도 억울하제. 뭐를 자기가 결정한 것도 아니고 아무 것도 모르는 나이에 생긴 일잉께. 긍께 그것이 데레사 이모가 그 원망이 가자므는 굳이 말하자면 할머니나 할아버지한테 가야 할 원망인디…… 그거를 풀어주지를 못 해논께 지금까지 그런 거제.”

“어쩔 수 없어 그건. 자연적으로 그리 돼 가꼬 있어. 자연적으로. 그래가꼬는 나가 열아홉에 시집갈 때게 아가다가 야섯 살인가? 아냐아냐 네 살, 세 살인가 네 살인가”

“엄마보다 열다섯 살이 적으니까 네 살이 맞겠네.”

“좌우간 서너 살 그때 묵었었어. 그래가꼬 저그 인자 시집을 왔다가 간께로 언니 왔다고 날 안 떨어지고 나 옆에서 잘라 그래. 안 떨어질라 글고 기양 그릉께, 글찍에는 형부가 뭔지도 모르지.”

“왜 저 남자가 우리 언니를 차지해가꼬 있는 거여 했겠지. 아저씨는 누구야? 했겄지”

“어어, 근본에 나하고 거석하고 살아논께. 그런께 인자 난중에도 인자 그러니께 데레사, 골롬바, 아가다 이모가 우리집 식구들한테 유난히 가깝게 했지. 글고 인자 대체 순천으로 이사가가꼬 저그 성당에 있응께 이모가 인자 육학년, 아홉 살인가 열 살엔가 학교를 들어갔어. 얼른 학교를 못 들어가가꼬 그래가꼬 인자 학교 졸업하고 난께 열대얏 살 묵어쁜께 멋 흐꺼인고 인자 신부님 집에다가 여줬지 우리가. 그래가꼬 인자 마리아씨..이가 같이 데꼬 있음서 머이야 일을 갈쳐 감서 그래가꼬 있다가 인자 결국에는 시집을 갔제. 몇 년 동안 거 있음서.”

시대가 시대인지라 병든 몸일망정 그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나니 어머니를 비롯해 여자들만 다섯 남은 집안은 더욱 어렵고 힘든 시간을 보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최은숙

35년의 교직생활을 명퇴로 마감하고 제 2의 삶을 살고 있습니다. 어머니의 이야기를 듣고 소설로 쓰고 있습니다. 올해 91세인 어머니가 살아 계실 때, 어머니의 이야기를 많이 듣고 글로 남기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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